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은 싫고, 공부는 지긋지긋했지만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기 싫다고 정말로 손을 놓아버리면 다시 붙잡을 수 없게 되는 게 학업이니까. 무엇보다도, 스스로 내건 조건을 지키기 위해서는 성적이 좋아야만 했다. 그래야 그와 자신이 불행해지지 않으니까.
과제 작성을 위해 자료가 필요했다. 교과서에는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는 각종 약재나 실험 재료 등등. 그리고, 지난번에 찾으리라 결심했던 '세계 시해법의 기록'도 필요했고. 살벌한 제목에 살벌한 내용이 담긴 책이라, 도서관에 없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는 달리 시해 사전은 도서관에 멀쩡히 비치되어 있었다.
필요한 책을 찾는 데만 해도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떤 책은 저쪽 구역에 있고, 어떤 책은 또 다른 구역에 있어서였다. 필요한 책을 모두 꺼내온 사이카는, 곤란한 표정으로 마지막 남은 책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계 시해법의 기록.
저것이, 하필이면 팔이 아슬하게 닿지 않는 높이에 있었다. 이럴 때는 보통 발 받침대나 사다리를 사용해서 올라가겠지만 그것들은 어째서인지 보이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쓰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도구는 포기하는 수밖에.
사이카는 조금 고심했지만 곧 결정을 내렸다. 이번에는 포기가 아니었다. 엄청나게 높은 것도 아니고, 딱 저 정도면 발만 들어도 괜찮지 않을까. 라는, 알량한 자존심의 발로였다. 어정쩡한 존심은 그녀를 까치발로 무리하게 책을 꺼내도록 몰아넣었고, 사이카는 곧 억지로 다리를 찢은 뱁새의 말로가 무엇인지 경험하게 되었다.
열심히 필기를 하던 중 어디선가 들리는 비명소리에 움찔해버려 필기를 삐끗했다. 해탈한 듯 눈을 감았다. 눈을 뜨며 한숨을 내쉬는 모습에서 깊은 빡침이 느껴지는 거 같았지만 화보다는 비명소리가 들린 이유가 무엇인지, 도서관에서 큰일이 난건지. 그런 걱정이 크게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뱅을 어깨에 올리고 비명소리가 난 곳으로 향하니 고통스러워하는 여자아이가 보였다. 주변에 떨어져있는 책, 세계 시해법의 기록. 시해 당한건가? 아아니. 의식의 흐름으로 하던 생각을 도리도리로 지우고 현실적으로 생각했다. 분명 책을 꺼내려다 떨어트린 거 겠지. 으으, 그거 진짜 아픈데. 측은한 눈빛으로 여자아이를 바라보다 품 속에서 마법약을 꺼냈다. 고통을 줄여주는 약이니 이걸 뿌리면 좀 나을것이다. 근데 이걸 주어도 될까. 괜히 이상한 사람이라고 의심하면... 말을 걸려니 용기가 필요했다. 한참을 망설이다 조심스레 다가가 놀래키지 않으려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저기요. 많이 아프신 거 같은데 괜찮으세요? 이거 뿌리면 좀 괜찮아질거예요."
거절하면 급하게 도서관을 나가야겠다. 노트랑 책을 챙겨서. 거절하지 않으면 급하게 자리로 돌아가고 왠지 긴장 된 표정으로 여자아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극한의 고통이 휘몰아친다. 세계 시해법의 기록. 두께는 두껍고 무거운 재질의 종이를 사용했으며, 하드커버에 모서리는 금속으로 마감해 특별히 더 단단했다. 시해 기록은 이름답게 위력까지도 매우 흉흉했다. 구와아악. 자존심이나 규범 따위는 고통에 질려 저 멀리에서 사이카와 함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툭, 떨어진 충격으로 넘겨진 책이 무릎을 꿇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의 삽화가 실린 페이지를 펼쳐놓았다. 지금의 자신과 완전히 똑같은 포즈에 표정. 꼭 저를 놀리는 듯한 효과에 사이카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차피 눈앞으로 잔뜩 차오른 눈물 탓에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설마 이 책도 마법에 걸린 책인가? 자꾸 무는 그 교과서처럼?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우연의 일치였던 모양이다. 여전히 발을 붙잡고, 끅끅거리며 책을 붙잡고 탈탈 털어봤지만 책은 종이만 팔락거릴 뿐이었다.
"아오, 이...."
그냥 이럴거면 찾지 말 걸 그랬나. 괜히 한꺼번에 빌려두자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열을 내니 고통이 조금은 가신 것 같다. 곧 첫번째로 자신이 도서관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에 생각이 미쳤고, 두번째로는 옆에서 느껴지는 사람의 존재가 느껴졌다. 아. 눈앞에 선 작은 여학생을 바라보며 사이카가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었다. 여학생도 마침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 그. 고맙."
방금 자신이 지른 비명은 썩 고라니같이 들렸었지. 뭐, 자기 자신에게 관대한 사이카이니만큼 그걸 신경쓰지는 않겠지만. 발등은 아직도 화끈거렸고, 사이카는 아직도 삽화와 같은 고통에 겨운 포즈를 취한 채 여학생을 올려다보고 있있다. 그것을 깨달은 사이카는 황급히 주변을 정리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헛기침을 했다.
지애는... 본인은 똑똑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라고 주장은 하는데, 실제로 만나면 둘이서 별 거 아닌거 갖고 말싸움하다 현피뜨는 성격입니다. (썸남: 공룡엔 깃털이 없었다고 생각해. 지애:X바 그러고도 니가 인간이냐.) 오히려 진짜 이상형은 활달한 열혈남아(or 여아)..같은 느낌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