>>954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목소리는 조곤조곤합니다. 아주 강한 음색을 지니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날카로운 듯 하면서, 언제라도 당신을 잡아먹을 수 있는 목소리입니다. 당장이라도 당신에게 웃으며 독설을 내뱉을 것만 같은 그런 목소리 말이죠. 에릭의 몸에서 기운이, 마치 물에 젖은 천을 짜내는 것처럼 짜내지는 감각이 듭니다. 그 감각은 에릭의 경험을, 기억을 집어삼키고 있습니다. 에릭이 쌓은 스무 개의 계단. 그 중 하나의 계단을 삼키고도 녀석은 만족하지 못한다는 듯 또다시 하나의 계단을 삼킵니다. 그 뒤에야 배가 부르기라도 한 것인지. 그것은 제 몸에 씌웠던 천을 천천히 벗어냅니다. 천에서 드러나는 것은.
......
수많은 시체 더미에서 피를 짜내어, 남은 것은 모두 가라앉게 했다. 오직 진득한 피들만이 거대한 바다를 이루어 출렁이고 있었다. 비릿한 철냄새가 섞인 그 향기 속에는 수많은 기괴한 것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물 위에는 정체 모를 살점과, 덩어리들이 둥둥 떠다녔다. 이따금 그 덩어리들과 바닷물이 섞여 하나의 형체를 이루고 나면 그 순간을 기다린 무언가들이 제 머리를 치켜들고 커다란 주둥이를 벌렸다. 그리고 우악스럽게 그것을 씹어 삼키고 다시금 바다로 가라앉았다. 생명이 만들어지고 탄생하는 경치는 경이롭다 하여야 했지만, 이 곳의 풍경은 기괴하다고 부르는 게 맞았다. 이따금 탄생한 역겨운 탄소단백질덩어리들은 마치 자신이 살아있다고 호소라도 하듯, 그 몸체를 꾸물거리며 살아있음을 주장했다. 그 위에서 한 여인이 발을 파도 속에 담군 채 먼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매혹적인 입술이 유독 반짝이고 있었다. 그 입술은 선홍색으로 탐스런 복숭아를 닮았다. 그것만이 아름다웠냐 묻는다면 또 아니었다. 이것저것을 따져보더라도 그 모습은 아름답다 부르기에 충분했다. 인간의 미적 감각으론,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러나 본능은 여실히 울리며 제 주장을 이어갔다. 이 여자는 위험하다. 아니, 이 것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녀를 이런 이름으로 불렀다. 혈해의 주인. 붉은 피의 바다의 여왕. 모든 기이한 피 흐르는 것들의 어머니, 저주의 근원.. 그런 기이한 이름을 가진 그녀는 살짝 드러난 베일 위로 자신의 장난감을 바라보았다. 예전과 같은 망가진 피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그럭저럭 농익은 향기가 났다. 이전의 냄새가 비릿한 쇠냄새가 났다면 지금만큼은 거칠지만 그만큼 순수한 피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에릭은 자신의 뺨을 무언가가 쓰다듬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 감각은 따스했으나, 독선적이었고, 또한 집착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렇기에 한없이 자애로웠다.
" 재밌지 않나요? "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의 변화를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에게 간섭할 수 있는 힘이 새로운 눈길에 의해 막혀 있었던 것을, 그는 스스로 날 받아들였다. 그 감각이 너무나 그녀를 황홀하게 했다. 아아, 집 나간 강아지가 비에 흠뻑 젖은 채 자신에게 꼬릴 말고 고갤 숙인 모습이란.. 얼마나.. 황홀하단 말인가. 그녀는 장난감에게 자비를 배풀기로 했다. 그 댓가로 그의 영혼이 쌓아올린 격을 일부를 앗아갔지만, 그런 것은 이미 한 세계를 다스릴 격을 가진 그녀에겐 티끌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말하자면 먼지 한 톨을 받고, 새로운 무언가를 주는 모습이니었으니 말이다.
" 당신은 처음에는 그리도 날 욕했으면서, 그 뒤에는 나에게 울며 매달리기도 했고, 정작 어느 순간부터는 날 필요 없다 하였으면서 정작 그녀가 돌아오길 간절히 바라고 있네요. "
조소가 이어졌다. 그 아름다운 손가락이 에릭의 볼을 지나 천천히 목으로 향했다. 경동맥 위에 닿은 손가락은 천천히 에릭의 목을 쓰다듬었다. 그녀가 조금만 힘을 준다면 에릭의 목은 뚫려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목에서 천천히 손을 떼어낸 채. 에릭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 좋아요. 주인에게 짖는 개라지만, 가끔은 선물을 주어도 되겠죠. "
그녀는 꼬리를 만 모습에 만족한 듯 했다.
" 대신. 지금까지의 추억은 압수예요. 서로 사이 좋게 지내기만 하면.. 재미 없잖아요? "
후훗, 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여왕은 천천히 에릭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거칠고, 피가 덕지덕지 붙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은 뒤. 그녀는 다시 베일 속으로 숨어버렸다.
.....
피. 모든 생명의 근간. 흐르는 것으로 삶을 상징하는 물질. 그것이 스며들어 양분이 되어야 했을 것이 분명한 것은, 지금 떠오르고 있습니다. 한 방울, 한 방울, 천천히 모여들어 하나의 인영을 만들어냅니다. 그 이전이 아주 어린 아이의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얼핏 성숙한 티가 나기 시작하는 소녀의 모습으로. 붉은 피의 바다의 여왕의 일부는 천천히 손을 뻗습니다. 백색의 나신에 그녀의 품위에 걸맞는 드레스가 입혀지고, 손에는 피로 이루어진 창 한 자루가 천천히 떠오릅니다.
엘로앙은, 기분 나쁘다는 듯 창을 휘두릅니다. 바람을 가르고 휘둘러진 봉은, 그러나 허공에 멈추어 섭니다.
격. 한 존재의 근원을 상징하는 것. 격의 차이가 엘로앙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의 격은 죽음으로서 돌아온 사자의 격. 그러나, 지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의 격은 생명, 그런 것으로 표현해야 좋을지 모를. 신비로운 것. 그녀는 방긋 웃습니다. 엘로앙이 움직이지 못하자 천천히, 그녀는 엘로앙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그의 심장이 있던 곳에 손을 올립니다.
" 불쌍해라. "
당신은, 살아있지 않군요.
그녀는 손을 올린 채 그 힘을 발현합니다. 챠르르르르륵, 하고 수 방울의 피가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곧, 엘로앙은 자신의 몸 속에서 뛰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심장. 그것은, 산 자의 증명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엘로앙은 눈을 감습니다. 거친 인간의 살도 아니거니와, 굳어 빠진 트롤의 살도 아닌. 모래에 피가 흘러봐야. 피는 결국 스며들 뿐입니다. 엘로앙의 육체가 천천히 무너지고, 그 자리에는 하나의 심장이 남아있습니다. 여인은 그것을 향해 손을 뻗습니다. 곧, 하나의 심장은 탐스러운 세 개의 과실로 변화합니다.
그녀는 그것을 에릭, 지훈, 하루의 입에 넣습니다.
피의 지배자
거대한 피의 흐름이 세 사람의 몸에 스며듭니다. 생명을 상징하는 피의 흐름에 맡긴 채. 세 사람은 스며드는 것을 기다립니다. 곧 세 사람의 상처는 산산히 아물어 버립니다. 말도 안 되는 치료의 폭력입니다.
그의 시선은 눈 앞에 있는 붉은색에게 향했다. 눈에 스쳐지는 감정은 파랑, 흑색, 그리고 다시 적색. 서로의 붉은 눈동자가 마주치며 잠깐 꿈뻑거리던 그는 이윽고 혈향이 비릿한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익숙한 맛, 익숙한 향, 익숙한 광경. 그리고 나만 가지고 있는듯한 기억.
" ...일어나 맥스, 그리고 ㅁ... 아니.. "
그는 이전에 메리라고 불렀던 것을 잠시 보다가 말했다.
" 네 이름은 이제부터 메리야. 메리 하르트만. ..난 이제부터 널 그렇게 부를꺼야. "
존재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가장 쉬운 방법은 작명이라 하였다. 그것은 그녀의 오랜 이름이었으나, 그녀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기에 기억하는 나는 다시끔 그것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마치, 방금 생각난 것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