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잘 통하는 것 같다. 단순하게 뜻만 봐서는 긍정적인 반응에 가까울 터이지만, 환상종과 인간의 관계는 그리 긍정적인 관계가 아니니까. 아나이스의 말을 듣던 늑대의 시선이 자신의 손톱으로 향했다가, 다시 그에게로 향한다.
"아니. 저는 전혀 시무룩해하지 않았습..."
움찔거리다 결국 발을 슬쩍 옮긴 아나이스를 보며 무언가를 깨닫기라도 하듯이, 늑대는 축 처진 귀와 꼬리를 빠르게 세운다. 쫑긋이며 세워지는 귀와 허리 언저리에서 살랑이는 꼬리.
"..........."
뻔뻔하게 뭘 보느냐는 표정이 자신을 향하자, 그것을 마주보던 늑대는 부끄러웠던 것인지 살짝 얼굴을 붉히더니 시선을 슬쩍 피했고, 1분가량 그러고 있던 늑대는 이유 없이 크르르르. 소리를 내더니 꼬리로 바닥을 탁탁 내려친다. 깊게 패이며 일어나는 흙먼지. 머리에 붙다시피 할 정도로 축 처지는 늑대의 귀.
"맞아, 어색하지. 존대말로 존대를 안하는 사람도 있고, 반말은 속이 편하잖아. 뒤탈도 없고."
진짜 뒤탈이 없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레오닉은 그저 입에 나오는대로 뱉어버렸다. 눈 앞의 아리나의 독보적인 화법이 스며들기라고 한 걸까. 하지만 경어를 사용하는 사이이면서 존중이 오가지 않는 경우는 숱하게 만나본 실제 사례, 레오닉은 많은 꼴을 보았다.
"동남부에, 큰 풍차가 하나 있던 것 말고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쬐끄만한 마을. 그리고 북부 출신과 술잔을 기울이는건 처음이야."
그녀가 건넨 술잔을 단번에 들이키자 레오닉은 하나는 음료수였는지 고민했다. 내린 결론은 간단했고, 저 페이스를 잇는다고 가정할 시에는 반드시 대야라도 준비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이런... 미안하다. 술맛만 떨어뜨렸네."
그는 한탄하듯 고개를 저었다. 누구에게나 과거는 있고, 그는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신조였지만 구태여 남의 과거를 엿보길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니 레오닉은 미안하고, 착잡한 마음에 얼마 남지 않은 술 표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눈을 돌렸다.
아리나의 행동이 그저 숨기기에만 급급한 자신과는 다르게 표면적으로 활달해도 어딘가 그렇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점에서도 그랬다. 동질감은 아니었지만, 그저 동정으로만 넘기기엔 석연찮은 무언가가 있었다.
"그러게 술을 원샷 때릴 때부터 알아봤다만. 체한건 아니지?"
음주에도 체증이라는 개념이 있던가. 레오닉은 한숨을 내쉬고 유리잔을 내려놓았다. 자유로워진 손으로 아리나의 머리를 들춰 이맛전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로는 본인의 이마를 쓸었다. 그저 아까의 대화로 인한 것이라면 몰라도, 술이 원인이라면 레오닉은 신경을 쓰지 않을수가 없었다.
축제의 현장에 직접 발을 들이자 밖에선 느낄 수 없는 들뜬 공기가 가슴을 파고드는 것 처럼 느껴졌다. 환상종들의 축제. 인간이었던 탓일까, 본래의 축제와는 달리 매우 자유롭고 방치적인 분위속에 모두 몸을 맡기고 즐기고 있다는 것이, 레이첼은 매번 이 현장에 들를때 마다 신기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정작 제일 기이한것은 자신일테다. 항상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 지켜보는 입장으로만 참여했지, 어느 다른 누군가와 같이 이곳에 발을 들인다는건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축제는 확실히 자신보다는 그녀에게 어울리는 것이다. 이 곳의 공기에 벌써 취한듯 쉼도 없이 재잘거리는 그녀는 아까 전까지만 해도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이 거짓말처럼 보일정도로 발랄했고, 오히려 이때를 기다려 온 것만 같았다. 그런 그녀가 마냥 귀엽게만 느껴지는지 계속해서 터져나오는 실없는 소리에 잔잔한 미소로 답해주는 레이첼이다.
시이는 그렇게 말하곤 생글생글 가만히 웃기만 한다. 그러곤 이내 턱을 만지던 손이 떼어지자 잠시 멍하게 아나이스를 바라본다. 그러곤 피아노치듯 제 손등을 두드리는 그 손가락의 느낌이 좋아서 그저 뺨을 붉히기만 한다.
"정말 어디든 상관 없었는데. ......그보다 물어버릴거에요? 음... 그러고 싶으면 그래도 좋은데요? 나 장갑 끼고 있지만. ...장갑 벗는 게 물기엔 더 좋으려나?"
그녀는 장갑을 벗으며 그렇게 말한다. 긴 장갑을 벗자 뽀얗고 작은 두 손이 드러난다. 정말 어디든 상관 없으니까 그렇게 말한 거고, 그냥 볼을 건드려보고 싶어서 볼을 찌른 것 뿐인데 역시 안돼는 걸까... ...그래도 뭐, 원한다면 상관 없는 걸? 난 내 모든 걸 내어 줄 자신이 있어.
"그보다 아나이스의 방이요? ...집무실? ......뭐, 전 어디든 상관 없으니까요. 아나이스랑 같이 있고 싶은 것 뿐인걸요, 그냥."
시이는 그렇게 말하며 붙잡힌 손이 잡아끌어지자 저도 일어나서 아나이스를 가만히 바라본다. 아까 전에 떨어트린 과자 봉투를 줍는 것이, 어쩐지 바보같아 보인다. ......나중에 수제 쿠키라도 구워 드리고 싶어진다.
비비안은 레이첼에게 이끌려서 걸어가다가 이내 자리를 바꿔서 양손으로 레이첼의 양손을 잡고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흥겨운 노래에 몸을 맡기며 춤을 추고 있는 환상종들 사이로 이끌었다.
"편하게~ 해요~ 우리 숲지킴이님! 오늘은 지키고 있을 이가 여기 있잖아요~?"
인간일때는 축제에 참여하는건 꿈도 못꿨어요. 레이첼의 양손을 잡고 가까이 다가가 귀에 속삭인 뒤 그녀는 베시시 웃는다. 다리를 절고 있던 인간일때는 구경만했다. 흥얼흥얼 노랫가락을 따라하면서 레이첼에게 자신을 따라하라는 제스처를 취해보였지만 이내 레이첼의 양손을 잡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춤을 추기 시작한다.
꺅꺅! 즐거움의 비명과 붉은색 드레스는 너울거리는데 용케 중절모는 떨어지지않고 있었다. 비비안은 방금 전 다친 이라고는 믿지 못할 꽤 괜찮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