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는 신음소리를 내지 않는단다. 랭록." 손잡이 부분을 분리해서는 레지스탕스의 입을 막아버리고는 부족하려나..라고 중얼거리고는 옵스큐로를 더하려 합니다. 그리고 다시 검에 조립하고는 현호를 바라보았습니다.
"선배라니. 어떤 의미라 하여도 나쁘지만은 않아. 물론 전자는 좋아하지 않지만." 물론 전자는 나이, 후자는 데스이터로서의 선배지만.. 데스이터인지에 대해서는 딱히 상관없었습니다. 레지스탕스면 다 떨어뜨리면 되는 거고. 데스이터라고 하여도 어차피 파멸만이 있을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무감정하게 그의 인사를 받고는 기다렸다는 듯하다는 말에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는
"이 몸의 코는 의외로 예민하니까." 소리가 들려. 너. 바뀌었구나. 라고 느리게 말하면서 그에게 다가오라는 듯 얇은 끈이 발목에 묶여 발목을 강조한 힐을 신은 발끝을 까닥였습니다. 레지스탕스가 흘린 피가 옷을 살짝 적시고 하얀 다리를 타고 흘러, 끈에 스며 대조가 이루어졌습니다.
랭록, 하고 외치는 세연의 목소리에도 소년은 그저 느릿하고 차분하게 인사로 숙였던 허리를 곧게 세울 뿐이였다. 의식적이지는 않지만 소년은 등을 반듯하게 편다. 오래도록 가문에 교육받은 여파였다. 명령어를 입력하고 출력하는 기능이 상실됐지만 무의식적인 제스처와 행동은 소년의 몸에 고스란히 박혀서 가시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전자와 후자, 전부 포함한 선배님이라는 호칭입니다. 아니면, 혹여 다른 호칭으로 불러드리길 바라십니까."
원하시는 바가 있으면 무엇이든지 말씀하십시오. 소년은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리며 공허한 미소를 흐릿하게 지었다. 곧 사라져버릴 부질없는 미소였지만. 소년은 세연의 말을 듣고 그저 느릿하게, 기계적으로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는 행동을 해보이다가 발끝을 까딱이는 것에 걸음을 디딘다.
피가 옷을 적시고 다리를 타고 흘러내림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그저 느리게 눈을 깜빡이고 텅 비어 공허하기 짝이 없는 눈빛으로 세연의 앞까지 다가갔다.
"선배님께서 바뀌었다 하시면, 바뀐 것입니다. 변하였다 하시면 변한 것입니다. '그저' 그 뿐입니다."
소년은 세연의 앞에 걸어오며 한쪽 귀를 막았던 손을 천천히 떼어냈기에 흐트러짐 없이 반듯한 자세로 세연을 바라본다.
세연은 현호를 바라보면서 가볍게 안은 팔을 풀러 다른 다리도 아래로 내렸습니다. 그리고 현호가 말하는 말을 듣고는 공허한 미소에 언뜻 보기엔 정말 진심인 듯한 미소를 띄웠습니다.
"네가 나랑 동갑인 걸 잊어버린 것 같구나." 그 말을 하면서 가까이 다가온 현호의 정강이를 걷어차긴 했지만.. "뭐. 어떤 의미라 하여도 끝을 보는 이상 이젠..아니 앞으로도 상관없지만." 이라고 덧붙여서 별로 연연하진 않는 듯합니다.
"그래. 바뀌었지. 누가 널 파헤친 건지는 모르지만." 파헤쳐진 네 모습도 마음에 들어. 덮여 있던 것이 흩어져 갈 길을 잃었지만. 라고 말하면서 반장갑을 낀 손을 들어 턱을 들어올리려 합니다. 그것은 약간은 친애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친애가 꾸며낸 것인지는 모를 일이었지만요.
//세연주:데이세연 성격 나빠! 정강이를 힐로 걷어찼어! 미아내 현호야아아아(공허한 메아리) 데이세연:검으로 옷자락이나 머리카락 몇가닥 베어낼까 했는데 새연주: 아 그거에 비하면 조금 덜 나쁜 거려나요..
소년은 정강이가 걷어차여지자, 잠시 눈을 살짝 내렸다. 힐로 걷어차인 정강이로 인해 소년의 무게중심이 일순 흔들렸지만 용케 앞으로 고꾸라지거나 주저앉는 모습은 절대로 보이지 않았다. 단지, 걷어차여진 정강이를 보고 소년은 세연의 말을 곱씹었다. 모든 것을 지워버렸더니 다른 것까지 모조리 지워진 모양이다. 입력하고 출력하는 것을 멈추니, 모든 기능이 정지됐다.
"죄송합니다. 세연양. 무례를 범했습니다."
소년은 살짝 미간을 찡그린 채 천천히, 높낮이가 일정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사과의 말을 건넸다. 걷어차여진 다리를 디디자 지끈하는 통증이 몰려왔지만 아무렴, 디핀도에 어깨가 베이고 스투페파이에 기절했던 것과 비할게 있을까. 턱을 들어올리는 세연의 손길을 피하지 않은 채 소년의 턱이 저항없이 들어올려진다. 소년은 세연의 행동에 대해 아무런 느낌을 품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는 바뀐것입니다."
누가 널 파헤친 건지 모른다는 말과 이어지는 마음에 든다는 말에 소년은 그저 천천히, 그리고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세연을 바라볼 뿐이였다.
너에게는 이미 상관없지, 아가야. 오 물론 그 의지는 네가 잘 이어가고 있고 말이야. 어리석은 녀석.
들리는 환청이 묵직했다.
//데이 현호 :........ 나이를 잊...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정강이걷어찼엌ㅋㅋㅋㅋㅋㅋㅋㅋ힐로 걷어찼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긋지긋하다. 이 의미없는 투쟁의 종결점을 찍고싶다. 애초에 추종자들의 승리는 당연한 것이었으니, 결과가 어떻게 흘러가든 빨리 이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그때가 되면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을테니까. 도태되는건 싫다. 어서 빨리 내 자리를 찾아가야 한다. 애초에 다른 선택지를 택할 여유따위는 없었다. 변하는게 없다는걸 알면서도. 발버둥이 무의미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그녀를 향한 아픔 때문인지, 내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인지 이제와선 구분되지 않는다. '그 날' 이후 내게 주어진 건 무에 가깝다는 것을 충분히 깨달았음에도 나는 더 많은걸 손에 쥐고 싶었다. 죄책감 같은건 이미 오래 전에 지워버렸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반드시 올라갈 것이다. 그것이 그녀를 향한 최소한의 속죄임과 동시에, 나 자신을 위한 선택이니까.
책을 덮고 뉘였던 몸을 일으켰다. 공터로 나가 선선한 바람이라도 쐐고 들어올 생각이다. 머리속에 복잡하게 얽힌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힐끗 시선을 돌려 비어있는 새장을 확인했다. 패밀리어와 함께 있을땐 몰랐는데, 막상 사라지고 나니 허전함이 느껴진다. 무의미한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쓸모도 없는 뱁새따위 사라지든 말든 알 바 아니다. 기숙사를 나와 복도를 걸었다. 원래 이 시간의 복도는 학생들로 북적였었다. 하지만 시기가 시기인만큼 현재는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복도를 거쳐 한적한 공터로 나와 가볍게 주변을 훑었다.
"우리 '추종자' 사이카.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낯익은 얼굴에 자연스레 말을 건네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진 그녀가 나와 같은 선택을 할 줄은 몰랐다. 애초에 그녀는 혼혈이다. 차별에 반발해 레지스탕스 쪽을 택하는게 더 일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같은 선택을 내린건 자신의 신념보단 안위가 우선이었겠지. 아니면 뭐, 말 못 할 사정이 있거나. 나야 우리 사이카쨩에게 지팡이를 겨누지 않아도 돼서 좋지만.그녀를 흘겨보며 낮게 실소를 흘렸다.
세연은 무례라는 말을 듣고는 테이블을 짚은 손을 들어 자신의 턱을 괴었습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을 세상이야. 파멸로 떨어뜨리기엔 이게 알맞지. 유감스럽게도.
"무례인줄은 아는구나." "상관없는 일이 되겠지만.." 지금은 중요하다. 라고 평해지는 일이니까. 라고 말하고는 이 몸이 좀 더 관대하지 않았다면 이 레지스탕스에게도, 네게도 그다지 좋진 않았겠지. 라고 말하고는 손에 뭔가 묻은 것을 탁 털어내듯 턱을 툭 쳐내 밀어내려 합니다. 분명 악의적인 밀침이었습니다.
"그래. 바뀌었겠지." "그렇지만 토해낸 건.. 적을 것 같다만" 사람의 인격이란 쉬이 바뀌는 게 아니란다. 네가 바뀌었다고 해도 그건 그냥 겉껍데기만 부서진 채 그 조각을 아직도 그러모은 채 있는 걸텐데. 세연은 그걸 왜 그렇게 깔깔 웃으며 말한 걸까요? 비꼬는 것? 이입된 것? 그러나. 진실로는 이유 같은 게 존재할 리가요. 아슬아슬한 끝이 툭 끊어진 이후로는 충동과 계략이 공존하고 있음에. 다만 충동인지 계략인지는?
혹시. 세연이 갑자기 데스이터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가요? 우습군요. 아슬아슬하던 것이 끊겨 산산조각나버린 것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