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극판 규칙 ☞ 상황극판은 익명제입니다. 본인이나 타인의 익명성을 훼손하는 행위는 삼가주세요. 하지만, 자신의 위치(스레주/레스주) 등을 밝혀야 할 상황(잡담스레 등에서 자신을 향한 저격/비난성 레스에 대응할 시 등)에서는 망설이지 말고 이야기해도 좋습니다. ☞ 서로를 존중하고, 자신이 먼저 배려하는 마음가짐을 가집시다. 모니터 너머의 이용자도 당신처럼 '즐겁고 싶기에' 상황극판을 찾았다는 것을 기억해주세요. 모두 두루두루 친하게, 잘 지냅시다. 말도 예쁘게해요, 우리 잘생쁜 참치들☆ :> ☞ 상황극판은 성적인/고어스러운 장면에 대해 지나치게 노골적인 묘사를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약물과 범죄를 미화하는 설정 또한 삼가해주세요. 각 스레마다 이를 위반하지 않는 수위 관련 규범을 정하고 명시할 것을 권장합니다. ☞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행동이 결코 아닙니다. 바람직한 상판을 가꾸기 위해서라도 서로에게 관심을 가져주세요. 다만 잡담스레에서의 저격이나, 다른 스레에서의 비난성 및 저격성 레스는 삼갑시다. 비난/비꼬기와 비판/지적은 다릅니다. ☞ 상황극판의 각 스레는 독립되어 있습니다. 특정 스레에서의 인연과 이야기는 해당 스레 내에서만 즐겨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잡담스레에서 타 스레를 언급하는 일도 삼가도록 합시다. 또한 각 스레마다 규칙 및 특징이 다르기 마련입니다. 해당 스레의 이용자들에게 문의해주시고, 그 규범에 따라 행동해주세요. ☞타 스레와의 교류 및 타 스레 인원의 난입 허용 여부(이건 허용한다면 0레스에 어디까지 괜찮은지 명시해둡시다)와, 스레에 작성된 어그로성 및 저격성 레스의 삭제 여부, 분쟁 조절 스레의 이용 여부에 대한 결정권은 각 스레의 스레주에게 있습니다.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분쟁 조절 스레"를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 처음 오신분은 어려워말고 잡담 주제글에 도움을 청해주세요! 각양각색의 스레들을 가볍게 둘러보는 것도 적응에 효과적입니다.
가끔 분위기가 너무 좋으면 그 주변의 환경이 전부 술에 취하게 한 듯이 온화하고 그럴듯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부드럽고 시원한 가을바람, 맑은 공기, 어딘가에서 아련히 맡아지는 바다의 내음과 방금 먹은 오뎅 국물 냄새, 창백한 달빛에 물들은 두 사람의 머리카락과 옷 등등이 그런것을 묘한 향수로 만들어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
"그럼 자주 마주치도록 돌아다녀야겟는걸요?"
당신의 장난에 피실피실 웃으며 응수하는 그녀는 곧 자기배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기대되는걸요?"
무엇일지는 모르는 채로, 마냥 순진하게 웃으며 당신과 같이 학교로 걸어가며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상당히 자유로워 보이고 학생들에게 수 많은 편의를 제공해주는 아카데미지만 여기서도 최소한의 룰이 있다. 가령 흡연을 하지말자! 음주는 안돼에! 시설물을 고장내지마! 따위의 룰은 기본이며 그 이외에도 여러가지 룰이 자리잡고 있었다. 디트리히 에게 있어서 룰은 20초 정도 보고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지며 노는 것 이였다. 그는 규칙에 얽메이는 걸 싫어했으니까. 어찌보면 반항아 처럼 느껴지는 사상이지만 그가 안 좋은 생각을 가지고 흡연이나 음주를 하는 건 아니다. 단지 호기심이 너무 많거나 자기 능력을 연구하는 걸 즐기는게 전부다. 그러나 연구라는 것이 너무나도 과하고 위험했기에 디트리히는 능력을 연구하다가 이번에도 시설물을 파기해버렸다. 그 결과 목에 팻말을 걸고 쓰레기를 줍고 있었다.
' 시설물을 파손하지 맙시다! 이사장님이 슬퍼해요? 8ㅅ8 '
귀여운 그림이 그려진 팻말을 목에 걸고 툴툴 거리며 집게를 이용해 쓰레기를 줍는 모습은 어찌보면 애석해 보였지만 그런 모습은 얼마가지 않았다.
" 도x마무 거래를 하러왔드아.. "
힘 빠지는 소리를 중얼 거리며 기묘하게 손을 빙글 돌리며 찌그러진 캔을 공중에 띄워 쓰레기통에 집어넣는 모습은 과연 이 학생이 진지하게 벌을 받을 의향이 있을까 의심하게 만들었다.
잠시 잔소리가 심한 제 오빠 이안을 떠올린 이아나는 머리가 잠깐 어지러웠다. 일이 많았다지만 이안이 이아나에게 하는 걱정은 가끔 도가 넘는 일이 있었다. 특히, 이렇게 밤 늦게 둘이서 걷는 모습은 밤에 나왔다는 사실, 그리고 모르는 외간남자랑 돌아다닌다는 것으로 이안은 기함을 칠 일이였다.
"앗. 미안해요. 오빠가 있는데 잔소리가 좀 심해서..."
거기서 적당히 말을 생략한다. 당신이 다음을 위하여 어떤 것을 먹일지 고민하며 말하자 기운차게 네! 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가 학교에 다 오자 새삼스럽게 기분이 미묘했다.
"그러게요. 애초에 가까운 곳이였으니까 꽤 일찍 왔네요?"
밤에 쌓인 건물들을 보며 이제 정말로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질 시간임을 알자 그를 향하여 고개를 꾸벅인다.
"어쨋든 같이 어울려줘서 고마웠어요, 겐씨.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당신의 말대로 지금이라도 자려는듯 당신에게 한 파례 손을 흔들고는 그대로 뒤돌아서 학교로 가는 이아나였다.
2학년에 능력을 실험한답시고 시설물을 파괴하는 후배가 있다는것은 익히 알고 있었던 내용이지만, 그게 나에게 있어 피해로 찾아올거라고는 생각도 하지못했다. 자력을 다루는 능력이라고 했던가. 그걸 응용해서 내가 거주하고있던 기숙사실의 문이 기괴하게 찌그러져서 나오지도 못하고 주변도움을 받았을때는 정말이지 낯부끄러워서 몇일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 피해자라서 망정이지 남한테 신세를 너무졌다. 창문밖으로 나온다고 도와준답시고 매트리스를 깔아주질않나. 너무 과추종인데 그건
어찌되었건 그 날의 피해를 입힌 존재는 2학년의 디트리히 아넨베르벨. 당연히 기숙사도 학교의 시설물이니 시설물 파기로 반성을 해야하는게 당연했다. 다만, 진지하게 벌을 받을 기색은 피해자로서 감독하고있던 나에게 있어서 눈꼽만큼도 없다는 것은 지금 당장에 눈치챌수가 있었다.
"벌을 준다는건 썩 유쾌한 일은 아니지요."
손에 쥐고있던 철선(철로 된 부채, 암기로 사용됨)을 금속음을 내며 펼친 다음, 위협하듯 디트리히의 앞에 때리는 시늉을 하고는 이어 말했다.
"그런데 이 태도는, 나를 미소짓지않게 하는군요."
아까도 태만한 자세를 보였길래 철선으로 머리를 살살 때렸는데, 무게가 제법나가서 혹이 났으리라.
뒷 편에서 천천히 다른 목소리가 들리자 디트리히는 능력을 멈추고 가만히 얼어붙었다. 탱그랑 소리를 내며 캔이 허공에서 둥둥 떠다니다가 땅바닥에 낙하했으며 이후 날카로우면서도 묵직한 금속음이 울렸다. 저 소리를 들으니 방금 맞은 곳이 욱신거리는 것 같았지만 디트리히는 포기하지 않고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아 정말, 기숙사실 문을 찌그러트린 건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이 잘생긴 후배는 선배님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작은 장난을 쳤었다. 그러나 깜빡하고 문을 되돌리는 걸 잊어버려서 결국 일이 크게 번졌다.. 라고?"
사실 디트리히는 문을 펼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능력은 염력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력이나. 문이 철문이긴 했으나 자성으로 펼치려고 하면 할 수록 문은 기괴하게 비틀려갔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일이 너무 크게 번져있어서... 거기다 사실 그 문 뒤에 유현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좋게 좋게 생각하는게 어떨까요? 선배?"
양손을 착 하고 모으며 방실 거리던 그는 은근슬쩍 집게를 내려두고 가까이 다가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지루하게 둘이서 쓰레기를 멍하니 줍는 것 보다는.. 같이 근처의 카페나 디저트가게로 향해서 시간을 때우다가 끝내는게 좋지 않을까요? 저는 선배님의 조국에 굉장히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어떨까요? 네? 네에?"
아마 저 철선이 정말로 보석 5개를 모을 수 있는 것 이였다면 디트리히는 어디 한 곳 부러진채로 쓰레기를 다시 줍고 있겠지.. 하지만 보석 5개를 수집하는 철선이 아니더라도 지금 당장 디트리히는 유현에게 맞을 것 같았다.
"그게 저의 능력이 조금 만 더 강했더라면 문을 고쳤을 겁니다. 하지만 제 실력이 모자랐기에 크윽! 하지만 이것도 세계선의 의지라고 생각하시고 넘어가 주실수는 없겠습니까? 선배?!"
여러가지 헛소리를 꺼내지만 유현의 표정은 싸늘해져만 간다. 그는 조금 곰곰히 생각하는 척 하다가 가짜 공주와 만나니 황녀라는 부분에서 풋 하고 웃음을 흘리며 방긋 거린다.
"와 그 별명 정말 어울리시.. 아니, 도대체 어떤 작자들이 황녀님에게 그런 말을! 이 부드러운 금발과 반짝이는 은색 눈동자가 증거라면 증거 아니겠습니까! 황녀님은 단지 문이 고장나서 창문으로 뛰어내리신 건데 누가 이상한 별명을 붙일까요?! ..뭐 매트리스를 밑에 설치하는 사람들을 보자면 새로운 별명이 붙을 것 같기도 합니다."
집게를 발로 툭툭 차 풀숲에 숨기고는 팻말을 벗어 휙하고 버려버린다. 그렇게 누군가가 직접 그린 귀여운 이모티콘 팻말은 버려졌다.
"우와 저 같이 미천한 후배와 밥을 먹어주시는 겁니까? 기쁘네요.. 아니 정말 기뻐서.. 저 점심 누군가랑 같이 먹은 적이 없거든요."
보통 혼자서 밥을 먹었으니까. 어째서인지 이상한 문제아 소문 때문에 가까워질만한 사람이 없었다.
싸늘하다못해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온갓 드립으로 점철된 농담을 듣고있자니 실시간으로 썩어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다만, 추문으로 붙은 별명에 대해 풋 하고 웃는 그를 보고 순간적으로 표정유지가 안될뻔 한걸 뒷말을 듣고 겨우 가다듬을수가 있었다. 그쪽 치들이랑 비슷한 소리를 지껄이는 거였다면 취급하는 태도를 달리 했을지도 몰랐겠으나, 단순히 입이 방정인 녀석이다라고 판단을 유보했다. 입을 닫고 있으면 그래도 사람값은 할거같은데, 어쩌다 이런 괴짜랑 얽히게 됬는지 참 사람의 일은 모르는 법이다. 신이 기록을 이렇게 썼다라고 흔히들 표현하지만.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유현의 근처에 가서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며 안내를 시작한다. 이대로 주욱 전진하면 학생식당이 있기는 하다. 학생식당. 그는 학생이면서도 학생식당을 이용하지 못했다. 문제아라는 낙인도 문제지만 몇 번 출입 금지를 당한 전적이 있기 때문이였다. 이유는 정말 단순했다. 1 홀로 밥 먹는데 학생식당에 혼자 앉아있으면 조금 그래서 안가다가 어느날 우연히 가게 되었다. 2 누군가 뒤에서 혼자 밥 먹는다고 흉봤기에 철로 된 식판으로 조금 장난을 쳤더니.... ... 아직도 왜 혼났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멈칫) 황녀님도 제법.. 신랄하게 비난을 하시는 군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안경태를 만지작 거리지만 흡사 거대한 공성추가 가슴에 퍽 하고 치는 느낌이였다. 피도 눈물도 없는 황녀... 뭐라고 하고 싶었지만, 말을 할려던 찰나 철선을 만지작 거리는 황녀의 모습에 기가 죽어 입을 다물어버렸다.
특별히 날이 좋은 때였다. 당분간은 수업이 없을테니 마음만큼은 신나게 놀고 싶었지만, 어쩌다보니 기숙사에 박혀 공부만 하고 지내던 프란츠는 저녁이 다 되어서야 겨우 방 밖으로 나올수 있었다. 물론 저녁에도 딱히 덥다거나 춥지는 않았고, 때때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그를 즐겁게 했다. 그 덕분인지 마음도 저절로 풀려왔다.
그가 한 여학생을 발견한 것은 딱 그 시점이었다.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는 곳이었으니, 그녀의 모습이 더 잘 보였음은 분명했다. 그는 괜한 호기심이 생겨 그녀의 뒤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다른 학생이라면 벌써 저녁밥을 먹을 시간인데, 왜 저 여학생은 이곳에 있는걸까? 하는 생각이었다.
" 흐음.. "
그는 조용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갑자기 말했다 삑사리라도 난다면 곤란해질 테니까.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곧 프란츠는 그녀도 알아차릴 만한 거리에 도달했다. 그는 먼저 말을 걸어볼까 하며 약간 고민하는 자세를 취했다.
이아나는 지금 아기를 엄마 대신 봐주는 중이였다. 분유를 먹고 우는 아기를 달래며 아기가 혹여나 감기가 걸릴지도 모르니 옷을 더 두텁게 싸매고 품에 안고 어른다. 그러기를 10분이 좀 넘었을까? 고개를 숙여 아무도 없는 해안가에서 몰래 두 눈으로 아기와 눈을 마주치며 아기를 달랜 이아나는 곧 아기가 잘 것 같자 조심히 아기를 부드럽게 흔들며 실눈을 뜨고 자장가를 조곤거린다.
"이리 날아오렴-. 작은 아이야ㅡ. 먼 꽃밭의 어디-에서 잠을 자는거니? 이리 날아와주렴. 작은 나비야. 엄마가 여기서 너-를 기다려ㅡ."
토닥토닥. 토닥토닥. 그렇게 한참을 있었을까? 실눈을 뜨고 있어서 평소처럼 눈동자를 가리던 이아나는 어느세 보이는 테오도르를 보며 고개를 까닥이고 소곤거리듯 다가가 말한다.
할 일 없이 별이나 세던 밤중에 온 문자 한 통은 나도 벌써 이렇게나 시간이 흘렀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게 했다. 진로상담이라.. 난 좋은 의미로 관심학생(아마도)라 이사장실로 부르시겠지. 가을은 가을인지라 아직 추운 날씨를 생각 해서 옷을 고른다. 끝이 퍼진 단추 달린 원피스, 반바지 위에 무릎양말에 구두. 그 위에 후드를 걸치고 기숙사 밖을 나섰다.
두어개의 게이트를 거치고 십 여분 정도 걸어 도착한 이사장실 복도는 텐게르의 시간을 담은 밤의 풍경과 복도를 비추는 조명이 어우러져 꽤 조화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상은 이쯤하고, 이제 들어가야지.
훈련장에서 오후를 통째로 보냈더니 어느새 날이 저물어간다. 간만에 기분 좋게 능력과 체력을 써서 그런지 꽤 상쾌한 기분으로 기숙사를 향해 돌아갈 수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보니 삼삼오오 모여 저녁을 먹으러 가는 학생들이 보였다. 그러고보니 저녁때네. 나도 먹어야지 싶었지만 학생들이 드글대는 식당으로는 가고싶지 않았다. 어쩔까. 간만에 나가서 먹을까.
"고민이네..."
인적 드문 한켠에 서서 먼 곳을 보고 있을 즈음, 이쪽으로 걸어오는 듯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그저 지나가는 건 줄 알았으나 방향이 바뀌지 않은 걸로 보아 명백히 나를 향하는 걸 알 수 있었다. 또 누가 무슨 시비(?)를 걸러 오는 건가. 평소처럼 날 선 반응을 보일까 하다가 지금 기분이 좋으니 조금 달리 대해보기로 했다. 순전히 변덕에 불과했다. 나는 변덕이 심하니까. 그래.
"...무슨 용건이라도?"
가볍게 몸을 반 돌려서서, 고저 없는 덤덤한 목소리로 먼저 말을 걸었다. 평소의 까칠함이나 쌀쌀함이 빠지니 그런 느낌이더라.
자신도 방에 묶여있느라 밥 시간도 놓쳐버렸으니, 왠지 모를 동질감도 함께 했다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프란츠는 그녀의 덤덤한 목소리와는 조금 다르게 평소보다 들뜬 듯한 목소리였고, 그건 몇시간 동안이나 말 한마디 못했기에 아직 성대가 적응이 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프란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렴 어떻겠나라는 생각에 지나쳐 버린 모양이다.
" 음.. 아, 혹시 좀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서는.. "
프란츠는 약간 주춤하면서 말했다. 그녀의 분위기가 약간은 다가가기 힘든 느낌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런 것에 굴할 그는 아니었으니, 곧 친절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한가한건 사실입니다. 현재로서는 그저 학교에서 학문과 무예를 익혀 로머에 이른다는 정도니까요. 오라버니나 언니, 어머니가 하는일을 생각한다면 정말 한가하다고 생각합니다."
황위계승권을 버린 시점에서야 그저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정도에 불과한데, 그것을 바쁘다라고 말하기도 과분하다. 그저 미래에 있을일을위해 사람들과 어울리는 사교정도에 불과하니까.
"옹호해주니까 기어오르는겁니까? 이번엔 정통으로 맞아보시겠습니까?"
어디서 동질감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건지 순간적으로 손이 본능적으로 나가려는 것을 참으려했다. 추종해주는 이들에 대해선 말하지말자. 나는 원하지않는다. 그러한 인물은 참된 동반자가 아니라, 그저 내 타이틀에 욕심이 있는거다. 황위계승권조차 버린 입장인데도 단물이 있을거라 착각하는 멍청한 녀석들이다.
"이걸 사람한테 쓰는건 당신의 최초입니다만, 영광이라고 생각하세요. 하급 아바돈이랑 같은 취급으로 여기는 거니까 지금."
킥하고 웃음소리를 내고는 철선을 펼쳐서 방금전 추종자를 떠올렸을때의 본능적인 얼굴을 가다듬었다. 표정관리라는게 정말이지 귀찮은 일이다. 그렇다고 드러내는 순간에는 정말로 소문속의 저주받은 황녀라는 말을 들을테니까.
"흠 자유롭게라고 하니 생각났는데 강력한 자철석 두개를 가지고 당신을 실험해보고싶네요. 그걸로 사과를 으깨는 실험을 누가하는걸 본적이 있었는데."
적당히하고 이제 식사나 즐기자는 의미에서 손의 뼈마디를 우그덕 하는 소리를 내고는 반강제의 무언의 압박을 준다.
음,산책하러 나왔다고 해야하나...요즘 졸업하고 나서 무슨 길을 걸어야할지 하도 고민하다보니 속이 깝깝해서 몸이라도 좀 움직이고 싶었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어머니를 돕는게 가장 좋겠지만,그럴거면 티엘린까지 와서 6년이라는 시간을 보낸게 너무 아깝잖아. 좀 더 의미있는 일을 하는게 나을것 같기도 하고. 그나저나 이아네는 참 착하네,이렇게 애도 봐주고. 나는 애 보는건 죽어도 못하겠던데 말이지. 나는 이아네의 곁에 다가가서 키득키득 웃고 말했다.
"으음,산책이라면 산책일까나? 그냥 속이 답답해서 좀 걸으려고 나왔지."
진짜 답답한데,담배라도 피면 좀 나으려나? 아냐,그렇게 담배피면 폐에 안좋아. 나는 한숨을 푸욱 내쉰다음 다시 씨익 웃고 이아나를 바라보았다.
"우리 귀여운 이아나가 듣기엔 조금 어둡고 답답한 이야기니 이건 여기서 끊겠습니다요. 테오 선배님은 후배의 마음을 헤아릴줄 아는 선배니까요."
음,그나저나 내가 여자가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여자 마음은 왜 그렇게 복잡한지 궁금했는데. 한번 이아나한테 물어볼까나.
"저번에 카페에서,처음보는 여자한테 말 걸었는데 아주 대놓고 무시당했다니까? 내가 그렇게 못생긴걸까? 아니면 너무 어려보이는걸까? 으음,잘 모르겠어! 이 몸,나이 22세치고는 나름 동안에 얼굴도 괜찮다고 생각했거든! 이아나,어떻게 생각해? 테오 선배가 한 행동이 잘못되었던걸까. ...커피나 마시는 성격 더러운 여자애한테 말을 건게 실수였을지도.헤헷★"
그냥 궁금해졌을 뿐이라. 여기 학생들은 왜 그렇게 타인에게 관심이 많은지 모르겠다. 혼자만의 의문에 고개를 슬쩍 기울이다가, 그 궁금증에 대답을 해주었다.
"잠깐 생각 좀 하느라고 조용한 곳으로 비켜있었을 뿐이야. 저녁을 어떡할까 싶어서."
지금 시가지로 나가면 맛있는 샌드위치를 파는 가게에 갈 수 있을테니. 마침 생각난 김에 거기나 갈까 하며 기울인 고개를 바로세웠다. 내 분위기가 버거웠는지 상대가 살짝 주춤하는게 보였다. 익히 봐온 반응이기에 뭐 기분이 상할 것도 없었다. 오히려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곤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악의가 없었으니까. 몰래 다가온 것도 아니고."
이런 저런 쓸데 없는 말을 덧붙였다면 분명 짜증이 났겠지만, 이 상대는 그러지 않아 계속 차분히 있을 수 있었다. 지금 내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도 한 몫 하겠지만. 반쯤 돌아섰던 몸을 완전히 돌려 마주보듯 서다가, 스쳐지나가는 바람에 앞머리가 살랑였다. 행여나 눈이 보일새라 손으로 그 가벼운 살랑임까지 잡곤 상대를 응시했다.
답레가 늦게 가는 점은 정말 죄송합니다 진주. 하지만 저도 다니는 직장이 있어 챙기지 못할 수 밖에 없었고, 애초에 오늘 진주가 오시면 그때 맞춰서 멀티를 돌릴 생각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돈을 벌어야하는 현실이 더 중요하고, 저도 전부 다 맞출수는 없습니다. 답레가 늦는것은 죄송하지만, 과도한 독촉은 삼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긴... 이제 4학년은 졸업학년이라죠? 다들 모여서 옹기종기 지내던 때는 멀어졌고, 어느세 졸업하면 흩어지는 사람도 많아지고... 여러곳에서 모여들었으니까요. 생각할게 많아질 시기라고 전에 들었던 것 같네요."
아이를 안아든 팔이 조금 쑤셔서 다른 손으로 아이를 들었다. 그러면서도 과연 테오 또한 그런 나이가 되었나 해서 씁쓸해진다. 이대로 있으면 아마 그는 고향-어떤 곳인지는 잘 듣지 못하였다.-으로 갈테고, 아마 그러면 자주 오기 힘들것이라는 것이 어렵지 않게 그려져서 쓸쓸한것도 같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떠들어보라고 내버려두고는 준비해 철저하게 논파하는 식으로 상대가 굴욕적인 표정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오락거리가 된다. 다만, 그것으로 끝은 아니다. 지금이야 굴욕을 주는것으로 끝내겠지만, 언젠가 훗날에 뒤끝을 볼생각도 있다. 힘이 있을때의 이야기겠지만.
"당신같은 친분은 사양하겠습니다. 같은 소문으로 얽히면 그건 좀 미소를 유지하는데 실패할거같으니까요."
물론 일반적인 후배로서의 취급은 별반 다른사람과 다를바 없다.
"분수를 아는거랑 알아서 높은사람한테 빌붙는건 다른 이야기지요. 사리분별이라는 말은 그걸 구분할줄 안다는 경지입니다. 뭐어, 하급 아바돈은 말은 안통하니 그것보단 낫나."
이후는 적당히 식사와 함께 꽁트같은 대화가 오가는 것으로 그를 위한 처벌은 끝이났다고 봐야했다. 사실 화풀이 하려고 담당한거지, 결론적으로 피해 입을일은 일찌감치 차단했기에 귀찮은 수고를 한 대가를 치르게 했다는 정도로 만족한셈이었다. 다만 그의 능력은 지금으로서는 괴짜스럽게 이상한곳에나 낭비하고 있지만, 나름대로의 응용방안을 생각하자면 언젠가는 도움이 될것이라고 계산적인 생각으로만 그의 대한 평가를 마친다.
결국 나는 이러니 저러니해도 타인이라는 존재를 이율타산적으로 밖에 보지않는다. 그저 가면을 쓰고 어울려서 어떻게 적재적소에 활용할수있는 연줄을 만드는가에 집착할뿐.
이사장실은 왜 항상 언제 어느 타이밍에 와도 정숙하다, 는 감상으로 끝을 맺게 되는걸까. 내가 긴장한 것인지 아니면 사람이 뿜어내는 아우라가 그러한것인지. 아무튼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한켠에 마련된 내 자리에는 내 성적표며, 진로상담서며, 하여튼 학생으로서의 나에대한 평가들을 나타내는 문서들이 주르르 놓여져 있었고, 배려심 있게도 차까지 놓여있었다.
"......"
앞으로 나올 내용은 너무나 뻔하다. 브릿지로 가는 것이 확실한지에 대한 것이라던가. 여하튼 예측 가능한 수준의 이야기들이 오갈것이다. ...어쩌면 아닐지도?
이아나가 데리고 있는 애가 갑자기 우는걸 보니 절로 이런 말이 입에서 나왔다. 으휴,애가 어릴때부터 귀는 참 밝아가지고. 아주 어릴때부터 소문 제조기의 싹수가 보이는 애에요. 이아나가 애를 잘 달래서 조용히 시킬때까지 기다려준다음. 애가 울만큼 울어서 다시 눈을 감자 입을 연다.
"헌팅이라니,크흠. 이 몸,22세 먹을때까지 여자랑 단 한번의 연애도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할 생각 없습니다요. 아니,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도 연애할 생각 없어. 연애 해서 마음고생 하느니 차라리 집에서 개나 키울거야. 어쨌든 참 예뻐보이는 여자가 테이블에 우연히 같이 앉아있었는데 그 여자한테,'참 예쁘시네요.' 하고 말 했단 말야! 근데 그걸 또 기분 나빴는지 아주 목소리에 서리가 낀것 마냥 차갑게 딱딱 끊어서 대답했다니까? 게다가 반말도 틱틱 하고. 나는 존댓말 했는데. 참."
어우,열받으니 속에서 말이 막나오네. 심호흡하고,진정! 진정! 쓰읍 하아 쓰읍 하아. 좋아,나는 진정했다! 그 다음으로 넘어가자!
"그러니까 말야,커피를 마시니까 성격이 이렇게 더러워지는거야. 인생의 쓴맛도 얼마 보지 않은 애들이 커피를 좋아한다니까? 그거 알아? 이아나? 진짜 힘든 일 겪은 사람들은 커피 같은거 잘 안마셔요. 우리 아버지도 돌아가시기 전까진 사탕을 입에 달고 사셨다구,커피같은건 쳐다보지도 않았어. 순 말야,어중간하게 힘든 사람들이 나 힘듭니다~ 힘들어요~ 하고싶어서 커피를 마시는거라니까?"
그래! 커피를 마시는건 진짜 힘든척 하고 싶은 사람들이나 커피를 마시는거지,진짜 힘든 일 겪거나 음식을 먹을 줄 아는 미식가들은 오렌지 주스를 마신다구. 그리고 사과 주스나 포도 주스 같은건 죄악이야! 오렌지의 상큼하고 시원한 맛이 아니면 안돼! 나는 이아나를 바라보며,응응,선배말 맞지? 하는 표정으로 (초롱초롱한 눈빛은 덤) 이아나의 말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자,어떻게 말할거야? 응?
아기가 잠잠해지자, 정말로 응어리가 평소에 참 많이 맺혔던지 울분어린 말을 우두두두두 쏟아내는 테오도르의 말에 이아나는 어제 자신의 수다를 들어준 프란츠가 대략 이런 느낌이였을까 싶었다. 이럴때는 그저 잘 들어줘야 할까 싶어 미소를 잃지 않으며 듣는다.
"어머나... 의외시네요. 그럴줄이야."
사실은 테오도르라면 적당히 활기차고 나이가 비슷한 다른 선배를 만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아니면 차라리 정말로 얌전한 사람을 만나서 내조를 해달라고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도 하고. 어쨋거나 저쨋거나, 그는 참 억울하기도 많이 억울했나보다. 이렇게 자신에게 말을 우수수 쏟아내는걸까 싶어 아기를 고쳐안았다. 그나저나 대놓고 퇴짜라니, 어지간히도 운수가 없었나보다. 아니면 뭐... 다른 이유가 있거나.
"그건 확실히 완벽히 상대방이 나쁘다고 할 순 없겟지만 운이 나쁘긴 하네요. 뭐... 어떤 사람들은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해서 경계심이 강하기도 하니까 그럴수 있을지도 모르겟지만."
그리고 또다시, 그 억울함에서부터 나오는 것 같은 속사포 수다에 이아나는 파도가 소리를 내며 찾아오는 것을 구경하듯이 들었다. 흠... 피곤할때는 단게 땡긴다는걸까. 아니면 그가 의외로 어딘가 딱딱한 면이 있거나 자기 주관이 강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흥미롭게 보다가도 살짝 말한다.
"확실히, 시험이나 토벌 시즌만 되면 커피랑 차랑 사탕이나 초콜렛이 가끔 품귀현상이 일어나는건 여기서 자주 봣죠. 저도 밤샌다고 둘 다 먹다가 어느순간 사탕을 한 가득 물고 공부를 하기도 했고... 그런데 어디서 들었는데 코피도 사탕도 다 저마다 기호에 따라서 다르대요. '아. 난 지금 이렇게 힘드니 마찬가지로 힘든 무언가를 보며 위안삼고 싶다' 가 커피! 그리고 '아. 난 정말로 힘드니까 이것을 이겨낼만한 연료가 필요하다.' 가 사탕이고 중간이 초콜렛이래요!"
물론 참고하되 신봉하진 말아야 하는 카더라의 말을 하는 이아나는 실눈이 보일까봐 눈을 감은채로 웃으며 말한다.
"그럼-. 음. 이제 몇 십분만 좀 있으면 아이 보기도 끝나는데 말 나온 김에 저기 해변 끝쪽에 과일주스 프는 곳에서 오랜지주스 드실래요?"
밤이다. 바람도 분다. 이런 날이 좋다. 그저 좋아서 바람을 맞고 있다. 이런 밤인데도 양산은 든 채로 가만히 주위를 보고 있다. 바람이 너무 쌩하니 불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잔잔하지도 않아 선선한 이 정도가 딱 좋다. 인생에도 딱 적당히 중간만, 평균 정도만 갈 수 있었다면 좋을텐데 내 인생은 중간을 모르는데다가 평균조차도 가지 못했나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우울해할 수는 없으니까.
"......?"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저 가만히 있다가 이내 발을 옮기기 시작해 다박다박 걸어가고 있었는데 반짝이는 금발이 보인다. 이런 밤을 배경으로 하면 시선을 강탈해갈 수 밖에 없는 저 색이 아주 오지는군요. 아니 이런 표현은 좀 아닌가. 아무튼 그래도 뭐 모르는 사람 아닌가. 하고 지나가려는 찰나에.
"엨"
제대로 발이 꼬여 넘어져버렸습니다. 어, 어떡하지. 그냥 지나가려 했는데. 너무 쪽팔려. 어떻게 해야 하죠?
방금 시비가 붙어서 싸우고 돌아오는 길 이였다. 딱히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나한테 시비를 걸었다. 능력을 사용한 건 반칙이 아니니까 돌을 얼굴에 집어 던지거나 극성을 바꿔서 밀어버리거나 하는 방법으로 싸웠는데 선생님한테 이른다고 소리치면서 가버렸다. 어라? 나도 다쳤는데? 라고 되물을 시간도 없이 가버린 녀석들을 보니 얼척이 없었다.
그는 멍하니 밤바람을 맞으며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얼굴에 난 상처를 만지려다가 따가워서 그만둘려는데 갑자기 엨 소리와 함께 쿵 소리가 들렸고 뒤를 돌아보니 소녀로 보이는 아이가 넘어져있다.
"..? 뭐야?"
별과 같은 아이였다. 꼬마였지만 음울한 느낌의 기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검은색 머리를 수 놓은 별 장신구들이 눈에 걸렸다.
오,그거 말 되는거 같다. 힘이 필요한 사람은 사탕이고 좀 어중간하게 힘들어서 한탄하고 싶은 사람은 커피란건가. 그 중간이 초콜릿이고? 근데 초콜릿은 언제 먹어도 기분 좋고 행복하잖아! 이아나의 말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어휴,이렇게 말 하니 아주 속이 다 시원하네. 다음에 그 여자애 만나면 진짜 나도 쌩무시를 하던가 해야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는,이제 슬슬 이아나한테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의외라니? 그건 무슨 뜻이야? 이 선배님이 혹시 연애쪽에선 정말 쑥맥이라 부끄러워 했다고 생각하기라도 했던거야? 음,정말 예쁜 사람 눈 앞에 두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그런 여자 못만나봤거든. 응."
절세미인이 아니라면 아마 부끄러운 모습은 보여주지 않을거야,딱 봐도 눈이 돌아갈만큼 예쁜 여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날 혼란하게 할 수 없어. 아암,그렇구 말구.
"응,그거 좋은 제안이지만 선배님 돈이 좀 부족하거든. 우리 하늘에 계신 까마귀 신님,엘레노아님한테 기도할때 피워야할 향 사느라 돈을 다 썼습니다요. ...그나저나 이거 어떻게하나,내일부터 식당가서 돈내고 밥 사먹기도 힘드네 진짜. 나도 알바라도 좀 할까?"
아바돈 토벌 알바같은건 자신 있는데 말이지! 으음,그나저나 슬슬 가봐야할때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다니.
"그러면 우리 귀여운 실눈 후배,잘있어. 선배님은 지금 그지같은 장비 점검 좀 하러 가봐야해서! 다음에 또 보자구!"
정말로 괜찮았다. 주변에 별 머리핀이 몇개 떨어진 것만 빼면. 으아 젠장할. 머리핀을 열심히 주워서 다시 머리에 쏙쏙 꽂은 뒤 다시 당신을 바라보았다. ...근데 누구지?
"저기, 근데 누구세요? 선배님이신가요?"
일단은 일어나서 당신을 바라봅니다. 나보다 키 크다. 올려보느라 얼굴에 그림자 진다. 약간 무섭다. ...아, 구도 때문에 그런겁니다. 사람 자체는 무섭지 않은 분 같은데 올려다봐야 하니까 얼굴에 그림자 져서 좀 무서워졌어. ...그래서 나도 모르게 한 발짝, 뒷걸음질 쳐버렸는데 괜찮으려나.
상대가 이쪽의 스탠스에 좀 못 따라오는 느낌이지만 뭐 상관 없나. 당황하는 듯 해도 대답과 행동이 재깍재깍이니 답답하지 않아 괜찮았다. 안 그랬으면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혼자 휙 가버렸을거다.
잘 모르는 곳이니까 안내를 해줄 수 있냐는 말에 당연하잖냐는 태도로 시가지 쪽을 향했다.
"그러니까 따라오라고 했잖아. 모르는 곳에 가는데 앞장서라고 하겠어."
사람 참 무안하게 만드네. 한결 편해진 목소리가 약간 농담하는 것처럼 흘러나왔다.
시가지로 나가는 길엔 나와 비슷하거나 같은 생각을 한 듯한 학생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조금씩 어두워지는 거리는 하나둘 켜지는 가로등들로 밝혀지고 있었고. 방학 중에 자주 이 시간에 나가곤 했던게 생각나 그런 적도 있었지,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다. 따라오던 상대에게 들렸을지는 모르지만.
"..."
가는 동안 먼저 말을 꺼내기보다 묵묵히 입을 다문 채 차분하게 걸어가고만 있었다. 애초에 이런 상황에 먼저 말을 꺼내는 타입이 아니라서. 딱히 어색함 같은 것도 못 느끼고 잘만 걷고 있었더란다.
프란츠는 그녀의 말에 웃음기를 섞으며 대답했다. 겉으로는 느긋해보여도, 속에서는 아직 당황한 기색이 사라지지 않아서 약간의 어색함은 지우지 못했다.
" 저녁 공기도 좋네요. 낮보다 시원한게. "
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를 따라가고 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것은 아니지만, 아직 이전의 기색을 지우지 못한 프란츠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는 이외에도 천천히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순간 그녀에게서 무슨 말이 들린것도 같지만, 그것을 콕 집어 말하기에는 이미 때를 놓쳤다.
"...무리...... 인가? ...무리는 아냐. 정말로. ...조금만 의식하면 고칠 수 있을걸요? ...아. 또 무의식중에......"
그렇게 말하곤 헤헤 웃더니 디트리히가 제게 말하는 것에 잠시 고민한다.
"...앞으로 자주요? 음, 그러면 나도 좋겠네! 내가 친한 사람이 없어서." "근데 수업을 자주 빠져요? ......모범생은 아니신가보네요. 뭐 남의 생활에 간섭할 생각은 없지만... 디트리히도 능력 연구를 좋아하나요? 나도. 나도 좋아해. 근데... 내 능력은 저주계니까. ......암만 연구해봤자 좋은 취급은 못 받을 것 같아서."
별 대화 없이 걸어 왔더니 어느새 시가지의 한 거리에 도착했다. 상대가 뒤쳐지거나 하지 않은 걸 보면 나와 보폭이 비슷했나보다. 아니면 상대의 걸음이 느긋했거나.
주변을 둘러보는 상대를 한번 힐끗 보고 그 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었다.
"이쪽이야."
넋놓고 있다가 놓치지 말고. 말과는 달리 상대가 나를 놓치지 않게 적당히 천천히 걸어갔다. 접어든 길은 지금까지 걸어왔던 환한 길과 달리 가로등도 적고 사람도 없어 제대로 가는 건가 의심스러울만한 길이었다. 하지만 드문드문 불 켜진 음식점이나 가게가 있는 걸 보면, 사람이 안 다니는 곳은 아닌 듯 할거다.
"방학 동안 할 짓 없어서 여기저기 다 다녀봤더니 이런 데도 찾게 되더라고."
여자 혼자 올 만한 곳은 아닌 거 같지만 그런 건 그냥 넘어가자. 나는 느긋하게 길을 따라 걷다가 어느 앤티크 풍 카페 앞에 멈췄다.
불빛이 적은 거리로 들어서자 그는 신기한 듯이 여전히 주변을 보면서 걷는다. 정말 이런 곳을 지나서 가게가 있는걸까.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드문드문 보이는 불켜진 건물이 보이자 그도 안심한 듯 별 말 없이 걸어갔다.
" 이런 카페도 있었다니.. "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을 즐겨하는 그도 처음보는 가게였다. 그럼에도 딱히 낡았다거나 하는 분위기는 아니었고, 오히려 조금 고풍스러운 느낌을 들게 만들었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 적당히 앉을 자리를 찾아 일단 그곳으로 갔다. 창가에 위치한 곳이었다. 그 뒤에 카운터로 가 음식을 주문했다.
//헤일리주 죄송하지만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해서 먼저 자야 할것 같아요.. 다음에 다시 이어올게요!
>>276 시엔의 이름은...... 애칭이 셴인 캐릭터를 내 보고 싶어서 낸 거라 별 뜻은 없슴다. 굳이 있다면 쌍둥이 언니인 시엘과 한 글자 빼면 똑같다는 거? 별에 대한 건... 그냥 별을 좋아합니다. 원래도 좋아했지만 키리에가 작살난 뒤에 시엘과 같은 걸 볼 수 있는 건 밤하늘의 별 뿐이라며 더 좋아하게 되었죠.
디트리히주 시엔주 헤일리주 안녕하세요! 아침부터 전화가 빗발치는 바람에 늦게 봤네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269 앙투안이 연주하는건 그날그날 기분따라 다르긴 해요. 그런데 나름 원리원칙?스타일이라 자기가 작곡한 곡으로 즉흥 연주 할때는 기본 음에서 계속 변주해서 연주해나가도 남이 만든 곡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거의 안 건드리는 느낌? 좋아하는건 연주 난이도 자체는 낮은데 제대로 뽑아내려면 정말 기본기에 충실하지 않으면 어려운 곡이네요. 바이올린 협주곡 3번 느낌? 하기 싫어하는 연주는 딱히 없는데 굳이 뽑으면 컨디션도 영 아니고 소리도 좀 안날 때 억지로 연주를 이어가는걸 안좋아해요. 연주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지치는 느낌이라서.... 사실 주종목은 피아노인데 이건 휴대를 할수가 없어서 현장에는 바이올린만 갖고 다니는 슬픈 사연이...
>>287 피아노를 들고 다니면 뭔가 그림이 이상하지 않을까...요...! 아닌가...?(?? 디트리히는 원딜 근딜 서포터를 자유롭게 오갈수 있을거 같아요:3! 적이 가까이 왔을땐 검이랑 방패를 붙여서 전투불능으로 만들거나 멀리 있을땐 어검술처럼 날려버리거나? 하지만 문짝을 부수는 것은 아니됩니다...
이사장이 하는 일은 빌어먹을 정도로 많다. 국제 정세는 물론이고 아바돈의 발생 조사 및 토벌명령서 등등을 적어야 하고.. 그 와중에도 여러 상담은 빠질 수 없다. 오늘은 현족의 유학생인 진을 만나기로 한 날이기에 평소만큼의 일을 마치려고 하였는데 약속 시간의 15분 전 문이 두드려지자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들어오시기를." 평소처럼의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아직 약속 시간이 되지 않았으니 저 소파에 앉아서 다과를 잠깐 즐기기를. 이라고 말했습니다. 책상 위에는 달콤한 것과 어울리는 차가 금방 끓여진 것처럼 놓여 있었습니다. 비서가 미리 준비해놓은 건지.. 아니면 다른 걸 이용한 건지..
"마지막 서류만 보고 앉도록 하지요." 그 서류를 꼼꼼히. 그러나 빠른 시간 내에 보고는 그의 맞은편에 앉으려고 합니다. 무슨 이유로 불렀을 것 같냐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겠군요. 차갑다 못해 냉혹하기까지 한 눈입니다.
어디를 가던지 사람은 있다. 학교니까 어쩔 수 없는 건 맞지만 기숙사에까지 사람이 있는 건 너무하다 싶을정도다. 매일같이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대는 사람이 있지를 않나 둘 자리가 모자라 정리를 겸해서 책을 묶어서 복도에 내놨더니 누군가가 들고가기도 했다. 아직도 그 책이 어디에 갔는지는 모르는 상태고 매일같이 울리는 시끄러운 소리는 여전히 짜증만 나게 하지만 그래도 여기가 왕궁보다는 낫다. 노골적으로 안한다고 티를 내는데도 자기멋대로 판단해서 자기멋대로 사람을 미워하는 티를 내는 인간들이 가족이라고 이곳저곳에 돌아다니는 곳보단 아예 모르는 사람들밖에 없는 이곳이, 나에게는 좋다.
그리고 찾으려고만 하면 인적이 드문 곳 정도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도서관의 구석자리나 나무만 몇그루 있는 음지. 이런곳은 햇볕이 잘 들지 않아서인지 곰팡내는 조금 날때도 있지만 사람이 잘 오지 않는다는 것 만으로도 나에게는 충분히 큰 메리트다. 이런 걸 보고 웃고있어도 들키는 일도 없고 무엇보다 화법을 연습해도 아무도 모르잖아. 솔직히 말해서 이만한 유토피아는 찾기도 어려울 뿐더러 이런곳에 숨어있는 개인에 집착하는 수준의 인간들이라면 금세 들켜서 시끄러워지거나 물이 뿌려지거나 한다. 심하지않은가.
"학생들이 3월에 강한 이유는 개강해서..."
나지막이 책에 쓰여있는 유머를 읊조리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다른 쓸모없는 책들에 섞여있길래 재미와는 거리가 먼 무언가인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수준이 아닌가.
“감사해요.”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다과를 즐기진 않았다. 즐길 분위기도 아니고 별로 즐기고 싶지도 않다. 그냥 다과와 차는 내게는 장식품인 듯 선뜻 건드리기가 어렵다.
조용한 방안에 종이와 팬소리만 들린다. 약속시간에 딱 맞춰 왔어야 하나 생각이 든다. 때에 따라 이런것은 적당히 끼워 맞추자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이렇게 일이 많은 사람은 제 시간에 가자... 라는 정도로. 그런데 이사장님은 언제나 이렇게 냉혹한 눈빛으로 쳐다보는건가 아니면 오늘따라 인건가 모르겠다.
아아, 오늘따라 피곤합니다. 저주 연습을 하다가 리스크가 돌아올 걸 예상을 못 했네요. 그 전에 저주 연습하려고 크리스마스 트리에나 쓸 법한 나무를 사서 가라 저주몬 몸통박ㅊ 아니 이게 아니라 아무튼 부패 저주를 최대출력으로 걸었더니 나무는 별 피해가 없는데 제가 피를 봤군요. 그렇기에 쉬기로 했습니다. 일단은 그렇기에 인적이 드문 곳으로 최대한, 최대한 갑시다.
"......? 어라."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곤, 바로 뒤를 돌아 가려 합니다. 이미 다른 사람이 먼저 있었는데, 게다가 엄청 편하게 있었는데 제가 방해하면 안돼겠죠. 그래도 저 자리 편해보이던데. 부럽네요......
"...아, 아니다. 잠깐. 방해되게는 하지 않을테니까 여기 좀 있어도 될까요? 제가 사람들 많은 곳을 싫어해서."
그래도 역시 이 장소 알아두면 편할 것 같다. 그리고 좀 더 있고 싶다. 편한 곳 같아보였으니까. 그러니까 여기에 있게 해달라고, 다시 몸을 돌려 당신을 바라보며 묻는다.
나는 이사장님의 생각을 잘 이해할수가 없었다. 대체 지금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는 이유는 뭘까? 아까 냉혹한 눈빛을 보낸건 빨리 도착한것에 대해 직접 뭐라 할수 없으니 눈빛으로 뭐라 한것일까? 아마 나는 그것이 맞다고 생각이 든다. 하지만 너무 하다. 나는 분명 윗사람의 부름이나 약속엔 미리 가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슬픈 마음이 들지만 어쩔수 없다. 이 슬픔을 딛고 이사장님의 냉혹한 눈빛을 기억하며 다음에는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말자.
아. 어쩌면 이사장님은 냉혹한 눈빛으로 ‘식탁의 과자는 비싸니 먹지 말라’고 메세지를 보낸걸지도 모른다. 역시 문화. 하지 말라는것과 하라는것을 쉽사리 구분 하기 어려운 곳이다. 나는 문화에 관해서는 역시 멀었다.
질문에 답해야지. “최근은 잘 지내고 있어요. 아직도 배움의 속도가 느려서, 원하는 만큼 빨리 배우질 못해 힘들지만요.” 아직도 멀었다 라는 생각이 매일 매시간 마다 든다. 아직 부족하다.
“맨처음 여기 올때부터 지금까지 제 마음가짐은 다르지 않아요. 최대한 힘을 얻어 고향에 돌아가 힘이 되어 주고 싶어요.”
창문을 열어도, 얼굴에 찬물을 끼얹어도 딱히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앙투안은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기로 했다. 앙투안은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입학식 전 가볍게 앓았던 감기가 원인이었을지, 얼음을 넣은 초콜릿 음료를 너무 많이 마신게 원인이었을지는 몰라도, 두통은 하루 전부터 꽤 끈질기게 앙투안을 괴롭혔다(앙투안은 자신의 종잡을수 없는 생활패턴이 원인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늘 그랬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점은 열이 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리라. 하지만 앙투안은 그 점에 기뻐하지는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계속 악보를 들여다보아도 나아질 일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엉망진창에, 악상도 떠오르지 않는 상태에서 곡이 진행될리는 만무했으며, 설사 진행되더라도 제대로 된 결과물이 탄생할 일은 추호도 없었다. 연주하는 사람도 지휘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괴로운 곡이라면 모를까. 어쩌면 아바돈까지. 결국 앙투안은 깃펜을 내려놓고 방 밖으로 향하기로 했다. 시원한 공기를 제대로 맞는다면 좀 달라질지도 몰랐다.
그렇게 걷고 걸어 도착한 곳은 분수대가 있는 광장이었다. 앙투안은 사람이 많은 곳에 굳이 가서 어울릴 정도로 넉살 좋은 성격은 아니었지만, 무의식중으로 공기가 잘 통할 만한 넓은 곳을 찾아온 모양이었다. 혹시 편하게 앉을 곳은 있을지. 두통이 더욱 심해졌다. 결국 앙투안은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머리를 짚은 채 아무렇게나 걸어가 대충 눈에 보이는 곳에 앉았다.
"......아."
하지만, 근처에 선객이 있던 모양이었다. 앙투안은 햇살과 아픔에 눈살을 찌푸리며, 살짝 고개를 들어 그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책에 집중하던 사이에 가까이온건지 알아채지는 못했지만 어디에선가 목소리가 들려서 깜짝 놀라 자리에서 허둥대다가 그대로 의자가 뒤로 넘어가 넘어지고 말았다.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이걸로 흐름이 끊겨버렸잖아. 독서를 방해하다니 매너가 상당히 나쁜사람인 것 같아서 왜인지 조금 짜증이 났다. 아니 솔직히 부끄럽다. 수치심이 분노보다는 조금 더 많은 것 같다. 아마도 확실하게.
"ㅁ...뭐야. 가까이 올거면 기척을 내라고..."
억지로 수치심을 감추며 의자를 세우고는 천천히 등받이 뒤에가서 숨었다. 아무래도 눈을 마주치고 대화하는 건 레벨이 좀 높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렇게 갑자기 다가오는 사람은 대부분 좋은사람은 아니다. 17년밖에 안살았지만 내 인생의 절반을 그렇게 살아온 이상 경험담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이내 들리는 사람 많은 곳이 싫다는 말에 약간 긴장이 풀리고 말았다.
"시끄럽게 하지만 않으면... 괜찮아. 대신 방금 본 건 전부 잊어."
천천히 등받이 위로 고개를 내밀며 떨리는 손끝으로 내가 앉은 책상의 반대편 끝을 가르키고는 조용히 말했다. 확실히 사람들이 많으면 이런 종류의 사람들도 없지는 않겠지. 내가 가장 좋은 예가 아니던가. 그리고 원래 이런 부류끼리는 상부상조해야 하는 법이다. 인적이 적은거지 완전히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다. 애초에 교내 1위가 되지못하면 개별실이 아니다보니 대부분이 공동생활. 나같은 부류에게는 최악의 상황아니던가.
"ㄱ... 가까이오면 책상을 엎을거야."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반쯤 진심이다. 위험하다면 도망가야하지 않겠는가. 애초에 인적이 드문 곳. 조용한 건 좋지만 이상한 사람이 가끔 오기도 했다.
"잘 지내고 있다니 다행이구나." 고개를 끄덕입니다. 무언가 불편한 것이 있으면 건의함에 넣거라. 라고 답한 뒤 그녀의 질문에 대한 진의 대답을 주의 깊게 듣고 답햐주려고 합니다.
"배움의 속도가 빠르다고 해서 완전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단다. 기초가 없으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인 것에 비해서는 잘 따라와주는 편이니까." 라고 말하면서 과자가 별로인가? 라고 물어보려고 합니다. 딱히 먹지 말라는 제스쳐를 취한 적은 없었는데. 라는 생각도 들지요. 그리고 진로에 대해서 듣고는...
"만일 그 던전이 끝난다면 현족은 어떻게 될 것 같으냐?" "일단 내가 듣기로는 아바돈의 기준으로 치면 하급조차도 아닌 것이라고는 하는데. 훌륭한 팀이 가면 그 던전은 바로 클리어가 될 수도 있겠지." 네가 그 팀이 되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이라고 덧붙이며 물어보려고 합니다. 현족은 그냥 그대로 살아갈 것인가? 에 대한 것도 있을 것이고, 던전 안에서 쏟아지는 아바돈(약하긴 하지만)을 그 원인마저 멸구한다면 그들은 어떤 방향일지.
"......음. 죄송해요. 아무튼...... 방금 본 거요? ...딱히 제대로 본 것도 없지만. 아무튼 잊을게요. 그리고 그럴 수도 있는거잖아요?"
그러곤 방싯방싯 웃더니 책상을 엎을거란 말에 고개를 갸웃한다. 음...... 가까이 가지는 말아야겠다. 아무튼 이제 들고 온 책을 읽어야할텐데. 음...... 최대한 멀찍이 떨어지자. 멀찍이 떨어져서 책을 읽는다면, 아무래도 별 문제 없겠지? 그렇겠지? ......아마도? 뭐 상관은 없을테니까. 아무튼 나는 최대한 먼 쪽의 구석으로 가서 탈파닥 앉았고, 이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상이 엎어지는 건 싫으니깐말이지.
"......근데 이런 곳도 있었구나."
너무 구석의 외진 곳이라서 잘 몰랐던 곳인데 앞으로는 알아둬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근데 저 사람 누구일까? 모르는 사람인데. 역시 내가 말을 건 게 너무 무례한 행동이었을까?
맑은 날은 싫어하지 않는다. 성격은 이래먹었어도 환한 햇살이나 상쾌한 바람을 맞는 것은 나 역시 좋아했기에. 유난히 맑은 날은 마실 것이나 책을 들고 바깥에 나가 시간을 보내는 것이 방학 중 일과였다. 물론 수업이 없는 지금도 그랬다. 오늘은 읽던 책을 들고 분수대가 있는 광장으로 나온 참이었다. 나와 같이 수업 없는 학생들이 돌아다니지만 딱히 거슬리진 않았다. 나한테 말만 안 걸면 되니까. 귀찮게만 안 하면 내가 먼저 시비를 틀 일도 없었다. 내가 무슨 인성 파탄난 사람도 아니고.
볕이 적당히 드는 자리에 앉아 안경을 벗어 옆에 내려놓고, 길게 드리운 앞머리 아래로 책의 활자를 천천히 쫓아 읽어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털석, 주저앉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옆에서 누가 말을 거는게 들렸다. 일부러 인적이 없는 곳으로 왔기에 그 말의 대상이 나라는 것쯤은 금방 인식했다. 짜증을 내서 쫓아버릴까 싶어 고개를 돌리고 그 사람을 보았는데. 안색이 썩 좋아보이지 않았다. 그런 사람에게 막 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 참.
"상관없어요. 여기가 닥히 내가 전세낸 것도 아니고, 공공장소인데."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그렇게 답하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행여나 앞머리가 휘날려 눈이 보일까 조심하면서 다시 책을 읽어내려가다가, 그냥 지나가듯이 말했다.
"아프면 보건실에 가지 그래요. 이런데 나와있지말고."
혼자 앓는다고 병이 낫나. 약간 궁시렁대는 어조였지만 평소에 남을 대할 때의 쌀쌀맞음과는 비교도 안 되게 상냥한 거였다. 내 기준으로.
아라에게 있어서 평균보다 위라는 건 대단한 칭찬이긴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은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진의 말을 듣다가...
"아직까지는 괜찮은 듯하지만, 언제 강력한 이들이 나올지 모를 일이니." 네가 혹은 현족이 강해져서 어느 정도 정리가 가능하게 해두는 것이 좋을 듯하겠지. 라고 말합니다. 그 말 밑에는 만일 던전의 무언가가 빠져나올 시에는 팀들로 처리가 가능할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유로워진다.." 나쁜 말은 아니지만, 땅을 사고파는 이들은 그 땅을 자신의 영토로 넣을 생각을 멈추지는 아니하겠지...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아바돈의 위협이 없어지면 그들 자신과의 싸움을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녀로써는-물론 싸움으로 인해 발전도 하긴 하지만.- 아바돈이 멸절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습니다.
"로머 교육 뿐 아니라 교양 교육도 수료하면 그들은 무시하진 못할 거라고 생각한단다." 눈을 한 번 깜박이고는 몇 가지 어려운 점이라던가 왠지 잘 안 되는 게 있는지.. 훈련상에서 힘든 게 없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점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아무래도 뭔가 위험한 생각은 없는 것 같으니 긴장은 안해도 될 것 같은ㄷ...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다. 사람하고 사적인 대화하는게 얼마만인지 감도 안잡혀. 지난 1년을 어떻게 지냈더라. 분명히 누군가하고는 말을 했을거다. 그때처럼 하면 어떻게든 될거야. 우선은 의자에 앉자. 역시 불편한 것 보다는 거북한 게 낫다.
"그럴 수도 있다니 그건 무슨소리야!!"
순간적으로 수치심이 치고 솟아버려서 새어버린 목소리와 책상을 내리치는 큰 소리가 섞이고는 미묘하게 상기된 얼굴이 눈에 띌 정도가 되었다. 이내 냉정을 되찾게 되자 약간 상기된 정도였던 얼굴은 이내 새빨간 과일처럼 변해갔다. 아니, 수치스럽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큰 소리를 내다니 역시 가끔은 사람과 만나는게 좋은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역시 모르는 사람과 연관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어리석다고 생각들 뿐이었다. 조용히 자리에 앉고는 읽고있던 책에 얼굴을 파묻고는 조용하게 잊으라고 중얼거렸다.
"ㅇ...이름? 아... 에녹이야. 본명은 길어서 기억못할테니까 이정도만. 17살이고 같은 2학년. 출신지는 운투국이고 취미는 혼자있기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자기소개를 하는 시엔을 향해서 책위로 눈정도만 내밀고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간단한 자기소개정도니까 딱히 문제는 없겠지. 전에 읽었던 책에서도 자기소개는 적당한 수준에서 마치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무거운 대화는 공적인 자리에서 하는 정도면 충분해. 그런 자리라면 대부분 상대같은건 알고 나올테니 소개할 이유도 없겠지만... 아, 왠지 엄청나게 말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건 실책인건가? 실책이겠지? 오늘은 방에가면 그대로 잠이나 자자.
"...여기 조용해서 괜찮지? 평소엔 사람도 안와서 집중도 잘되고 말이야..."
별거아닌 주제라도 말을 이어가는게 중요하다. 대화의 비법의 제1장에 적혀있던 말이다. 그대로 실없는 얘기라도 이어나간다면 문제없이 대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상대방은 앙투안보다 어려보이는 소녀였다. 자유롭게 층진, 맑은 하늘 같은 머리카락과 대조적으로, 눈은 길게 내려온 앞머리에 가려져 있었다. 이유를 묻는 대신 앙투안은 소녀의 말을 들었다. 누군가가 어떻게 다니건 다 그 사람만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눈앞에서 멀쩡하게 걸어가던 사람이 갑자기 물구나무를 서더라도. 공공장소. 그렇게 빚어진 단어가 생경했다. 광장이었고, 건물 밖이었으니 그 말이 맞다. 맞지만, 새삼 그렇게 느껴지는건 두통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겠지. 소녀가 바람에 실어보내듯 던진 말에, 앙투안은 고개를 저었다.
"...거긴 더 아파질거 같아."
약이 있는 곳 특유의 건조한 냄새는, 사람에 따라 병이 가라앉는 느낌을 들게도 한다지만, 신경이 곤두섰을 때는 오히려 증세를 더 악화시킬수도 있는 것이다. 아파할 시간에 진통제 한 알이라도 더 먹는게 생산적이긴 하겠지만. 진통제. 앙투안은 문득 옷자락에 넣어둔 '진통제'를 떠올렸다. 어째서 생각하지 못했을까? 앙투안에게 있어서는 물이기도 하고, 밥이기도 하고, 약이기도 한 것이었는데. 앙투안은 초콜릿'들'을 꺼내어 그 중 하나를 입에 물었다. 카페인은 두통을 심화시킨다지만, 그런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튼, 염려해줘서 고마워. ...골라갈래?"
화이트, 밀크, 다크, 생초콜릿, 심지어 트러플까지. 앙투안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그 정도의 초콜릿이 주머니 안에 들어간다는 사실에 놀랄지도 모른다.
이사장님의 말에 대답않고 조용히 있는다. 맞다. 여기서의 교육은 많았고 나는 조금이나마 사람의 세상을 알게 됬다. 지금은 아니다. 어쩌면 내가 늙을 때까지, 아니 30-40년 정도 일까.
내 고향에는 꽤나 희귀한 광물이 많이 나오는 듯하다. 지하 깊이서 나온 용암으로 세워진 산이기 때문인가. 내 고향은 여기서 멀다. 그래서 여기 사람들은 그곳의 정보가 적다. 게다가 알고 있다해도 너무 멀어서 유통이 힘들다. 가지고 가는길이 멀고 험해 유통비용이 지나쳐 진다. 차라리 주변의 광산에서 캐는게 이익인것이다.
하지만 계속 기술이 발전하고 광산에서 나오는 자원이 줄고... 내 고향이 가까워 지는 시점이 와서 내 고향을 점령하는게 이익이 된다면...
아마 예상대로 되겠지.
입다물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이사장님이 대답할게 없다는걸 알아챈건지 질문을 바꿨다. “여전히 능력의 강도가 잘 오르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원거리에 대한 공격에 대한 대처법을 아직 완전히 터득하지 않아 문제를 일으키고 있죠.”
/ 예전에 시트 만들때 인첸트에 대해 어물쩡 넘어 갔는데 혹시 지금 수정이 되면 진의 무기에 날아서 돌아오는 인첸트를 부여해주거나 있었다고 할수 있나요? 토르 망치처럼!
양호실로 가지 그러냔 말에 거긴 더 아파질 거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건 나도 동의한다. 특유의 약 냄새는 몇 번을 맡아도 절대 전혀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라. 오래전 약 냄새가 코를 찌르는 듯 해 나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더이상의 약은 싫어. 그런 아픔도.
"알 만 하네요."
단조롭게 중얼거리고 책장을 넘겼다. 사락- 가벼운 소리와 함께 새로운 페이지가 펼쳐진다. 그곳에 쓰인 새로운 내용을 천천히 읽고 있는데 옆에서 달콤한 향이 났다. 향을 따라 고개를 돌린게 귀로 말이 들린 것보다 빨랐다. 나는 상대보다 초콜릿을 먼저 보았고, 권하는 듯한 말을 듣고서야 하나 집어갔다. 아무거나 집고 보니 다크 초콜릿이었다.
"보인 걸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요. 고맙습니다."
순순히 감사인사까지 하고 초콜릿의 은박을 벗겼다. 한입 크기로 똑 잘라 입에 넣으니 혀 끝부터 쌉쌀한 달콤함이 퍼진다.
"맛있어.."
잠시 책을 보던 것을 멈추고 입안의 달콤함을 즐겼다. 뜻하지 않은 간식은 언제나 맛있는 법이었다.
만일 처음의 게이트만 설치된다면야. 가깝고 멀고는 중요해지지 않는 것도 있을지도. 란 먼 생각은 티엘린에게는 들리지 않으니..
무언가 생각이 많은지 침묵을 지키는 그의 앞에서 평온한 표정으로 차를 홀짝거립니다. 부드러운 차의 향이 퍼져나가는 것에 기분이 조금은 좋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결혼 압박은 조금 싫습니다만... 조카가 없는 것도 아니건만. 그의 대답이 들려오자 찻잔을 달그락 소리 하나 없이 부드럽게 내려놓고는 답해주려고 합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진 군의 능력 수치는 낮지 않아. 능력 수치 2천으로도 훌륭한 로머가 될 수 있는 법이니. 너무 조급해하지 않아도 괜찮겠지." 또한 원거리 공격은 기본적으로 막아내는 것보다는 피하는 것이 효과적이지. 물론 예측하고 쏘는 경우에는 그 예측을 무효화하거나. 받아쳐내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유도의 경우에는 오히려 파괴해야 하는 것을 파괴하도록 역으로 유도할 수도 있는 법이니. 라고 몇가지 말해줍니다. 확실히 티엘린 사립 아카데미에서 나름 괜찮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은 유달리 높은 이들이 많기는 했지만..
“감사합니다.” 능력의 수치가 낮다는건 거짓말은 아닐것이다. 아니 칭찬일것이다. 2000이 괜찮은 로머의 기준이라는것은 나도 들은적이 있는 바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조급함은 없어지지 않는다. 아니면 열등감이라 해도 좋은가? 내게 느껴지는 한계감과 내가 강하다는 자신감을 가지지 못하는것은 이 주변의 탓일까?
졸려 죽겠다아아아. 늘어지는 목소리로 하품을 쭉 하고,프란츠와 로렌스에게 가져와달라고 했던 책들을 한번 쭉 읽어본다. 한 1년 휴학하고 복학했으니 예전에 필기쪽 배웠던걸 싹 까먹어서 다시 읽기라도 해야할거 같거든. 이번 학년엔 어떻게 필기 시험에선 좋은 성적들 받아야하는데 말이지,1학년 2학년 3학년 필기 모두 그냥저냥한 성적을 받았으니 4학년만큼은...
"그나저나,우리 프랑이는 머리 안짤라? 좀 짜르지. 그렇게 머리 길면 먼지 다 뭍고 바퀴벌레가 머릿속에 들어가고 고생 많이할텐데 말여. 방 바닥에는 노란색 머리카락 수북-하게 쌓여있고."
이자식 머리가 더 길어졌다니까,그렇게 길면 머리 감기도 귀찮을텐데. 나는 노트에 프란츠랑 로렌스가 가져온 책들에 적혀있는 메모를 열심히 베끼면서 그렇게 한소리 한다. 내가 2학년때부터 그랬던거 같은데! 쌍검은 쓰는게 아니고,머리는 좀 짧게 자르라구. 특히 쌍검같은건 왜 쓰는지 모르겠어,쌍검을 쓰느니 차라리 한손에 총을 드는게 훨씬 낫지.
"프레데릭,그나저나 너는 뭘 먹고 그렇게 키가 큰거여. 나도 키 크는 음식들 학교 다녔을땐 많이 먹은거 기억하지? 멸치 엄청 많이 먹고 우유도 하루에 1리터는 마셨잖아. 운동도 죽어라 하고. 근데 왜 아직도 170이냐고오오,적어도 이 180은 되어야 덜 억울하지 않겠어? 그러고보니 프랑이도 키 180 넘네...으휴,이놈들아. 키 크니까 좋냐! 나 내려다 볼 수 있으니까 좋더냐!"
으아아아 메모하기 귀찮으니까 별 이상한 생각이 다 든다! 게다가 틀리게 메모했을때 지우개로 지우는거 힘들어! 젠장,이런거 어디 통째로 베껴주는 사람 없나?! 왕족들은 참 좋겠구만,하인들을 한 백명씩 데리고 다니니 책 던져주고 베껴! 하면 싹 베껴줄테니까 말야.
"...필기 진짜 어려워,어렵다구. 그치?"
그렇게 말한다음 한숨을 푸욱 내쉰다.
"아아,그러고보니 우리 1년 넘게 못봤잖아! 그동안 무슨 일 있었어? 프랑이랑 프레데릭 둘 다 여자친구 생겼냐?! 나는 묻지 말아줘,우리 고향 어떤데인지 너희들도 잘 알잖혀."
"아니... 그, 나쁜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었지만요. 그러니까. ......저도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거든요. 지나고 보면 별 거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곤 볼을 긁적이며 미안하다는 듯 당신을 봅니다. 음...... 역시 내 잘못인거겠지?
"......아무튼 죄송해요. 그리고 앞으로는 에녹 씨라고 부를게요...... 그래도, 괜찮나요...?"
저는 당신을 싫어하는 것도 어떻게 두렵게 하고 싶은 것도 아닌데 이게 내 맘처럼 안돼는 모양이네요. 음. 어떡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상대 쪽에서 저렇게 나와버리면 나도 어떻게 해야 할 지 애매해서 말이에요. 우선 읽던 책이나 읽을까요. 달달한 연애소설도, 귀여운 그림책도 아닌 슬프고 우울하고 음울하기 그지없는 소설책이지만 그냥 읽습니다. 계속해서 말이죠. 우울합니다. 처음에는 소녀가 나옵니다. 그리고 어린 여동생이 나옵니다. 소녀는 어린 여동생이 태어나자 제게 오던 애정을 여동생에게 뺏겨버리고, 그 이후 사랑받고 싶어 계속해서 노력하지만 사랑받지 못합니다. 소녀는 결국 그 아이를 사랑하고 돌봐주기로 결심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이와 함께 있을테니, 자신도 아이와 같이 사랑받을 수 있을거라 믿는 겁니다. 이 부분의 묘사가 좋아서 저번에 그 부분까지 읽었었는데, 이제 이 부분부터 읽어야겠지요.
저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합니다. 여동생은 지나치게 연약했고 지나치게 사랑스러웠죠. 소녀는 여동생을 돌봅니다. 그렇게 계속 여동생을 돌보며 부드럽고 강한 감정이 치솟는 것을 느낀 소녀는 웃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 아직 태어난지 일년 하고 반 밖에 안 됀 여동생을 살해...... 어? 잠깐만?
소녀는 앙투안의 말에 어깨를 떨고, 동의의 뜻이 담긴 말을 보내왔다. 소녀 역시 약냄새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픔을 가라앉히는것 같으면서도 건조하고, 동시에 건조한것 같으면서도 아픔을 가라앉히는 냄새. 앙투안은 말수가 많은 성격은 아니었고, 소녀 역시 그런듯하여, 그 뒤 잠시 동안은 침묵이 감돌았다. 책장이 잠시 바람에 팔락이는 소리와, 다른 책장과 맞닿아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맴돌 뿐이었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더라도 향기는 주변에 퍼져나가는 법이다. 앙투안은 초콜릿을 꺼낸지 얼마 되지 않아 소녀가 돌아본 것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굳이 의외였던 점은 보다 달콤한 밀크나 프랄린이 아니라 다크 초콜릿을 골랐던 점일까. 물론, 취향은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이고, 딱히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없기에 다크를 골랐을 가능성도 있지만.
"천만에."
앙투안은 오히려 폐를 끼친 것은 자신이라는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비슷한 말을 처음에 했고, 소녀는 공공장소라는 말을 돌려주었으니까. 앙투안이 생각하기에 동어반복적인 대화는 그다지 권장할만한 것은 아니었다.
다시, 좀 전과 비슷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좀 전과 다른 점은, 책장의 소리가 사라졌다는 점과, 신선한 공기 덕분인지, 초콜릿의 달콤함 덕분인지,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해서인지 두통이 좀 잦아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긍정적인 변화였다. 앙투안은 기분이 다소 나아졌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비로소 무언가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앙투안은 자신이 악보를 챙겨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짧게 한숨쉬었다. 두통 때문에 정신이 없기도 했었고, 기억해가면 되기는 하지만,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이다. 앙투안은 잠시동안 그것이 마음을 물들이게 내버려두다가, 곧 치워냈다. 초콜릿 포장지는 폼이 아니다. 부족한 것은...
"어떤 사람이라도 한순간의 실수에서 배워야 하는 법이니까 말이지.." 조언을 아껴서 얻는 것이라고는 그저.. 라고 중얼거렸습니다.
"묻는다기보다는.. 요즘 주위에서 애완동물을 그냥 기를 수 있게 하라는 말이 있더군." 어떻게 생각하는지나 혹시 주위 학생에게 그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는가? 라고 물어보려 합니다. 애완동물은 언제나 위험부담이 있는 법. 이 커다란 로라시아 섬에 애완동물 안 기르는 사람도 있고 기르는 이도 있는 법이지만.. 몰래 기르는 이가 늘어 골칫덩이다. 라는 생각을 합니다.
"만일 보조 인챈트를 넣고 싶거나, 인챈트를 강화하고 싶다면 크리드에게 가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고개를 끄덕입니다.
두 사람은 테오도르가 찾아와 달라고 했던 것을 들고 왔다. 양은 로렌스 쪽이 훨씬 더 많았고, 그가 그만큼 공부량이 많다는 것을 알려주는 장치같기도 했다. 졸린 듯이 하품을 하던 테오도르가 프란츠에게 농담같은 말을 하자, 프란츠는 아무 걱정 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답했다.
" 그래서 묶고 다니고 있죠. 그리고 머리카락에는 바퀴벌레가 들어오지 않는답니다. 도련님. "
머리카락이 빠지면 귀찮기는 하지만요. 프란츠는 그 말을 덧붙이며 묶고 있던 머리끈을 착 풀어버렸다. 로렌스가 이상하게 향기롭다며 소름끼쳐 하는 것은 덤이다. 그때도 잠시, 또다시 날아오는 질문에 다시 입을 연다.
기분 좋은 날씨, 혀 끝에서 녹아들어가는 초콜릿의 달콤함, 잔잔한 분위기. 아. 근래 들어서 이렇게 좋은 날이 있었던가. 언제나 단단하게 굳어있던 경계가 한겹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초콜릿을 한 조각 떼어 입어 넣었다. 이전의 여운이 사라지기 전에 새롭게 이어지는 단 맛이 혀 위로 은은하게 번져들어갔다.
한동안은 그런 조용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상대 역시 말이 없는 편인지, 아님 더 말을 걸지 않을 생각인지 몰라도 말없이 조용해서 더 그랬던 것도 있었다. 나로서는 환영이었다. 간만에 평화롭고 좋은 시간을 맞았는데 그걸 방해한다면 화가 날지도 몰랐으니까.
다시금 초콜릿을 입술 새로 밀어넣을 즈음 그 정적이 깨졌다. 뜬금없이 들릴 거 같지만, 이라고 하는 상대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필기구 있느냐고 물어온다. 그 즈음엔 뭔가 짜증을 낼 만한 마음이 깃털만큼도 들지 않아서 먼저 침묵을 깬 상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스커트의 주머니에서 얇은 여성용 만년필을 꺼내어 내밀었다.
"이런 거 밖에 없지만요."
짙은 파란색에 뚜껑과 마개에 은세공이 덮힌, 주문품인 듯한 얇은 만년필. 잉크는 나오기 전에 채워둔 거니 충분할 터였다. 원하는 만큼 쓰라고 넘겨주곤 시선을 돌려 책으로 향했다. 이제 슬슬 남은 내용을 읽어볼까.
"그건 그렇지. 하지만 혜택을 줄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저번에는 고양이 알레르기를 지닌 학생이 와서 하소연하더군. 작년 기숙사 학생이 고양이를 등록하지 않고 키우는 바람에 알레르기 때문에 대판 싸웠다고.
"여러 사람들, 그리고 크리드랑도 의논해서 결정해야지." 의견을 들어보는 것이니 부담은 없어도 된다. 라고 말하고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라고 시계를 봅니다.
"여러 회의에 참석해야 해서 게이트를 타야 하니. 오늘은 이정도로 하도록 하마." "마지막으로 무언가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보거라." 겉옷을 챙겨 어깨에 걸치려고 합니다. 다음 번에 상담이 있다면 몇가지 더 충고해주마. 라고 덧붙이려고 합니다. 과자 하나쯤 가져가도 좋고. 라고 농담처럼 말하고는 가 보아도 좋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름만으로 부르겠다는 시엔을 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니 생각보다 레벨이 높은 외톨이인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 얼굴을 떼고 다시 천천히 책을 읽어갔다. 얼핏 본 표지가 약간 익숙해 보였다. 분명히 내용이 상당히 기괴했던 것 같은데... 역시 예상한 그대로의 반응이 보였다.
"어때...? 괜찮은 내용이지...?"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말은 작기야 했지만 확실하게 들릴정도는 되었다. 내용이 어쟀건 공통의 화제가 아닌가. 이 정도라면 힘들이지 않고 통화할 수 있을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였다면 이렇게 말 할 생각조차 없었겠지만 왜일까, 이런 곳에는 오는 사람이 적어서 그런지 안심해버린걸지도 모른다.
"전개가 충격적이기는 해도 최근에는 그런 정도는 많으니까 말이야..." ---- 으어아아어아아ㅏ!!! 늦었다!!! 많이 기다리셨을텐데 죄송합니다...;ㅁ;
두통과 더불어 피곤함도 다소 잦아드는 느낌이었다. 앙투안은 살짝 고개를 들어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광장은 그 넓이에 비하면 대단히 조용했다. 입학식, 혹은 개학식 이후 마지막 자유─사실 자유시간 자체는 학기 중에도 있지만─를 찾아갈 사람들은 거리로 나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앙투안은 사람이 많은 것보단 오히려 그것이 훨씬 더 좋다고 생각했다. 앙투안도 소녀도 말수가 많지 않아, 그들의 대화 사이에는 침묵이 내려앉는 빈도가 목소리가 울리는 빈도보다 훨씬 높았지만, 그것은 거북함과는 거리가 먼 편안한 침묵이었다. 만약 시끌벅적한 소음이 끼어들었다면 오히려 두통이 더 심해졌을 것이다. 타고난 성격도 한몫 했을지도 모르지만.
"......고마워."
앙투안이 대답 사이에 잠깐 침묵을 둔 것은 약간 놀랐기 때문이었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이 현실이 되면 누구나 그렇듯이. 소녀가 내민 것은 소녀의 머리카락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푸른색 만년필이었다. 뚜껑과 마개에 덮인 은세공이 섬세했다. 평범하다고는 할 수 없는 가정에서 자란 앙투안이 보기에도 수준높은 주문품이었다. 이런 것이라면 함부로 남에게 주기 꺼려질 만도 하건만. 여성용이어서일지 앙투안의 손에는 작았지만, 앙투안은 감사히 만년필을 받아들었다. 꼭 돌려달라는 소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남은 초콜릿을 입에 밀어넣은 뒤, 앙투안은 초콜릿 봉지를 접힌 곳 없이 폈다. 그리고 간단한 악보를 적어가기 시작했다. 은박이라는 특성상 종이에 적을 때보다는 선이 확실지 않았지만, 만년필이 제법 좋아서인지 필감은 절대 나쁘지 않았다.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 은박지 위에 펜이 미끄러지는 소리, 희미한 바람소리. 이따금씩 들려오는 웅성거림. 두통에 시달렸던 것이, 어쩌면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머릿속의 음에 맞춰 자신의 무릎을 두드리며 앙투안은 생각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은박지에 빼곡히 음표가 채워졌다. 여백이 더 없는 것이 아쉬웠지만, 이정도만 해도 감지덕지한 것이다. 무엇보다, 잉크를 꽤 써버렸다. 앙투안은 짧게 한숨을 쉬며, 책에 빠져든 듯한 소녀를 불렀다.
"...여기. 방해해서 미안해. 덕분에 좀 더 진도가 나갔어."
나중에 혹시 마주친다면 그땐 새 만년필이나 잉크병을 선물해야 할 것이라고 앙투안은 되새겼다.
왜 갑자기 여기서 이게 나와? 싶은 수준으로 갑자기 여동생을 죽이는 장면이 나왔다. 그래서 그 전을 다시 읽었더니, 아아. 아니었군요. 복선은 이미 잔뜩 깔려있었는데 내가 눈치를 못 챈 거였어. 이게 복선인지도 모르다가 뒤통수를 훅 맞았다. 뭐지, 이 다음이 너무 궁금해. 너무 재밌어.
"최근에... 그래요, 이런 정도는 많죠. 갑자기 이런 전개가 확 튀어나오는 것도...... 예상치는 못했지만 좀 더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호기심을 유발하는 요소니까요. 이렇게 글을 잘 쓸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는 그렇게 말하곤 당신을 보다가,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립니다. 그 다음 장면은 소녀가 피투성이가 된 채로 동생의 시체를 (삐-)......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뭐야 이거 무서워. 이젠 그만 읽고싶은데.
"......이런 장면도 이렇게 묘사를 잘 하다니 참 뭐랄까... 부러워지는 사람이에요. 이 작가. ...혹시 에녹 씨는 좋아하는 소설이 있나요?"
로렌스가 손가락을 튕기며 대답한다. 단답이긴 했지만 그만큼 확실한 의미 전달도 없었다. 프란츠는 그 모습을 보며 책상을 톡톡 두드린다. 뭐,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수 없죠. 같은 느낌으로 예상할 수 있다. 대신 프란츠는 테오도르의 약간의 분노섞인 말을 듣고는 거기에 답했다.
" 결국은 운인거죠. 후후. "
딱히 과시적인 말투는 아니었지만, 마지막의 웃음이 미묘하게 자랑하는 것으로 들린 것은 기분탓일까.
" 그러고보니, 저번에 어떤 아가씨와 함께 가는걸 본것 같은데요.. " " 그런 일 없어. " " 과연 그럴까요? 그것보다, 이건 제 버릇이나 다름없는 말투니까요.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으셨는지요. "
로렌스가 뭔가 말하려다가 멈춘다. 아마, 자기도 익숙해지는데 몇 년은 걸렸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지만 딱히 말을 끼워넣고 싶지는 않았는지 어느새 아무 책이나 골라서 읽고 있다. 프란츠는 별 생각 없는듯 테오도르에게 말을 건다.
" 휴일인데도 공부해야 한다니, 4학년쯤 되니까 참 힘드네요. 이런 날에는 밖으로 나가고 싶은데. "
없을 거라고, 아님 빌려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나. 상대의 대답 전의 그러한 느낌을 주었다. 그럴 법도 하다. 나는 내가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에게 어떤 분위기를 뿜는지 익히 알고 있었다.
만년필을 빌려주고, 상대가 무얼 하는지는 딱히 보지 않았다. 필기구를 찾았으니 어련히 무언가 쓰겠거니 싶었다. 음... 간간히 들리는 소리로 보아 글자를 쓰는 건 아닌 것 같고. 선? 선... 악보? 대강 그런 것만 들리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그 사이 나는 책장을 두번 더 넘겼고 초콜릿 역시 꾸준히 먹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창 내용에 집중하고 있는데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다 썼나보네. 나는 책이 넘어가지 않도록 한 손으로 잡고 상대에게서 만년필을 돌려받았다.
"괜찮아요. 마침 있었던 것 뿐이고."
없는 걸 찾았으면 짜증냈을지도 모르지만. 담담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농담 같지는 않다. 돌려받은 만년필을 흔들어보니 잉크가 꽤 줄어있었다. 짧은 사이에 많이도 썼네. 주머니에 챙겨넣으며, 아까와 같이 지나가듯 물었다. 순간의 호기심이었다.
오랜만에 더듬지도 않고 적당한 목소리로 말한 건 나조차도 싫어질 정도로 담담하게 빈공간을 매워갔다. 아무리 그래도 소설. 매일같이 그런 일이 일어나는 곳에서 살다보니 현실감이 무뎌진건지 그정도의 내용은 아무렇지 않은 수준이 되었다. 애초에 형제간의 정이라는게 얼마나 될까. 최소한 본국에서, 왕자나 왕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라면 극 소수를 제외한다면 다들 남이나 다름 없이 여길텐데 말이다.
"아... 아니야. 방금 말한건 잊어주는 걸로 부탁해. 응. 그리고 잘 쓰려면 많이 쓰는게 정답이야. 많이 쓰면 잘 쓰게 될거야."
그림이 한 눈에 완성되는 예술이라면 소설은 천천히 베일을 벗겨가는 예술이라고. 어떤 책에서 읽어본 적이 있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난 쓰는 것 보다는 읽는 게 좋으니 별 문제 없다고 느끼는 거지만. 쓰는게 좋다면 역시 그 베일하나하나의 완성도를 계속 올리는 수 밖에 없다. 초반에 지루하다가 후반에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작품은 복선을 찾아서 다시보면 극초반부에 아무렇지도 않게 뿌려진 복선이 후반에는 엄청나게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했다. 모든 내용이 연결되도록 하면서 그렇지만 파트의 완성도를 떨어뜨리지 않는 선으로. 물론 저 책은 어디까지나 흥미를 돋구는 수준이다. 슬래셔물은 아무리 잘해도 슬래셔물이지.
"...소설은 아니라도 최근에는 이거 읽고있어."
천천히 눕혀둔 책을 일으켜세워서 표지가 보이게했다. 아까부터 읽고있던 책은 당연히 그거다. 화려한 글씨체로 유머 100선이라고 적힌 기묘한 책. 물론 중고로 버려질 예정이던걸 가져온거라 딱히 상태는 좋지 않았다.
"나중에... 한번 읽어봐. 읽고싶으면 빌려줄게."
물론 보존상태가 안좋다고해서 훌륭한 서적이 아닌건 아니다. 사람은 꺼린다. 하지만 이런걸 싫어하지 않는다면 딱히 일부러 피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며 다시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누군가가 혹시 종이를 보자마자 모든 악상이 떠오르느냐 묻는다면, 앙투안은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해여 비로소 결과가 나왔을 때 악보로서 적어내는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초콜릿 봉지라는 공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악보에, 본디 남의 물건인 만년필로 만들어나가고 있으니, 더욱 실수로 '좋지 않은' 음을 위치시키는 것은 지양해야 할 일이었다. 만약 수정하게 되더라도 방에서 수정함이 마땅하다. 그래도 두통이 잦아들어 한결 나아진 기분과, 편안한 침묵과, 탁 트인 곳에서 자유로이 불어오는 바람은 앙투안에게 꽤 괜찮은 악상이 떠오르게끔 해주었다. 졸작은 나오지 않을것이다. 앙투안은 생각했다.
"그리고 나한테는 없었지."
담담한 소녀의 말에 앙투안은 마주 담담히 대답했다. 남이 물건을 빌려달라 할때 짜증내는 사람은 보통 물건이 있을 때 빌려주기 싫어하는 경우가 많지만, 소녀는 그 반대인 모양이었다. 앙투안은 잠깐 의문을 가졌지만 곧 납득했다. 없는걸 그 자리에서 당장 만들어내는 것은 보통은-그런 종류의 능력자가 아니라면야-불가능하니, 이상하지는 않다. 문득, 소녀가 손으로 책장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새 만년필보다는 펜촉과 책갈피가 나을까.
굳이 음표나 기호가 아니라 줄을 긋는 소리만 해도 글씨를 쓰는 소리와는 다르다. 앙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작곡이 취미라서. 연주......는...... 지금은 못하고."
남앞에서 직접 연주하는걸 내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제외하고서라도, 피아노를 들고 다닐 정도의 힘이 없는 이상, 무리다. 볼래? 라고 말하는 대신, 앙투안은 초콜릿 봉지를 들어 소녀에게 보여주었다.
지금도 많이 쓰고 있었다. 그렇지만 더 써야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당신이 읽고 있었다는 책을 봅니다. 유머 100선. 음...... 재밌어보이네.
"나중에... 나중에 빌릴게요. 지금은 읽을 책도 많고 할 일도 많아서 읽을 시간이 없지만, 나중에는 시간이 생길테니까 나중에 만나게 되면 빌려달라고, 말해도 괜찮죠...? 에녹 씨."
그렇게 말하며 상냥하게 웃는다. 원체 부드러운 인상이었지만 더 부드러워보이는 얼굴이 되었다.
"그러고보니까 에녹 씨는 별을 좋아하나요? 전, 정말로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머리에도 별 모양 핀이 한두개 꽂혀있는걸까. 싶어지는 말이었다. 시엔은 속으로 꽤나 조마조마하고 있었다. 혹시 별 싫어하진 않으실까? ......아니면 이렇게 초면에 대뜸 묻는 게 싫지는 않으실까? 모르겠다. 정말로, 사람과 만나서 살아간다는 건 나에게 그런 것이었다. 사람이 싫었던 나였기에,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아아, 모르겠다. 사람은 무섭다. 그렇지만 좋은 존재니까. 그러니까 최대한 믿어보려고 노력하는데 그게 안됀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아. 이제 시간이... ......죄송하지만 전 이만 가볼게요. 나중에 만나요."
상념에 빠져있다보니 시간이 되었다. 이만 가 봐야겠지. 자리에서 일어나고 그 장소를 벗어난다.
연주를 하느냐고 묻기는 했지만 취미일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연주 쪽이 능력 아닐까 싶었다. 이 학원에서 허투로 무언가를 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래서 작곡이 취미란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능력이면 그럴 수도 있지.
지금은 못 한다는 걸 보니 휴대가 간단한 악기는 아닌가보다. 아니, 처음 여기 왔을 때부터 상대는 달리 무언가 들고 있지 않았다. 연주하는 악기가 무엇인지 몰라도 어쨌든 지금은 연주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거다. 아까 낯빛도 좋지 않았고.
보여달란 말도 안 했지만 상대가 선뜻 쓴 걸 보여주었다. 익숙한 오선에 이리저리 찍힌 음표들. 여자애가 악기 몇은 다룰 줄 알아야 하지 않느냐면서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덕에 악보를 볼 줄 알았다. 덕분에 보는 동안 나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책을 톡톡 두드리며 음표를 따라갔다. 몇군데 어색한 부분이 좀 있었고, 완성본은 아니었지만 제대로 완성되면 한번 들어보고 싶을 것 같은 곡이었다.
"피아노인가요. 연주하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지게 하네요. 수정의 여지는 있지만."
간단하게 말하고 악보가 적힌 초콜릿 봉지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집에서 피아노를 칠 때엔 어머니가 앞머리를 땋아 정리해주셨었는데. 그 생각이 나서 앞머리 끝을 살짝 만지작거리다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다시 채우면 돼요. 어차피 소모품이고, 굳어서 못 쓰게 되는 것보다 낫고."
굳을 때까지 안 쓰진 않겠지만. 그리 말하고 여태 내려놓았던 안경을 들어 다시 썼다. 안경을 썼으니 책은 더 안 볼 셈이었다. 읽던 책도 책갈피를 꽂은 뒤 덮고서 잠시 머리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면 책을 빌려도 되냐는 물음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한번 시엔을 힐끗 쳐다보았다. 편안해보이는 인상. 그래서 더 방심할 수는 없다. 저런 사람일수록 속내가 어떤지는 알 수 없는 법이니까. 짧은 인생사에서 배운건 그런 것 뿐이었다.
"별은 그렇게 좋지도 싫지도 않아."
가끔씩 보면 좋기야 했지만 평소엔 특별한 일이 아니면 고개는 떨구고 다니니까 볼 일이 적기도 했다. 애초에 밤에는 자고 낮에는 틀어박히는 내 특성상 연이 없는 것에 가까웠지만 그 부분은 말하지않기로 했다. 한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누가 어떤 이야기를 햿던 것 같지만 그것도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손을 뻗어도 손끝에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건 그냥 없는거라고, 그저 그렇게 생각했다. 점점 감각이 날카로워졌다. 지잉거리며 이명이 귀를 울리고 갑자기 찾아온 두통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눈 앞에 있던 소녀는 나의 두통이 잦아드는것과 함께 시간이 되었다며 어디론가 훌쩍 떠났다. 무언가 나조차도 알 수 없는 말이 목언저리까지 올라왔지만 말할 수 없었다. 그저 빈자리를 향해 손을 뻗을 뿐이었다.
"아..."
무언가가 비어있는 목소리가 조용하게 헌책의 냄새와 함께 잦아들어갔다. /// 저도 막레!!! 시엔주 수고하셨습니다!!!
격정적인 음악은 아니었다. 화려한 곡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단조로운 쪽에 가깝다. 앙투안은 그것을 아쉽게 생각하지 않았다. 화려한 곡이든 평화로운 곡이든 곡은 그 나름만의 짜임새가 있으며, 악상을 다시금 떠오르게끔 해준 풍경이 풍경이었으니. 눈 앞의 소녀는 악보를 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악기를 다뤄본적이 있는 듯했다. 음높이와 박자에 맞추어 움직이는 소녀의 손가락을 보며 앙투안은 자신의 머릿속에만 있을 때와는 다소 다른 느낌으로 소리없는 연주를 들었다.
"기교가 필요한 곡은 아닐거야."
물론 어느 정도의 기교는 들어가겠지만, 앙투안은 기교보다는 기본기에 충실한 곡을 좀더 선호했다. 입문 난이도 자체는 크게 높지 않지만, '제대로' 연주해내려면 기본을 허투루 넘긴 사람에게는 어려운. 앙투안은 자신의 곡을 볼 때면 형이 인상을 구긴 것을 잠시 떠올렸다.
소녀는 어째서인지-혹은 곡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는지 앞머리를 만지작거리고는 안경을 다시 쓴다. 앙투안은 어째서 앞머리로 가렸는데 안경을 쓰냐고는 묻지 않았다. 언뜻 보기에는 불편하지 않을까 싶지만, 지금의 차림새를 고수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소녀의 말에 앙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알았어. 그렇다면 거기에 대해선 더 말하지 않을게."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지만, 상대가 굳이 사양하는데 계속해서 말하는 것도 강요의 한 종류가 될 것이다. 앙투안은 소녀가 머리칼을 만지는 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초콜릿과 더불어 습관적으로 넣고 다니던 끈을 떠올렸다. 지금의 앙투안의 머리길이엔 맞지 않아 쓸수 없지만. 앙투안은 끈을 꺼내서 소녀에게 내밀었다. 아무래도 남자용이기에, 큰 특징 없는 흰 끈이었다.
>>576 A1. 물론이다마다요! 선레는 .dice 1 2. = 1 1: 인디고 2: 시엔 A2.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 / 가장 편한 사람은 고향의 스승님, /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부모님! A3. 아직 생각해 놓은 바로는 없... 지만... 추가될 수도요? 떠오르면 떡밥을 풀겠습니다!
기교가 필요하지 않은 곡. 나는 본래 그런 곡이 잘 맞았다. 뭐든 기초가 탄탄해야한다는 걸 어머니로부터 귀아프게 듣고 자란 탓도 있었다. 스스로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지만서도. 뭐 그런 곡이라면 나도 연주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연주를 하려면 손을 좀 풀 필요가 있...있으려나?
"...하려면 해야겠지..."
잉크에 대한 건 내가 괜찮다고 하자 알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선선하니 좋네. 가끔 부담스럽게 답례를 하겠다거나 하는 사람이 있어서 싫었는데 이 사람은 시원시원하게 넘어가서 편하다. 음, 어쩌면...
상대가 하얀 끈을 내밀었을 땐 나도 모르게 응? 했다. 뭐지 이 끈은. 아, 내가 머리 만지는 걸 보고 필요한가 했나. 뭔가 화려한 그런 거라면 단박에 거절했겠지만 저건 있으면 가끔 쓰겠다 싶었다. 그래서 선뜻 끈을 받아들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잘 쓸게요."
그렇게 말하곤 즉석에서 긴 머리를 훑어올려 하나로 묶어버린다. 잘 안 묶을 뿐이지 이런 끈으로 묶는 건 익숙했다. 간만에 목덜미가 드러나자 시원함을 느끼며 앞머리만 잘 내려오도록 다듬었다. 앞으로 자주 좀 묶을까. 앞머리는 어쩔 수 없지만서도.
창 밖으로 별이 뜬 것을 보자마자 번뜩 시엔이 생각났다. 연상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강한 인상을 받았다는 거겠지. 또, 곧 이렇게 만나게 되리라는 암시이기도 했으리라. 「모든 번뜩임과 영감은 필연을 가리킨다!」 스승님이 하신 말씀은 아니고, 피센에 살던 시절 마을 장로가 한 설교다. 모든 부와 가난은 텐게르께서 쏟으시는 항아리에서 나온 것. 그런 의미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끝은 칼라미티가 맺듯이, 인간의 직감과 발걸음은 텐게르께서 점지하시는 것이다. 종파마다 의견은 다르지만, 일단 우리 마을 장로는 그렇게 말했다.
“바람을 쐴까”라면서, 반쯤은 시엔을 찾으려는 의중으로 기숙사를 나섰다. 왠지 반드시 마주칠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이번 주는 수업도 없고 한적하니 저녁에 나다녀도 그렇게 눈치가 보이지 않는다. 통금 규제도 조금은 느슨해진 기분이 들었고. 나는 곧장 아카데미를 나서서, 상점에서 음료를 샀다. 과즙이 들어간 설탕물이다. 벌꿀술이나 맥주를 사기에는 눈치가 보인다.
풀밭이 가로 늘어선 길을 걸었다. 여름이 조금은 일찍 종적을 감춘 것 같았다. 마주 불어오는 바람에서 점점 무더위의 흔적을 찾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하늘에 박힌 별자리들은 기숙사 방 안에서 본 별과 다름이 없다.
“셴!”
조금 걷다가, 별을 올려다보고 있는 시엔을 보았다. 직감이 맞은 것일까, 결국 내가 찾을 작정으로 나왔기 때문에 마주친 것일까. 텐게르만 아실 일이었다.
앙투안은 소녀의 말에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하려면 한단 것은 연주에 대한 이야기인 것일까. 곡이 소녀의 마음에 어느정도 맞는 듯했다. 자작곡이 호평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그다지 없는-비뚤어진 소수의 사람을 제외한다면- 법이며, 앙투안은 다수에 속했기에 기분이 약간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겉으로 보기엔 별 차이가 없겠지만. 무리할 필요는 없어, 라거나 음악실에 피아노가 있으니 거기서 풀면 돼, 라고 하는 대신 앙투안은 가볍게 말했다.
"고마워."
담백한 어조였지만, 곡이 곡이니만큼 화려한 미사여구는 필요 없을 것이다.
"어차피 난 안 쓰니까. 갖고만 있는 것보단 낫고."
만년필을 돌려줬을 때와 비슷하다. 차이점이라면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이 서로 반대가 되었을 뿐이다. 소녀는 층진 머리카락을 시원스럽게 묶어올렸다. 앙투안은 평소에는 볼 수 없던, '머리를 묶었을 때의 끈의 모양'을 잠시 생경하게 바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묶은머리, 긴 안경이라니 어쩐지 도서관에 있으면 어울릴것 같다고-그리고 그것은 편견이라고 생각하면서.
"아. 혹시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
악기를 다루는 사람이라면, 나중에 앙투안이 작곡 도중 곡의 느낌에 대해 조언을 구할 때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학원은 매우 넓었다. 푸른 머리카락, 소녀, 앞머리를 가린 머리 모양만으로 사람을 찾기엔 많이. 물론,
아무리 직감을 믿어도 다른 사람의 기분까지 파악할 수는 없다. 어째서일까,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장담할 수 없어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 잠깐 동안 고요했던 응시, 어려워 보이던 미소 때문이었나. 다행히도 잽싸게 전환할 화제가 이미 있었다.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들긴 했는데, 만날 줄은 몰랐네. 아무튼 비슷한 기분은 들었어. 흠흠…, 나도 구경해도 돼?”
혼자 있는 걸 방해한 건 아닐까 싶었다만, 일단 앉고 볼 일이었다. 흙으로 의자를 만들기도 귀찮아 바닥에 털썩 앉았다. 어차피 엉덩이가 젖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점점 빛이 바래는 키 큰 풀 줄기가 등허리를 간지럽혔다. 전에도 같이 별을 봤었지, 분명…. 페가수스자리 하나는 확연히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북극성도. 그러나 나머지는 또 가물가물했다. 어릴 적에는 천좌를 읊는 게 해도를 읽는 것보다도 즐거운 일이었지만, 이렇게 빨리 까먹어 버리는 사람이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거 마셔.” 음료가 담긴 유리병을 하나 내밀었다. 속에서 보랏빛 액체가 찰랑거렸다. 포션 ― 전장에서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마시는, 치유 능력이 인챈트된 액체 ― 병과 비슷한 모양새지만 병 주둥이에 효력의 정도를 나타내는 표시가 없다. 내 것도 입 근처에 주둥이를 가져다대고 마개를 이빨로 뽑았다. 한 모금 입에 머금어 목을 축였다.
“새로운 별자리, 나타난 거 있을까.”
무언가 해야만 하는 중요한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뻔한 이야기로 시간을 끄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는 일이었다.
신기하다며 웃더니, 바닥에 앉은 널 보다가 네 곁으로 조금 더 다가갔다. 그러곤 살짝 기댔다. 오늘은 왠지 주변에 누구라도 좋으니 있어줬으면 했어. 근데 그게 네가 될 줄은 몰랐네.
"...어, 이거 주는거야? ......고마워."
제게 건네어진 음료를 보다가 마개를 잡고 낑낑대다 겨우 마개를 뽑아낸다. 겨우 뽑아낸 뒤 음료가 담긴 병 끝자락에 입을 대고 음료를 입에 머금고 목 뒤로 금방 넘겨버린다. 혀로 음료의 맛 같은 가벼운 것이라도 감각이 느껴지니까 어쩐지 외롭지만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외로운데도 그렇지 않다고 일부러 착각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지만 나는 원래 그런 당연한 거짓말을 하는 존재였으니까 당연한 것이다. 나는 멍청하기 그지없었고, 뭘 해도 그녀에게서 이길 수 없었으니까.
"...별자리, 글쎄. 새로운 게 나타나긴 했을까. ......사실 별똥별만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럴 일 없지만..."
난 별똥별이 떨어지는 게 싫거든. 그렇게 덧붙이곤 가만히 널 보다가 웃는다.
"너는 소중한 사람을 잃어본 적 있어? ...아니면 싫은 사람을 잃어본 적 있어? ......별이 떨어지면 그건 사람이 하나 간 거라잖아. 갑자기 생각나서."
나는 지금 어떤 표정일까? 울고 있어? 아니면 웃고 있어? 글쎄, 난 모르겠어. 내 안면근육이 내 마음대로 안 움직이는 기분이야. 분명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데 내 마음대로 안 움직여. 분명 나는 웃고 있는데 사실 속으로는 아니야.
나는 생각에 빠졌다. 피센의 마르바에서 보낸 유년기, 티엘린에 들어오기 위해 2년동안 공부했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잃었나. 엄밀히 말하자면 잃은 것은 없었다. 백척간두 위에서 나는 이상하리만치 잘 버텼다. 하지만…. 그래.
“없어. 변명하자면, 그래서 조금 무서워. 언제라도 잃게 될까봐.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거지, 난….”
천구는 세상 주변을 돈다. 일 년에 한 바퀴씩, 태양과 함께 황도도 운행한다. 별은 어찌 보면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루에 머리카락 한 올만큼, 모든 것은 남쪽으로 밀려가고, 동쪽에서 다시 쓸려온다. 이름을 알거나 모르는 별들이 사라지고 또 태어나는 것이다. 이 잔인한 운행에서 유일하게 불변하는 것은 북극성뿐이다. 조금 슬퍼져서 숨이 답답해 콧숨을 킁, 하고 쉬었다.
“그래도 난 다행이라고 생각해. 아직 젊다는 게, 잃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았다는 거잖아. 부모님이나, 스승님이나, 그리고 너나…. 어쩌다 내가 먼저 죽을지도 모르고. 하여튼 마음 준비를 하는 법을 배울 시간이 많이 남은 게 다행이야.”
로머라는 직업을 지망하게 되었다면 각오라는 것이 필요하댔지. 시선은 계속 하늘을 향해 있었다. 밤바람이 조금 차가웠다.
앙투안의 대답에 소녀는 움찔 놀란듯 보였다. 어째서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지만, 앙투안은 굳이 이유를 묻지는 않았고, 소녀 역시 그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기에, 주변에는 다시금 침묵이 내려앉았다. 앙투안은 문득 머리 위에 비추던 태양빛의 각도가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생각보다 광장에 온 뒤 시간이 많이 흐른 모양이었다. 보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 처음 광장에 왔을 때만 해도 머리를 쪼갤것만 같던 두통도 어느새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잦아들어 있었다. 이대로 조금만 지나면 완전히 없어질 것이다.
이름을 묻는 앙투안의 질문에 소녀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역시 초면인-혹은 강의실로 이동할때 멀리서 봤을 가능성도 만에 하나는 있었지만-사람에게 이름을 말하는 것은 내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앙투안이 생각한 찰나, 소녀가 대답했다. 헤일리 미뉴엣. 성씨가 춤곡의 이름이라는 사실이 잠깐 앙투안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만약 앙투안이 좀 더 붙임성이 있거나 너스레를 떠는 성격이었다면 관련 질문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붙임성 있는 성격도 아니었고, 너스레는 더더욱 없었기에, 앙투안은 그저,
"앙투안 위페르. 4학년이야."
선선히 헤일리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럼. 미뉴엣 양. 내가 꽤 시간을 뺏은 것 같네."
앙투안은 악보가 적힌 초콜릿 봉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잉크가 다 마른 것을 확인했으니 안에서 번질 우려는 없었다. 앙투안은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서서 앉아 있는 동안 구겨진 옷깃을 바로잡고는 헤일리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두통도 나아졌고, 곡도 얼개를 잡을 수 있었어. ...고마워. 좋은 저녁이 되기를."
아사티르는 마지막 단추를 채우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카데미의 교복이 아닌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일상복이 곧 사제복인 그가 이곳에서 사제복을 입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렇게 그가 사제복을 입게 된 이유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카데미 내에서는 유스쿠 교의 각 신들을 모시는 신전이 세워져 있다. 아사티르도 라저 종파의 교리를 따르는 견습 사제이다 보니 아카데미 내 신전을 관리하는 사제와 같은 동년의 학생들보다도 더 친해지게 되었다. 사건은 어제, 사제는 신전 근처에서 나무의 가지를 치다 넘어져 심하게 다치게 되었다.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해 도저히 미사를 드릴 수 없는 처지였고 그를 대신해서 아사티르에게 부탁하게 되었다. 리그트 신을 모시는 입장으로서 아사티르는 망설이지 않고 사제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옷장의 한켠에는 검이 세워져 있었다. 본래라면 검을 차고 다녀야 하지만 오늘은 성 아르고트 성전기사단의 견습기사가 아닌 리그트 신을 따르는 견습 사제로서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검을 차고 가면 안 된다. 언제 어디서나 검을 들고 다니던 아사티르에게는 낯선. 그러면서도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그나저나 잘 할 수나 있을련지..."
한 가지 걱정이 되는 점은 자신감이었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리그트 신을 모시며 살면서 미사나 기도는 셀 수도 없이 드렸지만 본인이 주도해서 미사를 드리기에는 오늘이 처음이다. 걱정은 되지만 해야만 하는 일. 한숨을 내쉰 아사티르는 걱정 반, 기대 반을 품고 기숙사를 나왔다.
라저 분파의 신전으로 가다 아사티르의 눈에 들어온 것이 보였다. 귀여운 그림과 '친구와 싸우지 마세요!'라고 적혀진 팻말을 목에 달고 거리의 쓰레기를 줍는 학생이었다. 그것도 귀찮은지 캔을 발로 툭툭 건드리며 설렁설렁 일하고 있었다. 그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러고 있는 것일까?
"변명이 아니야. 나도 무서워. 잃어봐서 더 무서워. ......너무 질투났는데도 너무 좋은 사람이었고, 너무 다정한 사람이었어. ......너무 착한 사람이었는데 내가 질투한 게 잘못이었나봐. ...아. 이야기가 딴 길로 샜네."
언제라도 잃게 될까봐, 너는 무섭다고 했다. 네가 무서워하는 만큼 나도 무섭다. 아무도 잃기 싫은데 잃을 지도 몰라서 무섭다. 이 일을 선택하는 게 아니었는데, 내 언니는 로머가 되길 바랬고 내가 그녀의 유지를 이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언니를 닮은 거울이었고 언니를 투영한 거울이었다. 거울이라고 해서 원본과 똑같을거라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았을텐데.
"...만약 죽는다면 나 먼저 죽을래."
예상치 못하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예상했을지도 모르는 말이었다. 그건 상관없다. 그냥 나는 죽는다면 적어도 날 기억해줄 사람 하나는 남기고 죽고 싶었다. 그래서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래서, 전부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네가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나 먼저 죽을래. ......네가 죽는 걸 본다면 내가 많이, 힘들어질 것 같아. 친구니까."
툭툭 내뱉듯이 그렇게 계속 말한다. 아무래도 내가 제정신이 아닌가보다.
"네가 죽은 뒤에 내가 널 기억하게 된다면 내가 많이 힘들테니까 내가 먼저 죽을래. ...나 되게 이기적이지?"
눈물이 한 방울 톡, 떨어졌다.
"근데 나 좀만 이기적이게 해줘. 너보단 내가 먼저 죽을래. 내가 죽은 뒤에 네가 날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너보단 내가 먼저 죽게 해줘."
사람이 이렇게 무기력해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태한 모습을 보이며 쓰레기 줍는 것도 설렁설렁 하던 그는 이윽고 자력을 이용해 캔으로 무언가를 조립하기 시작했다. 이미 벌이란건 그에게 무의미한건지 간혹 와아 나 우우 같은 이상한 추임새를 넣으며 조립하는 모습이 애석하다를 넘어 한심하다. 아무튼 그가 캔을 이용해 양철로봇을 완성할 때 쯔음 누군가 쓰레기를 주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라는 인사를 들으면 안녕하세요 라고 답변해야겠지...?"
어딘가 종교인 처럼 입은 사람이였다. 그에게 있어서 종교란 믿을 사람이 믿고 마는거다 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런 그도 교회 같은 장소를 간 적이 있었다. 성가대의 여자애가 귀여웠으니까. 아무튼 종교에 관한 접점은 1도 없는 그에게 종교인이 다가오자 디트리히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그런데 그.. 사제님? 신도님? 은 무슨일로? 혹시 사제신도님도 벌을 받으시는 건가요? 그럼 이 팻말을 인수인계 해드리겠습니다"
>>670 신벌을 내린 사건 외에는 엄청나게 개입하는 사건은 많지 않습니다! 일종의 신탁 같은 건 내리긴 했지만..말이지요.
그도 그럴 것이 리그트 신은 책 쓰느라 바쁘고(가끔 이런 이가 태어날 것이다 라는 느낌은 가능함) 칼라미티 신은 안식하고 계시고(깨어나서 화답하는 게 재앙의 전조다!) 그나마 텐게르가 화답하는 빈도가 잦기는 하지만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은 어렵거든요. 약간 행운을 더해줄 수는 있지만.. 삼주신은 인간과 아바돈에 대해서 드러나진 않지만 생각보다 공정한 편이기도 하니까 말이지요..
말의 물줄기는 구멍 뚫린 독처럼 계속 흘렀다. 아무리 손이 커도 틀어막을 수 없다. 모든 유체는 아래로 흐른다. 다만 누구인지는 묻지 않았다. 독의 구멍을 넓히는 짓이다, 그건. 밤이 꽤 짙게 쌓여서 시엔의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란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이제 다음 주쯤이면 진짜 아바돈을 마주하게 되리라. 하마르에 도사리고 있는 아바돈보다는 훨씬 약하겠지만, 그래도 표적 인형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었다. 발톱에 대한 공포가 긁힘에 대한 공포로, 긁힘에 대한 공포가 잘림에 대한 공포로 점점 종양처럼 자라 가는 것을 나도 느낄 수 있었다. 눈을 잃고, 팔을 잃고 하는 것은, 각오한 일이었지만 감당하기 어려웠다.
베테랑 로머들은 의수를 달고 있거나 애꾸눈인 사람이 많다. 철갑도 가볍게 찢어발기는 아바돈에게 당했는데 팔 한 짝, 눈 한 알밖에 잃지 않았다는 것은 순전히 요행이거나 다른 이유가 있어서다. 죽음을 겁냈던 것이다. 그 대가로 평생을 결손의 덫에 붙잡힌 채 사는 것이다. 아바돈에게 완전히 당한 이들은 무덤에 있지, 땅 위에 있을 수 없었다. 나는 그런 것들을 설명하고, 나도 공포를 느끼며, 너를 위로하고자 한다… 그런 말을 하고 싶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사람들을 놔두고, 부모님이나, 고향 사람들이나, 너 같은 친구를 두고 죽으면 과연 어떻게 될까. 전장에서 누군가가 죽을 날이라면, 누가 먼저 죽어야 할까. 네 말마따나 ‘이기적인’ 네게 양보해야 하나. 머리가 아팠다.
시엔의 목소리가 흔들리는 것이 들렸다. 나는 조금 당황했다. 팔이 떨리고 머리가 지끈 달아올라, 바닥에 짚고 있던 오른팔이 휘청였다. 확연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풀밭에 달빛이 맺혀 떨어진 것 같았다.
프란츠는 잠시 고민하고 있었지만, 곧 그녀가 추천해준 파니니를 골랐다. 음료는 별로 고민하지 않고 평소와 똑같이 아메리카노로 결정했다. 메뉴를 고른 다음 그는 그녀가 고른 것까지 유심히 살펴보더니, 곧 함께 계산하기 위해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 좋은 곳을 알려주셨으니, 그만큼 보답을 해야죠. "
처음 오는 곳인데 좋은 곳인지는 어떻게 아느냐 묻는다면,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는 거리에 세워진 가게는 대부분 맛이 좋았다.. 라는 납득이 가면서도 가지 않는 그의 경험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이런 곳에 세워진 가게가 맛이 없다면 금방 문을 닫지 않았을까. 같은 것이다.
" 으으음. "
그는 작은 추임새를 넣는다. 카페의 분위기가 상당히 편안한 느낌을 주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조금만 더 참으면 성 아르고트 성전기사단의 본거지인 빛의 요새로 돌아간다. 아카데미에서 생활한 지 2년 가까이 되었지만 아사티르는 이곳이 익숙해지지도 편해지지도 않았다. 빛의 요새에 있었을 때가 더 나았다. 침대는 돌같이 딱딱하고, 어른들은 무뚝뚝하며 낮에는 강도 높은 훈련과 밤에는 신학을 공부하는 힘든 삶이었지만 아사티르에게는 빛의 요새가 진짜 집이었다.
아사티르는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시계탑에서 시간을 확인했다. 신전으로 가기에 아직 시간은 널널했다.
그렇게 말하곤 너를 가만히 보았다. 네가 굉장히 동요한 것 같았다. 그런데도 미친 사람처럼 계속 말이 쏟아졌다. 입은 제멋대로 움직였고, 내뱉어지는 말들은 네게 하고 싶지 않았던 말들 뿐이었다.
"......울으면 안돼는데 자꾸 울고 있네. 나 진짜 멍청하다. 그치? ...그런데 난 죽어도 어차피 잃을 게 없거든. 내 가족들은 날 그닥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고, 내 언니는 이미 갔고, 난 언니의 대용품처럼 언니를 상기시키는 존재가 될 뿐이지. 그러니까 내가 죽는다면 넌 살았으면 좋겠어. 로머가 되어서도, 몸 건강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어. 내가 그렇게 살 수 없으니까 니가 그랬으면 좋겠어. 그 사람은 그럴 수 없었으니까 네가...!"
그렇게 말하며 웃으려다가, 갑자기 스쳐지나가는 생각에 눈을 깜빡인다. 아, 이제보니까 나도 널 언니와 겹쳐보고 있나보다. 자괴감 든다. 기분나빠. 싫어. 왜 내가 제일 싫어하는 걸 내가 너에게 하고 있을까?
"...아."
이게 아닌데. 나 때문에 이 관계가 망가질 것만 같다. 내가 잘못했다. 내가 전부 잘못했어요.
"......아아. ...이게 아닌데. ......미안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내가 너한테 이럴 줄은 몰랐어. ...무의식적으로 널 내 언니랑 겹쳐봤나봐. 어떡해. 어떡하지. ...미안해. 네가 너무 좋은 사람이라서 그랬나봐. 아냐 이건 역시 변명이지. 그래, 내가 전부 잘못헀어. 미안해, 미안해, 진짜 내가 다 미안해. 내가 너한테 뭘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내가 너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을까? 너처럼 다정한 사람을 또 다른 다정한 사람과 겹쳐보는 걸 그만두려면 어떡해야 해? ......어떻게 해야 나는..."
아사티르는 디트리히의 마지막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그도 여타의 아이들처럼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으면 디트리히처럼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 아이들은 많은 선택지가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기사들과 그 종자들이 가득한 빛의 요새에서 자랐고 신학과 검술을 공부하며 컸다. 어린 시절, 빛의 요새가 세상의 전부였던 그에게 성단기사단의 기사 외에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후회하고 있는가?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아사티르는 기사들의 도움으로 리그트 신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고, 아버지 같은 존재인 기사, 글렌과 같이 모험을 할 수 있었다.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선택할 거야, 라고 아사티르는 다짐했다.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까. 문득 다시금 깨달은 건, 내가 그렇게 대화를 잘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그동안 시엔과는 이상하리만치 편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는 것.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고 나니 꿈에서 깬 것만 같았다. 다시 나는 소심한 인디고 키트로 돌아온 것이었다.
시엔의, 그러니까, 언니. 죽은 언니. 처음 들었다. 대용품이라니. 그리고 시엔은 그 사람을 내게 투영했다. 왜였을까. 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나? 아니지, 아니다. 시엔이 울고 있는 이유는 그리움인가, 질투인가? 원망일 수도 있었다. 다만 실습이 가까워진 것 때문에 생긴 불안은 아닌 것 같았다. 혼란스러웠다. 여기는 티엘린 아카데미다. 로머가 되고 싶어 목숨을 거는 자들이 겨우 턱을 걸쳐 들어오는 명문. 나도 두 해를 바쳐서 겨우 들어왔고. 그러면… 시엔은 로머가 되길 바라지 않았던 것인가? 도대체 뭐지?
“죽지 않을게!”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 뿐, 대안은 전혀 없었다. “절대 안 죽을게…. 앞으로 더 강하게 돼서, 하마르 대륙을 전부 수복할 때까지 전장에서 죽지 않을게. 난, 노력하고 있으니까…. 분명 살아남을 수 있을 거야, 난!”
허겁지겁 말하며 팔을 엉거주춤 들었다. 어깨를 붙잡아 줘야 하나? 등을 토닥여 줘야 하나? 나는 단념하고 다시 팔을 내렸다. 지금은 무얼 하든 독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녀의 말에 수긍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조금 부담이 된다. 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다. 그야 그와 그녀는 만난지 하루도 안되었으니까, 생각해보면 지금 이 상황도 평범한 사람들끼리 라면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어느 순간부터 익숙한 일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 디바이스.. 네, 그랬었죠. "
그는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앉아 있을때도 무심코 종종 디바이스를 확인하던 그는 그녀의 말에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아마 개학식 날 주변에 앉아 있었던걸까. 아무튼, 설마 그게 여기에서 드러날줄은 그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저기, 그으. 그러니까... 왜? 너, 그러니까. ......지금 너도 당황한 거 딱 보여. ...너도 당황했으면서 나한테...... 이렇게나 대해주는 이유가 뭐야?"
어이가 없을 정도라서 너를 보았다. 더 이상 울 수도 없었다. 너와 내가 이렇게 친해질 때까지 1년이 걸렸는데 그 동안의 시간이 망가져버린 것 같았다. 그 동안 쌓아온 기억들이 다 부서진 것 같아서 나 자신이 더 싫어졌다.
"...그보다 정말로? ......죽지 않을거야? 그럼 죽지 마. ...절대로. 절대로 죽지 말아. 내가 죽기 전까지 너는 죽어선 안돼. 내 기준에서지만, 너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나에겐 니가 절친이었고 그렇기에 네가 죽어 없어지는 걸 바라지 않아. 아니 바랄 수가 없어."
기분이 나쁠 정도다. 내가 원래 이런 인간이었나 싶다. 나는 이래선 안됀다.
"......그러니까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번 친구가 되어주세요. 날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내가 망가졌을 적에 내가 너에게 약간이나마 의지할 수 있게 해주세요. 내가 너를 내 언니와 겹쳐보지 않게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여지껏 죄송했어요. 그동안 치료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낫지가 않았나봅니다. 죄송해요."
그래, 나는 이렇게 빌어야만 했다. 나는 그렇기에 너에게 빌었다. 제발 친구가 되어달라고.
“안 죽어.” 나는 말했다. “있잖아, 사실 나 엄청 강해! 죽순도 이젠 쉽게 만들고. 그러니까 안 죽어.”
안 죽을 수는 없다. 하마르 대륙에서는 죽는 것에 순서가 없다. 거기에 발을 들인 로머에게는 하루라는 시간도 과분하다. 다만 일각의 생존을 바라야 한다. 나도 로머가 돼서 대륙을 개척하러 떠나거나, 혹은 이곳에서 아바돈을 상대하게 되리라. 죽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죽어서는 안 될 이유가 생긴 것이었다. 아버지는 내게 로머가 되길 종용하며, 죽음 따위에 상심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젠 그럴 수 없다.
큰 결심을 하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다른 사람의 몸에 제멋대로 손을 대는 건 살면서 다섯 번도 채 없었던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브릿지로서 팀원을 지키는 것, 사지에서 목숨을 거는 것보다 더한 각오가 필요했다. 깨 본 적 없는 창문을 깨는 것 말이다. 나는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시엔에게 다가가 있는 힘껏 등을 토닥였다.
“우린 친구야. 절대 널 미워하지 않아. 텐게르에게 맹세. 친구로서 난 절대 먼저 죽지 않는다. 약속. 이것도… 텐게르에게 맹세.”
호를 그어 맹세했다. 밤하늘이 검었다. 어둠이었다. 나는 텐게르가 지켜보는 아래서 맹세를 한 것이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없다, 라는 말이 있다. 도대체 이런 꿈도 희망도 없는말을 누가 퍼뜨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느정도 말은 맞는다고 생각하고있다. 그 증거로 나, 메이엔 겐은 제법 사람을 많이 속여왔다. 물론 속은 수도 많기야 하겠지만. 사람은 가면 갈수록 적응해나가는 생물. 이제 속은 수보다 속인 수가 더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고보니 저번에 세상에 있는 모든 걸 믿는듯한 여자아이를 한명 만났었는데. 영 양심에 찔려서 속일 수 없었다. 속이다고 해서 뭔가 나오는건 아니지만. 역시 습관이라는건 무섭다는게 이런 상황을 말하는게 틀림없겠지.
"무료하고 무가치하다. 좋아! 돌아갈까."
학교에서 일을 할 수 있는건 매우 좋은 일이었지만 돈은 많으면 좋다. 그렇기에 밖에서도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학생을 써 줄 정도로 어리석은 점장은 그리 많지는 않다. 학생신분이 이럴때는 도움이 안되는걸. 게다가 급여로 사기를 치려는 사람도 있었고. 킁, 어떻게 벗겨먹을 수 없으려나.
"음?"
그런 생각을 하는데, 벗겨먹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시야에 잡혔다. 진이다. 모든걸 믿지는 않지만 믿음이 선이라고 규정하고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고는 나쁘지 않다고생각해. 진.
생각지 못 한 얘기를 꺼낸 건지 반응이 눈에 띄었다. 그 개학식날 지적을 받았는데 눈에 안 띌거라고 생각했나. 아니, 이건 내가 예민하게 본 탓일지도 모르지. 나는 그냥 물어봤다는 듯 턱을 괴며 무심하게 말했다.
"그쪽 말고도 몇명이 더 있었으니까 눈에 띄었어. 그게 생각나서 말해본거고."
아무 의미도 없는 얘기였다. 어떤 의미도, 뜻도 없는 말이었지.
그뒤 조금 더 기다리니 두사람 분의 주문이 쟁반에 얹혀져 나왔다. 베이컨 토마토 샌드위치와 블랜드 커피의 내 것과 파니니와 아메리카노의 상대 것. 점원은 각자의 앞에 맞는 것을 내려놓았고 별 말 없이 간단한 식사를 시작했다. 음식은 전에 왔을 때처럼 맛있었고, 커피는 뜨거웠지만 내 입에 잘 맞았다.
"먹을만 해?"
먹기 시작하고 조금 지나서 한번 물어보았다. 나름 자신있게 데려왔는데 맘에 안들거나 입에 안 맞으면 좀 그렇겠지만.
"안 죽는구나. 다행이다, 안 죽는구나. ......네가 죽지 않았으면 했어. 네가 죽지 않았기를 바랬어. 그래서 고마워."
그러곤 너를 보았다. 내 등을 토닥이는 네 손길이 참 묘한 기분이 들었다. 네가 왜 이렇게나 잘 해주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게 고마웠다.
"...감사합니다. 친구가 되어주셔서 고마워요. 인디. ......약속이군요. 감사합니다. ...저는 딱히 종교를 믿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맹세하겠습니다. 인디가 텐게르를 믿고 있으니 저도. ......텐게르에게 맹세할게요."
그러곤 당신을 따라 어설프게나마 호를 그어봅니다. 해본 적 없어서 이렇게 어색하고 어설프게 그어질 뿐입니다. 그렇지만.
"......저기. 저, 그러니까. ...이왕 이렇게 제대로 친구가 된 거, 이야기 하나 해도 될까요. 제가 겪었던 일들이에요. ......사실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지만 이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도, 들어주는 게 인디라면. 믿을 수 있는 너라면. 그렇다면 가능할 것 같아요."
그녀가 선선히 웃어보이는 그 모습은 바람에 날려갈 민들레 홀씨같기도, 이미 잘게 부서져 가루난 모래같기도 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없다, 라는 말이 있다. 도대체 이런 꿈도 희망도 없는말을 누가 퍼뜨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느정도 말은 맞는다고 생각하고있다. 그 증거로 나는 참으로 많이 속아왔다. 대체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의 것을 더 앗아 가려는걸까? 아니면 덜 주려고 하거나.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 또한 이 문화에서 배웠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적응 못하겠다. 대체 내가 못 들어본 법률과 적용방식이 이렇게나 많을까?
일을 해도 돈이 없다. 자연에서 축복을 받아 살던 삶이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고향사람들 제가 돌아간다면 제발 기억해 주세요. 여기 삶은 사람이 참 무섭습니다.
이 전단지도 아니고 저 전단지도 이상하다 하며 일거리를 찾아가는 도중이다.
어떤일이 좋을까... 하는데 누군가 내쪽으로 외치는 거 같디. 돌아 봤 윽. “윽.” 하고 말이 더 안 나왔다. 또 왜!!!
목이 탔다. 순간 손에 들고 있는 유리병이 기울어진 것을 깨달았다. 바짓단이 조금 젖었다. 어쩔 수 없지, 어깨를 으쓱하고 남은 설탕물을 마셨다. 내가 시엔의 감정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입을 다물어 코로 긴장의 한숨을 내쉬고 다시 시엔을 바라봤다. 기숙사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더구나 이 일을 마무리짓기 전까진 돌아가선 안 된다. 일단 시엔이 웃음을 되찾은 것은 다행이었다.
골짜기의 공기는 차갑게 식어 바람도 무엇도 불지 않는다. 이파리 흔들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귀뚜라미도 숨을 참고 있다. 오직 침 삼키는 소리만이 들린다. 적막을 보증해 주는 그런 소리 말이다…. 시엔의 말을 들어 주기로 했다. 나만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대신, 무슨 일이 있었건 너는 셴이야. 누구도… 아니, 적어도 나는… 셴을 절대 부정 안 해. 그러니까, 이제 울지 말고 말하기다. 알겠어?”
나는 조건을 붙였다. 머리가 복잡해서 무슨 말을 들어도 흘러내릴 것만 같았지만, 정신을 꽉 붙잡았다.
내 감정을 네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내가 질투했던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네가 들어줄 수 있을까. 과연 말해도 될까. 그래도 그냥 말하자. 믿어준다는데.
"......나한테 쌍둥이 언니가 있었어. 눈의 좌우 방향만 빼고 똑같은 언니. 나도 언니도 똑같았는데 건강함과 건강하지 않음의 차이는 컸나봐. 나는 내 나이대 애들한테 놀림받고 괴롭힘당했는데 언니는 아니더라. 그래서 매번 학교 가기가 싫어서 집으로 숨었어. 그런데 부모님은 내가 힘든 걸 모르시더라고. 그래서 날 밖으로 내보내서 어떻게든 학교를 가게 만들려 했지. ......그러다가 결국 사단이 난 거야. 나는 한번 죽으려 했는데 누군가의 제지로 결국엔 죽지 못했어. 어쨌든 그 이후 나는 정신 상담을 받기 시작했거든? 근데... 그, 뭐라고 해야 하나. ......내가 그동안 부모님한테 사랑받은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그러곤 깊게 한숨을 쉬더니 너에게 조금 더 다가가 너를 덥석 안아버린다. 원래 이러면 안돼는데.
"......늘 어머니는 날 사랑한다고 했고 아버지도 그랬는데 아니었어. 그 집에 내 자리는 없더라. 내가 문제아였으니까, 부모님은 내가 학교를 안 갈 적마다 대신 불려가 경위를 조사당했었어. ...그래서 내가 상당히 귀찮았는지도 몰라. 그걸 알게 된 건 상담을 받을 때였어. 늘 부모님이 나를 위해 상담시설까지 데려다주시고, 날 위해 힘쓰느라 시엘... 그러니까 언니한테 신경을 덜 쓴다고 말했는데 사실 아니었어. 신경을 쓴 쪽은 나였지만 사랑받은 건 내가 아니었어."
이내 또 다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래도 이렇게 상담을 계속하면 부모님은 바뀔거라고 믿었어. 근데 아니었더라고. 왜 바뀌지 않는 걸까 싶었어. 그래도 계속해서 바뀔 거라고 믿으면서 상담을 가던 날이었는데. ......그 날 내가 살던 곳이 전부 작살나고 내 언니도 죽었어. 그 이후로 어머니와 아버지는 종종 날 언니와 겹쳐봐. ...이름도 종종 틀린다니까? 바보같게. ......근데 어쩔 수가 없더라. 지나치게 닮아서."
그래서 난 아직도 거울 보는 게 싫었다 그녀가 거울에 나 대신 비치는 것 같아 싫었다 나는 거울을 보는 게 아직도 싫었다 쌍둥이 언니를 질투했다 나는 내 쌍둥이를 사랑했지만 질투했다
그렇다. 귀를 막아도 소리는 들린다. 그렇지만 내 나름의 저항의 표시였지만 안 통하는거 같다. “...그거 진짜죠.” 귀를 여전히 막은 채로 결국 들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하던 일중 하나가 끝나버려서 벌어야 할돈이 더 필요하다. 저정도 액수면... 일단 이주일은 여유 생길거 같은데.
“그거 또 막 사실은 건달의 소굴이라던가 이상한 거래가 오가는 곳이라던가 아니면 이상한 옷 입히고 일시키는 곳이라던가 아니죠? 그리고 그 일 하려했는데 빠진다는건 또 거짓말이죠!!! 그거만 대체 몇번을 들었는데!”
그가 식사를 마친 것은 그녀보다 조금 늦은 때였다. 그는 잘못해서 설탕을 조금 많이 넣은건지, 달달해진 아메리카노를 전부 마신 다음에 천천히 일어났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창 밖은 어느새 조금 더 어두워져서, 가로등이 적은 거리와 맞물려 그가 느끼기에 음산한 분위기를 냈다.
" 잘 먹었습니다. "
그는 말을 마친뒤에 잠깐 고민하다, 뭔가 퍼뜩 생각난듯 다시 입을 열었다.
" 그러고보니, 통성명도 제대로 안했네요. 전 4학년 프란츠 발터랍니다. "
그는 그녀의 답을 기다리며 잔에 한모금 조금 안되게 남은 아메리카노를 마저 마셨다. 설탕 맛이 좀 강하게 느껴졌지만, 제대로 양 조절을 못한 자신을 탓해야할 일이었다.
시엘 아나테마. 시엔 아나테마의 죽은 자매. 스스로를 부정하고 남이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비슷할 수록 더욱 그럴 것이다. 오직 자신만이 다른 점을 알기 때문이다. 자살을 기도했다는 것은 충격적이지만 말이다. 내가 로머를 포기하고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는다면 해더를, 그러니까 내 여동생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해더가 ― 성격 상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만 ― 나 대신 로머를 해 줄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런 ‘대체’는 서로의 자아가 부정당하지 않는 선에서만 매끄럽게 일어난다. 사업가 인디고 키트는 인디고 키트일 것이고, 로머 해더 키트는 해더 키트일 것이다.
하지만 시엔은 시엘이 될 수 없었다.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차이를 무시당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거지.
“있잖아, 나는….”
어정쩡하게 팔을 들었다. 어떤 자세를 취해야 편할까. 가족 말고는 포옹을 해 본 적이 거의 없다. 더구나 안겨 본 경험은 더더욱 없다. 다른 사람과 이렇게 깊은 대화를 나눈 적도 얼마 없다. 나는, 소심한 사람이니까. 도무지 팔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허공에 뻗은 채로 굳어 버렸다. 오른손의 손끝에서 미끄러지기 직전인 유리병을 검지손가락과 중지손가락으로 위태롭게 잡고 있었다. 혹시 떨어지겠다 싶으면 아주 녹여 버릴 작정이었다.
할 말이 생각났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말을 들을 때다. 아무리 대화에 미숙한 인디고 키트라도 그 정도는 안다. 일단은 어정쩡하게 왼팔을 뻗어 등을 쓸어 주었다. 그래, 잘 하고 있어. 울지 않고.
여관인데 술집도 겸... 하긴 돈을 그렇게 준다면 일도 여러가지 많겠지. “네 잘 부탁드려요. 그리고 아니요. 맥주는 원래 안 마셔서.” 일단 맥주는 사양했지만 학생이라 안되나 같은 소리를 한다. 응? 매우 뭔가 스무스 하네. 학생이라 말도 안했는데 알아보고. 겐이 아마 학생을 소개 시켜주겠다고 했나보다. 그렇겠지?
"그래서 시엘이 죽은 뒤에 걔가 원했던 대로 살려고 했어. 부모님도 그걸 원하는 게 내심 있으셨고. 걔는 나랑 같이 로머가 되고 싶댔거든. ......그래서 시엘이 원하는 대로 이 학교에 왔어.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니가 제일 친하고 니가 제일 고마운 친구였어. 그러니까...... 응, 그냥 고맙다고. 여태까지. 많이 고마웠어."
이제 다시 웃어보인다. ......다행이다. 이런 좋은 사람이 내 친구라서.
"...이걸로 내가 해야 했던 이야기는 끝. 그냥 좀 우울하게 살았던 사람이 너한테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서 꺼낸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넘겨도 좋아. 대신 아무애게도 말하지 말고."
그러곤 가만히 널 안은 채 있다가, 아. 하고 다시 네게서 조금 멀어져 거리를 둔다.
"음...... 이제 내 이야기는 끝이니까. 이제 이 일들에 대해 하고 싶은 말 같은 거 있어? 있으면 말해줘."
그리고 날 아프게 하지 말아줘. ...덧붙이려고 했는데 역시 이 말은 안돼. 이 말은 아냐.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지. 이런 말은 안돼.
"......어떤 말이든 좋으니까. 어떤 행동이든 좋으니까. 그러니까 너는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솔직하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말해줘. 하고 싶은 행동이 있다면 해줘."
팔이 품을 떠나자 겨우 몸이 편안해졌다. 사실은 어정쩡한 자세로 팔을 뻗고 있었기 때문에, 몰래 흙으로 등을 받치고 있었다. 등을 받쳐 준 죽순을 허물어 버리고 다리를 앞으로 뻗어 편하게 앉았다. 그러나 조금 추워져서 무릎을 오므려 가슴에 품었다.
할 말은 없었다. 텐게르께 맹세코 오늘 일은 다른 사람 앞에서 입에 담지 않으리라. 속으로 거룩한 표를 몇 번이고 그렸다. ‘내가 아까 한 맹세와 더불어, 입을 봉하기로 한 이 맹세를 어긴다면 부디 내 모든 것을 거두어 항아리에 담으소서.’ 하지만 어떤 말이라도라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실로 복잡한 감정이었다. 내가 어릴 적 마르바에 살았을 적에, 참치잡이 어선에서 그물을 던졌는데 대게만 주구장창 잡혀 만선한 어부들이 있었다. 생각의 그물을 던지면 이상한 상념이 채웠다.
“고마워. 나 같이 소심한 녀석이랑 친구 해 줘서.”
결국 나온 건 이런 말이었다. 무릎에 턱을 괴고 시엔 쪽을 보았다. 달빛이 조금은 쨍해져서 얼굴을 알아볼 만했다.
“티엘린에 입학하려고 운투에 유학했을 때부터 외로웠거든. 친구도 다 마르바에 있으니까 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정말 휴일만 되면 고향에 갔어. 아카데미에 와선 더 심해졌었고. 그런데… 너 덕분에 고향에 가지 않게 됐었어. 그게 고마워.”
1. 도끼창!! 개멋있어!! 날 가져요!! 2. 학살의 현장에서 난 피어오른다... 붉은 여명에 피어나는 꽃처럼 -> 아 프로젝트 진 멋있당 -> 프레이 유튜브 봐야겠당 (실제 의식의 흐름) 3. 과연 위키에 괄호 없이 페이지를 만들 수 있을까 -> 진이 3명 있었기 때문에 결국 진(티엘린 사립 아카데미) 항목으로 개설함.
"...넌 소심하지. 그래. 그건 인정해. 그렇지만 나쁜 애는 아니야. 아니 좋은 애야. 그러니까 나는 너를 친구로 생각했고 친구가 되고 싶었어. ......네가 좋은 녀석이었기에 날 친구로 받아준거야. 그러니까... 음. 뭔가 말이 좀 애매해지긴 했는데. 아무튼 내가 더 고맙다고."
그러곤 푸흐흐흐, 평상시의 소녀다운 기색이 엿보이는 웃음을 흘린다.
"외롭고 우울하고 고향 생각 날 때면 나한테 와. ......나도 고향이 많이 그립거든. 떠난지 5년이나 됐는데, 가봤자 폐허일텐데 돌아가고 싶어져."
그래서, 그냥 그렇다고. 그렇게 덧붙이고는 너를 가만히 볼 뿐이다. 너를 가만히, 그저 가만히 보며, 네가 나와 친구가 되어준 것에 감사한다.
이아나. 언제나 사랑받는 이아나. 누구에게나 사랑받으며, 또 동시에 그 사랑을 애정을 가득 담아 돌려주는 사랑스러운 소녀. 그런 이아나는 지금, 평소라면 절대 받을 일이 없는 싸늘하면서도 뜨거운 시선을 받았다. 평소에 감고 있던 두 눈은 무엇에 홀린 것 처럼 그녀가 받은 고통이랑 충격을 가득 담고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네가, 아니... 이제는 당신이 혐오스러워서 견딜수가 없어. 그동안 더러운 피랑 눈을 숨기면서... 넌, 너는..."
그렇게 모두를 속이며 순진한 년 마냥 웃었던 거야? 라는 말을 들었던 때 이아나는 귓가에서 유리컵이 높은 탁자에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는 것 처럼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상대방의 눈은, 그래... 그 분노에 가득 찬 두 눈동자는 다른 한 편으로 배신을 당한 사람처럼 아파보였기에 이아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숨긴 비밀이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만큼 아프게 한것일까 싶어 그것이 가슴아팟다.
"일부로 속이려던건 아니였어... 미안해."
결국 이아나는 먼저 사과하였다. 하지만 곧 상대방의 분노어린 사나운 말에 그녀의 브서질 것 같이 연약한 금빛의 눈에서 눈물이 한 줄기 흘러 뺨 위로 내달리듯 떨어졌다.
"거짓말 마!!! 넌 모두를 속였어, 나를 속이고, 다른 애들도 다 속였다고! 그 더러운 피를 갖고 왜 여기에 온거야?! 우리가 그렇게 우스웟니? 그래서 그렇게 친한척 살랑살랑 꼬리나 흔들고 다닌거야?! 더러운, 더러운 아바돈 새끼인 주제에! 그런 주제에 내가 친구라고 한거였냐고!"
아. 바보같을 수준으로 불쌍한 이아나. 누군가를 제대로 미워하는것도 못 하고, 자신보단 타인의 아픔에 공감해버리는 불쌍한 소녀. 충분히 미워해도 괜찮을텐데 미워하기는 커녕 자신을 탓하며 심하게 혼자 화를 내는 친구에게 손을 뻗어 안아줄 수 없다는 것에 미안해서 우는 구제할길 없는 바보나 마찬가지로 착한 어린 아이가 마음속에 사는 이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