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한 녹색. 소년은 그 불빛이 아직까지도 눈에 선한 느낌에 눈을 가만히 감았다. 로널드가 주고간 약품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흥분된 목소리, 걱정어린 목소리, 우는 소리. 기타등등의 모든 소리가 얽혔지만 소년은 복도 벽에 천천히 주르륵 미끄러지듯이 주저앉았다.
소년은 지하 감옥에서의 일을 생생히 떠올렸다. 녹색. 쓰러지던 커다란 유니콘. 붉게 물들었던 교복 주문을 쏘던 자신. 비명도 없이.
그저 담담하게 모든 것을 눈에 담으며.
감정을 모른다는 건 침 좋은거야. 그치? 아가야. 불길한 녹빛! 오 아가야. 그를 생각하니? 아니면 그녀를. 소년은 책을 쥔 손을 그대로 벽을 향해 뻗었다. 쿵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소년은 앉은 채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눈을 느리게 다시 뜨고 소년은 약품을 제 베인 손에 발랐다. 그것 뿐이였다. 저 색깔은 그 가 아니다. 그녀도 아니다. 그의 죽음은 그저 병이였다. 마법사들만 걸리는 희귀한 병. 그 불빛을 맞은 거미처럼 맥없이 스러지지 않고 적어도 유언을 남기고.
차라리 전부 다 가져가시지. 사랑한다. 듬뿍 받았던 애정도 사랑도. 이리오렴, 호야. 눈부신 나무와 같던 당신은.
쉬잇! 아가야. 새어나오잖니? 네가 옭아맨 사슬을 단단하게 묶어라. 너는, 그를 잃은 직후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잖아? 누가 너를 보면 어쩌니? 기만자라고 손가락질 당할거란다. 알고있잖니. 알고있잖니. 다시 [너]라는 아이로 돌아와야지? 착한 아가야.
소년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짧은 시간 소년의 가쁘던 숨도, 하얗게 변한 손끝도 전부 평소로 돌아왔다.
차분하고 고요하게. 정중하고 진중하게. 다정하고 사려깊은.
무뚝뚝하고 조용한 감정기복이 적은 검은 눈동자 를 느릿하게 깜빡이고 소년은 너무나 평소처럼 천천히 기숙사로 걸음을 옮겼다.
3년동안을 해왔던 일이니까 아주 손쉽지 않니 착하디 착한, 우리 아가.
깃펜에 베인 손가락에서 소년은 아릿한 통증을 느꼈다. 그 손을 들어 소년은 느리게 제 입술에 가져다대고 그 피를 머금었다.
아주 쉬운 일이야. 그렇지. 아가야. 다행히도 너의 소중한 학원 선배님들이 너를 보지 못했구나. 아쉽게도. 그 기만당한 얼굴을 봤어야했는데! 네가 봤어야했는데!
오늘은 유난히 밤이 길거같다고 소년이 느리게 차분하고 고요한 잔잔한 밤의 파도같은 검은 눈동자로 힐끗 복도의 창문에 비친 제 얼굴을 바라본 뒤 입가를 매만졌다.
괜찮다고 말하는 차분하고 진중한 목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은은한 무엇인가가 있었기에, 다행히도 눈물은 더 이상 흐르지 않았더랬다. -기실 제인이 울음을 잘 참는 탓이 없지는 않았다만- 하여간, 제인은 제 손을 감싸는 당신의 손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참았던 호흡을 슬며시 뱉어내었다. 손이 나보다 훨씬 크네. 가는 호흡이 차가운 공기에 섞여 새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 것 뿐인데, 그것 가지고 감사하기는 뭘. 오히려 난 네가 먼저 좋아한다고 해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
당신은 농담을 모르고,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단점이나 어찌 보면 장점이라 할 만했기에 제인은 그런 당신이 퍽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맘 놓고 믿을 수 있을 테니까. 더불어 오해로 관계가 곯을 일도 없을 테니까. 당신은 가족들과 어르신들만이 부르는 호칭으로 자신을 불러 달라고 말했다. 그에, 제인은 얼굴에 다시금 말간 미소를 머금을 수 있었다. 미미하고 금방이라도 흩어질 듯 한 미소라도 그 찰나의 순간을 바라보는 것이 마냥 즐거울 따름이었더랬다.
" 그 어떤 고백보다 진실된 고백 같아서 좋은걸, 호야. "
이렇게 부르는 것이 맞으려나. 이내 제인은 아하하, 하고 맑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몇 년만에 눈물을 흘린 것이 무색하도록 만면에 피어오른 미소가 그 어느 때보다 진실되고 밝았다. 뻔뻔하기도 하지. 품에 안긴 채 당신의 목을 조심스레 끌어안고 그리 얌전히 있던 제인은 이기적으로 굴어도 상관 없다는 말에 문득 고개를 들어 당신과 얼굴을 마주했다.
" 흐응, 정말로? "
짐짓 장난스런 말투로 당신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제인은, 느닷없이 당신의 왼쪽 볼에 가볍게 쪼듯 키스를 남기곤 제법 의기양양해진 표정으로 당신을 바라보았다.
" 그럼 이런 것도 되나? "
당신의 목에는 여전히 제 팔을 감고, 물기가 덜 마른 눈으로 슬쩍 바라보는 것이 제법 즐겁다는 태도였다. 하루에 한 번씩 해도 돼? 라고 물을 때는 유독 장난기가 두드러져보였고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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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눈물로 사랑을 기억하진 않으리라 사랑했다는 사실로 아파하지 않으리라 슬픔으로 인해 모든 걸 발견하고 기쁨으로 인헤 모든 걸 잊으리라 이 겨울이 끝나고 나면 첫 봄비를 사랑했던 시간만큼을 잊혀가는 모습으로 지켜봐 준 바로 그 누군가를 위해.
소년은 하얗게 제 입가를 비집고 새어나오는 입김에 날이 제법 차다는걸 알수 있었다. 목도리를 챙기기를 잘했다. 소년은 그리 생각하며 제인을 바라봤다. 연모한다 말하지도 않았고 사랑하노라, 하는 달콤한 말은 없었다. 씁쓸하게까지 느껴지는 서로의 진심의 끝에 붙은 제인의 눈물은 진실이였고 차가워진 제인을 제 품으로 당겨 안은 소년또한 진심이였다.
달콤한 사탕은 필요없으니 씁쓸한 당신을 주세요. 고맙다고 말하는 제인의 말에 소년은 느릿하게 시선을 움직였다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가 미미한 흐린 미소를 지었다.
호야. 불리는 목소리에 예. 하고 소년의 정중하고 차분한 진중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 따라붙는다. 목을 끌어안고 있는 제인이 불편할까봐 소년은 잠시 몸을 움직여서 제인이 편한 자세로 있을 수 있도록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 예. 상관없습니다."
소년은 자신을 보며 장난스러운 말투를 해보이는 제인의 모습에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그때, 왼뺨에 닿는 생소하다면 생소할, 아니면 익숙하다면 익숙할 온기에 소년이 잠시 무표정으로 제인을 바라봤다.
"시제인 선배님."
의기양양하게 웃는 모습에 소년은 제인의 손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조용히 차분하게 중얼거렸다. 실례하겠습니다. 소년이 양팔을 움직여서 굉장히 가벼운 것을 들어올리듯이 제인을 안아들더니 - 제인의 키가 작은 편이였으니- 소년은 이내 요령좋게도 한손으로 제인의 물기가 어려있는 눈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주고는 말간 웃음에 섞인 것을 못본 척 가벼이 방금전 제인이 소년에게 했던 것처럼 제인의 입술에 입술을 댔다가 떼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