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극판 규칙 ☞ 상황극판은 익명제입니다. 본인이나 타인의 익명성을 훼손하는 행위는 삼가주세요. 하지만, 자신의 위치(스레주/레스주) 등을 밝혀야 할 상황(잡담스레 등에서 자신을 향한 저격/비난성 레스에 대응할 시 등)에서는 망설이지 말고 이야기해도 좋습니다. ☞ 서로를 존중하고, 자신이 먼저 배려하는 마음가짐을 가집시다. 모니터 너머의 이용자도 당신처럼 '즐겁고 싶기에' 상황극판을 찾았다는 것을 기억해주세요. 모두 두루두루 친하게, 잘 지냅시다. 말도 예쁘게해요, 우리 잘생쁜 참치타치☆★☆★☆:> ☞ 상황극판은 성적인/고어스러운 장면에 대해 지나치게 노골적인 묘사를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약물과 범죄를 미화하는 설정 또한 삼가해주세요. 각 스레마다 이를 위반하지 않는 수위 관련 규범을 정하고 명시할 것을 권장합니다. ☞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행동이 결코 아닙니다. 바람직한 상판을 가꾸기 위해서라도 서로에게 관심을 가져주세요. 다만 잡담스레에서의 저격이나, 다른 스레에서의 비난성 및 저격성 레스는 삼갑시다. 비난/비꼬기와 비판/지적은 다릅니다. ☞ 상황극판의 각 스레는 독립되어 있습니다. 특정 스레에서의 인연과 이야기는 해당 스레 내에서만 즐겨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잡담스레에서 타 스레를 언급하는 일도 삼가도록 합시다. 또한 각 스레마다 규칙 및 특징이 다르기 마련입니다. 해당 스레의 이용자들에게 문의해주시고, 그 규범에 따라 행동해주세요. ☞타 스레와의 교류 및 타 스레 인원의 난입 허용 여부(이건 허용한다면 0레스에 어디까지 괜찮은지 명시해둡시다)와, 스레에 작성된 어그로성 및 저격성 레스의 삭제 여부, 분쟁 조절 스레의 이용 여부에 대한 결정권은 각 스레의 스레주에게 있습니다.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분쟁 조절 스레"를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 처음 오신분은 어려워말고 잡담 주제글에 도움을 청해주세요! 각양각색의 스레들을 가볍게 둘러보는 것도 적응에 효과적입니다.
수업을 아예 안하면 국립(은 제국) 아카데미랑 가끔 하는 대항전에서 퀴즈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참사가 일어나니까 말이지요. 그러니까 수업도 일정 비율 있습니다!
에밀리아: 에밀리아의 포션교실에 온 걸 환영해! 그래. 포션제조법은 의외로 쉬우면서도 어렵지! 샤릴: 피튀기는 종교강의로다! 이거 의외로 대항전때 ox퀴즈로 자주 나온다고? 그럼 일단 상식 테스트부터 할까? 삼주신 이름은 뭐지? 지운영: 지운영이 운영하는 역사 및 지리학! 어머 샤릴 선생님. 제가 더 자주 나오지 않나요? 그럼 제국지리를 시작해 볼까요? 은 제국의 수도인 리스는 온대기후이며, 프롱 해와 접한 내해의 영향을 받고..(이하생략) 크리드: 너네는 능력을 무기에 각인도 못 시키니? 아..아니 아라님. 아 그렇게 말할 리가요. 제가 좀 뛰어나다 보니 눈높이가 너무 높아졌나 봅니다.
주의! 데플은 없지만 부상 등으로 구를 수는 있습니다. 어두운 분위기도 존재하고요. 개인설정, 개인 이벤트, 환영합니다. 완전 초보라 미숙한 스레주입니다.. 잘 봐주세요..(덜덜덜) 모두들 서로를 배려하고 활발한 어장생활! 캡이 응원합니다! 인사도 바로바로 하고, 잡담에서 끼이지 못하는 분이 없도록 잘 살펴보자고요!
전투 시스템에서 다이스를 사용합니다!! 기본 다이스 .dice 0 10. = 4 0-크리티컬 1-5 빗나감 6-10 명중 인챈트나 다른 다이스가 필요하신 분은 위키에 기재해 둬야 하며, 자신이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앓이도 보내고, 개인 이벤트도 보내고.. 온갖 걸 보낼 수 있는 웹박수: https://goo.gl/forms/SKs7SBRwrQZfsmfr2 위키: http://threadiki.80port.net/wiki/wiki.php/%ED%8B%B0%EC%97%98%EB%A6%B0%20%EC%82%AC%EB%A6%BD%20%EC%95%84%EC%B9%B4%EB%8D%B0%EB%AF%B8 시트스레: >1525406542> 이전스레: >1528353604> 임시스레 겸 선관스레: >1525430363>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글쎄. 수치상승 프로젝트의 결과물과 권능의 파편.....이라면 나쁘지 않겠지." "신탁은 내려오지 않는구나." "아니. 신탁은 내려올 거야. 감히 책을 더럽힌 인간이 사는 곳을 부수어라고."
- 황녀 머리랑 눈색은 가짜. 진짜는 보랏빛이 감도는 검은색. - 누군가를 '그분'이라 부르며 사모하고있다. - 진정으로 한번은 죽음을 경험했다. - 황위계승은 스스로 포기한게 아니라 대외적 사정으로 포기하라고 강요받은것. - 가짜황녀라고 부르며 죽이려고 암약하는 자들이 있다. - 바라는 목적을 간접적으로 언급하길 인간들의 타락과 공멸.
티엘린 사립 아카데미, 너무나도 유명한 이곳에 한 명의 외부인이 왔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그 외부인은 메디엔 겐이라는, 모두가 잘 알고있는 변태를 찾고있다는 소문이었고 그 외부인은 그 변태의 지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정상적(?)이었다. 그리고, 신사적이었다. 왜 신사적이냐는 말이 돌았느냐 하면 제법 디자인이 좋은 지팡이를 들고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 와중에 소문의 메디엔 겐은 무엇을 하고있느냐 하면.... 숨고있었다. 수풀에, 조용히 아무 말 없이 숨고있었다. 굳이 메디엔 겐이라는 변태의 지인에게 선의를 배풀 사람은 굳이 말해봐야 진 정도였으니 이대로라면 그 사람과 겐은 만날 수 없었다.
"아이고 맙소사. 어쩌다가 이런 일이. 진짜 지인이 이렇게 나와버리나? 난 이제 어떻게되는거지?"
혼자 중얼거리며 수풀에서 중얼거리며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빵을 우물우물 씹어먹고있었다. 그런 점에서 확실히 겐은 겐이었다. 준비성은 있는 사람이니까.
>>50 애초에 그런 뜻 이전에 글 쓰시는 그 자체가 스트레스라니까요? 진주랑 일상 돌릴때 잠깐 자리비우는 것도 일일히 검사받듯이 스트레스 받아가면서 돌려야하나요? 저 진짜 참다참다 도저히 못참겠어서 말 꺼내는겁니다. 이번만 그러신 것 같나요? 사람이 항상 자기 사정을 스레에 남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왜 제가 잠깐 차ㅌ서 참치에 잠깐 못올때도 일일히 라야주 안오냐 뭐냐 소리 하는 진주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나요?
>>65 고마워요. 저도 기다림을 좀 가져볼게요. 그래도 정말 짧게 여유라도 내서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 정도만이라도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안그러면 저는 계속 새로고침하면서 기다리고 있거든요... 라야주도 제가 아니겠지만 빨리 답레 해주려고 계속해서 새로고침 하며 제가 기다리고 있다는것을 알아주세요.
그래도 정말 짧게 여유라도 내서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 정도만이라도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 제가 이 말때문에 스트레스 받는거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기다리고 자시고 이 행동 자체가 싫다고 제가 몇번을 말해요? 저는 무조건 진주한테 맞춰줘야하고 조금이라도 안맞춰주면 제가 죽을 죄인 된거마냥 징징대는 소리 듣고 있어야 하냐구요 예?
장도를 뽑아들려다가 멈추는 그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음부터는 절대 이 말을 내뱉지 말자는 개인적인 약속을 하면서. 이것 참, 몰랐는데 자기가 붙임성이 없는걸 제법 신경쓰고 있었나보구나? 생각보다 인간적인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혼자 방실방실 웃다가 들리는 말에 다시 표정을 바꾼다.
"걸으면서, 말이지?"
그렇게 무섭게 달려오더니 잘도 여유로운 미소를 띄우며 걷자고 한다고, 생각했다. 숨도 안차는건가? 도대체 얼마나 뛰어다녔으면 이렇게 체력이 넘쳐나는걸까! 난 뛰어다니기는 커녕 걸어다니는것도 녹록치 않았거늘!
"어어, 저 사람은 내가 옛날에 알던 사람인데. 헤어질때 좀 그랬거든. 그래서 그런거야."
혼자 갑자기 방실거리면서 웃는 그의 표정에 그녀는 슬금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딱히 뭐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훈련장에서 훈련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그녀의 머릿속은 처음으로 생긴 친구에게 해야하는 말과 여러가지가 복잡하게 얽혀서 어지러웠기 때문이였다. 팔짱을 끼고 있던 한손을 들어 목의 문신을 쓰다듬으며 그녀가 대답을 위해 여유롭게 입술을 움직인다.
"그래. 걸으면서."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녀는 성큼 앞으로 훌쩍 걸어갔고 침묵을 지키다가 뒤에서 들려오는 겐의 말에 흐트러져있는 셔츠 단추에 손을 댔다가 쇄골의 흉터를 매만진다.
"옛날에 알던? 티엘린에 들어오기 전에 말인가. 헤어질때 그랬다는 건 저 신사분의 뒤통수라도 거하게 때리고 도망쳤나?"
음. 밤동안 되짚어 보면 상대방의 사정을 생각하는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네요. 일상을 할때 상대방이 말없더라도 기다려 주고, 아니면 일상동안 레스를 길게 못 쓰거나 바쁠거 같으면 미리 말해주고. 이런일이 있어 답레가 짧을거 같다. 이런일이 있어 답레가 늦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해주지 않으면 난 모르니까... 서로에게 말을 해준다면 좋은거 같아.
어제 한것을 또 반복하는건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자신의 사정을 말해준다면 나는 괜찮은데.
음...저도 진이라는 캐릭터 자체는 마음에 들어요, 어디까지나 누나동생 관계이상은 그닥이지만. 하지만 진주의 방식이 제겐 스트레스였지요. 아시다시피 저는 스레에 상주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주만 기다리는게 아니라 저도 일 때문에 답레를 달 시간이 없을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은 반응을 안하는 건 아니잖아? 라는 겐의 말에 비류는 머리를 쓸어올리던 것을 멈추고 천천히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다른 사람들도 반응을 하기는 하지만, 뭐라고 할까. 겐처럼 반응하는 사람은 못봤다. 아, 리타라는 그 조그마한 선배님은 빼놓고 이야기할까. 하지만 그 선배님은 그냥 텐션이 높고 경쾌한 사람이고.
슬금슬금 엉뚱한 생각에 빠지려는 정신머리를 다잡기 위해 그녀는 고갯짓을 가벼이 해보인다.
"피도 눈물도 없는 에서, 눈물이라는 지칭은 이 눈물이 아니지 않았나?"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여유롭고 느긋한 목소리와 그런 미소를 지으면서 대꾸하고는 이어지는 겐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살짝 기울어졌던 고개가 똑바로 되돌아온다.
"장사를 얼마나 오래했는지와 입담이 좋은 것, 표정과는 별개다. 그나마 장사를 많이 해봤으니 당하지는 않겠지만."
모호하게 농담을 흘리지만, 그녀가 고개를 돌리고 큭큭 웃는 꼴은 절대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안된다라는 걸 알려 준다.
언제 일어나 언제 자고, 무엇을 하는지 잘 모르는 나날이 벌써 며칠째더라. 시간 감각과 날짜 감각이 반쯤 마비된 채로 보내는 하루하루는 정말 무의미하고 무의미했다. 내 생애 이토록 공허했던 적이 없...아니 없던 건 아니구나. 그 날 이후로 나는 쭉 공허했었지. 그걸 자각하지 못 하고 있다가 근래 들어 자각하면서 다시 느끼게 된 듯 했다. 항상 깊이 그어놓던 경계 안으로 타인을 들인 후로부터.
뭐, 헛소리지만은.
아무튼 나는 여느 때처럼 혼자 교정을 걷고 있었다. 점심시간이니 뭐라도 먹을 법 하건만 딱히 뭘 먹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따갑게 내리쬐는 햇살을 덥다고 느끼며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을 뿐.
"어우 더워..."
늦더위가 무섭다는게 이런 걸까. 지면을 말려버릴 듯 쨍쨍하게 내리쬐는 볕이 조금 짜증스럽기도 하다. 그래서 조금 더 걷다가 보인 나무 그늘 아래로 들어갔다. 때마침 거기에 벤치도 있어서 딱 쉬기 좋아보였다.
"더워라..."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걸터앉자마자 셔츠의 윗단추부터 풀러놓고 팔락팔락 손부채질을 한다. 그래도 그것만으로는 성이 안 차서 나무 그늘로부터 부채모양으로 그림자를 일으켜 팔락팔락 흔들게 만들었다. 손부채질과는 비교도 안 되는 시원한 바람을 쐬며 벤치에 반쯤 늘어져 있었다. 누가 지나가건, 누가 보건 상관치 않고.
오늘은 수업이 없었다. 정확히는, 황가의 일로 수업을 미룬 것이지만. 그정도는 유도리있게 봐주는 이 아카데미는 참으로 맘에 들었다. 일종의 도피처로도 좋았고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고 견문을 넓히는 것또한 좋았다. 하지만, 이 찌는 듯한 더위는 참을 수 없이 싫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황가의 하계 의복은 그 기능을 하지 못한다. 금박과 은박이 수놓아져 쓸데없이 화려한 자수는 물론이거니와 시원한 옷감이 아닌 비단과 고급실들이 엉켜 바람도 잘 통하지 않는다. 다행이라면 소매가 약간 짧고 통이 크다는 정도인가. 여전히 더운건 매한가지이지만.
나는 방금 황가의 일을 끝내고 도착했으니, 옷은 당연히 예복이었다. 갈아입을 새도 없이 도착한 이 곳은 그나마 시원함이 느껴지는 그늘들이 많았다. 마땅한 그늘을 찾기위해 손부채질을하며 그늘을 찾고있자니, 앞섶을 풀어헤치고 그림자로 바람을 만들어내는 발칙하고 부끄럼 없는 하늘색 머리의 처자... 잠깐만...?
"헤일리 양."
황당하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그림자로 바람을 일으키는 것은 능력의 일부이니 내가 왈가왈부 할 것은 아니지만, 다 큰 처자가 누가 보면 어쩔려고!
앞머리에 가려져 보이지 않겠지만, 내 눈밑은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다. 자도 자도 풀리지 않는 피로와 그로 인한 불면 상태가 만들어낸 내 얼굴의 그늘이었다. 아침에 거울을 보며 앞머리가 가리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아, 앞머리 길러서 정말 다행이야. 응.
그러한 상태로 시원한 그늘 아래에서 역시나 시원한 바람을 맞고 있으니 슬슬 잠이 올 것만 같았다. 여기서 자도 어차피 개운해지지 않겠지만 잠이 올 때 자는게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퀭한 두 눈을 감고 짧은 낮잠을 자보려고 했다. 그런 와중에 말을 걸어온게 세하였다.
"거-참... 너 오기전엔 아무도 없었으니까 괜찮았거든~ 네가 있어도 달라질 건 없지만."
누가 있어도 달라질 건 없지. 그렇고 말고. 늘어지는 목소리로 대꾸하고 한술 더 뜨듯 다리도 꼬았다. 날이 이러하니 스타킹도 니삭스도 생략한 맨다리가 아슬아슬하게 휘익 넘어가 꼬인다. 벤치에 거의 몸을 걸치다시피 앉아 한쪽 팔걸이에 팔 하나를 걸치고, 매끈하고 흰 다리를 비스듬히 꼰 채로 턱을 괴며 세하를 보았다.
"그나저나 너 엄청 더워보인다. 보기만 해도 더워보여. 어휴."
진저리가 난다는 듯 손사래를 치곤 그림자가 부채질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쉼 없는 부채질에 벌어진 옷깃이 살랑살랑 흔들리니 시워해서 기분이 좋더라.
문제, 문제라. 지금 내 상황은 문제일까? 풀어야 하고 해소해야 하는 문제인 걸까? 그냥 이대로 두면 안 되나? 조금 비뚤어진 채로 어긋날대로 어긋나버린 채로 방치하면 안 되는 걸까? 들려온 한마디에 속으로 수많은 물음이 떠올랐지만 어느 것 하나에도 답하지 않았다. 그냥 흘려보냈다. 떠올라 다시 가라앉게 내버려두었다.
"보시다시피 그러겠지."
그저 들려오는 말에 기계적으로 대꾸를 하고 다시 한번 하품을 할 뿐이었다. 흐냐-암...
하품을 연달아 해서 그런지 눈가에 물기가 맺혔길래 앞머리 안으로 손을 넣어 약하게 문질렀다. 닿은 부분이 미묘하게 젖은 것을 불어오는 바람에 식히며, 같은 벤치에 앉은 세하의 말을 들었다. 한 귀로 들어온 말이 그대로 다른 귀로 빠져나가는 것 같다. 그래도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 한 건 아니니 돌려줄 말은 있었다.
"그 대나무 숲은 바람이 불 때마다 그 비밀을 읊조렸고, 숲의 대나무가 모조리 잘려나간 후에도 떠들었다지. 그런 숲에 무슨 얘기를 하라고? 애당초 얘기라고 한들 할 말 따위는 없어. 이렇게 네 말에 사사건건 태클을 거는 것 정도가 지금 대화를 이어가는 거라는 걸 모르는 걸까?"
뭔가 숨도 안 쉬고 떠들어댔다만, 요컨대 말하자면 그거였다. 너한테 할 얘기 같은 건 없다.
물론 들어봤을 리가 없을 거다. 칼보다 펜은 몰라도 펜보다 혓바닥은 방금 내가 멋대로 말한 거에 불과하니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은가. 세치 혀로 사람을 농락하는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니.
이제 충분히 몸이 식었기에 그림자의 부채질을 멈추었다. 살랑살랑 불던 바람이 멈추고 정적인 공기만이 그늘 아래에 내려앉는다. 나는 꼬고 있던 다리를 풀어 반대로 꼬며 몸을 살짝 틀었다. 자연스럽게 걸치고 있던 팔도 바꾸니 세하 쪽으로 몸이 돌아가게 되었다만, 어차피 끝과 끝이니 닿을 일은 없었다. 좀더 노골적으로 보여지게 된다면 모를까.
그 상태로 머리를 쓸어넘기는 세하를 보며 그의 말에 대꾸했다.
"천만에. 내 컨디션이 안 좋을지언정 나는 이 상태를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러니 힘겨워하지도 않지. 그저 잠을 못 자고 생체리듬이 뒤죽박죽인 것을 문제라고 받아들이고 심각하게 생각하면 제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걸."
모든 사람이 너와 같지 않다며 신랄하게 말을 쏟아내었다.
"만약 얘기를 들어주겠다 한 사람이 네가 아닌 유현 황녀였다면 나는 주저없이 말했을 거다. 다른 친구였어도 그랬겠지. 눈 앞에 닥친 일조차 어떻게 해야 할지 대처하지 못 하고 우왕좌왕하는 꼬맹이 누구씨와는 보는 시선이 다르니까 말야."
[응답하라 ㅂㅏㅂㅓ리더٩( •̀ω•́ )ﻭ!!!!!!] [리타님께서 매우 중요한 고민거리가 있으시다!!!!!!] [그거슨 ㅂㅏㄹㅓ바러바러바러바로바로바로바로!] [(사진 첨부)] [이 주인업ㅂ는 앨범을 어떻게 팔아치우냐에 대해ㅅㅓ다!!!!!!!!]
♪ 리타 는(은) 예쁜 붉은 머리 소녀(소년?)의 사진이 담긴 앨범 사진을 첨부해 보냈다!
[나능 징지하다(ง°̀ロ°́)ง!!!!!!!!] [절대로 어떻게 파는지 몰라서 그런거 아냐!!!!] [(-8-) 흥] [ㅜ] [라아아아야아아아아아아아아 이거 그냥 사진이랑 같이 대자보로 붙임 되게찌??? 디바이스 번호 같ㅇㅣ써놓구??????] [나 정말 급해 ㅇㅡ아아ㅏ아아아 HELP ME(。>д<)!!!!!!!!SOS!!!!!!!!!]
완전 재미있는 사실을 알려주자면 나 지금 팀 건물이다. 팀 건물 안에 있다면 같은 건물 안에서 서로 디바이스 문자로 대화하는 셈이 되는거다. 하.하.하. 왜 뭐 뭐. 나는 진지하다.. 놀리지마라..
세하가 무엇을 생각하는진 모르겠으나 단언컨데 그것은 어느 것도 맞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와 같지 않고, 나 역시 사람이니까. 그래서 그렇게 말하고 옷깃의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그 뒤의 말에도 적당히 대꾸하면서.
"무얼 생각하는지는 알겠네. 황녀라면 내 얘기를 역으로 이용할 거라고 생각하겠지? 내가 그 정도 리스크도 감안하지 않았을 것 같나. 아, 더이상의 말은 의미 없을 뿐이니 관두자. 응."
이것도 저것도 귀찮아. 하지만 상대가 그런 나를 가만히 두지 않으니 이를 어쩌나.
"관심? 관심이라. 그래. 뭐."
그 대사는 내가 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야.
나는 하품을 하며 손가락을 까딱였고 그 소리에 맞춰 세하 주변의 그림자가 일어났다. 수많은 팔의 형태로 일어난 그림자들은 그 각각이 세하의 몸을 붙들어 끌어서 벤치에 등을 대고 눕도록 만들어버린다. 다소 거칠었을지 모르나 사정을 봐줄 생각은 없다. 문답무용으로 붙들어 꼼짝도 못 하게 만들곤 그제서야 몸을 움직였다. 느릿하게 움직여 세하에게 다가가, 마치 덮치는 듯한 모양새를 만들었다. 누가 봐도 그래보이게 말이다. 그대로 세하의 가슴팍에 손을 짚은 채 내려다보며 열기라곤 한가닥도 없는 서늘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마음 없는 이러한 행동도 관심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러던지. 그러니 그 말 그대로 돌려줄게. 은 세하, 너 나한테 관심 많은가보다?"
오늘은 먼저 말 건 것도 아닌데 아는 척을 하질 않나, 요즘 묘하게 유들해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너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치부를 내게 잡혀 있어서 그러나?"
행여나 그걸 외부에 퍼뜨릴까봐? 예의 토끼 분장 사진 건을 얘기하며 나는 가는 웃음을 흘렸다. 웃으며 세하의 턱을 손 끝으로 쓸어올렸다.
"아. 그 사진말인가. 물론 지나치게 부끄러운 사진이었지. 그런 기이한 물건에 혹해 추태를 보였지만, 그것이 어쨋다는 것인가? 이 유약해보이는 황자가 겁이라도 먹을 것 같은가?"
물론 퍼트려지면 안좋은 소문과 내 이미지에 대한 문제가 커질테지. 하지만 제국의 정보력과 내 소신이있다면 극복할 수 있는 문제였다. 애초에 이 제국에서 완벽고결한 인간은 없다. 심지어 나의 어머니도, 계승당시에 손에 피를 묻힐 정도셨으니.
"한 가지 말해주도록 하지. 내가 왜 아직도 살아있는가?"
유약해보이고 눈 앞에 닥친 일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황자. 제국에서 가장 먹기좋고 이용하기 쉬운 내가 왜 아직도 살아있는가. 그에대한 대답은. 순간적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나를 노리는 이들은 내가 다 죽였기 때문이지."
손에 닿아있는 벤치를 압축시킨다. 빠르게 압축시켜지는 벤치와 묶인 그림자 사이의 틈. 그 사이로 몸을 비틀어 빠져나온다. 그와 동시에 균형이 무너지는 헤일리를 한 손으로 받으려 했지만, 내 팔은 그리 단련되지 않아, 충격을 줄이는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넘어지는 정도의 느낌밖에 들지 않겠지.
뭐라고 말하는지는 사실 귀에 들리지 않았다. 내가 하는 행동조차 이제는 멀게 느껴지는데 한낱 말이 제대로 들려올 리가 없었다. 그런 내가 반응한 것은 구속에서 풀려나는 방법이었다.
벤치를 압축시키고 그 사이 벌어진 틈으로 빠져나가는 것. 의외성 있는 타계책에 놀람을 표하면서 나는 그대로 무너졌다...기보단 그냥 그림자에 몸을 맡겼다. 세하를 놓친 그림자가 모습을 바꿔 나를 붙들어 넘어지지 않게 해주었다. 그는 나를 받친다던가 하려 했겠지만 헛수고였다. 내 몸은 이미 똑바로 서 있었으니.
"네 이야기 같은 건 별로 관심 없지만 말야. 이렇든 저렇든 어쨌든 상관 없고."
여유가 생겼건 연기를 덜 하게 되었건 사실 나랑 연관 없잖아? 그렇게 말하며 뭔가 신나 보이는 세하를 보지 않고 뒷짐을 지며 슬쩍 돌아섰다. 내가 넘어지지 않았으니 그가 뻗은 손 역시 쓸모없었다. 그야말로 헛된 친절 그 자체가 되어버렸달까.
"의미 없고 생각 없는 그 행위 어디가 파렴치 하다는 건지 모르겠네. 음란함은 당신 마음속에 있습니다, 라는 말을 알려나 몰라?" "그나저나 잘 쉬고 있던 벤치가 부서져 버렸으니 다른 곳으로 갈 수 밖에 없겠는 걸."
공허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얘기하고 그대로 뒷짐을 쥔 채 발을 떼었다. 그래. 나는 그저 쉬러왔고, 자리가 없어졌으니 갈 뿐이었다.
송곳 모양의 귀걸이의 크기를 변형시켜서 오락가락하는 정신을 바로 잡기 위해 손바닥을 찍어누른다.
목의 인챈트가 발동되어 오는 끔찍한 구토감과 호흡이 막히는 감각.
혓바닥이 마비되는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익숙해졌다고 나름대로 생각하는 그것은 전조라도 있었다.
입을 막고 기침을 하는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내린다. 코에서 흐르는 피와 뒤섞여서 간신히 벽에 기대 앉아있는 게 전부였다.
후욱. 철맛이 감도는 호흡의 끄트머리가 가늘게 떨린다.
어떻게 해서든 예언을 이루려고 할거다.
해악의 별. 나라를 멸망시킬 아이. 그 빌어먹을 예언. 그 빌어먹을 예언자들.
송곳 모양의 귀걸이를 이용해 찍어누른 손바닥의 상처를 헤집는 것처럼 자그마한 병을 쥐고는 그대로 벽을 향해 집어던졌다. 단단한 벽에 부딪혀서 산산히 부서지는 자그마한 병을 바라보며 숨을 몰아쉬는 와중에도 비릿하게 웃어보였다. 치사량은 아니지만 충분히 보낸 이의 하고픈 말이 무엇인지 알수 있을 정도의 양이였다.
《 당신이 존재 자체가 커다란 비밀의 한축임을 잊지 말기를. 당신의 존재를 눈치채는 자, 암브리시오 왕국의 가장 큰 비밀을 들여다보는 것이니.》
병과 함께 동봉된 작은 쪽지를 향해 송곳 모양의 크기를 늘린 귀걸이를 박아넣은 채 자조섞인 웃음을 지었다. 앉아있던 자리에 새하얀 살얼음이 곳곳에 드문드문 보였다.
그 어떤 것에도 자유롭지 못해. 네가, 엄청난 죄과를 쌓아올린 네가 누군가와 친구가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 너는 거짓말쟁이잖아?
피가 다시금 울컥 치밀어올랐다.
까드득-. 어금니와 어금니를 맞부딪히며 으르렁거리는 신음을 흘렸다. 입가를 타고 흐르는 본국에서 불리는 스스로의 별칭을 떠올렸다.
죽는 건 당신의 앞에서. 내가 죽어야할 곳은 당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스스로 목에 칼을 대어 베어내는 것.
그러니, 괜찮다. 깊은 고독의 수렁에 빠지는 것을 기꺼워하며 죽음에 가까운 피안화를 꺾어 손에 쥘테니.
무심코 그런 생각을 했었다. 왜 나는 감정을 표현하면 안되는것인가? 이 지옥같은 세상에서 감정을 죽이고 냉정을 연기하는 나는 과연 살아있는 것인가? 어머니께서 말씀하신것이 이런 삶이라면, 나는 평생을 죽어있는 것이랑 다른게 무언가? 수없이 고민해보았다. 감정적으로 살지않고 참고 사는 것이 무슨 이득이 있는 것인지. 결론을 내자면 나는 참으로 어리석었다는 것이다. 결국 내가 얻은 것은 친족들의 멸시와 꼭두각시 놀음. 어머니의 이름을 먹칠하고 아버지의 명예를 훼손하는 버러지 같은놈들.
언제까지 참아야하는가?
참지 않겠다. 인내는 끝났다. 나는 은 세하라는 이름 석자를 이 제국에 뿌려 두려워하게 만드리라. 방계의 모든 혈족들은 나를 두려워 할 것이고 머저리같은 고관대작들은 나를 우러러보아 내 발밑에 두리라.
그러기 위해서 우선 첫번째. 나를 우습게 아는 그 멍청한 방계놈들의 머리를 부숴버리는 것. 우선 그것이 시작이다.
"찾아라. 그리고 내 앞으로 대려와라."
무수히 많은 병사들이 내게 존명을 외친다. 누군가 위에 군림한다는 것이 이리 만족스러웠던가? 아니면 방계의 늙은이들과 대적자들을 치워버릴 생각에 환희와 기쁨이 차오르는 것인가? 어느쪽이던 좋다. 지금 나는 저들의 모든 것을 부숴버릴 테니까.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아, 방계의 늙은이들과 나와 대립하던 멍청하고 우둔한 자들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기고 있었다. 모두 괴물을 본 듯한 얼굴들이다. 겁을 집어먹은 노인네, 절망하여 절규하는 남자들. 체념한 듯 고개를 떨군 청년들과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잔뜩 겁을 집어먹은 아이들까지. 가엾고 딱하지만. 사실, 가엾지고 않고 딱하지도 않다. 차라리 구원이 아닌가. 왜냐하면,
<clr red gray> 저들은 모두 내 손에 부서질테니 </clr>
가장 먼저 끌려나온 것은 나의 어머니의 사후, 권력의 쾌락을 알아버린 버러지같은 노인. 나의 큰 아버지이자 현 당주 대리. 그래, 나는 이 자 만큼은 꼭 내손으로 죽이리라 다짐했다. 쓰레기같은 벌레가 나의 어머니의 휘광을 입고, 어머니의 말을 빌려 아버지가 누려야할 영광을 왜 네놈이 누리는 것이었는가. 나는 참을 수 없었다.
"큰아버지. 왜 그랬는지요."
「무얼 말이냐.」
"알지 않습니까. 당신이 한 짓을."
「그때, 네 어미가 죽었을 때 너를 죽였어야 했다. 이리 될 줄....」
"이리될 줄 모르셨겠지요. 나는 참을성 있는 아이에, 어머니의 치마폭에 쌓여 사는 유약한 황자놈이라 생각. 당신의 생각 아닙니까. 내가 언제까지 참을것이라 생각했습니까?"
내 손에 들려있던 흑색의 곤봉으로 큰아버지의 어깨를 내려쳤다. 무언가 부러지는 느낌이 들며 내 앞의 버러지는 쓰러졌다. 꺽꺽거리는 신음소리와 말도 나오지 않는 고통이 나를 한층 더 기쁘게 한다.
"그래. 당신은 그랬지. 나를 삼키고 내 가족의 모든 것을 네놈이 가져가려 했지. 나는 그게 너무나도.... 불쾌했어."
한 번 더 내려쳤다. 이번에는 갈비뼈. 뿌득하는 소리와함께 우렁찬 비명소리가 들린다. 늙은 주제에 비명지를 힘은 남아있나보지? 내 어머니가 돌아가실 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인간이 지금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눈물을 흘린다. 참으로 역겹고 비참한 인간이다.
"당신이 바랬던 일은 아니겠지. 하지만 나는 매일이고 곱씹으며 원했지. 당신을 내 손으로 죽이는 것을."
"하지만 안심해. 외롭지는 않을테니까."
퍽, 퍽, 퍽, 퍽. 피가 튀기고 살점이 튄다. 쓰레기의 피는 내 곤봉과 옷, 그리고 얼굴에 튄다. 참으로 불쾌하다. 이 자의 피는 어째서 끝까지 나를 불쾌하고 짜증나게 만드는 것인가? 형체도 알 수 없게된 이 고깃덩이를 보자니 구역질이 난다.
역겨움을 참으며 다음 사형수를 불렀다. 아. 이번에는 쓰레기의 아들이로군. 잔뜩 겁먹은 저 눈빛. 살려달라는 외침. 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모두 죽을테니까.
"시체는 모두 개먹이로 주어라. 늑대의 흉폭성을 살리는 것도 좋겠지. 인육을 먹은 늑대들은 용맹하니."
곤봉을 휘둘렀다. 몇 번 휘둘렀는지 모른다. 비명소리도 이제 식상하다. 곤봉 휘두르기도 지쳐 그냥 굴을 파 나머지를 몰아 묻어버렸다.
이들은 시작일 뿐이다. 나는 이 제국의 쓰레기들을 모두 치울 것이다. 그리고 나는 더 높을 곳을 탐하리라. 더욱 높이 올라가 나의 이모님. 여제의 옆에서 모든 이들을 내려다보리라.
그러고보니 저번에 기이한 이사장님의 사진을 주웠었지. 세상에는 수요가 있고 공급이 있기 마련. 이 사진을 누군가가 비싸게 살것 같기도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나도 기이한 사진이었다. 혹시 본인은 이 사진을 보이는게 싫을 수도 있을테고. 아, 이 얼마나 착한 학생인가! 굳이 사진을 본인에게 돌려주러 간다니! 아아, 훌륭하다 메디엔 겐! 흠, 메디엔 겐이라.
"똑똑똑, 들어갑니다!"
육성으로 '똑똑똑' 이라는 말을 하며 망설임 없이 이사장실의 문을 힘차게 연다. 역시 사람은 당당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점에서 나는 완벽 그 자체가 아닐까? 왠지 누군가의 꿀밤이라거나 제자의 머리치기라던가 여러가지 생각나긴 하지만 난 언제나 당당했다고 자부한다.
"이사장님! 제가 뭘 가져왔게요? 알아맞추면 제가 상으로!"
뭘 드리지?
"음, 상으로 그 물건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줄 생각이지만 이렇게 선심쓰는듯한 행동을 하는것도 좋겠지? 역시 난 똑똑하다. 부족한건 경험이다.
지난번의 하피 대 공습으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면, 더이상 입을 다물고 있다가는 공국은 기본이요, 에르넨과 비스마르크 휘하의 군단마저도 세를 물릴 수 밖에 없고, 자연히 전쟁을 원하는 스카기아의 균형이 깨진다면, 주변의 다른 소국들에게 삽시간으로 피해가 번질 것이다. 우리는 방패이니, 절대 무너져선 아니되며 무너지지 또한 아니할 것이다. 하얀날개 기사단의 구호를 한번 속으로 되뇌이며 캘러미티 신전 안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오늘은 중요한 용무가 있어 크리드를 찾아왔다. 물론 나 혼자 온 것은 아니고, 두 사람이서 왔다. 아니 아바돈 하나에 인간 하나인가? 내 발걸음에서 세 걸음 정도의 차이로 들어온 아바돈은 전신이 물로 이루어진 작은 소년의 모습에 눈 부분만 금빛으로 빛이나는 중급 아바돈, 에르넨이다. 자신을 분해해 구름으로 하늘에 있다가, 내가 들어가는 타이밍에 맞춰 ㄷ시 본래의 형태로 돌아온 것이다. 뭐, 따지고보자면 에르넨의 본체는 포리아 공국의 공역, 델 라마루스 공역 그 자체나 다름 없지만, 그런 사소한 문제는 넘어가도록 하자.
디바이스에 온 연락을 보고 든 생각은, 어라, 약속한 날이 오늘이었던가? 였다. 그 때의 나는 사람이 거의 없는 도서관 구석자리에 앉아 한창 무언가를 하던 중이었다. 뭘 하고 있었는지는 딱히 중요하지 않은 듯 하니 넘어가자.
'...시간이 된다면...'
그 문구를 보고 잠시 고민, 아니 생각하지 않았다고는 하지 않겠다. 시간이라면 넘쳤으나 없던 핑계라도 만들어내어 안 갈 수도 있었으니. 그러나 길고 짧은 생각 끝에 나는 가는 것을 택했고 연락에 짧은 답신을 보냈다.
[OK]
얼마가 걸린다거나 어디라거나 그런 언질은 한문장 한토막도 없는, 어떻게 보면 무례할지도 모르나 그런 거 신경쓸까보냐. 연락을 보낸 직후 일어나 자리를 정리했다.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펼쳐놓았던 책이나 노트들을 닫고 필기구를 필통에 넣고 다시 그것들을 가방에 몰아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림자에 밀어넣었다.
"그럼, 갈까."
아무것도 들지 않은 빈 손으로 도서관을 나선 것은 답신을 보내고 10여분이 지난 후였다.
그리고 약속된 장소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30여분이 지나고서였다.
시간이 시간이다보니 약속장소인 카페는 한적했다. 늦어서 미안한 기색 없이 비류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에 한 잔 뿐인 아메리카노를 힐끗 보았으나 그 뿐. 그녀에겐 보이지 않을 눈을 들어 마주보면서 말했다.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하자는걸까나?"
안부나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내드는 건 지극히 나답지 않았으나 그런 거 생각하고 싶지 않아.
에르넨은 흑당사탕, 나는 박하사탕에 손을 뻗어 잡았고. 1분여 정도 사탕을 모두 녹여 먹느라 침묵이 감돌았다.
[ 크리드, 아니 정죄자시여. 델 라마로스 공역의 결정권자, 비구름의 에르넨과 인간측 결정권자 라야 델 포리아의 합의에 따라 요청합니다. ] [ 스카기아 추방 및 델 라마루스 공역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스카기아의 굱단 휘하의 개체에 관한 살상 및 면죄를 요처하는 바 입니다. ] [ 스카기아의 죄명은 이러합니다. 스카기아는 이전 결정권자 레이먼 델 포리아의 의도적 살해, 결정권자 대리로 물러난 세르딘 델 포리아의 중상에 일조하여, 델 라마루스와 포리아 사이의 맹약에 심각한 훼손을 가하였나이다. ]
"인간 측 결정권자 라야 델 포리아, 이상 같은 연유로 스카기아의 추방에서 발생 할 수 있는 무력 충돌에 관한 면죄를 요청합니다."
답장을 확인하는 그녀의 손은 여유롭고 느긋했지만 답장을 읽어내려가는 그녀의 눈동자는 무던하고 담백했다. 답장을 읽으면서 그녀가 생각한 것은 벽에 집어던져서 산산조각난 병의 잔해를 어떻게 치워야할까하는 생각이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을 뿐이였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한적하기 그지 없는 카페는 누군가가 오고가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기에 비류는 문이 열리고 발소리가 자신이 앉아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것, 의자를 빼서 앉는 것까지 듣고만 있다가 다시금 감고 있던 한쪽 눈을 슬금 가늘게 치켜떠서 맞은편에 앉은 헤일리를 마주했다.
그 짐승형 아바돈과 마주했을 때에 봤던 헤일리의 모습은 비류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아? 뭐가?
"음료한잔 시키지 않고 본론부터 말하는 게 영 어색하군. 약속된 기한도 아닌데 불러서 미안하다."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을 빼서 아메리카노에 꽂힌 빨대를 쥐고 달그락달그락 얼음을 움직이면서 그녀는 말을 이었다.
"실습, 아니 그걸 실습이라고 부를수 있는지는 모르겠군. 아무튼 그 `짐승`과 마주쳤을 때의 일이다. 평소와 다르더군? 왜, 죽고싶었나? 어째서냐고는 묻지 않겠지만 왜 그런 모습을 보였는지에 대해 이야길 하고, 아니 듣고 싶었다."
말했잖나. 우리, 할 이야기가 많다고. 비류는 아메리카노를 한모금 마시고 다시금 팔짱을 낀 뒤 헤일리를 마주 바라보며 여유롭게 미소를 머금었다.
"살상은 너희들이 하면 되는 것이다." 면죄는 그들이 로머에게 죽는 것으로, 혹은 정죄자에게 받는 것으로 가능한 것이니. 내가 허가하고 말고가 아니ㄷ...라고 말하려다가 맹약을 훼손했다는 것이란 말에 동공이 축소됩니다.
"맹약을 훼손해?" 맹약을 안했다면 모를까 맹약을 하고도 그것을 능히 욕보인 것이냐? 라고 보석과도 같은 녹빛 눈을 번쩍였습니다.
"중급 아바돈 나부랭이가 상급도 최상급도 맹약을 어기지 않는데 맹약을 훼손해?" "내가 나선다면 그것은 그대로 끝나버리겠지만 요청한 것을 보면 내가 나서는 것을 원하는 것 같진 아니한 것 같구나." 에르넨을 흘깃 바라보고는 대력적인 것은 정죄를 한다고 마음먹으면 알 수 있으니. 라고 덧붙입니다.
[ 예, 본디 델 알로나 공역의 부유섬의 결정권자인 스카기아가 비스마르크를 기만하여 결정권을 가져가고, 그 탓에 현재 양측 다 곤란한 상황에 이르렀으며 인간측 대표자와 델 라마루스 대표자 모두 저희가 직접 해결하는 것에 합의 했나이다. ] "저의 조부 레이먼 델 포리아, 그리고 델 라마루스의 사이에 이루어진 맹약을 저희 인간측에서 배신 한것처럼 속이기 위하여 이전 결정권자를 살해 하였습니다. 그리고 현재 델 라마루스 해역의 결정권자인 비스마르크의 힘이 계속해서 약해지고 있고, 더이상의 대치는 불가등하다 판단하여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아...뭐, 기한이라는 건 딱히 의미 없는 거니까. 빨리 얘기할수록 좋은 거 아니었어?"
앉은 뒤 들려온 말에 그렇게 대답한 것 같다. 어색하다던가 기한도 아닌데 불러서 미안하다던가 그런 말을 들어서 적당히 끼워맞추기 식으로 대답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점원을 불러 내 몫의 아메리카노를 한잔 주문했다. 아무래도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내 음료가 나오기 전 동안은 비류가 휘젓는 커피잔을 응시하고 있었다. 달그락거리며 휘저어지는 얼음들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으니 새로운 말이 귀로 흘러들어왔다. 실습 아닌 실습날 왜 그런 모습을 보였느냐고, 죽고 싶었냐고. 나는 잠자코 듣고 있다가 그 말이 머릿속에서 다 흘러가기 전에 붙잡듯 대화를 이었다.
"그 '짐승'과 대치했을 때 말이지. 응. 뭐, 기억하고 있어. 중간에 로라시아가 나와 그 짐승을 좀더 흉폭하게 만든 것도. 거대해진 짐승이 얼음창 공격을 해서 이 옆구리가 뜯겨나간 것도. 다 기억하고 있어. 옆구리가 뜯겨서 정신이 혼미해지던 그 순간까지는."
그 날 전투에서 끝까지 정신을 자리고 있던 비류라면 눈치챘을 것이다. 지금 말한 것이 그 날의 절반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내가 거짓말을 하는게 아니라는 것을.
"얼음창에 옆구리가 뭉텅 뜯기고 피가 쏟아지면서 정신이 아득해지는 그 순간까지 생생해. 그 뒤에 나는 기절했다고 생각했어. 깨어보니 기숙사에, 그것도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길래 누가 데려다줬나보다 그 정도로만 생각했지. 그게 내가 기억하는 사실이야." "하지만 나는 그런 괴물을 앞에 두고 죽으려고 했던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지? 내가 할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전투에 임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니 반문할게. '그런 모습'이라는게 대체 어느 순간을 말하는 거야? 처음부터? 아니면 로라시아가 쓸데없는 개입을 한 후? 그것도 아니면... 내가 기억하지 못 하는 그 뒤?"
네 질문에 대한 대답은 먼저 내 말에 대답해줘야 가능할 것 같네. 그렇게 말하고 때마침 나온 아메리카노 잔을 집어들었다. 차가운 음료를 한모금 쭉 빨아 마시고, 대답을 기다렸다.
스카기아의 증오가 맹약을 깰 정도로 강했다. 아직 나는 이 이외의 가능성을 그다지 염두에 두고있지 않다. 그도 그럴것이, 델 알로나의 결정권자들은 한없이 인간에 적대적이고 잔혹하기 그지 없는 자들이고, 델 라마루스와 포리아의 합동방어선이 아니었다면 아마 진작에 델 라마루스가 아닌 델 알로나로 불렸을 것이다.
"형식이라면 어떤 형식을 말하시는 건가요?"
이 죄과 시스템을 잘 알고있는 에르넨과는 달리, 나는 이 시스템에 대해 알고 있는것이 적으므로 먼저 묻기로 했다. 차후에 스카기아가 아니더라도, 이런 일은 두번 발생하지 말란 법이 없다. 이번엔 간계였으나, 무력으로 밀고 들어온다면 어찌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기록 해 두고, 후세대의 결정권자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
"인간을 싫어하는 건 싫어하는 거지만 시스템이 천천히 바뀌어가는 실상을 생각해 보면.." 스카기아는 자충수를 둔 것일지도 모르지. 라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별 건 아니야. 정죄자가 눈으로 본 것에 대해 판결하면 될 뿐이야" "재판과 거의 같지. 너희들의 경우에는 형벌을 마이너스로 주는 형식으로 면죄하면 되는것이지. 다만 나의 재판정에서 거짓말을 하거나 진실을 숨기고 말을 안한다거나 하면 삼주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 그것을 위해 눈의 목걸이와 눈동자의 반지를 가지고 있다라던가 하는 것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과를 착실히 쌓아가는 건 근본적으로 정죄자가 부족한 것이 문제일까... 라고 중얼거리지만
방어를 포기하고 공격에 주력했다는 사실, 에 조금이라도 찔리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을 작정이라던가 자포자기로 그런 것은 아니었으나 확실히 그건 무모한 짓이었으니까. 그것을 비류가 알지 어떨지 모르나 자세한 설명은 관두기로 했다. 지금 주목해야 할 부분은 거기가 아니었다.
비류가 말하는 '그런 모습'이 보인 때는 내가 기억하지 못 하는, 정확히는 내가 기절했다 생각한 그 이후 같았다. 나는 기억이 없으나 내 몸은 움직였다는 말인가. 그 때의 부상은 그리 쉽게 견딜 것이 아니었다. 살이 한웅큼 뜯기고 그 아래 자리한 것들이 쏟아질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동시에 체력도 바닥이 나 성배를 쓸 생각조차 못 하고 정신을 잃었는데. 그 상태로 움직였다니.
"다른 사람 같았는지 넋이 나간 것 같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때의 기억이 없어.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기절한 후론 캄캄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그러니 왜 그런 모습을 보였냐는 네 물음엔 모른다는 답 외엔 줄 수 없겠는 걸."
어쩔 수 없는 답을 내놓고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정말 진심으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으니까. 아메리카노를 다시 한모금 마신 후 혹시, 라고 물었다.
"그 날의 그런 모습, 네가 말하는 그 때의 모습을 찍은 무언가가 있다면 그걸 보고 내가 판단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나 역시도 궁금하거든. 정말 의식 없는 몸이 움직였는지, 뭘 했는지."
행여나 네가 기억하는게 있다면 얘기해달라며 비류를 보았다. 앞머리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생기 없는 눈으로.
에르넨의 설명을 들으니 대강은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간다. 요컨대 비둘기집을 초과하는 문제*가 발생 할 수도 있다는 거라 이거지. 거기다가, 감시하는 아티팩트가 있으면 굳이 정죄자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될 것이고.
"...일단 인간측에서는 아티팩트 이외에도 공국의 선박을 총동원하여 사각지대가 없이 기록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델 라마루스 공역에서는... 잠시만요. ]
에르넨은 손가락을 한번 튕기더니, 손 위에서 사람 머리만한 둥근 구를 불러왔다. 뭘 하려는거지?
[ 델 알로나의 결정권자에게서 받아온 동의 입니다. 델 알로나에서는 스카기아를 제외한 모든 결정권자에게 스카기아 축출 건에 대한 동의를 얻었으며, 그 증표로 셀렌델의 날개깃털, 나스트라의 천둥석, 얄마르의 심해의 결정을 가져 왔습니다. 델 알로나 결정자들의 공통 의견으로는 스카기아의 군단을 예외없아 바다 한 가운데의 무의 공역으로의 추방이 있었습니다. ]
...나보다 준비가 더 철저한 것에 대한 놀라움. 아니 것보다 그 인간이라면 학을 떼던 고지식한 영감들을 설득 한 것을 보면, 그만큼 스카기아의 죄가 무겁다는 것이겠지.
"안 돌려주는 게 더 무서워질지도요?" 라고 농담에 가까운 말을 하고는 겐의 말에 잠깐 멈칫합니다.
"로머는 사망률이 절대 낮지 않답니다" 저 또한... 초기에는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넘기었지요. 유감스럽게도 가장 큰 위기는... 이리고 덧붙이다가 입을 다뭅니다. 평화기이기에 로머를 동경하는 이들도, 로머의 수입에 혹하는 이들도 많지만 그만큼의 혹독한 삶을 살게 된답니다. 라고 말을 돌립니다.
"로머가 되겠다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건 항상 알아야 한답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것. 이라고 느긋하게 말하고 웃습니다.
"진인가... 나중에 만나면 물어봐야겠네. 아, 회복된 거에 대해선 대강 예상하고 있었어. 그렇게까지 깔끔하게 만들어버리는 건 보통 회복으로는 불가능하니까. 신급 아이템이나 그에 준하는 힘 정도가 아니라면."
나는 성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효율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에 대해서 비류에게 설명을 한 건 아니다만. 아무튼 그 말들에 이해했다는 반응을 보이며 한편으로는 생각했다. 무엇이 내 몸을 조종했을지, 가지고 놀았을지... 비류의 말을 들어보면 죽으려 한 것도 같으나 무조건적으로 그런 건 아닐 것 같단 기분이 아주 약하게 들고 있었다. 그저 눈 앞에 닥친 상황에 반응한 것 뿐 아닐까, 같은 느낌이.
잠깐 생각에 빠진 사이 비류가 사과를 해왔다. 유감이라며 하는 말을 나는 뒤늦게 붙잡아 그 의미를 되짚어보아야 했다. 이해한 후에는 쓴 웃음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무례하지 않고 실례되지 않는 친구 사이, 인가..."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내가 느끼기에도 무겁고 낮으며 음울했다. 마치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는 듯이. 그 생각을 드러내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으하아... 살짝 벌어진 손 틈 사이로 깊은 한숨과도 같은 소릴 흘렸다. 한숨의 여운이 가실 즈음에야 말했다.
"네 말을 들으니 떠올랐는데 말야. 최근 말이지? 이렇게 생각했어. 벽을 낮추고 타인을 받아들이기로 한 내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그래, 나는 언제까지고 혼자였으면 되는 거였다고. 가주님의 말씀이 하등 틀린 것 하나 없다고. 그랬다면 이렇게 힘들어 할 일은 없었을 거 아냐. 맞아. 그 때 부정했지만 사실 힘들었어.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그저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어서 힘들었다고."
가느다란 목소리는 혼잣말과 같은 말을 줄줄 풀어내었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탓에 조금 먹먹한 소리가 되었다만 말을 이해하는데는 문제없었을 것이다.
"있잖아, 어? 있잖아. 비류. 무례하지 않고 실례되지 않는 친구 사이라는게 대체 뭐야? 친구라는게 그런 걸 따져가며 대해야 하는 거야? 그런 거였어? 아니, 사실 나도 잘 몰라. 친구 사이라고 해도 지켜야 할 것이 있고 그렇다고는 생각해. 머리로는 이해하고 생각하는데 마음은 잘 모르겠어. 모르겠는데... 모르겠어. 그냥."
그냥. 나는 더 할 말을 찾지 못 하고 거기서 말을 끊었다. 몹시 많은 말을 한 것 같으나 동시에 무엇도 제대로 표현한 것 같지 못 한 느낌이 공존해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어쩌다.
"그렇다면(공국의 선박을 이용한다면) 내가 할 일은 줄어드는 법이지." "정확하게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내가 보는 것은 진실을 가르쳐주는 것이라 상관없지만 해준다는데 안 받을 이유는 없잖아?" 라고 말하고는 결정권자에게서 받아온 동의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합니다. 그런 것을 받아오다니. 확실하네. 라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만일 나로도 부족하여 또다른 정죄자의 협력을 얻고 싶다면..." 추천하는 방법은 아니지만. 아라에게 가봐. 라고 덧붙입니다.
"다만 아라는 정죄하는 걸 넘어서 스카기아와 그 군단을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죽여버릴걸...?" 이라고 말하는 게 그다지 정성들인 말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하기에 진심인 것 같은 말이었습니다.
이해했다는 헤일리의 반응에 비류는 사과를 하며 목례를 하던 고개를 들고 잠시 목의 문신을 더듬었다가 팔짱을 꼈다. 아니 끼려했다. 잠깐신급 아이템이라는 말에 기숙사에 있는 삭취검에 대해 떠올렸지만 딱 그정도였다.
팔짱을 끼려던 그녀는 헤일리의 한숨에 슬금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본다. 무례하지 않고 실례되지 않는 친구사이. 친구인 척하는 지인이라는 관계라고도 정의될 수 있는 얄팍한 관계. 자신의 말을 반복하듯 중얼거리는 헤일리의 목소리가 음울하고 무겁게 들려왔기에 비류는 입술이 아닌 혓바닥을 물면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린다.
이어지는 헤일리의 말을 들으면서 비류가 테이블을 치는 속도가 천천히 늦춰졌다. 아니 사실은 의도적으로 느즈막히 반응했다. 언제까지고 혼자였으면 ㅡ하는 말이 비류가 다시 창문으로 시선을 돌리게 하기 충분했다.
"혼자였으면 되는 사람은 없다."
여유롭고 느긋한 어조로 헤일리의 혼잣말과 같은 중얼거림에 대답하듯 그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얼굴을 가린 헤일리를 못본 척, 먹먹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도 눈치채지 않은 척. 비류는 무던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천천히 그 행동을 몇번 반복하다가.
" 유감스럽게도, 나도 모르겠군. 친구라는 게 어떤건지, 내가 그대에게 어디까지 다가가는 게 좋은 것인지. 어디까지 알아야하는 것인지. 어디까지 알려주는 것이 좋은건지. 나도 잘 모른다. 우습게도, 그대와 나는 친구라는 관계에 서로 익숙하지 못한다. 무례하지 않고 실례되지 않는 친구사이라는 건 아마도."
서로의 선을 지켜주는 사이겠지. 그게 친구인지는 모르겠다만. 비류는 이제 깜빡이던 눈을 가늘게 뜨고 무던하고 담백한 어조로 중얼거리면서 얼굴을 가린 헤일리의 머리를 손끝으로 가벼이 쓰다듬는다.
사실 그 말들은 비류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나를 이렇게까지 초조하게 한, 자업자득일지도 모르는 기분을 느끼게 한 그에게 쏟아내어야 마땅할 말이었고 감정이었다. 그렇지만 비류의 말로 하여금 간신히 막고 있던 감정의 댐에 구멍이 생겼고, 틈을 찾은 감정들이 앞다투어 쏟아져 나왔다. 나와야 할 자리가 아님에도 흘러나와 볼썽사납게 흩어졌다.
내가 말하는 않는 사이를 비류의 목소리가 채웠다. 혼자였으면 되는 사람은 없다, 라는 말로 시작된 느릿한 말은 조용한 분위기 속에 너무 선명하게 들려와서 귀를 막고 싶을 정도였다. 아, 듣지 않았으면. 듣지 않는다면 편할지도 몰라. 아니 이미 늦었는데 지금 피한들 편해질 리가 없잖아. 멍청아. 나를 닮은 목소리가 피하려는 나를 책망했다. 그래서 그렇게 말했다. 피하지 않고.
"...모르는 걸로 되는거야? 서로 모른다면, 그냥 그걸로 되는거야?"
머리에 스쳐가는 가벼운 손짓을 나는 처음으로 밀어내었다. 얼굴을 감쌌던 손을 내리며, 내 머리칼을 건드리던 비류의 손을 옆으로 밀어내었다.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비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싫어 나는. 그냥 그렇게 서로 모른 채 그만이라고 여겨버리며 넘길 수 밖에 없다면, 싫어."
그건 어쩌면 내 이기심일지도 몰랐다. 익숙하지 않으니까, 모르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두는 것은 싫다는 그 감정은 어쩌면 나만이 가지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녀에게도, 그에게도, 또다른 그녀에게도, 다른 그에게도 없이 오로지 나만 가지고 있어 나만이 주변에 민폐가 되는 걸지도 모른다.
'저런 괴물은 내 자식이 아니야.'
그 날처럼 거부당하고 혼자 떨어질지도 모른다. 다시 혼자가 될 지도 몰라. 그래도 이대로는 싫다. 그럴 거라면 차라리.
그만둘거야. 내가 먼저 놓아 전부 거절할거야. 어차피 혼자가 되어야 한다면, 누구와도 이 이상 가까워질 수 없다면 내 쪽에서 밀어내버리겠어. 전부.
그러한 결심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 날, 내 속이 텅 비었던 그 추운 겨울 날. 나는 한번 모든 것과 연을 끊고 담을 쌓기로 결심해 그것을 불과 얼마전까지 지켜왔었다. 그러니 두 번은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그 때보다 더 많은 것을 포기하고 더 많은 사람을 거부해야 하지만, 그로 인해 그 날보다 더 아프고 괴롭겠지만, 잘 할 수 있을 거다. 분명.
다시 혼자가 되면 더는 괴로워하지 않아도 돼. 나를 닮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내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이 오가는 동안 제법 긴 침묵이 흘렀다. 그 사이 별 말은 안 들렸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하지만 그 침묵 끝에 운을 뗀 비류가 앞머리로 손을 뻗자 나는 그것을 재차 거절했다. 정리를 하다 말아 더 헝클어진 머리를 그대로 둔 채 비류의 말에 그저 답할 뿐이었다. 하지만 말이 이어질수록 그건 대답이 아닌 절규에 가까웠다...
"원하는 대로 해줄 것도 아니면서 왜 물어봐? 나는 기약 없는 희망은 싫어. 언젠가, 나중에, 그런 말들을 해도 사실은 믿지 않아. 이미 너무 많은 그 말들에 배신당했고 끝내는 내쳐져버렸거든. 14년, 자그마치 14년간 기약 없는 희망에 매달려있다가 결국은 떨어져버렸다고. 그래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원하지 않고 혼자가 되기로 했던 거야. 거미줄 같은 희망에 매달리느니 나락 밑바닥에서 혼자 썩어가기로 했어. 그랬는데, 나도 사람이라서, 거기가 아닌 여기라면 괜찮지 않을까라고 욕심이 생겨서..."
아아. 감정에 북받힌 목소리는 결국 물기에 젖어버렸다. 먹먹하게 젖어드는 목소리는 하던 말조차 끝내지 못 하고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헐클어진 앞머리와 제멋대로 흘러내린 머리칼 사이 흰 뺨 위로 투명한 눈물이 가감없이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 사이로 목 메인 소리가 간신히 말했다.
"이제...이제 됐어.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래... 아무것도 무엇도 누구도 원하지도 바라지도 소원하지도 않을테니까, 그러니까..."
결국 그 말도 끝이 흐려졌지만은. 눈가에 맺히다 못 해 넘치는 눈물에 눈을 감고 흐느낌을 삼키며 그렇게 있었다. 이제 더는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 채로.
나는 글쎄. 혼자가 무서웠나. 싫었나. 익숙했나. 그저 단 한번이라도 웃어주는 사람 한명이라도 있었다. 나를 인정하고 받아주고 다정하게 웃어주는 사랑하고 사랑하는 나의 왕, 나의 반쪽. 나의 하나뿐인 달빛. 보답을 바라지않고 충성하고 맹목적인 애정을 쏟고 돌아오는 애정을 원한 적이 없었다. 혀의 마비가 겨우 사라지고 잠시 헛구역질이 올라오려고 하는 속을 달래기 위해 음료를 마셨다. 빌어먹을. 욕설을 삼키면서 두번째로 손이 거절당했으나 비류는 신경쓰지 않았다.
당신에게 닿는 것도 주저하는 자신이였다. 비류는 손을 테이블에 올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하는대로 해주지 않는 게 아니다. 해줄수 없는거야. 적어도 선과 예의를 지키고 무례하지 않는 친구 관계를 선호한건 그대가 나와는 다른 간극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으니. 그래서, 친구가 되고 싶은 거였어. 다른 간극이지만 그래도 닮았으니 말이다. 시작부터 잘못 끼운 단추였지만."
철이 들고 눈물을 흘리는 당신을 보면 어찌해야하는지도 모르고, 괜찮아라고 속삭였을 뿐 유약하고 상냥하고 다정한 당신을 위로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아니 누군가를 위로하는 법을 몰랐다. 사교성은 필요에 의해 배웠다.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아직도 어렵고 내가, 모든 비밀의 거대한 한 축이기에 알릴 수 없었고 선을 그었다.
비류는 목의 문신을 손바닥으로 덮는다.
내 길은 이미 시작부터 썩어버렸지만 어둠 속에서 헤매이는 너와 피에 익숙한 나는 참 비슷한 느낌이였다. 그래서 친구가 되고자했지만 애초에 시작이 잘못됐던 거지. 무던하고 담백하게 이어져가던 말을 멈추고 비류는 평소와 달리 작은 웃음을 흘렸다.
"이미 원하던 것을 조금이나마 손에 쥐지 않았나. 내가 먼저 내민 손이였으나 잡은 것은 그대의 의지였다. 친구도, 혹여 있을 연인도. 그렇다면ㅡ 바래도 된다. "
그대는 이제껏 너무 많은 것을 잃었지 않나. 행복해야지. 부드러운 재질의 손수건을 꺼내어 헤일리가 앉아있는 쪽으로 밀어주며 그녀는 애써 여유로움과 느긋함이 사라지려는 미소를 붙들었다.
당신의 눈물에만 약한줄 알았는데, 나는 그저 우는 사람에게 약한가봐. 언니. 내가 울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눈물이 눈 앞을 가린다, 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많은 눈물이 눈물샘에서 솟아 밖으로 흘러나온다. 양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파르르 떨리는 눈커풀 아래로 보이는 것은 아지랑이처럼 보이는 내 손등. 희게 질리다 못 해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세게 쥔 두 손 위로 큼직한 눈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져 터진다. 그 불쾌하고도 오묘한 감각이 새 눈물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느껴진다. 손등을 적시다 못 해 흘러내려 옷자락을 적시는 눈물을 나는 그저 그대로 둘 뿐이었다.
그 날처럼. 아무도 손 내밀어주지 않던 그 날처럼.
...너는 결국 혼자로 남을 운명인거야...
"...아니야,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 몸짓은 내게 속삭이듯 들려온 말에 대한 저항일지도 몰랐고 비류가 했던 말에 대한 부정일지도 몰랐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그 말에 대한.
솔직히 혼란스러웠다. 비류에게 쏟아낼 것이 아닌 것들을 엉망진창으로 부어놓고 이제는 어떻게 수습할 수도 없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그만두겠다고 그리 말했으나 깊숙한 곳에 자리한 진심은 아니라 외치고 있었다. 그 진심 어린 외침을 묵살하고 돌아서야 내가 편할진데, 그런데 왜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귀에 이명이 울려 머리가 더욱 복잡해진다. 조금만 더 있으면 생각마저도 멈춰버릴 것 같던 찰나, 이명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에 젖어 붉게 달아올랐을 그 얼굴을 들어 비류를 보며 말했다. 억눌려 있던 목소리는 반쯤 갈라졌으나 개의치 않고 말했다.
"비류,는...? 비류는? 비류는 그대로도 좋은거야? 나만 행복해지고 나만 앞서 가버리면 비류는 그걸로 좋은 거냐고..."
나는, 그게, 싫어...
"네 말대로 네가 내민 손을 잡은 건 나야. 내 의지였어. 네가 누구라고 해도 무엇이라고 해도 받아들이겠다는 각오를, 그래, 어쩌면 한심하고 얄팍해 보일지도 모르는 마음을 가지고 잡았다고. 결코 좋지만은 않아도 함께여서 좋았다고 같이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랐는데."
결국 너도 아닌 거잖아... 허탈하게 흘러나오는 말에 담긴 것은 체념이었다. 이렇게 말해본들 결국은 아무것도 남지 않을거라 생각하니 그것은 체념일 수 밖에 없었다. 말을 마치고 북받히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쩐지 속이 헛헛했다. 무언가를 채우고 있던 것에 바닥이 뚫려 전부 빠져나간 것 같은 기분이 명치 부근에 맴돌았다. 천천히 그 부근을 손으로 쓸어내리다가, 다시 한숨을 쉬고 들었던 고개를 떨구었다. 남은 것은, 아니, 무엇이 남았을까. 이 이상.
눈물이 흐르는 것을 바라보던 비류가 몸을 반쯤 일으켜서 상체를 숙이고 헤일리의 손등에 떨어진 눈물을 닦아내고 자신을 보는 것에 그 뺨에 손수건을 가져다댔다. 가볍게 능력을 써서 얼어버리지 않고 차갑게 온도만 내려가도록 세심하게 신경써서 뺨에 손수건을 올리면서 그녀는 침묵했다.
"언젠가 말했었지. 그림자에 빗대어서 그대가 말했던 게 있었다. 내 행복은 단 하나. 그대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좋겠군."
나만 행복해지고 나만 앞서가버리면 그걸로 좋은 거냐는 말에 비류는 여유로움과 느긋함, 그리고 짓는 이도, 보는 이도 이유를 모를 희미한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거면 돼. 그대의 등을 밀어준 건 내가 아니겠지만.
"그거면 된다. 그거면. 부디, 내 유일한 친우인 그대가 더이상 멈춰서지 않은 채 행복해지면 된다."
내 앞은 모조리 썩어 문들어지고 피비린내밖에 나지 않는 길이라서. 스스로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사람이라.
"헤일리. 나는.. 미안하군..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말하지 못해. 말할수 없어."
너도 아닌거라고 체념하는 듯이 말하는 헤일리의 말에 비류는 자신의 목에 새겨진 문신을 손바닥으로 덮었다가 다시 자신이 앉아있던 자리로 몸을 푹 가라앉혔다. 쓰다듬고 매만지다가 이내 손톱으로 문신이 새겨진 목을 감싼 손에 힘을 준다. 인챈트를 건드리지 않고 스스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맹수로 자라왔고 누구도 물어뜯지 못하게 누구도 해치지 못하게 잡혀있지. 별은 아름답지만은 않아. 특히 그 별이 뜻하는 바가 부정적이면.."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잊지마시길. 산산히 부숴버린 자그마한 병. 비릿하게 올라오던 피섞인 기침. 티엘린에 있더라도 위협당하는 목숨. 비류는 비유적이고 은유적인 말을 천천히, 속삭이듯이 중얼거리면서 다시 헤일리를 바라봤다.
"그렇기에 나는, 그 무엇도 말할수 없다."
그녀는 헤일리의 손을 가만히 잡으며 이번에는 거부하지 말아, 라고 속삭이면서 몸을 숙여 자신의 목에 있는 문신-손톱이 파고들어 피가 배어나오는- 이 닿도록 한다.
멀고 먼 옛날. 알루시아라(Alusiara) 티엘린은 어느 날 로라시아 섬에 홀연히 나타나 티엘린 사립 아카데미를 세웠습니다. 능력이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은 그의 곁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은빛 머리카락의 인챈터가 있었다고도 하네요. 그리고 그는 그가 직접 가르친 로머들과 함께 은의 제국화를 도왔습니다. 그 당시의 은은 그저 자그마한 도시국가에 불과하였으나, 그가 합류하게 되면서 은은 칭제건원(稱帝建元)하게 되었습니다. 그 칭제건원에 가장 분노한 것은 아침의 나라 마탠. 그로 인하여 그 두 나라는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머의 중요성을 간과하던 마탠은 이어받은 것이 바닥나가고 있었고, 특히 코델리아 해협전과 르산티망으로 인해 발발한 블라디크 전투는 리에츠가 멸망한 이후 그 기술을 이어받고 발굴해 여러 전쟁을 통해 강력한 국가가 되었던 마탠이 코델리아 등, 바닷가를 잃고 내륙에 고립되었다는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아침은 힘을 잃었고 눈의 나라 은이 낮을 열었다. .....그리고 저물어가는 해는 헥센나흐트(Hexennacht)를 불러일으킬 것이니. 텐게르께서 심히 기뻐하시지 아니하겠는가.
그러나 영원하진 않겠지.
그리고 당시 은의 군주였던 은■■는 그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고 싶었으나, 알루시아라 티엘린은 청록빛 눈을 휘면서 양자에게 시집을 보내라 하였으니...
양자는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로머였답니다.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났다면 좋을일이었겠지만.
전설일 뿐입니다. 애초에 그러한 거대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아바돈의 습격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조차 없었으니. 전설의 범주이지 아니하겠나. 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다만 역사서에서는..... 이리 말하거나 생각해보았자 무슨 소용인가.
그것은 ....파멸을 언질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다 한순간의 꿈이었습니다... 로 끝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아라였던 ....는 꿈에서 깨었습니다. 필요없음에도 취한 것은 기분 나쁜 것을 느꼈답니다.
꿈이란 것은 위험한 것이랍니다. 모두에게...말이지요.. 다시 눈을 감고, 잠깐이나마 도피해 보시길.
칼라미티는 그 눈을 떴습니다. 꿈이나 별세계가 아닌 현실에서요. 그러나 다시 감았답니다. 아직은 일어날 때는 아니지요. "System of SAMSARA has re...." "Blended?"
눈물로 달궈진 뺨을 식히는 냉기는 이미 멎은 눈물이 다시 흘러내릴지도 모르게 상냥했다. 냉기와 함께 닿는 손수건 역시 부드러워서, 부르튼 살갗을 아프지 않게 감싸주어서 무심코 기대버릴 것만 같았다. 너는 이토록 상냥하고 좋은 사람인데, 왜, 어째서.
비류의 말에 나는 어느 날의 대화를 떠올린다. 친구가 되자고 했던 날이었을 것이다. 친우로써 그녀를 받아들이고자 했던 날. 그렇기에 나는 기다리겠다고 했었다. 언젠가 서로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믿지 않는다던 언젠가를 기약하며 기다리겠노라 했다. 믿지는 않지만 기다리겠다고 생각했었다.
"그거면 될 리가 없잖아. 너 역시 사람인데. 인간인데."
감각 없는 손에 닿는 문신을 보았다. 붉은 석산, 피안화의 문신. 손톱 자국 사이로 배어나오는 피가 꽃잎인 것 마냥 보이는 문신을 보다가 팔을 뻗었다. 살짝 떨리는 팔을 뻗어 비류의 목을 감싸 당겼다. 다시 터지려는 눈물을 참고 울음을 삼키며 가까워진 귓가에 속삭였다.
"너는 정말로 그거면 되는 거야? 끝까지 누구에게도 아무 말도 못 한채 스러져가도 좋은거야? 그냥 주어진 앞길에 체념하며 끝을 기다리면 되는거야? 벗어나고 싶지 않은거야? 한낱 타인일 누군가가 한 말에 너를 집어던져 놓은 걸로 만족하는 거야?"
"너는 사람으로 태어나 지금도 사람이야. 별의 의미 같은 건 인간이 붙인 것에 불과해. 그게 무엇인들 너는 너야. 너의 존재를 정의하는 건 누구도 아닌 너 자신이라고. 네 행동에 의의를 붙일 수 있는 것 역시 너고 네 마음 네 생각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 역시 너야. 어떻게, 무엇으로 태어나 주변에서 무어라 한들 너라는 사람은 너만이 관철할 수 있어. 휘둘리지 말고 흔들리지 않는 자신을 만들 수 있는 건- 너 스스로라구. 이 바보야."
흐윽. 차오르는 숨을 짧게 내쉬며 팔에 힘을 넣었다.
"있잖아. 내가 타인을 향한 벽을 낮추게 된 건 네 영향이 커. 네 탓이라는게 아냐. 네 덕분이야. 네가 친구가 되자 먼저 손을 내밀어 준 덕분에 나는 변하자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어. 외면만 하던 주변을 받아들여보기로 했어. 그런 네가 그렇게 스스로를 포기해버리듯 말하면, 나와는 더이상 가까워질 수 없다고 말하면 나는 너무 슬퍼. 나는 너를 도와주고 싶은데 그럴 필요가 없다고 너는 그대로인 그거면 된다고 말하면... 내가 필요없다고 하는 것 같잖아. 그런거야? 사실 나 같은 건 필요 없는거야..?"
말은 끝으로 갈수록 억지스럽고 아이의 칭얼거림 같아졌다. 혹여는 집착 같기도 했다. 그것이 인간관계에 서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최악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이상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몰랐으니.
한바탕 쏟아내고서야 감쌌던 팔을 풀었다. 천천히 물러나며 손끝으로 목의 문신을 쓸어내렸다. 손톱 자국이 쓸려 아프지 않게 조심히, 떨리는 손길로. 그러고서야 제자리로 돌아가 주저앉았다. 다만 이번에는 고개를 숙이지 않은 채 비류를 보았다는 것이 달랐다.
비류는 자신의 목에 있는 문신을 보고 팔을 뻗는 헤일리를 밀쳐내지 않았다. 상냥한 기색이 느껴지도록 테이블을 손으로 짚어 지탱하며 감싸는 것에 깜빡이던 눈을 감았다. 온통 어둠과 흐릿한 붉은빛이 일렁이는 공간에 온전히 남겨진 채 고개를 비스듬히 하고 헤일리의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기댔다.
"내 가치는 그것이고 내 존재는 그것이야. 아홉살때부터 나는 그 위치가 내가 있어야할 곳임을 알았어. 이제는 그 마저도 소용이 없어졌지만."
타인에게 벽을 치던 마음을 바꾸게 된 게 내 덕분이라는 말에 감았던 눈을 뜨고 비류는 입을 다물었다. 헤일리의 말에 한숨과 비슷하게 숨을 내쉬고 여유롭고 느긋함이 묻어나는 무던하고 담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때문에 울 필요는 없어. 친애하는 나의 친우. 내가 그대에게 친구가 되자고 했던 것에 후회했다면 이 자리에 그대를 부를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필요없다고 생각했다면 더더욱. 문신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비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모호하게 농담조로 말을 꺼내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은 뒤에 얼음이 녹은 아메리카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슬금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는 스무디를 좋아하고 차가운 음료를 좋아한다. 단것도 좋아하지. 그리고.. 그대또한 좋아해. 친구로서 정말로 좋아한다. 이런 나라서 싫어졌나?"
테이블에 놓인 각설탕을 집어들어 얼음이 녹아버린 아메리카노가 담긴 컵에 떨어트리고 천천히 빨대를 이용해 저으면서 물었다. 턱을 괴고 무척이나 모호한 농담을 던지듯이.
제자리로 돌아와 앉아 차분해지는 동안 조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비로소 내가 하고픈 말을 했다는 생각. 이전의 횡설수설하던 말들은 모두 헛소리었을지언정 방금의 그 말들은 진정으로 비류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녀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을 돌고 돌아 겨우 전했다는 느낌이었다. 그래, 사실은 여기서 비류에게 이렇게 쏟아내었어는 안 됬는데...
비류는 내 말들에 수긍해주지는 않아도 나를 끝까지 친우라고 불러주었다. 친구가 되자고 했던 것을 후회했다면 이 자리에 부를 일은 없었을 거라고. 그리고 말해주었다. 친구로서 정말로 좋아한다고. 그제야 나는 살짝 입꼬리를 올릴 수 있었다. 눅눅해진 얼굴로 힘 빠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간단히 싫어질 거라면 울지도 않았어. 싫어할 수 없어서, 정말은 그만 둘 수 없어서 그런 걸. 나도 정말 많이 좋아해. 비류. 고마워."
비류의 말에 부서지려 하던 마음이 간신히 형태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완전히 나으려면 아마 시간이 필요할테지. 쳇- 누군가가 아쉽게 혀를 차는 듯한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신경쓰지 않기로 하자. 적어도 지금은.
상황이 일단락된 후, 짧은 시간 동안 격한 감정에 시달려서 그런지 전신의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잠시 동안은 손가락 하나 꼼짝하기 힘들달까. 긴 숨을 내뱉으며 의자에 편히 등을 기댄 나는 얼마간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느릿하게 자세를 바로잡으며 비류를 향해 말했다.
"누군가를 상대로 이렇게 격해진 건 너무 오랜만이라 적응이 안 되네. 응. 거기다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해버렸고. 이것저것 멋대로 쏟아내서 미안해. 비류 네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해야 할 말까지 기세에 쏠려 해버리고 말았어. 맞아.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이런 기분이 되버린 건 그 녀석 탓인데, 너한테 괜한 화풀이를 해버리고 말았어..."
으으 한심하다 나... 밀려오는 자괴감에 버티지 못 하겠다는 듯 테이블에 엎드려 이마를 박았다. 그대로 추욱 늘어져 골골거렸다. 기운 없고 미안하고 자괴감 쩌네 진짜...
뺨이 꾹꾹 눌려도 아프지 않았다. 아플 리가 없지. 그래도 장난스럽게 볼을 부풀려 반응해주며 낮은 웃음을 흘렸다. 숨 막히게 무겁던 공기가 사라진 자리는 정말 편해서.
"그렇게 말한다면 두번째로 만족해야지 뭐~"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하면서도 아쉬운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순서가 두번째라 해도 친구관계가 어떻게 되는 건 아니니까. 적당히 반은 흘리고 반은 기억하며 유도리 있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나를 떠나버린 말들은 이제 그녀가 어떻게 받아들이냐만 남아있었으니.
"역시 말이 잘 통해서 좋다니까."
무슨 얘기를 해도 끝마무리가 찜찜하지 않아서 좋다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자세를 바로하고, 내 손등에 입 맞췄던 비류의 손을 그대로 잡아 당겨서 똑같이 손등에 입술을 대었다. 다 큰 처자들이 하기에 민망하고 부끄러울 법 했으나 내가 언제 주변 시선 봐가면서 행동하던가. 그 제멋대로임이야말로 나였으니.
캡: 생각해보니까. 크리드나 아라가 진겜 참가하면 진짜 끔찍해질 걸... 크리드:?? 캡: 크리드 혹은 아라가 참가하는 순간 조금이라도 거짓이 섞이거나 바른대로 불지않으면 삼주신 앞에서 거짓 증언 한 걸로 처리되니까..(흐릿) 물론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라는 건 가능하고 자기도 거짓이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경우라면 모를까. 아니면 아예 룰에 거짓을 말할 수 있다면 모를까..?
좋아좋아! 다 보내놨다! 와안전 뿌듯해 징쨔! 그보다 리타노프 요원이 모야 리타노프 요원이이.....! 이짜식 영화를 너무 감명깊게 본거 아냐아아???? 그 요원 창 안쓴다구 난 창 쓰구우! 바보라야 바아보라야. 흥. 흐으응. 그보다 언제 오려나 모르겠다. 설마 요요요 공국 간 거 아니게찌 일 때문에???? 그으럼 한참 걸릴텐데. 아 기다리는거 싫다 너무너무 싫다아아. 너무 싫어 정마알.
"어엉졔 기다리냐구우 졍마알! 아 쨔잉나아아!!! "
이층 침대 일층에 계속 앉아있는거도 질렸다! 슬리퍼 질질 끌고 일어나선 가볍게 벽 잡고 다리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요거라도 하다 보면 오겠지 라야. 완전 늦게 오면 메롱해줄거야 징쨔아아!
비류와의 대화 이후 뭔가 가벼워진, 어떤 의미론 헐거워진 기분이 되었다. 실상 해결이랄까 해명된 것은 없었으나 그냥 기분만 아무래도 좋다고 느껴져버리고 있었다. 그녀 덕분에 이리 된 것은 나쁜 전개는 아니었으나 과연 좋은 일일지는 모르겠다. 이러한 앙금이 알게 모르게 쌓여 훗날 어떤 파문을 일으킬지 모르니...
'라고 할까, 그래도 그냥 두고 넘어가기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보고 있던 책을 덮었다. 간만에 책을 빌려와 보고 있던 참에 그런 생각이 들어 독서를 멈췄다만 딱히 짜증은 나지 않았다. 가만히 책을 덮은 뒤엔 디바이스를 들어 메세지창을 띄웠다. 상대는 라연. 잠시 깜빡이는 커서를 보다가 단조로운 한문장을 보내었다.
[몸은 좀 어때?]
지난 번 실습 이후 처음으로 보내는 메세지였다. 그 전에 먼저 사과의 말이 오긴 했으나 그 때엔 내가 답을 하지 않았었다. 늦게 보기도 했고. 그러고 또 며칠이 지난 후에야 연락을 해보는 것이었다.
만약 이 메세지에 답이 오지 않는다면, 저번과 같은 일이 또 생겨버린다면...
"...에잇."
나는 고개를 저어 생각을 날리고 디바이스를 내려놓았다. 잠시 후 화면이 꺼지고 잠잠해진 디바이스를 보며 잠자코 기다릴 뿐이었다.
-예쁘네. 울고 있는 것도. 괴로워하는 것도. 숨이 벅찬 것도.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 라고 중얼거리면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시커멓게 드리운 그늘이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아서 숨을 몰아쉬면서 그렇게 있어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다가 울리는 디바이스에 그것을 확인하려고 디바이스를 켜기 전, 그 검은 화면에 그의 얼굴이 비치는군요. 시커멓게 죽은 눈에 창백한 얼굴.
헤일리의 메세지를 확인하고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답장을 보내려 합니다.
"몸은... 지금은 괜찮아.." 중얼거리면서 메세지를 쓰고 보내려고 합니다. 보내려는 순간 머뭇거리더니. 잠깐 시간 되면 만날래..? 라는 메세지를 보내려다가 지우려고 했지만 잘못 터치해서 보내버립니다.
그냥 가만히 기다린지 몇 분이나 지났을까. 책 위에 얹어놓은 디바이스가 진동을 울리며 화면을 반짝였다. 짧은 진동 두번. 메세지의 알람이었다. 기다린 것과는 다르게 천천히 디바이스를 집어 화면을 열었다. 이번엔 제대로 온 답문을 보고 어깨가 살짝 내려앉았다. 나도 모르게 긴장했는지, 어깨에 힘이 들어갔었나보다. 바보 같이. 그럴 일이 뭐가 있다고.
아무튼 답장을 보내기 위해 손가락을 움직여 화면의 키보드를 두드렸다.
[괜찮다니 다행이네.] [시간은 괜찮아. 어디서 볼까? 장소는 너 편한대로 해.]
잠깐 시간 되면 만나자는 말이 붙어있어 그렇게 답문을 보내었다. 아팠다고 하니 그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만날 곳을 정하는게 나으리라. 나는 그런 일을 겪고도 몹시 멀쩡해서, 오히려 미안해 해야 할지도 몰랐으니까.
"...아."
외출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옷을 벗다 말고 다시 디바이스를 집어들었다. 괜히 나오게 하는 것보단 이게 낫지 않을까 싶어 메세지 하나를 더 보내었다.
[나오기 힘들면 네 방으로 찾아가고.]
혼자 쓰고 있댔으니까 눈치 볼 사람도 없을 것이다. 차라리 그 쪽이 나을 거라 생각해 메세지를 보내놓고, 마저 옷을 갈아입었다. 다시 답문이 올 때까지.
[별로 좋지 못한 일이었지만.. 일단 지금은 괜찬ㅍ아] 분명 급하게 쓴 티가 나는 메세지였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살짝 미소를 머금기는 했지만.. 그건 한순간이지요. 그리고 온 메세지를 읽고는 찾아와도 괜찮냐는 믈음에 살짝 동공이 흔들리기는 했지만.
[찾아와도 가능해..] 호수는 알려나.. 하고 생각하고는 호수도 적어서 보내려 합니다. 괜찮다면..이라고 급하게 쳐서 보내려 합니다.
"찾아온다면...어쩌지." 방은 의외로 살풍경한 광경이란 걸 알고 있습니다. 정리고 뭐고 정리할 게 있어야 정리를 하지. 라고 바라봅니다. 옷을 갈아입고 나서 기다리려고 합니다. 아 맞다 가방. 버리진 못한 것에 눈길이 닿았지만 뭐. 열진 않을 거지 않은가.. 신경쓰지 않으려 합니다.
상의에 머리를 넣고 팔을 꿰던 도중 디바이스의 알람이 들렸다. 품이 넉넉한 가오리티를 대강 입은 채 디바이스를 먼저 확인했다. 찾아와도 된다는 말과 호수를 적은 메세지에 알겠다는 답을 적어 전송했다.
[옷만 갈아입고 갈게. 오래 안 걸려.]
전송을 확인한 후 짧은 반바지를 마저 입었다. 그런 다음 거울을 보고 머리를 정리하고, 디바이스만 챙겨 들고 방을 나왔다. 굽 없는 샌들을 신은 흰 다리가 휘적휘적 걸어 앞으로 나아갔다.
해는 이미 저문 시간이라 밖에 많은 사람이 나와 있지는 않았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머리 넘기고 나올 걸 그랬나. 걸어가며 그런 생각도 잠깐 했지만 단지 생각뿐이었다. 아직은 그렇게 공공연히 얼굴을 드러내고 다닐 생각은 없었다. 이대로라면 아마 졸업 때까지 그렇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만, 아무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가다보니 어느새 라연이 있는 기숙사동 앞이었다. 주변 남학생들이 좀 의아한 눈으로 봤다만 개의치 않고 들어가 라연이 알려준 호수로 향했다. 해당하는 숫자가 붙은 방 문 앞에서 두어번 문을 두드려 노크를 하고, 안에서 열어줄 때까지 잠시 기다렸던 거 같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그가 보였을 때 나는,
[기다릴게.] 약간은 딱딱하다고도 보일 수 있는 문자에 이모티콘을 붙여서 보냅니다. 잠옷으로 입고 있던 넉넉한 품의 잠옷을 벗고 운동할 때 입을 수 있는 트레이닝복을 입으려 합니다. 그러고 보니 남학생 동에 여학생이 오는 건.. 괜찮습니다. 과제 같은 걸 안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일어나서는 문을 열어주려고 합니다.
"아..안녕." 조..조금 오랜만인 것 같네...라고 어색하게 밝은 표정을 지으려 하지만 안색이 개판이라 안 되는 걸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어쨌거나 반갑게 맞이하며 조금 기다리는 동안 그나마 먹을 만한 걸로 티타임 세트를 대강이나마 훑어본 걸 늘어놓은 테이블을 바라봅니다.
"차라도 마실래..?" 목에 딱 달라붙은 목걸이의 끄트머리에 말라붙은 핏자국만 없었다면 완벽하지 않았으려나요?
남의 방에, 그것도 라연의 방에 직접 온 건 처음이었다. 처음이지만 딱히 어떤 감흥이 들지는 않았다. 내가 지내는 곳과 별반 다를 것 없는 구조에 조금 살풍경하다는 감상이 든 정도일까. 그런 방 안을 힐끔 보곤 라연을 보았다. 희게 질린 얼굴에 시커멓게 죽은 눈이 결코 괜찮아 보이지는 않았다. 오겠다고 하길 잘 했네. 그렇게 생각하며 테이블에 놓인 자리로 다가갔다.
"아니. 괜찮아. 지금 널 보면 뭘 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을 거 같고."
환자를 부려먹는 취미는 없다며 자리에 앉으려 하던 찰나였다. 그의 목에 감긴 그것에서 붉은 자국을 보고 무의식 중에 손을 뻗어 잡았다. 마른 피 특유의 적갈색 얼룩을 잡아 한동안 보다가 손을 홱 놓았다. 그러곤 변함 없는 말투로 말했다.
"소스라도 튀었나 봐. 말라붙었네."
눈에 뻔히 보이는 핏자국에도 이렇게까지 담담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내 스스로도 내심 놀라고 있었다. 그 전이었다면, 이렇지 않았을 텐데.
"나를 보면 뭘 해도 마음이 안 편하다니." 나쁘지 않을지도? 라고 농담처럼 말하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헤일리가 목걸이를 잡고 살짝 당겨지는 느낌이 드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안색이 시퍼렇게 질리는 걸 자기가 거울을 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습니다. 목이 졸리는 기분. 기억 너머에서 다시 올라와서 목을 쥐어잡는 기분.
".....아..아냐. 떠났잖아..." 아냐. 잡지 마세요. 잡아당기지 마세요.. 라고 말하려 해도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바람 새는 소리 뿐일 겁니다.
"...제발." 당겨지는것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한참은 부들부들 떨었겠지요. 헤일리가 하는 말 한마디조차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방 안이라고 해서 안심했니? 유감이구나.
네에,루이주예요..ㅎ 으음..이유는 너무 길어지지 않게 설명드리자면..그간 제가 현실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심적으로 너무너무 힘들었는데,제가 그런걸 남들에게 잘 털어놓는 편이 아니다 보니..그냥 속으로만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었어요.그 왜 전에 제 친구가 힘들다고 여러분께 해결방안을 물어본게..사실 제 친구가 힘든게 아닌,제 자신이 너무 힘들고 지쳐서 그랬던 것이었구요.아무튼 결국 그것이 독이 되어서 해서는 안될 극단적인.선택을..했었답니다.응.근데 그 전에 제가 일방적으로 이별 통보를 했던 애인님이 제가 연락도 안 되고 하니까 너무 걱정되고 그랬는지..119에다가 연락도 하고.그리고 직접 제 집으로 왔다더라구요.아마 그렇게 해서 절 발견한것일거고..구급차도 와서 병원에서 응급조치 취하고 나서 엊그제 간신히 의식 되찾고..어제는 못 들렀었고.오늘에서야 여기 갱신했답니다. 써놓고나니 엄청 길어진 기분이지만..아무튼,그런 일이 있었어요.
괜찮아요..!지금 제게는 그런 한마디 한마디가 큰 힘이 되어주니까요.:)응.저도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고마워요.이아나주께도 고맙그.다른 분들께도 모두 고맙구. 스스로 내몬 이유는..음.아무래도 앞서 말했듯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제가 제 스스로를 아끼지 않게 되어서...일까요.응응 꼭 그럴게요.상담 역시 주저해선 안될것 같구요.아무튼,비류주도 고마워요..!8ㅁ8
넘어갈 것 같지 않더라도 그렇게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웃지 못하도록 잡힌 얼굴이 마치 울 것만 같은 얼굴이 된 것 같았습니다.
"알아... 하지만.. 하지..만.." ".....앞으로는 투명화 하고 다닐 테니까.." 라연은 고개를 숙이지도 못하고 복잡한 갈등에 잠긴 눈이 헤일리의 눈과 마주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벗겨준다는 말에 입술을 깨뭅니다.
"....이건 로머 구속용 목줄이야.. 9천이 넘는 수치를 지닌 이조차도 1천 이하의 수치로 능력을 못 쓰도록 강제로 만드는 거야." "생체 인식으로만 벗겨지는 거고.." 능력으로도, 그런 단검으로도 안 벗겨져...벗어보려 한 적이 있지만.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어.. 라고 눈을 내리깔며 말하려 합니다.
생체 인식으로만 벗겨진다며 능력으로도 단검으로도 안 된다는 말에 소리나게 혀를 찼다. 쳇- 가늘게 좁혀지는 눈에 담긴 것은 짜증, 혹은 이 성가신 상황에 대한 분노. 어쩌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자책감. 라연이만큼이나 복잡한 눈을 하고서 단검을 빼내었다. 빼내는 사이 날이 라연의 목을 스쳤지만 상처는 나지 않았다. 그야 스친 부분은, 날이 세워지지 않은 쪽이었으니까.
"...짜증나."
단검을 도로 집어넣고 턱을 그러쥐었던 손도 놓고 뒤로 물러났다. 털석. 소리가 날 정도로 대차게 바닥에 주저앉아서 짜증스럽게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머리를 고정시킬 건 없었지만 그림자가 따라 올라와 머리띠의 역할을 대신했다. 훤히 드러난 얼굴에 화와 분노를 섞어 부은 듯한 표정을 하곤 라연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아무 것도 몰라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게 제일 싫어. 나는. 눈 앞에 힘들어하는 너를 두고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게 얼마나 엿 같은데!"
젠장! 전부 쏟아낸 줄 알았던 감정의 댐 밑바닥에 분노가 남아있었나보다. 남은 걸 전부 비워낼 기세로 화를 내고 짜증을 내며 입술을 짓씹었다. 잇새로 비릿한 맛이 느껴질 정도로.
짜증과 분노와 자책감. 나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분명 그 자리엔 경멸과 분노와.. 혐오가 쌓이지 아니할까.. 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에 날이 스치었지만 세워지지 않은 날이었기에 아무 느낌도 없었습니다. 아니. 사실은 차라리 베어져.. 아닙니다.
"너무 고통스럽고 끔찍한데도 절대로 뺄 순 없었어." "나는 이걸 차고 인형이 된 지 십년이 넘었어.. 한 번도 뺄 수 없던 채로." 아예 한 번 죽는다면 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라고 말하는 목소리에는 체념이 짙게 묻어 있었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그의 눈은.. 어쩌면 인형이 자기가 인형인 것을자각한 듯한 비참한 눈이었습니다.
"차라리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으면 했어..." "그래서 항상 밝게만 있었는데. 겉만 보길 원해서.." 잘못된 거야? 비참한 걸 들키고 싶지 않았어. 그냥 그대로... 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어.. 라고 몇 마디 더듬대면서 중얼거리며, 고개를 떨구려 합니다. 눈물 몇 방울이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경멸하더라도, 나를 욕해도 괜찮아.. 알고 있어..." 경멸하더라도 말 해야 할까? 그것은 이미 속에서 시커멓게 고인 채 썩어가고 있을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파헤쳐져 새로운..이 생겼는걸요. 악몽과 고통과.. 혼잣말을 중얼중얼거립니다.
고개를 돌려 애꿎은 벽만 보는 내 귀로 그의 체념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걸 차고 10년간 인형으로 살아왔다고, 단 한번도 뺄 수 없었다고.
"......"
이어지는 말들에 나는 단 한번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몰랐으면 했다며 그래서 항상 밝게 있었다고, 겉만 보길 원했다고. 더듬거리며 이어지는 말은 결국 자신을 탓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욕해도 괜찮다는 말에 욕 대신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내뱉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조금 지친 듯한 얼굴이 그를 향했다.
"...너, 평소의 그게 밝게 있었던 거라고 말하는 거면 진짜 화 낼 거야. 항상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면서 말은 잘 하네, 정말."
다른 사람 눈은 속여도 내 눈은 못 속인다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곤 몸을 끌어 라연에게 가까이 갔다. 고개를 떨군 그의 팔을 잡아 내 쪽으로 당기며 속삭였다.
"네가 원해서 한 것은 하나도 없을텐데 내가 뭘 경멸한다는 거야? 널 욕할 부분이 어딨다고. 완전 바보네 이거. 혼자 삽질하지 말고 이리 와."
"어쩌면... 헤일리 앞에서는 조금 풀어져 있었던 걸지도 몰라...." 이유는 모르겠지만.. 조금은..진심이었을 거라고 생각해. 라고 덧븥이면서 조금은 진정된 건지. 숨을 조금 편하게 쉽니다.
정말 말해도 되는 걸까? 불안감은 가시지 않는다. 그렇지만 말하거나 알린 이들은 모두... 친구였던 이도... 전부 다.. 품으로 당겨져 안긴 것에 반쯤은 울먹거리며 말하는 것 같습니다.
"원하지 않았다고 해도..." "...말한다면 아마..." 망설이다가 몇 마디 더듬더듬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한 명백한 학대의 4유형중 마지막에 해당하는 행동이라던가. 수치가 올라감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라던가. 몇 번이고 말문이 막히면서도 눈을 내리깔고 라연은 어떤 반응이라 하여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며 다만 긍정적인 반응은 기대하지 않으면서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내 앞에서는 조금 풀어졌던 걸지도 모른다고 천천히 하는 말에 어이 없다는 듯 대꾸하면서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굽은 등을 천천히 쓸어내려주며 더듬거리는 말을 들어주었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그의 뒤에 감춰졌던 사실을.
"......"
라연의 말이 끝나고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우리 주변에 내려앉았다. 스윽 스윽. 내 손이 그를 쓰다듬는 소리만 아주 미약하게 울릴 뿐이었다. 말을 마친 뒤 고개를 푹 숙인 라연을 그저 안은 채로 나는 그 한동안 벽만 보았다. 오갈 곳 없는 화를 두 눈에 담은 채 그저 가만히 그를 안고 끓어오르려는 속을 삭혔다.
우리가 원해서 태어난 생도 아닌데, 어째서 이토록 잔인한 삶을 살아야만 하는가. 신이라 불리는 작자들이 원망스럽고 그와 나를 이런 몸으로 세상에 태어나게 한 그들이 원망스럽다. 세상에 내어놓고 이렇게 만든 그들이 원망스러워. 원하지 않았는데. 원해서 이렇게 태어난게 아닌데.
조용히 볼 안쪽의 살을 깨물었다. 어금니 사이로 사정없이 짓눌려 뜯기는 그 아픔에 지금 이 기분을 똑똑히 새겼다. 그 후에야 긴 숨을 내뱉곤 라연을 향해 말했다.
"미안해. 말하고 싶지 않았을 텐데. 그래도 얘기해줘서...고마워."
힘들었지... 잔잔한 목소리로 말하며 손만을 움직여 푹 숙여버린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손 안 가득히 담기도록, 소중하게. 달래듯이.
"그럴지도..." 살짝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무어라 한 마디 할 때마다 난도질로 온 몸이 찣어냐는 듯한 고통이 오는 듯한 착각같은 감각이 느껴집니다. 그래요. 그것은 죄악감과 죄책감과 자기혐오.
"....윽....으극... 흑....나...나아는...강림한 존재를 그녀를.. 미워할 수조차도 없단 말이야..." 잔잔한 목소리와, 죄책감과 자책감이 섞이고, 어루만지는 손에 잔뜩 억누른 울음이 터졌습니다. 사고로 죽었을 리 없다는 것도 알고, 그게 누군지도 아는데. 원망하거나 미워할 수 없는.
"미안할.. 건 없..어..." 한참을 눈물을 줄줄 흘리다가 겨우 진정할 수 있었으려나요? 긴 숨을 내뱉는 헤일리에게 피.. 냄새 나.. 라고 그 눈을 데굴.. 굴립니다.
//으으... 캡은.. 더 이상은 무리...예요.. 자야 해요... 다들.. 잘자여...(터럭)
델 라마루스 : 에르넨과 비스마르크가 다스리는 해역과 공역을 통틀어 이르는 지명. 포리아 근해에서 라마루스 해령까지의 넓은 지역을 일컫는다. 현재 포리아 공국과 에르넨, 비스마르크의 3자 맹약덕에 비교적 다른 국가에 비해서는 평화로운 지역.
델 알로나 : 라마루스 해령 너머의 까마득한 지역 전체를 일컫는 지명. 델 알로나는 아직 포리아 공국 입장에서는 그곳의 결정권자들 때문에 개척 불가 지역이다.
무의 공역/해역 : 알로나 단층 너머의 아무것도 살지 않는, 심지어 아바돈조차 살기 싫어하는 무의 영역. 이곳에는 동물도 식물도 그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 그야말로 무의 영역이며, 이곳에 도달하는 소리는 모두 사라지며,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돌아오는 것은 침묵 뿐이라 전해진다.
로마노프 대신 오코예로 불러주면 별 불만 없겠지. 둘다 창잡이이기도 하고, 에르넨의 성궁에서 나와 맹약의 갑주를 전개시켜 공국까지 날아간다. 금속 파츠의 비율이 매우 높던 기존의 갑주에서 흉갑만 금속으로 남기고, 기존에 입던 옷 위에 망토 형태로 추가되는 형태로 조정 하고나니 한결 비행이 편해진 느낌이다. 8분여쯤 날아 공국의 항구에 도착해 중앙 게이트까지 전력질주, 게이트를 세 번 통과해 팀 하우스까지 도착하는데까지 5분, 총 13분이 걸렸다. 아슬아슬하게 세이프네.
울면서도 복잡한 생각이 희미하게 스치었지. 그렇지. 어머니는 강림한 존재였잖아? 원망을 할 수 없지.. 책이 완전히 불타서 재가 되고 그 재조차도 바람에 흩날려 사라지지 않는 이상. 온전히 만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원망과 미움을 그녀에게 어떻게 전가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생각보다 그는 냉정하게 원망을 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뿐이란 것을 인정하고 있었으니까. 그것과는 별개로 눈물은 진짜였지만.
"별 것 아니라도.. 피 날 정도로 씹으면..." "...알았어" 세수 한 번 하고 오라는 말에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비틀거리면서 일어납니다. 순간 머리가 띵한 것 같았지만 괜찮아진 것을 알고, 세수를 했습니다. 거울을 보니 확실히 이따위 꼴이라니. 라는 헛웃음이 새어나올 것만 같습니다. 거울을 보니 자기 꼬락서니가 어떤지 보여서 조금 머리카락도 빗고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돌아오기 전까지 방을 둘러보면 텅 빈 장식장 안에 무언가 반짝이는 파편이 든 유리병과 잘 개켜진 털달린 두터운 망토, 그리고 잠금 장치가 되어 있는 일기장 같은 것을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외라면 한 곳에 모아진 구슬들 정도? 오. 피가 묻었는데 잊어버린 터라 피가 말라붙어 있을 겁니다. 뭔가 자세히 살펴보실 건가요? 아니면 그냥 기다리실 건가요?
제 상태는 모르고 나를 걱정하려는 듯한 말에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어서 씻기나 하라며 그를 보내놓고, 잠시간은 혼자 있었다.
"그럼 이제..."
얌전히 앉아서 기다릴까. 아니면 둘러볼까. 선택은 말할 것도 없이 후자였다. 언듯 보기에 살풍경한 방이지만 이것저것 보이고 있었다. 이왕 온 김에 한번 둘러보는 것도 나쁘잖은가. 그러다 치부를 또 건드리게 된다면...미안하겠지만.
혼자 쓰기엔 제법 넒은 방 안을 둘러보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특별히 볼 것은 피가 묻은 구슬과 무언가 들어있는 장식장 정도였으니. 피가 말라붙은 구슬들은 일전의 보물찾기에서 얻은 그것들 같았다. 아까 얘기 중에 수치가 올라서...라고 했던 건 이것 때문이겠지. 일반 학생에겐 좋을지도 모르나 지금의 라연에겐 독 같은 물건이었으이라. 구슬들을 톡톡 건드려 보다가 돌아서 장식장으로 다가갔다.
"이건..."
어떤 파편이 든 유리병과 털 달린 망토, 그리고 잠긴 일기장. 일상적으로 쓰는 물건 같지는 않아 보였다. 더군다나 그런 경험을 두 번이나 한 입장으로서는- 이거 보통 물건이 아닐지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오만하다 할지 모르나 신을, 상위급을 만난 당사자로써 말이다. 잠시 안을 보고 있다가 일기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저 잠금을 풀 열쇠는 가지고 있지 않으나 한번 외양만이라도 볼까 싶어서.
라연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좀더 걸린다면 아마 그대로 집어들고 이리저리 살펴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구급상자에서 약이라도 발랐으면 좋을 것 같..아.." 라고 속삭이고는 정말로 괜찮다면 좋을 거란 일말의 소망을 안고 화장실로 들어갑니다.
구슬들이 헤일리가 건드리자 살짝 반짝반짝거리는데. 어째 우리가 왜 독같은 물건이냐! x랄맞은 로머 구속용 목걸이 채운 놈 잘못이지! 라고 하는 것 같지만 헤일리가 들을 수는 없겠죠...
그것은 장식장에 장식되어도 좋을 만큼 고급스러운 표지의 일기장이었습니다. 표지는 무두질이 거의 필요없을 만큼 질좋은 가죽을-다만 가죽이 어떤 가죽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썼고, 그 위에 천을 덧씌울 수 있는 듯 천 표지도 옆에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 상당히 두꺼운 두께였고, 책등에는 금박으로 장식된 알 수 없는 문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다만 잠금장치는 열려 있었기에-확실히 잠궈 놓으면 생체 인식으로 열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법한...데도 고전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안을 보는 건 별 문제는 없었지만 아무 내용은 없이 텅 비어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넘겨도 넘겨도 끝은 나지 않았지요. 무언가 스륵스륵 거리는 느낌이었지만 주인은 아니었기 때문에 완전히는 알 수 없었겠지요.
-....그건.. 대체품이야.... 언젠가... -언을 적으면...
"...많이 기다렸어..?" 그런 여러가지를 하고도 시간이 남을 뒤에야 라연은 좀..아니 상당히 말끔해진 모습으로 화장실에서 나오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