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에 버금가는 정복군주이자 세종대제에 버금가는 성군. 민족의 성웅. -왕정폐지를 주장하는 사민당 지지층의 경우 홍익대제의 명성은 과장된 것이고, 그저 장인을 잘 둔 덕이라고 저평가하기도 한다. 물론 어느 정도는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의회를 믿고 총리와 내각을 믿어주는 것이야말로 입헌군주의 자질인 법. 홍익대제는 이제 막 걸음마를 내딛던 대한에게 이 이상이 없을 성군이었다. -실록에 따르자면 막 사돈관계를 맺었을 무렵에는 문성공 백산 노정남과 자주 갈등을 빚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외세를 끌어들여 나라를 망친 권신이라 여겨 미워한 것이다. 하지만 끝내는 문성공의 진심을 받아들였다. 야사에 따르자면 문성공의 장녀, 후일의 고황후 노씨의 뺴어난 미모에 반하여 그랬다고도 한다. 믿거나, 말거나. -하여간 그런 야사가 돌 정도로 타고난 호색한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이미 보위에 오르기도 전부터 열아홉에 이르는 첩을 들이며 세간에서는 연산군의 재림이 아닌가 우려를 들었다. 물론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러나 사민당에서는 이 또한 마누라를 잘둔 덕이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워낙에 대외활동을 즐기고 장수한 덕에 오늘날까지도 영상자료, 음성자료, 사진자료가 대단히 풍족한 편. 덕분에 그의 인생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도 자주 만들어졌으며, 홍익대제를 연기해 본적 있는가가 배우로서 하나의 지표가 되기도 한다.
-선말한초 친러파의 대부, 그리고 백산 노정남의 공범. -문성공과의 첫만남은 최악이었노라 전해진다. 당시 이범진은 을미사변 이후 이완영에게 밀려나 중앙정계에서 내쫓긴 와중이었고, 문성공 노정남은 그때까지만 해도 차르에 꼬리를 쳐 부귀영화나 누리려는 기회주의자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이범진이 먼저 백산에 숙임으로서 두 사람은 화해할 수 있었다. 백산을 향한 러시아의 신임이 너무도 굳건하여 이범진이 중앙정치로 돌아오려면 러시아를 등에 업은 백산에 기대야했기 때문이다. 덕택에 선말한초의 친러파는 하나로 뭉칠 수 있었다. -함흥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친러파가 러시아에 나라를 판 매국노로 전락하여 많은 이들이 백산을 떠나는 와중에도 끝까지 곁에 남았다. 달리 갈 곳이 없기도 했고, 결국 그 또한 작금의 사태에 무고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로 뭉칠 수 있었다. 그 뒤로는 언제나 문성공의 그늘로 일하며 활약했다. 문성공이 제주도 문제로 속세로 물러나게 되었을 적에는 백산의 뒤를 이어 총리대신을 역임하기도 했다. -죽는 날까지 대한의 앞날을 근심하며 편히 눈감지 못했다. 어찌도 억울했던지 병상에서 벌떡 일어나 세걸음을 걷고서 선채로 임종을 맞이했다 전해진다. 살아생전 대한의 앞날이 너무도 암울했던 탓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가 그토록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백산 노정남의 지갑이자 그림자. -여지껏 그래왔듯이 첫 만남은 최악이었다 전해진다. 이시영은 국권을 팔아치운 노정남의 매국행위에 격분했고, 상해로 넘어가 러시아와 맞서 싸우려 계획하기도 했다. 물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정남의 양보로 대타협이 이루어지며 입헌정치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하여, 이시영은 망국의 한을 품고서 조정에 출사했다. -백산은 그런 이시영을 중용했다. 그의 집안이 당대 대한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대부호였을 뿐 아니라 그 자신도 폐주 이명복 시절에 요직을 전전한 실력가였기 때문이다. 이시영의 탁월한 실무경험은 극심한 인재부족에 시달리던 선말한초의 대한제국에게는 한줄기의 빛과도 같았다.. -결과적으로 이시영은 백산에게 감화 되었다. 곁에서 일하며 지켜봐온 바, 그가 단지 일신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이 모든 업을 짊어진 것이 아니라 깨달은 것이다. 성재일기에서 이르기를 이시영은 이때 「세상의 모든 욕설이 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듯했다」며 백산을 마음 속 깊이 동정했다고 한다. -백산의 본심을 알게 된 이시영은 그 뒤로 백산의 비서이자 그림자로 활약했다. 그는 어떤 고된 일이라도 군소리 없이 백산을 위하여 일했다. 이시영은 당대의 천재들이 곡소리를 내는 가운데 늘 백산 다음 가는 업무를 홀몸으로 감당한 선말한초의 실력가였다. -성삼 이범진이 서거하고 백산 노정남이 성균관 대학 학장으로 일할적에 잠시나마 총리대신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대공황 이후 이시영은 군소리 없이 노정남에게 총리직을 넘겼고, 정남은 그의 기대에 부응했다. 이후, 정남이 떠난 이후에도 조정을 위하여 일하다 침상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백산의 고향친구이자 숙적. -앞선 을미의병에서도 한차례 일본과 싸웠던 그는 을사년에 진위대가 항일의군을 일으키자 또 다시 을사의병에 합류, 종전까지 일본군에 맞서 싸우며 함경도와 강원도에서 명성을 떨쳤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가 맞서싸운 적은 일본만이 아니었다. 함경도를 강점한 러시아 또한 그가 물리쳐야할 적이었다. -하지만 힘이 부족했다. 끝내 러시아가 일본을 쓰러트리고 대한제국을 평정하자 홍범도는 어쩔 수 없이 조정의 호출에 응했다. 이름 뿐인 조정, 러시아 군정 사령부의 부름임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실록에 따르자면 이때 홍범도는 죽음을 직감하고서 친지들에게 제 자산을 분배한 다음 빠듯하게 시간에 맞추어 서울에 상경했다 전해진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권력을 거머쥔 섭정공 노정남은 대타협을 이룩했다. 곧 민의원이 설치 되었고, 대한제국은 입헌정치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홍범도와 항일의군은 근왕당이라는 이름으로 러시아의 식민지배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그들 항일의군 또한 끝내는 정남의 진심을 깨달았다. 근왕당은 보수당이 되었고, 항일의군은 차차 흩어졌다. 그리고 러시아는 적이 아니라 혈맹이 되었다. 그때까지도 홍범도는 마지막까지 보수당에 남아 반러의 기치를 들었다. 그는 죽는날까지 함경도를 강점하였던 러시아를 용서하지 못했다. -오늘날까지도 그의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린다. 백산을 높이 평가하는 자는 여천이 옹졸했다고 하며, 여천을 높이 평가하는 자는 백산이 기회주의적이었다고 한다. 여천과 백산. 이 두 고향 친구가 공존했기에 비로소 오늘날 우리가 아는 대한제국이 태어날 수 있었다.
-한국 민주사회주의의 대부. -선말한초 러시아와의 관계를 모두가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개중에는 끝까지 러시아의 보호를 거부하고 자주독립을 추구하던 이들도 있었다. 한국 사회민주노동당은 그 중 대표격이었고, 여운형은 이동휘 등이 고려 공산당을 창당할 적부터 이들과 함께했다. -여운형이 사회민주노동당에서 각광 받게 된 것은 그가 수정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 이후 고무된 모험주의자들이 투쟁을 부르짖을 때도 여운형만은 수정주의를 지켰다. 그 탓에 당내에서는 그를 일컬어 혁명의 배신자 내지는 기회주의자라며 흉보는 경우도 잦았지만, 수정주의자였기에 여운형은 입헌민주당과 가까이 지내며 권력의 중심에 섰다. -대공황 이후의 협상장에서 여운형이 총대를 매게 된 건 당연한 전개였다. 몽양에게도 이 협상은 그의 정치생명을 건 구국의 결단이었다. 이미 당내 모험주의자들은 협상이 파토날 것이라 전제하고서 총파업으로 시작되는 거국적인 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은 엇나갔다. 백산은 너무도 순순히 정권을 사민당에게 이양했다. 정치생명을 걸고서 협상장에 나선 여운형조차 예상치 못한 사태였다. 후일 여운형은 제 일기에 「난생처음으로 사람의 눈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걸 보았다」고 적었다. 그만큼 놀라운 경험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여운형은 살아남았다. 대한의 수정주의 또한 살아남았다. 이로서 수정주의가 새로운 사회민주노동당의 주인이 되었다. -백산이 일선에서 물러난 뒤로는 죽는 날까지 총리대신을 역임했다. 그만큼 지난 거국내각에서 사민당이 보여준 성공은 눈부신 것이었다. 혹자는 몽양의 치세가 포퓰리즘 정치였노라 혹평하지만, 사민당 지지자들은 여전히 무덤에서 요람까지로 대표되는 몽양의 치세를 그리워하고, 또한 선망하고는 한다.
-문성공 백산 노정남의 후계자. -초기에 그는 노정남의 사람이 아니라 홍익대제 이강의 사람이었다. 미국에서 막 귀국한 그는 러시아에 국권을 팔아치운 백산의 진의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홍익대제가 백산과 사돈이 되면서 이강의 밑에서 일하던 김규식 또한 자연스레 정남의 사람이 되었다. 이때까지도 두사람은 필요에 의한 동맹관계였다. -관계가 호전된 것은 제주도의 영유권을 포기하였던 그 순간이었다. 세간에서는 그를 매국노라 비난하였으나, 현실정치가 김규식에게는 참으로 눈부신 결단이었다. 후일 김규식은 그의 일기에 「우리 중 누구도 그에게 돌을 던질 자격 따위 없었다」라고 적었다. 주저없이 섭정직을 포기하는 모습에서 김규식은 마침내 백산에 감화 되었다. -앞서 백산이 자리를 비운 사이 총리를 역임한 이범찬, 이시영과는 달리 김규식에게는 끝까지 총리대신 자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미국유학파였던지라 세력이 형편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내각에서 소외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당시 몇안되는 고등식자층이었던 김규식은 실무진으로서 묵묵히 소임을 다했다. -그런 그가 정남의 후계자로 떠오른 것은 거국내각이 막 발족할 무렵의 일이었다. 백산 노정남이 혈육의 정마저 끊어내고서 교섭위원장 자리에 덜컥 김규식을 발탁한 것이다. 누구도 예기치 못한 인사였다. 김규식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제 세력이라고 할 사람이 적었던 김규식이었기에 대한제국은 순풍만범할 수 있었다. -거국내각 이후에도 김규식은 무소속 의원이자 참의원 교섭위원장으로 남았다. 그 스스로가 원하였고, 모두가 그리 바랬다. 그는 죽는 날까지 입헌정치의 균형을 수호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문성공 백산 노정남의 후계자. -앞선 인물들이 노정남의 공과 과를 모두 목격하였다면 신익희는 철이 들 무렵 백산의 공만을 보고 자란 세대였다. 참으로 운이 좋았다 할 수 있으리라. 덕택에 신익희는 아무런 걱정도 없이 하고 싶었던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었고, 끝내는 옥스포드에서 박사 학위를 따내고서 귀국하였다. 그러자 백산은 주저없이 신익희에게 내무부 차관보를 맡겼다. 그의 나이 불과 만 스물하고도 여덟의 일이었다. -신익희는 일평생 백산을 존경하면서도 두려워했다. 「안 사람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일기에 적어두었을 지경이니 오죽할까. 당대의 여느 관료들이 그러했듯이 신익희 또한 백산의 살인적인 업무량에 시달리며 매일 같이 보약을 달고 살아야 했다. -하지만 보상만큼은 확실했다. 거국내각이 해체되고 내각이 정상화될 무렵, 그는 입헌민주당의 최고위원이자 정무위원장을 떠맡게 되었따. 그때 그의 나이 불과 만 마흔 다섯. 참으로 고생한 보람이 있다고 할 수 있었으리라. -김규식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끝까지 총리에 오르지는 못했다. 신익희는 입헌민주당의 최고위원으로서 원내 상임위원회를 전전했다. 이를 두고 신익희는 「총리는 도깨비가 하는 자리다」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젊은 날의 기억이 강렬했던 탓이리라.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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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천년의 숭유억불을 끝낸 위대한 스승. -당대의 여느 의인이 그러했듯이 용운 스님 또한 집권 초기 백산의 진의를 의심했다. 그가 직접 본것이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러시아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조국의 현실에 환멸하여 속세를 등져 출가했고, 이후로도 절대로 속세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당시 용운 스님은 그의 저서를 빌려 백산을 나라를 좀먹는 「개나으리」라 비꼬았다. 그만큼 나라를 러시아에 팔아치운 백산을 원망하는 마음이 컸던 것이다. -그런 그가 백산과 화해한 것은 대공황 이후의 일이었다. 중생을 바르게 이끌어야할 승가가 앞다투어 중생들을 현혹 시키는데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을까. 용운 스님은 반 파시즘 운동에 앞장섰고, 이러한 그의 자세는 교권 파시즘을 경계하던 거국내각의 인식과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하여 백담사에서 만난 두 사람은 딱 한가지에 동의했다. 숭유억불 정책을 완전히 끝내고 교권 파시즘 운동에 맞서 승가를 개혁할 것. 두 사람의 일기에 따르면 백산의 입에서 먼저 「숭유억불을 끝내겠다」는 약속이 나오고 그 다음에 용운 스님의 입에서 먼저 「승가를 개혁하겠다」는 약속이 나왔다 한다. -이후 용운 스님은 반 파시즘 운동의 사령관이자 승가 개혁의 선봉장으로 맹활약했다. 그는 살아 생전에 생불이라 칭송 받았고, 몇몇 속된 자들은 그를 미륵이라고도 일컬었다. 하지만 만해 한용운은 「이 모든 것은 백두산의 선한 기운을 받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반면 백산 노정남은 「이 모든 것은 오직 만해 한용운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였다. 참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두 거인다운 일화였다.
-국군 건군의 어버이이자 선말한초 만주의 군벌. -제법 오랜 시간 동안 이범윤은 문민정부에 송곳니를 겨눈 군벌이라 저평가 받았다. 그가 스스로 문민정부에 부월을 가져다 바치며 시대의 패배자로 전락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연구결과에 따르자면 다르다. 이범윤과 북부군 또한 그저 조국과 민족의 안녕을 바랬던 애국자들이었다. 다만 백산과 문민정부는 성공했고, 이범윤과 북부군은 실패하여 사라졌을 뿐이다. -이범윤은 당대 만주의 여느 군벌들과 달랐다. 그는 필요 이상으로 약탈하지도 않았으며, 필요 이상의 혈겁을 쌓지도 않았고, 병사들이 함부로 아녀자를 희롱하면 엄히 다스렸다. 물론 아편 또한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병사들에게 아편을 복용시키지도, 제 손으로 아편을 사고 팔지도 않았다. 되려 아편 밭이 발각되는 족족 모조리 불태우고 밀수범을 참살했다. 그는 다만 만주의 조선인들이 조금이나마 평안해지기를, 황제의 은혜가 이 압록강 너머까지 두루 미치기를 바랬다. -하지만 시대적 현실이 그에게 매국의 길을 강요했다. 제 손으로 아편밀수를 거부하며 독자적 자금줄을 포기했기에 현지의 백인 자본가들에게 휘둘리는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조국의 안녕을 바라던 북부군은 백인들을 위한 용병으로 전락했다. 통탄할 일이었다. 어쩌면, 후일 이범윤이 순순히 부월을 넘겼던 건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제 손으로 백산 노정남에게 부월을 가져다 바친 후 이범윤은 아무말 없이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는 일기나 저서를 통하여 저를 변명하지도 않았다. 대신에 그는 당시 유행하던 정교회 신앙에 몸을 바쳤다. 사후에도 다른 북부군 출신 군관들이 그렇듯이 가족묘를 거부하고서 정교회 성당에 묻혔다. -언젠가 연변에 가면 가장 먼저 이범윤과 북부군의 공훈을 기리는 공덕비가 당신을 반겨다줄 것이다. 학교에서 배운 것과 달라 당황스러울지도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기억해달라. 선말한초는 애국자가 매국노가 되어야 했던 시대였다.
◎익성군 (翼成君) 이명복 (李命福) _ -‐- _ _V_ -ニニニニニニ=- _ /,ヘ=∧/\/\/\/〉=`、 / ̄l , ‐、 l=/ _ _ -ニヽ ∨ニ- ! | ./ 〉 |/ <x─ ミ </ '/二| | | / / |{ / ̄.、 / ̄ .ヽ }x‐゙ v |./ / ハ └─=ニ _  ̄ ̄ } /⌒>‐ 、 { r〉 / 、 / // ''ノ──‐┐ / l ゙、/ / /八 r┘ --| __/ー〈___/ / | `¨¨ ´ /| ) / | ___,,.....::::::::/ /ニ- _ ,,. イ 、 \::::::::::_ ─/ /ニニ\ニニニニ/| \ `<__/ ∧ニニニニ=--=ニニ/ _ -ァニ- _ _ _ -ニ]二二ニニニニニニ/ _ -二/ニ/ \_,,.、丶´/ニニ|二ニニニニニニイ /-ニ/ニニ/ \____,.、/-ニ二|ニニニニニニニ/ /ニニ</\./ /ニ/\|二ニニニニ-/ /二二ニニニ-∥ ∥ニニニニニニニニ', . /ニニニニ/ニニ∥ |二二二ニニニニニニ', /二ニニニ|二二l |ニニニニニニニニニニ', . |二二ニニ|二二| |二二ニニニニニニニニ', -연산, 광해를 능가하는 최악의 암군이자 폭군 -21세기에 와서 재평가 받은 북부군과 이범윤과는 달리 오늘날에도 익성군을 재평가하려는 시도조차 없다. 워낙에 실록에 기록된 포악하고 무능한 행보가 쟁쟁하고 또 수많은 당대 사람들의 일기로 실록에 적힌 내용이 교차 검증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의 뒤를 이은 것이 순종대제와 홍익대제가 아니었더라면 전주 이씨는 익성군의 대에 왕업을 잃고 말았으리라. -익성군은 처음에는 청에 의지하였다가 그 다음에는 일본에, 또 미국에 의지하였다가 또 러시아에 의지하였다가 하면서 오락가락 거렸다. 그 와중에도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궁리는 커녕 제 사치와 향락에나 집중했고, 축재에 열중하여 끝내는 오군영이 왕에게 칼을 겨누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켰다. 그마저도 부족하여 외세를 끌어들여 반란을 진압하고 백성들을 학살하였으니 어찌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으랴? -모두를 용서하고 타협하였던 그 문성공 백산 노정남조차 익성군만큼은 용서하지 못하였다. 실록에서 이르기를, 걸인으로 위장하여 민가에 몸을 숨기고서 청나라로 망명을 가려 하였던 익성군을 발견한 백산 노정남은 끝내 울화를 참지 못하고서 몸소 칼을 뽑아 겨누며 「황상은 폐위되셨소이다!」하고 일갈했다 한다. 끝까지 외세에 의지하여 제 자리를 지키려 하였던 익성군을 용서하지 못한 것이다. 당연하게도, 오늘날 백산이 황실을 모독했노라 비판하는 사람은 없다. -이렇다보니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익성군 본인이나 익성군을 본 딴 배역이 자주 등장하고는 한다. 물론 개중에 선역은 지금껏 전무하다. 혹자는 「그 연산을 능가했다는 사람이 나왔다는 게 익성군의 역사적 의의다」라고도 한다. 그리고 실로 그러했다.
-무위지치를 이룩한 성군. -비아냥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실제로 그러했다. 암살미수 사건 이후로 백치가 된 이척은 내각이 뭐라하건 관여하지 않고서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관여할 수 없었던 거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대한의 입헌정치가 뿌리내리는데 큰 도움이 되어주었다. -당시 백산은 모든 공을 융희제에게 돌리고 반대로 모든 과는 저에게 돌렸다. 저를 깎아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권의 안정을 위해서였다. 익성군의 그 모든 패악을 겪고서도 여전히 대한의 백성들은 전주 이씨에 동정적이었고, 새로운 내각이 살아남으려면 이를 이용해 민심을 끌어와야했다. 결과적으로 융희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나 만 백성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무위지치를 이룩했다. -백산은 그런 융희제에게 동정적이었다. 지난 암살미수 사건이 백산과 무관하지는 않았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그는 친러파와 친일파가 대립하던 선말한초 정치의 희생자였다. 그탓일까. 융희제 이척이 천붕한 이후에도 백산은 죽는 날까지 매년 기일마다 융희대제의 종묘를 참배하며 그의 넋을 기렸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오늘날까지도 경복궁에서는 융희제의 귀신을 보았다는 목격담이 끊이지를 않는다. -사후 융희대제는 의종의 묘호를 추승 받았다. 옛 주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묘호였다. 대한이 주명의 천명을 계승하였음을 보여 여전히 소중화에 집착하던 유림을 달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의 치세가 숭정제에 비할바는 아니리라. 융희제의 치세에 대한제국은 주권을 회복하고 대한이 재조지은을 입었던 러시아에 재조지은을 입혀 러시아의 혈맹으로 다시 태어났다. 대제의 칭호를 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치세였다.
-대한의 국모. -국모라는 단어보다 고황후의 인생을 나타내기 좋은 표현도 또 없으리라. 그녀는 제 아버지가 그랬듯이 일생을 대한에 헌신했다. 장차 자라나 대한의 황제가 될 태자를 엄히 가르쳤고, 또 쉴틈없이 축첩질에 열을 올리는 부군을 전면에서 꾸중주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아내가 남편의 기를 죽여서야 되겠냐며 비아냥거리지만, 덕택에 홍익대제는 호색가가 아니라 민족의 성웅으로 기억될 수 있었다. -고황후는 백산 노정남의 유일한 이해자였다. 그녀는 제 어미조차 외면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아버지를 지지해주었다. 야사에 따르자면 전주 이씨에 시집간 것조차 고황후가 먼저 백산에 그리 청하였다고 한다. 교차검증은 불가능하지만, 그런 야사가 돌 만큼 고황후의 책임감과 결단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고황후는 살아 생전부터 당대 신여성의 상징으로 떠받들여졌다. 위대한 부군에 기죽지 않고서 제 뜻을 펼치는 그녀의 굳건함에 많은 신여성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사후에도 다르지 않다. 일부 극단적인 여성우월주의자들의 경우에는 홍익지치는 홍익대제가 아니라 고황후 노씨가 이룩한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보통은 이런 극단주의자들의 주장은 학계에서는 일언지하에 무시되기 마련이나, 오늘날 학계에서도 고황후 노씨의 역할을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한창이다. 아닌게 아니라, 실록에 이어 승정원일기가 학계에 공개되면서 고황후가 당대의 거의 모든 궁궐정치에 관여하고 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시대가 낳은 비극의 주인공. -아무렴 그녀만큼 자주 영상화된 선말한초의 인물이 또 있을까. 시대에 휘둘리기만 했던 비극적인 젊은 시절과 말년의 행복한 삶까지. 대한제국 문예인들의 창작욕을 자극하기에 그녀의 인생은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기에 영상매체에서 왜곡된 사실 또한 너무나 많다. 가령 그녀의 두번째 부군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와의 풋풋한 연애담이 그러하다. 영상매체에서는 흔히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여 맺어졌다고 묘사하거나 케렌스키가 먼저 그녀에게 반하여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억지로 혼인을 맺었다 묘사하지만. 당대의 기록매체를 통하여 교차검증되는 바 두 사람의 혼인은 그런 풋풋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전리품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약탈혼에 불과했다. -일부 여성우월주의자들은 그녀의 사례를 예시로 들며 백산 노정남을 권력에 미쳐 딸을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냉혈한이라고 비난하고는 한다. 학계 또한 그들의 지적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학계는 그럴 수 밖에 없었던 당대의 현실을 외면하지 말라고 분명히 지적한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그녀의 인생을 얼마나 잘 연기하였는가가 그 여배우의 역량을 평가하는 하나의 지표로 자리잡았다. 오늘도 충무로에서는 선배들을 뛰어넘고자 발버둥치는 백조들의 피눈물 나는 연기대결이 한창이다.
-당대 신여성의 화신. -백산의 자식들 중에서 가장 인지도가 없는 인물. 하지만 평범해서 나쁠 이유는 없다. 그만큼 그녀의 인생이 후대까지 회자될만한 큰 굴곡없이 무난하게 흘러갔다는 이야기니까. -숱한 자료에서 교차검증되는 바, 그녀는 집안의 귀염둥이였다. 집안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자란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언제나 아버지 곁을 멤돌며 애교를 떨었다. 그리고 백산 또한 그런 딸아이를 내치지 않았다. -그녀는 백산과 집안의 안식처였다. 모두가 흔들리는 와중에도 그녀만큼은 여전했다. 그래서 비록 역사에 남지 못했으나, 그녀는 당대 어느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살았다. 아무렴, 해보고 싶은 건 뭐든지 해보고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으니까.
-대한제국 정치외교학계의 위대한 대스승. -그는 본디 어버이의 뒤를 잇기 위하여 자라났다. 모두가 그리 기대하였고, 백산 또한 그리 기대하였다. 또 그 자신 또한 언젠가 어버이의 뒤를 잇게 되리라 믿고서 우직하게 나아갔다. 오산이었다. 그는 현실과 재능의 벽에 부딪혔고 방황한 끝에 제 길을 걷기로 하였다. 지난날 그를 궁지로 몰았던 어버이 또한 덕암의 결정을 지지해주었다. 그리하여 정계를 떠난 노재하는 두번 다시 정계로 돌아오지 않고서 우직하게 제 길을 걸어갔다. -만 서른 다섯의 나이에 성균관 대학의 정치학 박사가 된 덕암은 그의 아버지를 연구하는데 일평생을 바쳤다. 반평생을 아버지 밑에서 일해온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백산의 치세를 정리하여 세권의 책으로 남겼다. 오늘날 대한제국 정치외교학계의 성서로 추앙 받는 「숙의지치(熟議之治)」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일평생 정치란 타협의 예술이라 말했다. 필요하면 타협하고, 약속을 언제건 헌신짝처럼 내버리는 건 현실정치가 아니라 하였다. 덕암은 덕치를 믿었다. 비록 시대의 풍파에 무너졌으나 공맹의 왕도가 여전히 대한에 살아숨쉬고 있노라 말했다. 그리고 오늘날 그의 제자들도 그리 말한다. 오늘날 세상은 그를 새로운 대한의 퇴계요, 율곡이오, 우암이었노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