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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눈을 감은 채 혼자 부르던 노랫소리에는, 이내 한 청자 님께서 나타나셨다. 혼자가 아니라는 그 사실에 살짝 놀란 듯 멍하니 뜬 두 눈동자에는 곧 벚꽃나무 아래에 서 계시는 아름다운 검은색의 신 님께서 들어오셨고, 그에 황급히 날개를 펼쳐내어 아래로 내려왔다. 자신이 감히 '신' 님보다 더 높은 곳에 있을 수는 없었으니.
딸랑딸랑, 살며시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오는 신 님의 방울 소리를 들으면서, 공손히 예를 갖추어 스스로를 낯선 신 님께 소개해드렸다. 그것이 바로 자신이 신 님께 갖추어야 할 예의였으니. 그러자 신 님께서도 가볍게, 간단히 소개를 해주셨다. 신 님의 이름을 들었다는 그 작은 사실 하나에,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기쁜듯이 살짝 피어올랐다. 령 님. 혀 끝이 입천장을 살짝 톡, 치는 신 님의 이름도, 신 님께서 자신과 같은 조류 신이시라는 것도, 모든 것이 그저 기쁘게만 느껴졌기에.
"...만나뵙게 되어서 정말 영광입니다, 령 님."
무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령 님께 다시금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가지런히 앞에 모은 두 손은 서로 떠날 줄을 몰랐다. 그러다 자신이 이어서 드린 말씀에, 령 님께서는 잠시 검지 손가락을 뺨에 대셨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들려오는 령 님의 친절하신 말씀과 온화한 미소에, 순간 멍한 눈빛을 크게 뜨고 령 님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령 님께서 저를 칭찬해주신 건가요...? 저에게 웃어주신 건가요...? ...신 님께서... 저를... 저를...
기쁨과 행복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신 님께서 건네주신 작은 칭찬에도, 자신이 행복할 이유는 충분했다. 더군다나 신 님께서 웃어주셨으니... 헤실헤실, 작은 미소가 더욱 새어나왔다.
"...정말 감사합니다, 령 님. 물론 령 님의 아름다움보다는 절대 못하지만, 그럼에도 저의 노랫소리도 좋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무려 령 님과 제가 이어져 이렇게 만나뵙게 된 것만으로도 저는 정말로 기뻐요...!"
두 눈이 부드럽게 접혀졌다. 거짓도, 꾸밈도 없이 솔직한 호의와 존경심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딸랑딸랑, 령 님의 방울 소리마저도 너무나도 아름답게 느껴졌기에, 잠시 멍한 눈빛으로 령 님의 방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멍하니, 천천히 입술이 열렸다.
신선한 토마토를 먹고 싶다는 누리님의 부탁으로 나는 가리 지역으로 찾아왔다. 내가 아는 바, 여기만큼 신선한 토마토를 얻을 수 있는 곳은 없다. 지금 내 앞에 보이는 것은 성이라고 하면 좋을까? 아무튼 그런 곳이다. 가리 지역의 관리자가 살고 있는 곳. 나와 같은 위치인 관리자를 담당하는 밤프 씨를 만나기 위해서 난 여기까지 찾아왔다.
정확히는 밤프 씨가 관리하는 신선한 토마토가 필요한 것이지만... 누리님이 먹고 싶다고 하니까 당연히 내가 가지러 오는 것이 맞는 것이다. 일단 관리자이기에 한번은 제대로 만나보고 싶기도 했고...
잠시 그가 사는 집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앞으로 가서 노크했다.
"밤프 씨. 계십니까? 비나리 지역의 관리자, 가온입니다!"
딱히 약속을 잡아서 온 것은 아니었기에 안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일단 그것은 지켜봐야 알 수 있겠지. 그렇기에 문을 노크한 후에 나는 조용히 기다려보기로 했다.
령은 지그시 눈을 내리감았다. 이 작은 존재는 자신을 높여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될 지 궁금해졌다. 물론 흑조들 사이에 있을 때도 으뜸가는 존재로서 추앙을 받았긴 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다른 문제지 않은가? 령이 다시 눈을 떴다. 새카만 눈동자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령의 시선에 다시 리스가 담긴다.
령이 제 치맛자락을 잡았다. 무릎이 살짝 굽혀지며 순간적으로 령과 리스의 시선이 동등한 곳에 위치하게 된다. 령은 굽혔던 무릎을 폈다. 그래. 이 정도의 인사라면, 비록 옛 것이긴 하나 이 정도의 예의범절이라면 딱 맞겠지. 령이 리스를 바라보았다. 령이 몸을 움직이면서 다시 방울이 딸랑딸랑 소리를 내었다.
"저도 만나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귀하와 같은 아름다운 신을 만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요."
령의 목소리는 조곤조곤 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이 있었다. 령이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상대에게 있어 '나를 더 이상 경계하지 않아도 돼.' 라고 말하는 듯한 효과가 있었다. 령은 무릎을 굽히느라 흐트러진 치맛자락을 바로 폈다.
리스는 저의 작은 행동에도 멍하니 감탄을 하는구나. 령은 리스를 바라보았다. 예전에도 이러한 걸 경험해보았지. 그때 흑조들의 무리에서 자신을 으뜸가는 흑조로 칭했던 자들을... 순간 령의 눈빛에 슬픔이 깃들었다. 그들과 자신이 멀어지게 된 건 자그마한 질투심 때문이었다. 이 자와는, 이제 더 이상 그런 걸 겪지 않았으면 하는구나. 령의 눈이 다시 예전처럼 고고함을 띄었다.
"저도 리스와 제가 이렇게 이어지게 되어서 기쁘옵니다. 인연은 소중한 것이라 하죠. 당신과의 인연, 제가 잘 보살피겠나이다."
리스는 령에게 노래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령은 눈을 반쯤 감았다. 자신은 노래를.... 그래, 좋아했다. 좋아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지어다. 애초에 좋아하지 않았다면 리스의 노래를 듣고도 무시했겠지. 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뜻에는 긍정이 담겨있었다.
을씨년스러운 모습의 성은 우연찮게도 으슥한 가리의 외곽지와도 퍽이나 잘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있었다. 가온이 그 성의 커다란 문을 두들기자 그것은 마치 기다렸다는듯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열려들었고 성 안에선 검은 박쥐떼가 기분나쁜 울음소리를 내며 밖으로 몰려나왔다. 그리고 잠시 뒤, 방금전의 떼지어 다니던 박쥐들과는 어딘가 다른, 조금 더 커다란 모습의 박쥐가 펄럭펄럭 날아와 천장에 메달려있는 마무막대에 거꾸로 메달리더니 그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을 내뱉었다.
"어서와라 이방인이여! 이 저주받은 흡혈귀의 고성을 방문할 용기, 내 친히 가상하다고 여겨주지. 여기는 우리들, 박쥐들의 왕이신 블라디미르 밤ㅍ.."
토마토가 그 박쥐에게로 날아들었고, 박쥐는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토마토를 맞고선 바닥에 힘없이 풀썩 떨어져버렸다. 그리곤 저 만치 떨어져있는 곳에서 검은 정장을 입은 남성이 머리위에 삐죽 솟아난 특이한 모양의 더듬이를 흔들거리며 걸어오고있었다.
"미안하군, 손님이 온다면 맞이해달라고 했건만 이런 헛소리를 할 줄은 상상도 못했어."
하지만 토마토를 먹게되었으니 잠시뒤면 제정신을 차리겠지! 그는 덧붙이며 양 팔을 쭉 펼쳐올렸다. 성 내부의 밝은 불빛이 그의 그림자를 마치 거대한 박쥐와도 같이 보이게끔 만들었다.
"아무튼 들어와도 좋다! 비나리 지역의 관리자 가온, 참으로 오랜만이군. 넌 날 기억할진 모르겠지만 말이야."
문이 열리자마자 보이는 박쥐들이 울음소리를 내면서 밖으로 몰려나오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 그렇게 소리치며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갑자기 나에게 이방인이라고 부르면서 저주받은 흡혈귀가 어쩌고 하는 박쥐의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여기에는 그런 이는 못 들어오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 갑자기 토마토가 날아왔고, 나는 토마토가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다름 아닌 밤프 씨의 모습이 있었다.
나를 바라보며, 카캇 웃으면서 반겨주는 밤프 씨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며 살짝 목례를 하면서 인사를 올렸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가끔 은호 님을 찾아오시지 않으셨습니까? 물론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아무튼 밤프 씨. 가리 씨의 관리자가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같은 관리자로서 앞으로 잘 부탁하겠습니다! 그리고...볼일이라면 당연히 있습니다!"
그래. 아주 숭고하고 중요한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지. 그렇기에 나는 밤프 씨를 바라보면서 내가 여기로 온 용건을 이야기했다.
"밤프 씨가 가지고 있는 가장 맛있고 달콤한 토마토를 주실 수 있으십니까? 누리 님이 토마토가 먹고 싶다고 하시는데, 여기만큼 질 좋은 토마토를 구할 수 있는 곳은 없을 것 같아서 찾아왔습니다! 괜찮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