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극판 규칙 ☞ 상황극판은 익명제입니다. 본인이나 타인의 익명성을 훼손하는 행위는 삼가주세요. 하지만, 자신의 위치(스레주/레스주) 등을 밝혀야 할 상황(잡담스레 등에서 자신을 향한 저격/비난성 레스에 대응할 시 등)에서는 망설이지 말고 이야기해도 좋습니다. ☞ 서로를 존중하고, 자신이 먼저 배려하는 마음가짐을 가집시다. 모니터 너머의 이용자도 당신처럼 '즐겁고 싶기에' 상황극판을 찾았다는 것을 기억해주세요. 모두 두루두루 친하게, 잘 지냅시다. 말도 예쁘게해요, 우리 잘생쁜 참치들☆ :> ☞ 상황극판은 성적인/고어스러운 장면에 대해 지나치게 노골적인 묘사를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약물과 범죄를 미화하는 설정 또한 삼가해주세요. 각 스레마다 이를 위반하지 않는 수위 관련 규범을 정하고 명시할 것을 권장합니다. ☞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행동이 결코 아닙니다. 바람직한 상판을 가꾸기 위해서라도 서로에게 관심을 가져주세요. 다만 잡담스레에서의 저격이나, 다른 스레에서의 비난성 및 저격성 레스는 삼갑시다. 비난/비꼬기와 비판/지적은 다릅니다. ☞ 상황극판의 각 스레는 독립되어 있습니다. 특정 스레에서의 인연과 이야기는 해당 스레 내에서만 즐겨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잡담스레에서 타 스레를 언급하는 일도 삼가도록 합시다. 또한 각 스레마다 규칙 및 특징이 다르기 마련입니다. 해당 스레의 이용자들에게 문의해주시고, 그 규범에 따라 행동해주세요. ☞타 스레와의 교류 및 타 스레 인원의 난입 허용 여부(이건 허용한다면 0레스에 어디까지 괜찮은지 명시해둡시다)와, 스레에 작성된 어그로성 및 저격성 레스의 삭제 여부, 분쟁 조절 스레의 이용 여부에 대한 결정권은 각 스레의 스레주에게 있습니다.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분쟁 조절 스레"를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 처음 오신분은 어려워말고 잡담 주제글에 도움을 청해주세요! 각양각색의 스레들을 가볍게 둘러보는 것도 적응에 효과적입니다.
티엘린 사립 아카데미의 새학기이자 새학년은 전 대륙에 퍼진 은 제국의 역법 상 가을에 시작합니다. 티엘린 아카데미가 있는 로라시아 섬은 딱 가을스럽습니다만. 학생들이 오는 지역은 일년 내내 겨울같을수도, 일년 내내 여름같은 곳도 있을 수도 있지요. 물론 사계절이 있는 곳일지도요?
개학식의 날짜가 공지되었습니다! 모이는 곳은 강당이군요!
주의! 데플은 없지만 부상 등으로 구를 수는 있습니다. 어두운 분위기도 존재하고요. 개인설정, 개인 이벤트, 환영합니다. 완전 초보라 미숙한 스레주입니다.. 잘 봐주세요..(덜덜덜) 활발한 어장생활! 캡이 응원합니다!
전투 시스템에서 다이스를 사용합니다!! 라고 공지하지 않는다면 그냥 공격하시면 됩니다. 다만 공지할 경우에는 명중빗나감 다이스를 굴립니다. 다른 다이스가 필요하신 분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최근 포리아 공국에 들리는 소문으로는, 비스마르크라는 거대한 아바돈이 수평선 너머 먼 하늘에서 순항중이라는 것이겠지. 불행이라면, 이는 사실이다. 비스마르크는 거대한 푸른 고래 같이 생긴 아바돈이며, 비스마르크 자체는 매우 온순하나 그 주변의 공중형 아바돈이 공국에게 매우 위협적인 존재로 다가온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비록 그것이 온순하더라도 토벌하는 수 밖에. 이 위대한 토벌에 함께 할 로머들에겐 후한 보상이 기다리노라.
내가 살던곳은 외지인이 없으니까 딱히 고향을 묻는 그런게 없었다. 여기는 실례인건가. 왠만하면 묻지 말자.
“그런데 고향이 어딘지 딱히 말할 필요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어라. 어딘가 바로 이 애가 어디사람인지 알수 있는게 있었나? 아 또 내가 모르는 문화인가. “게다가 멸망한 곳이라니. 나는 그런건... 잘 몰라.” 고향의 멸망이라니. 나도 지금... 고향이 그런 위험에 처해 있잖은가? 다만 이 애의 고향은 이미 망한 차이가 그 차이 인가.
개학식이 완전히 끝난 뒤의 일이다. 접시며, 장비며 모든 것이 정리되고 난 뒤에는 아라와 크리드의 작은 말다툼 소리가 들렸다고들 한다. 하기야 크리드의 그 기행은 상의된 적 없던 것이었으니.
그렇지만 언제나 자비로운 아라 한 티엘린이니만큼 별 것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히 그 둘이 나오고 나서 아무것도 부서지지 않은 방과 말다툼 외엔 평범하기 그지없는 말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피가 튀겼다. 아니다. 그것은 반짝이는 액체였다. 하지만 그것이 목과 몸이 분리된 단면에서 맥과 함께 사방에 튀기니 누가 그것을 피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아라 한 티엘린은 볼품없이 늘어진 크리드를 무정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목은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 아니하고, 팔다리가 꺾이어 있는 몸은 참으로 인형 혹은 마네킹같은 모습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생을 잃은 자로 보일 것이었지만. 아라는 숨을 길게 내뱉었다. 긴 시간인 것 같았지만, 그녀의 손가락에 묻은 피가 땅에 떨어지지도 않은 짧은 시간이었다.
"네가 죽을 리가 없지." 일어나. 라고 발로 미동도 없는 몸을 발로 툭 걷어차며 냉랭한 목소리가 무겁게 내려앉자 마치 동굴에서 울린 것처럼 멀리서 메아리치는 듯한 발랄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연한걸. 본체를 부순 것도 아니잖아?" "내 본체를 부순다니. 그건 불가능하지. 내 본체의 특수성이 있으니까.." 아라가 뒤집어쓴 액체는 스스로 기화하여 오로라같은 연기만을 남긴 채 스러져갔다. 피는 사라지고, 잘린 것은마치 녹였다가 붙인 듯 아무런 흉도, 상처도 없이 고통조차 느끼지 않았던 것처럼 크리드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습니다.
"걱정마. 나는 좀 돌연변이 같은 존재라서 말이지..." 딱히 인간을 혐오하지 않거든. 그냥... 감히. 라는 생각을 하고 있고 좀 귀찮을 뿐이야.라고 그녀는 웃었다. 그렇지만 금새 울먹였습니다
"아니 그치만 아무리 내가 목과 몸이 완전 날아가도 피가 아라 당신의 손에서 흘러 땅에 떨어지기 전에 부활한다지만 아픈 건 아픈 거거든?" 좀 덜 아프게 죽일 순 없었어? 라고 투덜대는 크리드는 한심했다. 죽는 것에 더 아프고 덜 아프고가 어디 있겠는가.
"한심했다 생각했지!" 노코멘트를 하고는 그녀에 대해 생각했었지. 피식 웃으면서
"할일이 많겠군." 크리드 너는 인챈터이니 말이지. 라고 말하자 크리드는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뿐이지. 숙식제공. 지켜야 해. 라고 덤덤하게 말하였습니다. 크리드는 돌연변이가 맞았다. 그렇지만 돌연변이라 하여도 공격하는 이들에게까진 자비롭지 않았으니.
은 제국 초창기 이전, 알루시아라 티엘린에게 은혜를 입기 전의 크리드는 공격자. 특히 그중에서도 인챈터의 악몽이라 불렸으니까.
이른 아침. 수업도 없으니 늦잠을 잘 법도 하건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방학 중에도 그러했듯 일찍 일어나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밖에 나왔다. 아침 댓바람부터 무얼 하느냐면 뭐 뻔하지 않은가. 가벼운 조깅을 겸한 아침 운동이었다. 해가 떴음에도 조금 흐린 하늘이었지만 오히려 뛰기에는 좋았다. 금방 열이 나기도 하고 더워지니까 볕이 없는 편이 나았다. 간단하게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시가지 쪽을 향해 뛰어나가기 시작한다. 탁탁탁. 규칙적인 소리가 조용한 거리에 울렸다. 그렇게 넓은 시가지를 정해진 코스대로 한바퀴 돌고 오는게 아침 운동의 일환이었다.
언제나처럼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면 딱 아침 식사를 할 즈음이 된다. 그쯤 되면 학생들도 대부분 일어나있더라. 나갈 땐 조용하던 기숙사가 돌아오면 어수선해져 있는 것은 몇 번을 보아도 적응이 안 된다. 나는 누가 말을 걸 새라 얼른 내 방으로 돌아가 식당으로 갈 채비를 해서 나왔다. 밥 먹고 바로 도서관에 갈 생각으로 책과 필기구를 한 팔에 든 채로.
식당에 가니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어 있는게 많이도 보였다. 저 사이에서 밥을 먹으면 밥이 입으로 들어가기는 할까 싶었다. 아. 안 되겠어. 결국 오늘도 식당이 아닌 매점으로 가 빵과 우유를 사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곤 적당히 사람 없는 쪽 교정에 앉아 책을 보면서 빵과 우유를 뜯었다.
어수선한 식당의 분위기는 굉장히 익숙한 것이였다. 왁자하고 기운이 넘치는 공간에 있다보면 절로 어깨가 들썩이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즐겁게 시작부터 끝까지 기분좋고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아침도 먹었겠다.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잠시 기숙사에 들려서 재차 옷매무새와 이런저런 체크를 하기 시작했다. 특히나 신경을 써서 체크하는 것은 오른쪽 눈을 가리는 검은색 안대를 단단히 동여매는 행동이였다.
경쾌하고 시원시원한 미소가 이 행위를 할 때만큼은 흐리게 바뀐다. 자신이 스스로 저질러버린 과오였으니 할말은 없다만. 음음. 하고 이리저리 상태를 살피다가 오늘도 완벽하다는 판단을 하자마자 대강 땋아내린 머리끝을 동여맨 끈에서 손을 떼어내고 통통 튀는 경쾌한 걸음걸이로 외투에 양손을 찔러넣고 기숙사를 나섰다.
한참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걷던 하나뿐인 눈동자에 교정 한가운데에서 빵을 먹고 있는 푸른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잡힌다.
"안녕. 독서하는데에 방해한거야?"
부츠소리를 일부러 내면서 소녀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면서 시원시원한 미소를 짓고는 친근하게 말을 붙혔다.
한창 책의 내용에 집중해 있을 때 누가 방해하는게 얼마나 싫은 일인지 아는가. 그것도 불쾌한 소리와 함께. 먼저 들린게 목소리인지 저 부츠 소리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 상대가 지금 나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걸 알면서 묻는 듯한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부스스한 앞머리와 안경이 얼굴의 반을 가리겠지만, 눈 앞의 상대를 보는데는 문제가 없었다.
검고 긴 머리와 특이한 외투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저 사람을 아는가? 그것도 아니었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것을 확인하자 내 기분은 조금 더 불쾌해졌고 평소와 같은 날 선 말투가 입 밖으로 튀어나갔다.
"네. 보시다시피 방해하고 있네요."
무의식중에 존댓말을 쓴 것은 상대가 적어도 같은 학년은 아닐 거란 감이 무심코 들어서였다.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하급생은 아닐 거라는 감. 그 감을 따라서 손해 본 적은 없었기에 나는 존댓말로 계속 말했다.
"방해인걸 아시면 좀 비키세요. 안 보이니까."
음. 존댓말은 쓰지만 공손하게 한다고는 안 했다. 나는 내 할 말만 하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지금까지 대부분은 이 정도로만 대하면 알아서들 물러갔다. 가면서 아무 소리도 안 하진 않지만 아무렴 가는게 더 중요하지. 하지만 개중에 꼭 한번씩 이런 별종이 있었다. 한번으로 안 끝나는 상대가. 비키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너스레를 떨더니 햇빛을 다 가릴 정도로 크지 않다는 둥 떠들어댔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책장만 팔락 넘기며 뭐라고 떠들든 반쯤 흘려넘겼다. 어차피 나와 상관 없는 얘기다. 그런 생각으로 적당히 대꾸해 넘겼다.
"그늘과 잡음 두 가지로 방해를 받으니 문제가 없을 수가 없는데요. 그리고 대뜸 처음 만난 사람과 친해질 생각도 없어요."
같은 학년 내에서는 암암리에 내가 어떤 성격인지 알려져 있으니 다들 적당히 피하는데, 이 사람은 아닌 걸 보니 동급생이 아닌게 확실해졌다. 옆에 앉아도 되냐는 말에 나는 탁 소리나게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자리가 필요한거라면 비켜드리죠. 그게 빠를 것 같고."
먹다 만 우유팩을 한 손에 들고서 옆의 다른 자리로 가려고 몸을 틀었다. 인사라던가 그런 거 없이.
지체 없이 다른 자리로 가려 했으나 장갑을 낀 손이 어깨를 잡아 그 움직임을 저지했다. 우악스럽지 않은 조심스러운 행동이었으나 원치 않은 접촉을 했다는 점에서 한층 더 불쾌감이 쌓였다. 바로 쳐내려고 했으나 저쪽에서 한박자 먼저 손을 치워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제법 끈질기다면 끈질기게 말을 붙이려고 하는 것에 쯧, 혀를 차며 불쾌함을 숨기지 않은 태도로 여전히 쌀쌀맞게 대했다.
"같은 학교에 다닐 뿐이지 실상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타인과 교류할 생각은 1도 없습니다만."
이 상대에게 내가 흥미를 가질만한 무언가가 있다면 모를까. 그런게 전혀 없어보이는 상대와 말벗을 해야 할 의무나 의리도 없다. 그러니 지금까지처럼 나는 저 호의랄 것을 쳐내고 돌아서면 그만인 것이다.
"말벗이 필요하시다면 저기서 나오는 학생들 중 아무나 붙잡으면 되겠네요."
여전히 단단하기 짝 없는 목소리로 말 하고 저멀리 식당 출구로 나오는 애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 말과 행동에는 은연중에 끼리끼리 놀라는 비아냥도 섞여 있었지만, 그걸 상대가 알지 어떨지는 신경 밖이었다. 그저 어서 가버리던가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을 뿐.
조용해지길래 이제는 가려나 싶었다. 하지만 질리지도 않고 다시 말을 걸어오는 것에 눈매가 일그러졌으나, 그게 상대에게 보일 리는 만무했다. 어느 가벼운 남자나 할 것 같은 말을 한다 싶었더니 그 다음엔 뭔 소리를 하나 싶더라. 이런 사람은 아예 시작을 해선 안 된다. 지금 저 말에 혹해 말벗이 되었다간 꼼짝없이 다음에도 치근거리며 말을 걸어올게 분명했다. 좋게 말하면 넉살이 좋은거고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뻔뻔한거지. 이 웃기지도 않은 자리를 끝내야겠단 생각으로 나는 처음과 같이 말했다.
"그쪽이 원한다고 해서 제가 그것에 응해야 할 이유 역시 없죠. 전 그런 어떤 이해득실도 없는 이유 따위로 무가치한 시간을 보내려고 여기 있는게 아닙니다."
전날 개학식 전에 마주쳤던 동급생에게 했던 말과 같은 맥락이었다. 그러니 말 걸지 말라고, 상대하지 않겠다고.
"실례하겠습니다."
이 불쾌하고도 불편한 자리의 끝을 일방적으로 고한 뒤 아까와 같이 돌아섰다. 허나 이번엔 잡을 틈도 주지 않고 성큼 걸어 그 자리로부터, 상대의 앞으로부터 벗어났다.
교정에서 있었던 불쾌한 일을 뒤로 하고 향한 곳은 도서관이었다. 1학년 때부터 수없이 들락거렸지만 아직 반도 못 본 도서관은, 자리만 잘 잡으면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혼자 있을 수 있는게 큰 장점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조금 서둘러 걸었는지 어느새 도서관 정문이 눈앞에 다다랐다. 여느 도서관도 그렇듯 조용히 들어가니 수업이 없는 학생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공부가 목적이 아닌 듯한 사람도 보이지만은, 나만 방해 안 하면 그만이다. 일단 이전에 빌린 책의 반납을 하고 역사 분야 쪽으로 걸어갔다. 여기 오려고 신은 단화는 걸음소리를 최대한 줄여주어 걷는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그 책이...이쯤인데..."
내보다 머리 하나는 높은 책장 앞에 서서 찾는게 있나 쭉 둘러보았다. 아바돈의 역사에 대한 책이 분명 이쯤 어딘가에 있었던 거 같은데. 천천히 위아래로 훑으면 보다보니 옆으로 주춤주춤 걸어가게되더라. 무슨 게도 아니고.
"아."
그러다 제일 윗 칸에서 원하는 책을 발견하고 그리로 손을 뻗어보지만 닿지 않았다. 아주 살짝 부족한 정도? 몇 번 더 시도하다가 안 되자 한숨을 푹 쉬곤 발판을 찾아볼까... 중얼거리며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도서관이란 정말정말 크다. 진짜 크다. 장난 아냐. 그렇기에 과제를 위한 대출도 활발하긴 하지만 본분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행스럽게도 전산화가 되어 있어 기록표를 보면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는 점은 다행이지만.. 아바돈의 역사에 관한 것은 의외로 신학 부분에도 있는 편이라서 책을 두어 권 들고 나머지를 찾으려다가 헤일리를 만났다. 저번 결승때 만나고 나서 가끔 이야기도 나누고 연구주제로 이야기하기도 하니까.
"욥. 안뇽?" 붙임성 좋은 성격답게 빙글빙글 웃으면서 그녀에게 인사하려 합니다. 혹시 책을 뽑아낼 생각이야? 라고 묻고는 인챈트된 책장이 들어올 예정이라 하긴 하던데. 라고 넌지시 말했습니다.
"인챈터를 막 부려먹을 기회는 적다고 이사장님이 단단히 결정하셨을지도?" 도서관 공지에 붙어있던데. 라고 말하고는 원하는 책 꺼내줄까? 라고 물어봅니다.
발판을 찾으러 가볼까...싶을 즈음 라연이 대뜸 시야에 들어왔다. 너글너글하게 인사를 해오는 것에 보통 다른 사람이었다면 날카롭게 반응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어. 안녕."
단조롭긴 해도 가볍게 인사를 하고 라연을 한번 훑어보았다. 방학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게 없어보였다. 그가 책 두어권을 들고 있는 걸 보고 얘도 그래서 왔나 싶었다. 인챈터가 관련된 얘기를 하자 그러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서관 공지인가. 가기 전에 한번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저 위의 책 하나를 가리켰다.
"저거 꺼내려는데 손이 안닿아서. 꺼내주면 고맙고."
깔창빨 이럴 때 좀 써보라며 약간 우스개소리 같은 말도 했다. 평소의 나를 아는 사람들이 내가 농담도 할 줄 안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깜짝 놀랄까.
"그러게.. 시가지도 나름대로 멋이 있기는 하지만 막 삼년동안 돌아다니다 보면 꿰게 마련이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나야 뭐 집에서 불질이나 잔뜩 했지. 라고 말하면서 바베큐도 할 수 있다고? 라고 농담처럼 말하다가 맛집이라는 말에 오오거리고는
"맛집? 와.. 맛있겠다. 나중에 같이 갈래?" 아무래도 먼저 가본 사람이니까 뭐가 맛있는지 꽉 잡고 있을 거 아냐. 그치? 라고 능청스럽게 말하고는 베리아트 공화국의 유명 과자점의 과자 잔뜩 보존 인챈트 걸어서 사왔거든. 너도 한 박스 줄까? 라고 물어보려고 합니다.
"흑흑흑.. 헤일리가 사람의 자존심을 짓밟았다아... 여자 중에서 키 크다고 그러는 건가아..." 가짓으로 우는 척하긴 하지만 금방 얼굴색을 쓱싹 바꿔버리고는 반납하면 빌리라는 말에 어깨를 으쓱이고는 알았어알았어 너스레를 떱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져온 책에 대해서 묻는 헤일리에게
"신학 관련 책 한 권이랑. 어떤 로머의 수기." 이 수기는 레어인걸. 이라고 말하면서 역시 티엘린 아카데미. 국립 아카데미보다 오래되어서 그런지 이런 몇 권 남지 않은 책도 존재한다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꽃을 좋아하셨다. 정치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위해 어느 마음하나 둘 곳없던 어머니에겐 원예와 그림은 도피처가 되었으리라. 그 때문인지 나 또한 꽃이 싫지 않다.
어머니는 매화를 가장 좋아하셨다. 은 제국에서 피는 분홍빛 매화는 아름답게 정원을 수놓고 하얀 매화는 밤을 밝게 비추는 빛이었다. 나는 그것이 좋았다. 꽃놀이를 변명삼아 어머니의 손을 잡고 정원을 산책하고 어머니의 그림을 보고싶다는 것을 핑계삼아 어머니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지금은 다 지난일이지만.
이곳도 꽃이 한 가득 피었다. 이 학원에는 매화가 있는지는 모르나 아름답게 핀 꽃들은 추억에 잠기게 할테지.
같이 가자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하곤 과자 얘기에 시선을 확 든다. 베리아트의 과자...! 눈이 잔뜩 빛나고 있겠지만 어차피 가려져서 안 보이겠지. 한 박스 주느냐는 말에 맹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출신지는 이래서 좋구나 싶었다.
"안 주면 네 깔창이 사실 5센치였다는 루머를 퍼뜨릴거야."
사실은 통굽 신발을 신는다던가. 같은 농담 같은 말을 하고 내가 한 말에 내가 웃겨서 피식 웃었다. 라연이 무슨 책을 골랐는지에 대해 듣자 고개를 끄덕이고 수기책 쪽을 보았다. 입학하기 전에 아버지께서 보여주셨던 조상의 수기가 떠오르자 그것과 함께 전해지는 은목걸이에 대해서도 생각났다. 그것이라면 혹시...
"그래서 내가 국립 아카데미로 안 가고 여기로 왔지. 이 도서관에 그런 보물이 있다는 얘길 들었거든. 너 그거 반납할 때 꼭 나 불러라. 바로 빌리게."
만약 너 다음이 내가 아니게된다면 아까보다 더한 루머가 졸업 때까지 네 뒤를 쫓아다닐 거라고 덧붙였다. 히죽 올라간 입꼬리로.
아 맞다 테오도르주 아직 계심니까~~~??? (아마도) 좋은소식인데여~~~ 제가 손을 넘 못그려서 손하트를 열심히 그리면 손을 잘 그리게 되지 않을까 하고 손하트를 주제로 삼고 그림을 그리려는데 사다리타기 돌렸더니 테오도르가 나와서 손하트 하고있는 테오도르를 그렸다는 소식인데요~~~~~~~ 다른 분도 함 그려볼까합니다~~~ 사다리타기 돌려서~~~
"오오 감사감사!" 그러면 먹고 입가심하는 건 내가 살게! 좋은 맛집을 가르쳐준 정보료로 치면 되겠지. 라고 덧붙이고는 눈을 깜박입니다. 그러다가 과자를 안 주면 굽이 5센치라는 소문에 그건그만둬즈십시오라고 아주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빠르게 읊는 것이 랩에도 소질이 있을지도?
"통신주문으로 살 수도 있지만 왠지 줄을 서서 사는 것도 굉장히 두근두근거리니까.." 그리고 반납할 때 꼭 부르라는 말에 피식 웃고는(소문이 돈다는 말에 바로 새파랗게 질리긴 했지만) 당연한 말씀입죠. 라고 말하고는 국립에 안 갔다는 말에 아 좋겠다? 라고나 할까? 라고 농담을 합니다. 티엘린이 명문인 것과 더불어 어차피 라연은 절대 국립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까요. 당연한 일이지요. 수상한 소문이란 건.. 간혹 그런 법입니다.
"그러면 조금 더 찾아보다가 빌리고 갈래?" 물어보면서도 흥미로운 책이 있나 싶어 책의 제목을 훑어보고 있었습니다.
학원 근처에는 그가 기뻐할 만한 것들이 많았다. 그러니까, 평소 오해받을 여지가 많던 그의 행동 중에서도 특히 쐐기를 박는 특징이라고 해야할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 일 없는 듯이 걸어가던 그는 피어있는 꽃들에게 눈길이 끌린 것인지 어느새 그것들을 당장 뽑아갈 기세로 감상하고 있었다.. 물론 진짜 뽑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 와아, 이건 꼭 보여줬어야 했는데. "
그는 꽃들을 보며, 누군가가 생각난 듯이 아쉬운 말투로 혼잣말했다. 그러면서도 꽃을 손으로 만져보거나 몸을 수그려 더 가까이에서 보거나 했다. 아마도, 그 덕분에 주변에 누가 있는지는 잘 신경쓰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 ..? "
그런 그가 미묘한 인기척을 느낀 것은 조금 뒤였다. 그리고 발견한 것이 한 남학생. 그는 호기심을 느낀듯 남학생을 향해 다가가 먼저 말을 걸었다.
반응이 무딘 나와 달리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일비일회하는 라연을 보고 있으면 왠지 기분이 묘했다. 현재로썬 라연이 이 학교내에서 교류를 하는 거의 유일한 상대라서 그럴까.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과도 교류를 해볼까 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다시 혼자가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쌀쌀맞게 변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 참 변덕지구나. 아무튼 이랬다저랬다 정신 없는 와중에도 국립 아카데미 얘기가 나오자 좀 어색한 농담을 치는 것에 힐끔 쳐다보았다. 잘 알지는 못 하지만 라연과 그의 아버지를 두고 도는 소문은 몇번 들어본 적이 있었다. 같은 베리아트의 부르주아급인데도 만나기가 어렵다고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을 들었기에. 이렇게 같은 학교에서 볼 줄은 몰랐다만 말이다.
"줄 서는 거 난 귀찮아서 못 하겠던데. 아, 대신 사올 사람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네."
그러니까 과자 주는 거 잊지 말라고 말하곤 책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 그래도 한권 정도 더 빌릴까 하고 있었어. 음... 일생을 아바돈의 연구에 바친 사람의 수기 같은 건 없을까."
그런 건 이쪽이 아니라 자서전 쪽에 있으려나. 그렇게 중얼거리며 책장에 꽂힌 책들을 하나하나 짚어보았다.
남학생의 짧은 답변에 그는 가볍게 답했다. 보통 이렇게 뚫어지게 보는 사람은 애호가일 확률이 높던데, 이 사람은 아니었던걸까. 그렇게 생각한 그는 곧 날아온 다른 질문에 약간 뜸을 들이다 답했다. 그러고보니 남학생의 겉 모습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그러니까 황가의 사람에게 주어지는 외관이었다. 하지만 그가 알아챈 것은 조금 뒤의 일이다.
" 이름은.. 프란츠 발터에요. 반갑습니다. "
남학생은 그보다 나이가 적어보였지만, 그의 특이한 말투는 변하지 않아 마치 윗사람을 대하는 듯한 공손함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투였으니, 그는 별로 신경쓰고 있지 않았다.
"인챈트/과학 란은 상당히 최신 정보에서부터 기본이론까지 망라되어 있으니까."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쁘지 않을거야. 라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들어갈 순 있어. 이사장님과 독대해야 하지만." 한 번 들어갈 때마다 이사장님과 독대하라하면 차라리 안 들어가고 말지. 라고 투덜대고는 그래도 그 안에는 진짜 귀한 책들이 많으니까 말이야. 뭐더라. 칼라미티께서 그려져 있지 않은데 그거야말로 칼라미티 신님이 보이지 않는 용이라던가. 라는 주장의 책도 있었는걸. 고대어 책이었는데. 현대어로 번역을 엄청 세세히 해놨더라고. 감명깊게 읽었어. 라고 하다가 헤일리의 말에 어색한 듯 자연스러운 그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중얼거렸습니다.
"크리드는 어쩐지 오래 산 듯한 느낌을 주는 것 같기도 하고.. 그건 동안버프이리도 모르고.." "그래도 확실한 건 나ㅊ..아니 뭔가 많이 숨기고 있는것 같아." 그래도 인챈터로서의 능력이나, 가르치는 건 잘할지도 모르니까. 어차피 교사와 학생 사이가 막 가까울 일은 없잖아? 라고 말하고는 과학 쪽으로 가자는 것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게 격식 차리지 않아도 되네. 내가 황가의 후손이라고 하지만, 지금 나에게 있어 그것은 아주 사소한 문제일 뿐."
붉은 빛, 노란 빛, 푸른 빛, 여러가지 색의 꽃들. 정원사의 정성과 열정이 느껴지는 정원에선 나의 감정적인 면을 감추려해도 감춰지지 않는다. 아직 노력이 더 필요한 것일까. 하지만 어머니께서도 이 아름다운 정원을 본다면 누구든지 자비와 평안으로 가득 찰 것이라고 말할것이다.
"한 가지 묻지. 자네는 플로리스트인가? 아니면 단순히 꽃을 좋아하는 것인가."
바람을 타고 은은한 꽃향기가 코를 간질인다. 슬픔마저 잊게 만드는 향기는, 어째서인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렇게나 들어가는 사람이 없는데도 관리가 잘 되어 있더라고." 크리드에 대한 것도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도록 합죠." 고개를 끄덕이면서 위쪽을 슥슥 둘러봅니다.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책은 인식장해기기와 게이트를 만든 이들..이나. 인챈트를 대중화시킨 이 정도...려나. 라고 중얼거려봅니다.
"제목이 뭐더라. 좀 많이 과장해서 극찬하는 느낌의 제목이었는데." 혁신? 그런 느낌이더라고. 하기야. 초기 게이트와 인식장해기기 덕분에 제국이나 도시국가들이 세워질 수 있었으니 당연한 일인가? 라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다만 초기였기 때문에 정복전쟁이 일어날 수 있었고, 안정되고 나서는 힘이 차이가 나더라도 함부로 서로를 건드리긴 어려워졌으니. 라고 중얼대면서 평생을 아바돈 연구에 바친 사람의 저서 한 권을 빼냅니다.
아래쪽 칸의 책을 살펴보면서, 머리 위에서 들리는 말에 간간히 대꾸도 했다. 그나저나 라연 쟤는 은근히 아는게 많단 말이지. 배우지 않은 거나 의외의 틈새적인 거나,
"그쪽도 흥미가 없는 건 아니라서, 나중에 보려고. 일단은 보고 싶은 거 먼저 보고."
일주일간이면 충분히 다 볼 것 같다고 중얼거리며 책 한권을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 혁신이란 단어가 들어간 제목이긴 했지만 라연이 말하는 책 같진 않았다. 일단은 찾고 싶은 게 먼저기도 하고. 수그려 앉아서 손끝으로 책을 짚어보다가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라연이 어느 책 한권을 빼들고 있는 걸 보고 그거냐고 물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흥미로운 것부터 시작하거나 흥미롭지 않은 것부터 시작하거나." 타입이 다르니까 말이지. 으으윽... 시험 공부도 시작해야 하는데. 라고 중얼거립니다. 실습도 실습이고 공부도 공부고..
"음..예전에 꽤 많이 들었거든...그건 그렇지? 아무래도 혼자보다는 둘이 좋더라고. 앗 이거? 응응 맞아. 가져가도 괜찮아." 이쪽 책은 많이 읽어서 라면서 순순히 건네주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일주일 뒤에 수업이 시작하면 우리를 더욱 굴리실 거란 거지...?" 와 미춌네! 라고 농담처럼 말하기는 하지만. 분명 이번엔 약화시킨 하급 아바돈을 한 사람당 두 마리씩 붙여놓을 수도 있을지도! 라고 농담처럼 말합니다만. 당신. 말이 씨가 됩니다..
어렴풋이 어머니 생각이 났다. 휘영청 밝은 달빛아래 흐드러지는 매화를 보며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시던 어머니. 매화는 나에게 그런 존재다. 어머니가 있었다는 증거. 내 곁에 잠시 머물다간 나의 어머니. 지금은 모두 지난일이지만.
"순결. 순애."
어머니께서 읽어주신 책에서는, 백합의 꽃말을 순수한 사랑이라고 했다. 유독 그 말에는 평소에 보지 못했던 사랑이 담겨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아들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었을까. 내가 그 구절을 말했다면 나는 가족과 제국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터인데.
그러고보니 3학년은 실습도 하지. 일주일 후부터 있을 수업이나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이번 휴강을 더더욱 그냥 보낼 수 없게 되었다. 라연에게서 책을 받아들고 한번 내용을 훑어보곤 탁 덮었다. 자세한 건 기숙사로 돌아가서 봐야지. 고맙다고 말하다가 농담 같은 말에 아무렴 어떠냐고 받아쳤다.
"전년도 결투 우승자께서 별 걸 다 걱정하네. 그런 실습이라면 난 환영이야.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하루 빨리 알고 싶으니까."
과한 욕심은 화를 부른다지만 배움에 있어서 조금쯤은 괜찮지 않겠어. 그러다 죽으면 그게 내 운의 끝인거지. 먼젓번에 찾은 책과 여기서 찾은 것을 함께 들고 라연을 보았다.
어머니는 황가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행하라 하셨다. 하지만 타인에 눈에 감성적으로 비춰진다면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이다. 더욱 노력해야한다. 내 감정을 숨기고 내 의도를 숨기는 것. 그것이 어머니의 유언이었으니.
"그런가. 아직 부족하군."
나에게 있어 감정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어울리지 않다. 나는 언제나 냉정해야하고 이성적이어야 한다. 강박증에 가까운 자기세뇌로 나는 옳아매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내 자신을 안다. 어머니도 나를 알고 있다. 그렇기에 지나치게 감성적인 나에게 이성적으로 살라 말하신 것일테지.
배가 고프다, 고 느낀 것은 저녁 시간이 다가오는 애매하기 그지 없는 시간대의 일이었다. 당장 저녁시간이 코앞이라 학원 밥을 먹을 수도 있지만 오늘따라 그닥 내키지 않는 탓이 커서, 간식을 겸한 식사를 사오기로 했다. 저녁이니까... 샌드위치랑 생과일쥬스, 달콤한 젤리 정도면 무난하겠지, 뭐? 마지막이 아니라고? 흥! 젤리가 어때서!
먹을 거리를 사오는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예상보다 많은 양을 덤으로 얻어와버린 탓에 같이 먹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누구를 만나볼까...누구에게 가장 필요할까... 생각 끝에 훈련장을 쓰고있을 인디후배가 생각났다. 슬슬 저녁시간이니 서둘러 볼까! 발걸음을 빠르게 놀려 훈련장에 도착 해보니 훈련장 땅으로 의자를 만들어 쉬고있는 후배님이 보였다.
의자에 앉아 쉬고 있을 때도 발치에 뾰족한 흙 가시를 ― 내가 ‘죽순’이라고 부르는 건데 ― 끊임없이 솟아나게 해 봤다. 지쳐서 금방 그만두었지만 말이다. 쉬운 일이지만 금방 진이 빠진다. 마치 그물을 짜는 일 같다. 문득 고개를 들자 구름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몇 시간이나 지났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당분간 수업이 없지만, 스승님의 가르침 일곱 번째. ‘점토는 손을 떼는 순간 굳는다.’
“라야 선배님!”
익숙한 목소리였다. 깍듯이 인사하기 위해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리에 순간 힘이 빠져 휘청거렸다. 겨우 균형을 잡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손에는… 뭘까. 먹을 것인가? 일단은 이마에서 땀을 훌쩍 닦았다. 다행히도 바람이 선선했다. 목을 훑고 지나가는 순풍에 약간의 쌀쌀함과 넘치는 시원함을 함께 느꼈다. 어제보다 저녁이 더 일찍 찾아왔다. 그림자도 더 많이 길어졌다. 라야 선배님의 그림자는 그대로지만…. 가을이었다.
“여기는 어쩐 일로…? 어, 잠깐 비켜 드릴까요?”
라야 선배님이 ‘벽’을, 그러니까 ‘전기장’을 전개하는 방식을 참고하면 많은 도움이 된다. 물론 훈련하러 온 게 아닐 수도 있지만 말이다. 훈련장을 혼자 점거하고선 쉬고 있는 것도 눈치가 보이는 일 아닌가.
대략 대학교 같은 구조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대략 엄청 큰 실습장들이 여러 군데 있고, 도서관도 생각보다 여러 군데 있고, 동아리(?) 회관같은 곳도 있고.. 알루시아라 회관같은 곳도 있고 편의시설도 있습니다. 기숙사도 건물이 여러 채 있지만 다 동관이거나 서관이라서..(숫자로 구분함)
결론. 아침수업이면 그 아침수업이 이루어지는 건물이 본인의 기숙사와 가깝기를 바라는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니면 게이트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아니. 게이트가 더 일반적이지요.
....사실 티엘린 사립 아카데미가 있는 로라시아 섬이. 약 일본 국토 면적과 비슷한 크기인 카스피해 정도의 크기라서 말이지요.
기쁜 감정이 솟구치는 것을 최대한 잠재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것은 사양해서도 안 되는 법이다. 밥 생각을 하자마자 잊고 있던 배고픔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저렇게 많이 샀다는 건 로머 팀과 나누려고 한 걸까. 티엘린 4학년 로머 팀들은 웬만한 성인 아마추어 로머 팀 못지않게 강하다. 동경심이 끓어올랐다.
“훈련장에선 뭘 먹는 게 눈치 보인단 말이죠…. 앗, 무거워 보이는데 제가 들게요!”
팔을 뻗어 받기에는 바구니가 터무니없이 아래에 있었다. 쭈그려앉기도 껄끄럽다. 별 수 없이 허리를 숙여서 팔을 내밀고, 머리를 지면에서 수평으로 기울인 채 라야 선배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바구니를 들고 종종걸음으로 시장을 누볐을 라야 선배를 떠올렸다. 생각만 해도 앙증맞다.
>>412 그건... 사실 집안은 정말 동양계인데 하필 증조할아버지가 그렇게 도망가버린 뒤에 이아나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때 까지 할아버지를 못 잊어서 증손녀랑 증손주 까지의 이름을 전부 이안(증조할아버지의 인간계에서의 가명중 하나로 추정)아니면 이안의 변형인 이아나로 하느라 오히려 서양권 이름이지만... 그 외에는 솔직히 말하자면 중국과 중동의 사이에 있는게 더 가까워.
내겐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사, 사실 팔이 아프기도 하던 참이었구, 괜찮겠지! 괜찮을거야, 응... 아 모르겠다 진짜!
"오 좋네~ 저기서 먹는걸로!"
벤치보다 좋은 곳이라면 환영이지, 카페테리아라고 꼭 거기 밥을 사서 먹진 않으니까 굳이 상관 없겠지! 가벼운 발걸음으로 향하는 카페테리아 너머의 하늘은 벌써 파란색과 빨간색이 뒤섞여 황홀한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이런건 놓칠 수 없지. 왼팔을 하늘에 겨누고 디바이스의 버튼을 누르자 찰칵 하는 소리가 디바이스에서 울린다. 이런건 사진으로 남겨야 한다구!
참참. 그러고보니 세간에서 묘사되는 세 신의 모습을 안 썼구나.(어제 쓰려 했는데 자버림)
사실상 신의 묘사는 그 당시의 자기가 봐서 잘 그렸다 싶으면 됩니다. 여성남성도 구분하지 않고요. 막 일부러 모독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다만 좀 메이저한 묘사는 있는 편입니다.
리그트는 천공과 같은 머리카락과(이 천공도 밤이냐 낮이냐 노을진이냐. 비오는 날이냐로 나뉜다 카더라) 빛나는 눈. 학문 관련 물건(책과 깃펜 등)을 든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다만 다른 건 다 다르게 해도 책과 깃펜 같은 건 빠지지 않습니다.
칼라미티는 대부분 다양한 빛의 용의 모습이지만 인간으로 묘사할 경우에는 금빛 도는 적색이 메이저합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멸망을 표현한 듯한 모래시계 혹은 사후에 책을 무게에 단다는 듯한 저울을 들고 있습니다. 다른 건 다 다르게 해도 인간 모습으로 묘사할 때 모래시계나 저울은 빠지지 않습니다.
텐게르는 어둠과 같은 머리카락과 바다를 닮은 눈. 축적이다 보니까 항아리와 풍요를 상징하는 것을 든 모습이 메이저합니다. 시대마다 풍요와 부에 대해서 해석하는 것이 다르니. 든 것은 다양합니다만. 공통적으로는 반짝반짝계가 많습니다. 묘사시에 다른 건 다 다르게 해도 항아리나 풍요를 상징하는 것은 빠지지 않습니다.
내가 자초한 일이긴 하지만, 바구니는 묵직했다. 이런 무거운 걸 들고 다닌 선배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야 선배가 가리킨, 지는 해가 보이는 자리로 후다닥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바구니를 놓았다. 하늘이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소담한 창틀이 지평선을 향해 가는 태양을 고즈넉히 가두었다. 하품을 하며 탁자 밑에서 의자를 꺼냈다. 뒤편에서 라야 선배가 따라오는 것을 보았다.
“뭐가 있나요? 달걀 샐러드에… 샌드위치, 샌드위치 하나 더, 생선, 연어인가? 젤리도 있네요.”
쌓여 있는 음식들을 찬찬히 살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산 것은 아니니 마구 헤집어서는 안 될 일이다. 일단 의자에 앉아 선배를 기다렸다. 먼저 드실 것을 고르시고 나서 나도 고를 생각이었다. 그리고, 먹고 나면 이것저것 물어 보고….
다리 사이로 의자를 양손으로 짚고 고개를 들어 다시 창밖을 보았다. 일렁이는 노을이 보였다. 이제 곧 있으면 순식간에 색이 변할 것이었다. 놓칠 수 없는 장관이다.
저 성벽을 향해 전진하라 저 성벽을 향해 전진하라 주님이 우리 대장되신다 저 나팔 소리(나팔소리 성벽을 향해 울려) 크게 울려(거룩한 성을 향해 나팔소리) 저 나팔소리 크게 울려 주님이 우리의 대장되신다 저 성벽을 향해 전진하라 주님이 우리 대장되신다 나팔소리 시온성에 크게울려 거룩한 성에(울려라) 나팔소리 시온성에 크게 울려라 주님이 우리의(주님이 우리의) 대장되신다 전진하라
...이 노래를 이아나가 부른다고 생각하니까 정말 저건 버프용으로 모두 나가기 전에 큰 소리로 부를텐데 주님 부분을 어떻데 바꿀지 감이 안와... 그냥 한 신의 이름으로 햐도 될테지만 삼신이라거나 세 명의 신이라고 하면 박자랑 다 무너진드아....어쩌지...
포리아 공국에 중앙 광장에 들어선 당신은 여느 도시 국가와는 다른 풍경에 놀랄 것이다. 하늘에 보이는 작은 비행선들의 무리, 홀로그램 창을 띄우고 토론에 열중하는 사람들의 무리, 자동화 기기를 테스트하는 엔지니어들, 분수 위로 떠있는 수많은 홀로그램 창들에서 흘러 나오는 수 많은 정보들. 규모 면에서는 여타 도시국가들 보다도 작지만 주요 3국가와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은 정보와 기술의 국가, 포리아 공국의 낮을 표현하자면, 수많은 기술과 정보가 오가는 지식의 이데아라고 표현해도 무방 할 것이다.
보통 재산관련은 텐게르 신님께. 학문 관련은 리그트 신님께. 뭔가 치워버리고 싶은(?) 광범위한 범위는 칼라미티신님께..가 아무래도 일반적입니다. 아바돈 관련해서도 칼라미티님께 기도드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재는 안정기가 오래 지속되고 있기에 은 제국 내에서는 뉘트 분파가 리시트 분파와 비등비등한 느낌입니다.
나는 스...테이크는 후배 먹고 훈제연어 샌드위치! 자리에 앉자마자 메뉴를 선점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이번만큼은 베스트 셀러를 양보하겠어! ...젤리를 들킨게 부끄러워서 그런건 절대 아니고! 절, 대! 아니야! 접시를 꺼내 후배에게 하나 나에게 하나 놓고 생과일 주스 병도 똑같이 했다. 이럴 줄 알고 반반 나눠서 포장해왔지!
"제, 젤리는 신경 안 써도 돼!"
이, 이런 실수했다. 젤리를 미리 빼서 내 방으로 전송 해뒀어야 하는데. 디 콰트로나 같은학년이면 몰라도 후배님이 이런 모습을 보면 위엄이 깨진단말야... 흥, 몰라. 들킨김에 어쩔 수 없지.
포리아 공국의 중앙광장에 다시 나선 당신은, 낮과는 전혀 다른 풍경에 또 한번 놀랄것이다. 거리를 빛으로 밝히는 크리스탈 조명, 광장 중앙의 분수가 꺼진 자리에 생긴 작은 무대와 거기서 연주하고 노래하는 악사들과, 블루라인 디바이스로 그 무대를 녹화하고 즐기는 어른과 아이들. 실로 낭만적인 풍경을 따라가다 보면, 야시장에서 펼쳐지는 음식들의 향에 자연히 이끌리게 될 것이다.
젤리라. 탱글탱글하다. 단 것을 정말 좋아하시는 모양이구나. 그러고 보니 선배는 거의 항상 단 음식을 드시고 계셨다. 이런 것까지 얻어먹을 생각은 없다만, 굳이 저렇게 말씀하신다면 나중에 후식으로 같이 먹을까. 일단 밥부터 먹고 볼 일이다. 남은 건 계란 샐러드와 큼지막한 고기가 들어간 샌드위치다. 염치 없지만 지금 샐러드로 끼니를 때웠다간 내일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잘 먹겠습니다.”
의자에 똑바로 앉았다. 이내 접시를 받치고 정자세로 스테이크 샌드위치를 베물었다. 어렸을 때부터 배운 예절대로 과히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굉장히 맛있다. 훈련한 다음에 먹는 참이라 그런 것일까. 얌전히 우물거리며, 눈을 돌려 창 밖을 봤다. 천 보를 염색하는 것처럼 하늘이 순식간에 푸른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지평선 근처에서 구름이 짙은 분홍색으로 타올랐다.
“저, 선배님.” 나는 말했다. “하급 아바돈으로 실습할 때 다치기도 하잖아요. 그럼 얼마나 목숨이 위험한가요?”
식사의 적막함을 달래기 위해 말을 꺼냈다. 2학년이 되어 걱정인 것부터 묻기로 했다. 말을 마치고, 입 안을 생과일주스로 조금 축였다.
보통 통제된 실습용 하급 아바돈은 그렇게 위험하지 않지만 하급부터는 방심하면 죽을 수도 있다. 어릴 때 부터 아빠 엄마에게 받은 교육과 학원에서의 교육은 내게 그렇게 가르쳤다. 아무리 약하고 안전하더라도 거기엔 사람 목숨이 걸려있다. 특히 후배는 나와 같은 브릿지의 자리에 설 수 밖에 없는 능력인 만큼 더더욱이. 브릿지는 팀의 안전을 책임지고 파티원의 뇌가 되어주어야 하는 어려운 포지션이다.
"인디야, 선배가 항상 말하던거 기억하지?"
너는 너 뿐만 아니라 나머지 팀원의 목숨도 같이 책임져야 한다고. 훈련에서만큼은 때로는 가혹하리만치 인디에게 말한 이유는 하나다. 브릿지는 1초도 긴장을 늦춰선 안된다고, 브릿지가 긴장을 늦추는 순간, 팀원을 이어주는 다리(Bridge)가 사라져 버린다고.
역시, 실습용은 아니더라도 실전으로 들어가는 순간 목숨이 걸린 것인가. 학교 안에서 목숨을 잃을 일은 없겠다만…. 아직은 내 능력을 나조차도 다 알지 못한다. 녹이고, 모양을 다듬고, 굳히는 것…. ‘브릿지로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자문할 때 나는 시원스레 대답하지 못한다. 창의력이 조금 더 필요한 것일까. 샌드위치를 한 입 더 베어 물어서 번뇌를 잠깐 잊었다. 길지 않지만, 미각에만 집중한다면 고민은 잠깐 제쳐둘 수 있다.
“반죽으로도 동료를 지킬 수 있겠죠? 벽을 세울 수도 있고, 통로를 개척할 수도 있으니까….”
조금은 긴가민가한 말투로 말했다. 나는 날아오는 화살들을 녹게 만들 수 있을까. 동전을 허공에 던져서 떨어지는 것을 녹이는 식으로 연습한 적은 있다. 머리에 맞고 나서 녹아 버리는 바람에 돈만 잃었었다. 수호자로서 쓸모있는 능력이냐면 글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게 아니면 공격적으로…?
스테이크 샌드위치는 정말로 맛있었다. 주스와 함께 한 접시를 거의 비웠다. 나는 이어 말했다.
“제가 전장에 섰을 때 어떻게 싸울지 청사진을 그리고 있어요, 계속. 아바돈이 달려들고, 동료들이 지쳐가는 현장에서 내가 무엇을 녹이고 굳힐 수 있을까? 같은 거요. 졸업할 때까지 어느 정도 방향이 잡힐 거라고 기대는 하지만 말이에요.”
공기마저 오늘의 날씨가 화창하고 산뜻하다는듯, 이 건물 안이서도 상쾌하고 시원하다. 햇빛은 부드럽게 찬란하여 복도마다 그림자와 빛으로 미묘한 예술을 만든다. 이런 날에 반가운 사람을 만나다니, 그녀는 마음속으로 오늘 하루가 빛나는 이유 하나를 더 새길 수 밖에 없었다. 아마 있다가 밤에 기도드릴때 감사할 일이 하나쯤은 더 생기겟지.
"선배님들은 역시 대단하시네요! 전 아직 실전도 간신히 지원하는 정도인데... 무사히 오셔서 다행이에요."
새삼 4학년의 위엄을 본 것인지 아니면 원래 감탄을 잘 하는 요란한-이쪽이 더 설득력이 있다-면이 있는지 모르겟지만 여전히 표정이 반짝거렸다.
"와주신다면 정말로 즐거울거에요! 저희 아빠는 방학때가 되면 거의 동네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거든요... 뵐 수 있다면 제가 꼭 책임지고 이곳저곳 안내해드릴게요. 좀 지루한 감이 있는 곳이지만 사람들도 다 좋은 곳이고, 심각하기 춥거나 덥진 않아서 새로운 사람들이 오면 다들 정말로 좋아해요. 그리고..."
슬쩍, 복도에서 너무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말하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는 사람들은 있어도, 대체적으로 평화롭기까지 하여 어쩐지 이런 대화가 오가는 동안은 이곳이 아바돈이랑 싸우는 것을 배우게 하는 위험하고 긴장넘치는 곳이라는 것도 잊을 것 처럼 몹시도 부드러운 공기가 가득하다.
다행인지 아니면 불행인지, 인디의 능력은 나와 겹치는 부분이 많은 편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내 능력이 창조라면 인디의 능력은 재구성 이라는건데 결국 다른 두 방식 사이에서의 미묘한 간극이 실전에서의 생사를 바꿔놓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디의 스승이자 사수로서 나는 가르칠 때 더욱 신중해진다.
"그런 상황이라면, 인디는 바로 팀의 전열로 치고 나가야 해. 전열로 나가서 하는 일은? 가장 먼저 진입하고 가장 마지막에 후퇴한다. 팀의 전열과 후열이 제 힘을 어느정도 회복 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해."
그리고 그럴때는 땅을 우묵하게 파서 팀원을 대피 시키고 혼자서 지상에서 방어하는 것도 방법 중 하나야. 그렇게 덧붙이며 연어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물었다.
조용하다. 차가운 공기는 밤의 침묵을 감싸 서늘하게 내 몸을 스친다. 얼마만의 고요한 침묵이던가. 황도에 있었을때는 귀가 쉴 틈이 없었으니 이런 침묵이 참으로 고팠던지. 로머가 되기위해 이 학교에 입학하고 어언 1년이 지났다. 이 1년간 나는 무얼 했으며 무엇을 원하고 배웠는가. 황도를 도망치듯 뛰쳐나와 이 침묵속에 익숙해져 버리고픈 나는 비겁자인가? 어미니께서는 감성적인 나는 자기비하의 굴레에 얽메일 수 있다고 충고하셨다. 맞는말이다. 나는 지나치게 감성적이기에 냉철하고 이성적인 것 나를 원한다. 원래 모든이들이 자신이 되지못하는 것을 원하지 않던가? 나는 그렇다.
짤그락거리는 총과 검의 소리가 청아하게 울린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내 발소리는 너무나도 낯설다. 한 사람분의 발걸음. 나는 오롯이 이 정원에서 침묵을 만끽하며 걷고있다.
"....... 달이 밝군."
매화꽃이 있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황가의 정원같은 거창한 정원을 바라는 것은 너무나도 욕심이겠지. 가벼운 곡차라도 한 잔 있으면 좋겠지만, 규율은 규율. 정도에 어긋나고 규칙에 어긋나는 행위한 하지 않는다. 이성적으로 판단한다면 그것이 옳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감성적이다. 무의식중에 감성적인면이 없잖이 튀어나온다. 그렇기에 품에서 호리병과 잔을 꺼냈다. 찰랑거리는 사과주스 소리가 맑고 조용히 울린다. 비록 곡차는 아니지만 분위기를 내기에는 충분하다. 이런식으로 대체제를 만드는 것또한... 이성적인것인가?
달이 잘 보이는 벤치에 앉아 달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잘 보이는 달과 별이 마음에 든다. 작은 잔 안에 차오르는 사과주스. 그 안에 펼쳐지는 은하수. 이 어찌 절경이 아니겠는가?
"달은 술 마실 줄 모르고 그림자는 내 몸짓만 따라하니, 봄이 가기 전에 함께 놀아야 하지 않겠는가."
마지막 남은 샌드위치 조각을 입에 넣었다. 속에 든 고기는 다 먹어서 빵 끝자락만 씹혔다. 소스가 조금 묻어 있어 다행이었다. 세 모금 정도 주스가 남아 있는 컵을 들어올렸다.
“컵에 물을 따를 때마다 한 번씩 시도해 봐요. ‘굳히기’. 그런데 말 그대로 ‘굳을’ 뿐이지 고체가 되지는 않더라고요. 그러니까, 젤리….” 순간 입을 닫았다. 바구니를 흘겨봤다. 주스를 마셔서 단 것은 이미 충분했다. 나는 아예 젤리에 관해서 말을 꺼내지 않기로 했다. “푸딩… 처럼… 말이죠.”
주스를 굳혔다. 표면이 탱탱하게 변했다. 그러나 조금 힘을 주어 건드리는 순간, 물방울이 터지듯 풀어지고 말 것이다. 컵을 이리저리 살살 흔들다가 후룩 마셨다. 달았다.
"리그트의 집배원인 엘레노아여,저 테오도르 비르겐슈타인의 피로 하늘의 신께 바칠 책을 쓰는 까마귀여. 당신의 신도로써 오늘도 기도를 올리나이다. 엘레노아여. 제 피를 원하시면 피를 가져가시고,저를 사역하시길 원하신다면 사역하십시오. 대신 저희에게 눈을 주십시오,거짓과 진실을 가려낼 수 있는 눈을 주십시오."
나는 향을 태우면서 양 손을 맞잡고 기도했다. 하늘에계신 엘레노아여,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기도가 끝나고 나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으음,보조금 내고 이래저래 날 도와주는 학교 안에서 이렇게 기도하는건 모양새 안좋은건 알겠지만. 그래도 신앙인데 어떻게 하나,엘레노아께 계속 기도해야 돌아가신 아버지 보기에도 부끄럽지 않고 우리 어머니도 엘레노아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젠장,그리고 그놈의 여제고 뭐고 알게뭐냐. 사람 위에 사람이 있는게 말이나 되냐고,엘레노아의 가르침대로라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데 그 높으신 분들은 이것도 불편해한다니까.
"그나저나...향이 다 떨어졌구만."
카인 에트라사야에서 돌아올때 향을 한 상자에 가득 채워서 가져왔는데 벌써 다 태워버렸다. 기도를 매일매일 한다고 해도 이렇게 빨리 떨어지면 안되는데 말야. ...설마 누가 훔쳐가는건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방을 둘러봤다. 누가 향을 훔쳐가는거면 잡아서 죽도록 때리던가 해야지.
"뭐,어쩔 수 없네."
밖에 나가서 향을 사와야겠다. --- "...그러니까,향 파는 가게가..."
자주 가는 종교용품 판매점이 위치를 이전했다고 한다. 씁,하긴 요즘 그런 물건 수요가 줄긴 했지. 나같이 독실한 신앙심 가진 사람이 얼마 없긴 하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상점가를 걷기 시작했다. 한번 천천히 찾아볼까나...하던 사이,눈에 확 띄는 가게가 있었다.
"초콜릿 무스 케이크..."
으음,이렇게 맛있어보이는 케이크 파는 카페를 몇달만에 보는거야. 우리 고향에선 이런 초콜릿 먹기도 힘들었는데.
"여기,초콜릿 무스 케이크에,오렌지 주스에...네,네.그렇게 주세요."
죄송합니다.엘레노아님! 그래도 오늘 기도는 끝냈잖아요! 나는 하늘에 계신 엘레노아님이 날 너그러이 봐주시길 기도하며 간신히 찾은 빈 자리에 앉았다. 오늘 무슨 날인가,이 카페엔 사람이 엄청나게 많이 앉아있었다. 그리고.정말 어쩐 일인지 모르겠지만 내 앞에 앉은 사람은 눈이 확 돌아갈만한 미인이었다. 나는 크흠,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다음 내 앞에 앉은 미인에게 질문했다.
"저...실례합니다? 혹시,성함이."
그리고 그 눈을 보자마자 내 표정은 딱 굳어져버렸다. 저주받은 금색눈,아바돈의 피가 섞인 저주받은 혼혈아. 나는 고개를 다른 곳으로 말했다.
월광이 선명한 달밤. 그리 잠기가 있는 편도 아니고 한가하기도 해서 기숙사근처에 있던 정원에 밤산책을 거닌다. 다만 인기척을 보아하건데, 사람이 있다는 정도일까. 누군가 해서 가까이 가보니 익숙한 얼굴이 존재했다. 백금발 머리카락과 왼쪽의 눈동자는 푸른빛의 은빛눈, 오른쪽은 은은한 은색의 눈. 황가의 핏줄이 흐른다는 증거. 방계, 굳이 촌수로 따지면 사촌인 같은 나이의 은세하가 그곳에서 풍류라도 즐기는 어투로 말하는 것을 보고는 '표정'을 은은한 미소로 바꾸고는 말을 걸어온다.
"고작 과실의 음료를 마시면서, 마치 곡차라도 마시는 마냥 분위기를 취하는걸 보니 뭔가 골려주고싶네요. 오랜만이라는 말은 하지않겠습니다. 학교에서 은근히 마주치니까."
술을 마시는것도 아닌데, 저런말을 하고 있으면 딱 분위기를 깨주고싶다. 요컨데 놀리는거다. 그의 심정을 아예모르는것은 아니다. 이모쪽이 생전에 살아있을때 말한 말들이었으니까. 여전히도 마음속에 남아있는 중요한 존재인가 보다 하고 벤치에 걸터앉는다.
"결국 봄도 열흘을 넘어서면 그 아름다움도 변색되는데, 즐기는것에 무슨 의미가 있으랴. 결국 아름다움은 오래가지않는다."
화무십일홍에 낙화기근이라. 성하면 쇠하는것이 마련일지언정, 그 찰나의 순간을 바라는 것이 나와 어머님의 성향이라. 하지만 황녀님은 다르다. 그녀만의 확고한 신념이 있다라는 느낌을 적잔히 받는다. 그녀와 나. 그 사이에 있는 견해는 다를테지만, 이러면 어떠하고 저러면 어떠하리. 작은 아해부터 보았던 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다.
장난에는 장난으로 응수한다. 황녀의 말에는 언제나 가시가 돋아져있다. 아름다운 장미에 가시가 있는 것 처럼 황가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녀만의 화법. 나는 냉정함과 침착함을 연기하는 것이 생존방법. 오롯이 내 추측이지만. 역발상으로는 그녀를 이렇게 만든 제국은 아직 덜 여문 아이들에게 마저 잔혹하기 짝이없다.
"잠이 오지 않으십니까. 아니면 밤의 산책이십니까."
잔을 들어 한 잔 더 채운다. 찰랑거리는 사과주스안에 달이 구름에 가려 절반 밖에 보이지 않는다. 물끄러미 잔을 바라보다가 유현에게 건넨다.
그 순간 이아나의 등 뒤에서도 슬쩍 머리 위를 짐덩이가 지나가자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선다. 보통 이럴때는 레이디라면 앞에 나서지 않는게 예의... 일지도 모르지만 활기차고 열심히 뛰어다녀야만 하는 시골의 여성으로서 살아온 이아나는 딱 남들과 부딛치지 않을 정도로 당신과 함께 움직인다.
"예전에 학교 근처에 한적하고 적당한 곳이 있었는데 거긴 어떠신가요?"
어느세 밖으로 나오며, 당신의 멋진 은발과는 약간 다르게 조금 푸석거리는 잿빛의 머리에 노란 햇빛을 쬐이는 그녀는 당신을 향해 빙그르르 돌아서서 물어보았다.
자연과학 도서에서 읽은 적 있다. 「물을 이루는 입자들은 얼음이 되면 특이하게도 일정한 구조를 지니게 된다. 따라서 물이 얼면 부피도 늘어난다. 얼음에 강한 압력을 가하면 녹아 버린다. 얼음의 구조가 부서지기 때문이다.」 요컨대 서로 적절히 묶어 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겠지.
녹인 물질을 ‘조종’하는 과정은, 사실은 꽤 다르지만, 염동력과 얼추 비슷하다. 가만히 있는 물체를 움직인다거나 하기는 힘들지만, 물을 붙잡는 것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컵의 바닥에 남은 주스 방울들을 접시 위에 흘리고, 최대한 정신을 집중했다. 방울들이 탱글탱글하게 굳었다. 접시를 이리저리 굴리며 주스 방울을 유지시키려 노력해 봤다. 물질을 녹이고 아주 끈적하게 유지하는 건 힘든 일인데, 이것도 비슷했다.
주스를 붙잡고 있기에 집중하다가 실수로 접시 가운데를 살짝 녹여 버렸다. 걸쭉하게 녹아 내리는 접시를 황급히 수습했다. 모양이 조금 일그러졌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연습할 게 하나 늘었네요.”
멋쩍게 헤헤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밤이 구름 위에 올라타 검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밤은 텐게르의 시간이었다. 속으로 텐게르를 경배하는 호를 그렸다.
원하는 책을 빌린 후 기숙사에서 한참보다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더라. 한 반쯤 읽다가 정신을 차렸을 땐 돌아오고 꽤 시간이 지난 후였다.
"으그긋-"
기지개를 한번 켜고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대로 앉아있기만 하면 좀 그러니까, 시가지로 나가볼까 싶었다. 마침달달한게 땡기기도 했고. 케익이 맛있는 카페가 어디였더라 생각하며 느긋하게 방을 나섰다.
시가지로 나와 카페들이 있는 거리를 느긋하게 걷는다. 오늘은 어디로 가볼까. 카페들을 하나둘 지나치다가 한 곳 앞에 멈췄다. 마침 원하는 자리도 있어서 곧장 들어가 커피와 초콜릿 무스 케익을 고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온 것들을 들고 자리에 앉았는데, 하필 내가 앉은 테이블이 마지막 테이블이었다. 하. 뭐 아무렴 어때. 그렇게 혼자 2인 테이블을 차지하고서 기분 좋은 오후를 보낼 참이었다.
누가 앞에 와서 앉지만 않았다면 말이지.
뜨거운 커피를 천천히 식혀가며 한모금 마시고, 케익을 한입 먹으며 디바이스로 이것저것 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내 앞의 의자가 덜컹거린다 싶더니 누가 앉았다. 단언컨데 처음보는 사람이었다. 인기척에 슬쩍 고개를 들고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상대를 힐끔 보곤, 이름을 묻는 말에 딱 잘라 대꾸했다.
"알 거 없잖아."
그것이 내게는 지극히 기본적이고 당연한 태도였다. 그러곤 볼 일 없다는 듯 다시 커피잔을 들어 한모금 마셨다. 음. 여기 로스팅은 언제 와도 마음에 쏙 들어서 좋아.
그는 그녀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일단 자신뿐만이 아니라 상대방이 편안해야 좋은 대화가 될 수 있을테니. 그렇게 밖으로 나오니, 그는 햇빛 때문에 조금 눈이 아파보였다. 어쩌면 머리카락에 반사되어서 더 아플지도.. 흠흠, 아무튼 다시 그녀가 답을 물어오자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그가 입을 열었다.
" 학교 근처라.. 좋네요. 그럼 함께 가보죠. "
그는 멀리 나가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휴일이어도 언제 또 연락이 올지 모르니까.. 뭐, 중요하지 않다면 시간을 미루겠지만.
"그건 좀 상황이 다르네요. 골리러 행차했다면 내가 천리안이라도 있어야하니까요. 그저 우연입니다."
그도 그의 어머니도 행복한 찰나를 간직하려고했던건 틀림없었다. 다만, 나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어떤것도 결국 찰나이기에, 변화하는 현실에 대적하는 것을 원했다. 그것이 그와 나의 견해차이라면 견해차이겠지. 이해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결국 과거에 얽메인다. 라는건 씁쓸하지않나 라고 말하고싶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고 싶은 자신조차도 완전히 과거에 얽메이지 않았다고는 말할수가없다. 오히려, 행복한 찰나를 간직하려는 그와는 달리 내가 얽메인 것은 무거운 쇠사슬로 엮인 원죄니까.
결국 나는 살아가기 위해 변화와 대적하는 필멸자다.
"둘다인걸요. 딱히 잠도 오지않으니, 밤산책을 한다라는 말이 맞으니까."
화무십일홍. 열흘 붉은 꽃은 없다. 내가 행복했던 나날은 결국 찰나에 불과했다. 그런 사실이 떠올랐기에 어쩌면 부드러운 '표정'이 살짝 유지되지 않았을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어 제빨리 감춘다.
"뭐, 연기라 한들 상관없지않나요? 어차피 그리움이라는 것을 달래기 위한 수단이었을테니까."
우와,차가워,엄청나게 차가워. 고드름을 맨손으로 움켜쥔것만큼 이렇게 차가운 사람은 처음보겠네. 본인이 이렇게 자부하긴 뭐하지만 나름 인상 좋고 귀엽다고 자부하고 살았는데. 나같이 귀여운 사람을 이렇게 차갑게 거절해버리다니. 보통이 아니야! 찬찬히 외모를 뜯어보니,하긴 딱 봐도 차갑다는 느낌이 올라온다. 실루엣도 예쁘고 몸매도 좋지만 안경에,얼굴을 싹 가려버린 앞머리에...진짜 베일것 같네. 실수로 말을 걸어버린게 아닐까,살짝 불편한 기운이 감돌아서 다른 자리에 가서 앉고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런걸로 자리 옮기기도 그렇고. 자리도 없잖아.
"주문하신 케이크랑 주스 나왔습니다."
으흥★ 그런거랑 상관 없이,이게 몇달만에 먹어보는 케이크냐! 혀에 닿으면 머릿속까지 달달한 단맛이 올라와서 뇌를 녹여버릴것 같은 식감의 케이크! 달지 않고 시원한 생과즙이 듬뿍 들어간 오렌지 주스까지! 진짜 카인 에트라사야에서는 죽어도 구할 수 없는 음식들이라니까!
"잘★먹★겠★습★니★다!"
그리고 포크로 케이크를 살짝 떼어서 입에 넣는 순간,지고의 행복이 내 온 몸을 감쌌다. 아아,엘레노아여! 저는 이 순간을 위해 태어난 것입니까! 머릿속을 강타하는 단맛을 음미하고 이번에는 잘게 간 얼음이 가득한 오렌지 주스를 빨대로 쪽 빨아들인다. 입안에 남아있는 단맛이 싹 사라지고 온 몸이 시원해진다! 아아! 행복합니다. 이게 천국이 아니면 뭘까!
"이 케이크,맛있죠. 그쵸?"
성격 더러워보이는 여성분이시지만,그래도 이렇게 맛있는 케이크를 먹었으니 대화가 좀 통하겠지? 나는 내가 느낀 이 감동을 다른 사람한테도 어떻게든 얘기하고 싶어서,눈을 반짝이며 내 앞에 있는 여성분께 물었다. 네? 맛있죠?
"저는 커피는,별로지만."
그 쓴 물을 돈까지 내고 마시다니,그건 고문이에요.고문.아암. 이 여성분은 도대체 커피의 어느부분이 좋길래 마시는걸까? 마시면 쓰고,신 맛 밖에 안나는 끔찍한 물인데 말이지.
사실, 사람들이 많은 곳 또한 정말로 즐겁고 좋아하는 이아나이다. 하지만 이아나도 아직은 어리숙한 면이 남는 소녀였다. 더군다나 언젠가부터 피부로 느끼게 된-그녀의 입장에서는 충격적이게도-혼혈에 대한 차별의 시선은 마음이 쓰이는 일이라 몸을 사리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부터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상냥한 사람을 알게 된다는 것은 제 오빠인 이안에게 하는 것 마냥 마음 편히 두고 응석을 부리고 싶은 부분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고마워요!"
사실 햇빛이 비추어져서 만드는 착각이겟지만 미소를 짓는 순간 주변이 살짝이나마 빛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곧, 손으로 빛을 가리는 프란츠를 보며 조금 어수룩하게, 아니. 그것보다는 허겁지겁 그늘로 간다.
"그러게요! 날이 좋아서 게이트로 올 때 보니까 모두들 오는 표정이 좋아보였어요. 이런 날이라면 차랑 음식을 챙겨서 피크닉을 가거나 낙시를 가더라도 정말 재미있을 것 같네요."
그럼 야외 테라스가 있는 곳을 알아보아야 할까, 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앞장서서 전망이 잘 보이는 카페로 프란츠를 안내하였다. 아마... 이곳은 학교 안에서도 아는 사람은 아는 곳이니 프란츠도 대충 들어보거나 이미 와보았거나 하여 알 수 있을만한 곳이기도 하다.
프란츠는 왠지 그녀에게서 후광 비슷한 것을 느꼈지만, 아마도 착각이었을 것이다. 숨겨진 능력이 있다는 말은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으니까..? 그 다음 그는 그녀에게 안내받아 한 카페로 이동했다. 그곳은 프란츠가 전혀 알지 못하는 곳이 아니었고, 적당히 익숙한 느낌이 드는 장소였기에 만족할수 있었다. 게다가 야외에 자리도 있는 곳이니까.
"정곡인가 보군요. 충고같은 이야기지만 예전부터가 당신의 어머니와 관련되있으면 생각을 읽기가 쉬웠으니까 좀 조심하는게 좋을걸요."
그가 졌다는 듯 낮은 웃음소리로 얼버무리려고하자, 그렇게 말해둔다. 그에게 있어서 어머니라는 존재는 큰 지주로서 역할하고있으니까. 오히려 약점 잡히지말라는 의도로 말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언쟁이라는 말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웃음기가 아마도 없어졌다는 정도는 스스로도 자각할수 있는 수준으로.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 미천한 벌레들이 조금 있긴합니다. 진상을 알지 아니하고 헛소리를 내뱉는 존재가. 은 제국의 법도상으로 크게 확산하는 자가 아니라면 죄를 문책할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떻냐고 물으신다면 조금 과격한 말로 말하자면-."
'표정'을 유지하는 것을 잊고 말했다. 아마 거울이 있다면 비추고 있는건 사람으로서 이런식으로 가지는게 가능한가라고 의문이 들정도의 독기가 서린 얼굴. 거기엔 공허와, 무미건조하면서도 심연을 보는 듯한 눈동자가 마치 모든것을 원망한다는 듯 노려보고있었으리라.
"그 세치혀를 잘라서 저잣거리에 구경거리로 삼았을텐데."
나는 근본적으로 나를 폄하하는 자를 그런식으로 밖에 생각할수없었다. 다만 너무 그런 증오를 현실에서 드러내는 것은 위험하기에 다시 표정을 정리하기 위해서 옷에 꼬불쳐뒀던 종이부채를 꺼내서 '착'하는 소리를 내고 얼굴을 가린다.
벌떡 일어나서 직각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자연스레 탁자 위를 내려다봤다. 바구니를 놓고 가셨다. 바구니에는 젤리가 조금 남아 있었다. 달걀 샐러드도. 더 먹을 생각은 없으니 서늘한 곳에 뒀다가 내일 돌려드릴까…. 일단 먹은 자리를 치우기 위해서 다시 앉았다. 창 밖 서쪽 마지막 구름 한 조각까지 먹빛으로 물들었다. 접시 위에 뒹구는 주스 방울들을 핥았다.
「고령토로 성도 쌓을 수 있다.」 스승님의 가르침 그 열한 번째. 도예가의 캔버스와 같은 고령토만 있다면 무궁무진한 것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반죽’도 마찬가지로 가능성이 가득한 능력일 터였다. 다만 내가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뿐.
“물을 굳힐 수 없다면, 젤리는 어떨까….”
바구니에 담긴 젤리를 약간 덜어, 울퉁불퉁해진 접시 위에 놓았다. 젤리는 흐물흐물하게 퍼졌다. 오른손의 손가락 다섯 개를 젤리 위에 대고 젤리를 굳히자 모서리가 찰기 있게 곤두섰다. 무언가 번뜩 떠올라, 젤리를 도로 바구니 속 통에 담고, 바구니를 들고 일어섰다. 새로운 훈련법을 찾은 것 같았다.
오늘만 두번째 듣는 예쁘단 말에 웃음도 안 나왔다. 도대체 답답하다 못 해 아예 얼굴을 반 가려버린 날 보고 어딜 봐서 예쁘다고 하는 거지? 상대가 말하는게 굳이 얼굴이 아니어도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들어봐야 어이 없을 뿐이었다.
딱딱하게 대해도 자리가 없어서 그런지 상대는 가지 않았다. 그래도 불편하긴 하겠지. 애초에 말을 안 걸었으면 좀 나았을 것을. 이제와 후회해도 소용없단 걸 상대도 알겠지 생각하며 케익을 한입 크기로 잘라 입에 넣었다. 혀 끝에서부터 퍼지는 단맛에 기분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역시 이 가게의 맛은 1학년 때부터 변하질 않아 좋다. 그렇게 홀로 커피와 케익을 먹는데 앞에서 호들갑스런 소리가... 신경질적으로 힐끔 쳐다보니 엄청 촌스런 반응을 보이는 앞사람이 보였다. 참나, 초콜릿 무스 케익 처음 먹나. 내게도 맛있지 않냐며 촐싹대길래 약간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니까 좀 조용히 먹지?"
상대의 반응이 좀 요란했어야 말이지. 주변에서 몇몇 학생들이 이쪽을 보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아 짜증나네. 다리를 꼬고 비뚜름히 앉아 디바이스의 액정을 톡톡 두드렸다.
"개인 취향 존중이란 걸 모르나본데. 내 입에는 그 주스가 더 시큼하고 들쩍지근해서 최악이거든."
뾰족한 포크로 주스잔을 가리키며 쌀쌀맞게 말하고 커피잔을 들었다. 맛도 모르는게 말 막 하고 있네 정말.
"생긴대로 어린애 입맛이네."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며 빈정대는 한마디가 따라붙은 건 구태여 속내를 숨기지 않은 탓이었다.
그녀는 고고하다. 하지만 위태롭다. 황녀라는 자리는 이토록 사람을 몰아붙히는가? 황녀라는 이유로 비웃음당하고 사소한 실수 하나로 뒷방아를 찍는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방계로써의 의무와 책무를 강요당하고 제국의 누와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모든 것에 조심해야한다. 이것이 황가의 숙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중압감. 나는 그것을 반으로 나눠 피하고 짊어졌지만.
하지만 동정은 하지않는다. 아니, 감히 누가 동정한단 말인가? 고고하게 나는 봉황은 낮게나는 새들의 머리위에서 날아오른다. 그것이 은 제국의 핏줄이다. 그런 이들에게 동정이라? 어불성설이다.
"제국의 위명을 더럽히지 않는 한 처벌하지 않는다. 참으로 자비로운 제국입니다."
이 말에 야속함과 원망을 담았다. 나는 냉정과 침착을 연기한다. 연기라 함은 결국엔 덧씌우는 것, 한꺼풀 벗겨지면 너무나 감성적인 나는, 분노와 질책으로 언젠가 터져버리겠지. 역으로 생각하자면 이 제국의 위명을 더럽히는 자들을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감히, 어머니와 여제의 나라를 더럽히려 하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구역질이난다.
창 밖으로 보이는 훌륭한 경치가 괜스럽게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살살 부는 바람은 그녀가 사랑하는 바다의 냄새를 아른거리며 다가와 커피냄새와 섞여 기묘한 향수를 만들었다. 아마도 이런것에서 오는 감동이 하나 하나가 모여 그녀의 하루 하루를 빛나게 채워갔으리라. 메뉴를 시키고 프란츠와 함께 경치가 잘 보이고 가림막이 있는 곳에 앉는다.
"그러고보니 당분간은 그때... 수치랑 관련된 물건 덕분에 수업이 없다고 하던데 선배님은 따로 계획이 있으신가요? 언뜻 듣기로는 벌써 알뜰하게 휴가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도 들려왔어요!"
사실 그녀로서는 늘 한가한 것에 가까웠다. 학교의 이론은 다른 평범한 학생들처럼 시험기간에 적당히 하다가 벼락치기로 빡세게 한 번 하는 정도였고, 능력은 늘상 발휘되던 터라 일부러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실컷 노래를 부르는 것 만으로도 연습이였기에 할 말이 없었지만 프란츠와 같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지낼지가 궁금했다.
이안: 에히이! 거기서는 비음이 너무 강해. 이 부분의 악센트를 살리려면 무리하게 소리를 내지르려고 하지 말고 차라리 글자 하나 하나 만큼을 강조할 수 있도록 발음을 단단히 하는게 좋아. 이아나: 그렇긴 하겟지만! 그 뒤로 다시 첫 소절로 돌아오는 소리까지 하면 너무 정신없잖아! 정말로 하이라이트가 되는 구간은 따로 있는데 여긴 음을 높이면서 좀 천천히 죽이는게 전체적으로....
아주 그냥 단칼에 잘라버리는듯한 그 말에 질려서 더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세상에,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내가 뭔 말을 하면 왜이리 잘 받아주지를 못하냐. 프란츠같은 애는 만나면 재밌게 놀 수 있는데 말이지. ...물론 오늘 처음 만나긴 했지만요.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이 차가운 여성분과 더 대화를 하는걸 포기했다. 그래,뭔 얘기를 하겠어. 내가 뭔 말을 하면 칼에 베일것 같이 차갑디 차갑게 얘기하시는 분인데. 하지만 이어진 여성분의 말은 조금 싸늘하게 내 마음에 박혀왔다. 아니,뭐라고? 생긴대로 어린애 입맛이라고? 살짝 열이 올라온다. 이래봬도 스무살 넘긴지 한참 지났는뎁쇼.
"미안하지만 이 몸,4학년에 스무살 넘었습니다요. 그동안 인생의 쓴맛을 너무 많이 봐서 커피를 싫어하는거랍니다. 어린애 입맛이 아니라."
그래,임마. 진짜 힘든 일 많이 겪은 사람은 커피같은거 안좋아해! 커피는 어중간하게 고생한 사람들이나 좋아하는거야,진짜 힘든 일 겪으면 그 일을 잊기 위해서 술이나 단걸 먹지. 난 속으로 툴툴거리고는 다시 포크로 케이크를 한입 떠 입에 집어넣고 살살 녹는 단맛을 음미했다.
...이렇게 조용히,서로 대화 없이 말없이 케이크만 먹으니 너무 분위기가 삭막하다.나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 포크를 입에 물고,포크를 잘근잘근 씹고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바꿔서 마셔볼래? 무슨 맛인지 궁금해서."
입에 물었던 포크로 앞에 앉은 여자애의 커피를 가리킨다. 그래,얼마나 쓴지 궁금해서 말이야. 커피를 안마신지 벌써 3년이 지났다구.
그는 평범하게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적당히 쓰고, 적당히 맛있으니까. 마실게 없을때는 담백하게 시키는 것도 괜찮은 느낌이었다. 음료가 나온뒤 그는 커피에 설탕을 넣어 티스푼으로 빙빙 저었다. 연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아 조금씩 식히면서 마셔야 할 것 같았다.
" 계획이요? 이론 공부라도 조금 해볼까 생각 중이에요. 남는 시간이 있다면 그때 조금 놀고. "
이제 4학년이니까, 공부는 열심히 해두는게 좋을 것이다. 이것을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것이 아니었으니 방학 중에도 틈틈히 해왔었고, 이번에도 별 다를 것은 없었다. 그는 아주, 정말 중요한 또다른 일을 제외하고 나머지를 공부로 때우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는다면.. 말한대로 어디든 가서 놀게 되겠지.
황위계승을 포기했다는 말이 황가에 영향을 주지지않는다고는 할 수 없다. 내 어머니나 오라버니,언니가 있기에 쫒겨나지않는것만으로도 다행인 실정이니까. 그렇기에 그러한 사실이 부담스러울수 밖에 없다. 가족사이라고 해도 결국은 빚을 지고있는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어째서 홀로서기가 되지않는 것일까하고 원망스럽기 그지없는 황가의 사정이다. 결국 고고한 존재인척 하지만 스스로의 힘은 부족하기 짝이없다.
그런 상황을 동정받는 것은 더욱이나 그런 눈초리를 찔러버리고싶다.
"황권국가라고 하더라도 결국은 어느정도의 자유가 백성에게도 존중이 되어야겠지요. 그 자체가 나쁘다고는 할수없어요."
그저, 자신에게 걸림돌이 되는 인간이, 존재가. 증오스러울 뿐이다. 그렇기에 훗날을 위해 그들을 절대로 잊지않고 뇌리에 세겨둔다.
나와 그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황가의 아군으로서 그러한 자들을 싫어한다면, 나는 조금 그와는 달랐다. 내 스스로가 근거없는 소리에 피해를 입어야한다는 점. 그것이 가족에게 빚이된다는 점이 너무나도 싫었다. 그러니까, 나는 나의 문제가 먼저. 그렇기에 눈앞에 있는 그도 완벽히 나의 아군이라고 생각하지않는다. 황가라는 체제자체의 아군은 그저 부분집합일뿐이다.
"너무 극단적인것은 결국 스스로 독주를 마시는 것이니까 자중해야하지요."
사실은 극단적인 생각을 버리지는 않고있다. 그것을 드러내는 순간 나는 화투패를 잃은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다른 건 다 넘겨도 어린애 입맛이라던가 그 말은 그냥 못넘기겠나보다. 즉각 반응이 오는 걸 보고 비웃듯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렇게 생겨먹은 쪽이 잘못인거지."
상대는 4학년에 스무살이 넘은 것도 말해주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어려보이는 외모였다. 키도 나와 비슷하거나 작은 듯한 느낌이고. 신입생 같은 모습을 하고 초코 케익에 주스를 마시고 있으니 누거 어리지 않게 볼까. 참나.
그 뒤로 한동안 조용해서 이제야 좀 느긋이 있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종알종알 뭔 말이 그렇게 많은지. 이 조용한 침묵을 즐기며 커피를 마시고, 케익을 먹고 디바이스를 보고 있는데... 아무래도 상대는 이 조용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보다. 끝내 다시 말을 거는 걸 보면.
포크로 내 커피를 가리키며 바꿔서 마셔보지 않겠냐는 물음에 노골적으로 쯧, 혀를 찼다. 마시고 싶으면 사서 마시던가 저게 무슨 말이야. 다시 한번 소리나게 혀를 차곤 차갑게 권유를 거절했다.
"주스 따위로 입맛 버리고 싶지 않거든."
상대가 상급생이고 연상이란 걸 알아도 반토막난 말은 고쳐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당당하고 까칠하게 굴었으면 굴었지.
아련하게 불어오는 해풍이 아메리카노와 차의 향기와 섞여 두 사람의 목소리와 함께 주변으로 퍼진다. 그것이 묘하게 잔잔하고 편안한 기분을 만들기도 해왔고, 저 멀리서 알음알음 들리는 사람들의 목소리, 걸어다니는 소리와 무언가가 부딛치는 일상적인 소리-이아나가 정말로 좋아하는 소리들중 하나였다.-가 프란츠를 바라보는 그녀의 귀를 건드려 잔잔한 미소를 만들어낸다.
"역시 4학년은 졸업학년이라서 다들 바쁘시네요..."
공부를 우선시하는 프란츠의 말에 슬쩍, 자신과는 달리 힘을 팍 주고 공부계획을 짜던 룸메이트라던가 내년이면 4학년이 된다고 앓는 소리를 팍팍 하던 제 오라버니 이안을 생각한 것인지 새삼 그에 비하면 거의 하루 하루를 즐기기만 하는 자신에 대하여 새삼스러운 반성이 들었지만 그와 동시에 아마도 공부로만 때울 것 같은 프란츠에게 말한다.
"그렇다면 선배! 하루만 시간을 내주실 수 있나요?"
모처럼의 연휴인데 그냥은 아깝잖아요? 라고 하며 시간이 있을 때 논다고 했던 프란츠에게 이아나는 그늘에서 있을때는 볼품없는 잿빛이 되어버리는 머리카락과 닮아, 아주 작게나마 햇빛같이 빛나는 금색의 눈을 떠서 바라보며 뭔가 즐거운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짓는 표정을 짓는다.
"다같이 준비하는거에요. 선배랑 저랑 다른 친구분들을... 아. 많이 부른다면 역시 좀 피곤하겟지만 그래도 10명 안팍이라면 제법 재미있을거에요! 바닷가라던지... 음식이랑 수영복도 챙겨서 다같이 수영도 하고, 낚시도 하고, 싸온 음식들도 먹고, 산책하거나, 아예 볕 좋은곳에 모래로 몸을 덮고 푹 자면 엄청 따끈따끈하고 기분이 좋으니까 하루정도 다들 시간을 맞춰서 논다면 분명 휴식도 되고 앞으로 할 수업의 원동력도 될거에요. 게다가 지금 기간이 지나면 다시 또 모여서 놀기 힘들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다같이 가는거에요!"
그렇게 또 흥분해서 그 감정을 저도모르게 담으며 기쁘게 말을 하는 그녀는 기대감에 눈을 빛내며 프란츠를 바라본다.
마지막 남은 한 잔의 사과주스를 비워버린다. 텅 비어버린 호리병 안에는 바람소리만 윙윙 맴돈다. 나도 이처럼 공허하면 얼마나 좋을까. 감정적으로 내뱉은 말이 실언이 되어버리고 나의 행동 하나가 황가에 먹칠을 할테니, 차라리 감정은 없는편이 좋을것인가?
"하지만, 어느정도의 경고는 필요할 것입니다."
어릴 적, 어머니와 여제의 화답에 질문한 적이 있었다. 이 제국은 무엇으로 움직이는가? 그 때에 여제께서는 '공과 사'. 어머니께서는 '권위와 자비'라고 말씀하셨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 아카데미에 황가의 자손들이 입학한 예는 극히 드물다. 그렇기에 이목의 집중과 시기를 동시에 받는것은 당연지사. 역으로 생각하자면 행동 하나로 능력과 외형이 판단된다는 것이다.
슬프게도, 그런 말을 하던 그의 머리에는 시험은 한참이나 남았는데도 미친듯이 공부하고 있는 로렌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능력 수치도 꽤 높은데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건지.. 그는 약간이지만 기분이 우울해졌다.
" 하루.. 음, 노력해볼게요. 어떤 도련님이 막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래도 설득한다면 어떻게든 되겠죠! "
..아마도 그녀의 다음 말에서 그 미묘한 우울감도 사라졌을 것이다. 말보다는 밝은 표정이 더 큰 지분을 차지했지만, 그가 그녀의 행동으로 인해 위로받은 것은 분명했다. 프란츠가 조금 더 학년이 낮았더라면 훨씬 더 활기찼을 것이고, 지금 그녀의 모습에서 그 일부를 볼 수 있었다.
나는 여기에 온 학생중에 가장 돈이 없는 학생이지는 않을까 생각이 들곤 한다. 내 고향에서는 나름 뛰어나고 총명하다 들었지만 여기서는 아니다. 여기서는 다들 천재고 재능있고 총명하다. 나는 그저 보통의, 아니 여기 문화도 잘 모르고 인맥도 돈도 없는 최하의 학생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여기 들어와 잘 적응하게 된건 정말로 큰 행운이다. 나는 여기에서 잘 살고 있고(나름) 점점 많은것을 배우고 있다.
그중 배운것중 하나는 모든것을 가치로 하게 하는 화폐다. 그리고 그것을 버는것은... 힘들다.
“오늘도 수고했다! 여기 오늘 일당!” 동시에 나는 돈 주머니를 받는다. 내가 하루종일 무거운 물건을 옮기고 받은 대가다. “어 이거 평소보다 좀 많이 넣은거 같은데요.” 무게를 확인해 보니 원래보다 더 받은거 같다.
“생각해보니 자네가 여기 온지 1년 가까이 다 되가는거 같아서. 그동안 참으로 성실히 그리고 잔꾀 안 부리고 일한 댓가라 생각해!”
“솔직히 맨처음 소개 받았을때는 미덥잖았는데. 사고도 중간에 많이 쳤고.”
“그래도 열심히 일한게 어디 가겠어! 앞으로도 계속 와줬으면 좋겠군!”
이런것을 행운이라 할까? 아니면 운명이라 할까? 성실함과 꿋꿋함이 신뢰와 대가의 열매를 맺은것이다.
"법도대로-. 지금은 그선에서 그치는것이 낫답니다. 결국 사적인 감정이 뒤따른다면 어머니께 누가 됩니다."
감정적인 이유로 경고를 해봤자 오히려 그들이 물고뜯을 빌미만 늘어다준다. 그런 하찮고, 시기많은 존재들은 한번에 언젠가 일소시킨다는 생각만을 머리속에 담고는 지금으로선 말하지않는다.
"난 당신이 그렇게까지 하는건 그리 찬성하지는 않아요. 버림말을 스스로 자처하는거 같잖아요?"
필요한 말은 필요한곳에 쓸모없이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버림 말로 쓸 존재는 겉만 바라보고 추종하는 얼간이한테나 주면 된다. 그런 얼간이들과는 그의 가치는 다르다. 이율타산적으로 그에게 독주를 마시게 할 이유가 없다. 손해가 더 크기 때문에. 적시적기에 걸맞는 일을 해야하니까.
뭐, 당장으로서 내 계획으로 그를 끌어들일 생각은 없다. 황가의 아군이기에, 오히려 내 계획에는 차질이 될수있으니까.
"심리는 깊게 파지않았지만, 결국 사람이라는 존재는 생각보다 더러운구석이 있거든요. 자신의 손에 닿지않을 존재에게 티끌이 있다면 그것을 물어뜰어 끌어내렸다고 자기만족한답니다. 그렇기에 굳이 경고할 필요도없습니다. 광견같이 짖어보라지요. 자신의 미천함을 결국 정신승리하는거나 마찬가지니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오만한 발언이었지만 해가 되는 이들에 대해선 자비없이 나는 까내린다. 그들이 나를 까내리는데 내가 그들을 까내리지않을 이유가 어디있는가.
사실 그녀의 아빠(도 이름이 이안이다.)가 예전에 자꾸 하라는 어업은 안하고 노는 이안과 이아나에게 꾸중을 들 때 했던 말이 인상적이라 기억했다가 쓰는 말이였다. 당연히 이아나는 공부보단 노는것이 좋았다. 하지만 언제나 위험속에 뛰어드는 로머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하여 온 것은 이아나였기에 배움을 쉽게 여기진 않았다.
"하하... 혹시 예전에 들었던 로렌스 선배 얘기인가요."
그쪽도 꽤 성실하긴 하시죠~ 라고 하며 건조해진 목을 보호하기 위하여 약간 쌉쌀한 맛을 내는 차를 몇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는 아주 예민하게 프란츠의 얼굴에 일어난 변화를 방금 귀여운 아기토끼를 발견한 예닐곱살의 꼬마아이처럼 기뻐한다. 벌써 5살도, 6살도 지났지만 이렇게 기쁜것을 기쁘게 발견하는 예민함은 그녀에게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말 자주 들어요. 라기보다, 지금은 누구든지 기분이 좋아질 것 같은데요? 날씨도 좋고, 앞으로는 황금연휴에... 방금 막 학교에 왔으니까요. 아. 물론 긴장하거나 하는 사람도 있겟지만... 선배 앞에서는 정말 주름잡기지만 개학식때 먼저 나가는 신입생들을 보니까 기분이 미묘해지더라고요..."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또 누구에게든지 그 사랑을 전달해주는 소녀... 라기보단 아이에 가까운 사람. 은색의 머리와 함께 언제나 성실하고 진중하고 상냥한 당신이 지금 바라보는 그것이 이아나였다.
예컨데,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버림말을 자처하지마라. 역으로 생각하면 버림말이 아닌 다른 쓰임새가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무얼 위해? 황가를 위함이 아니라면 뭘 위해? 아직 답은 나오지 않는다. 역으로 되짚어본들 명확하게 나오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내가 해답을 구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렇기에 냉정해져야겠지요. 제국을 위해서."
사람의 첫인상은 얼굴로 좌우된다. 나와 황녀님은 제국의 얼굴. 지킨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지킨다는 말은 어줍잖은 동정이 될 수 있으니. 그렇기에 좀 더 조심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해야한다. 누가 이익이 될 것이지 누가 손해가 될 것인지. 사람으로 저울질을 해야 하는 이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머니와 여제를 위해서라면.
구름이 하늘을 기어가 달을 삼키고 별을 마시고 은하수를 메꾼다. 어두컴컴해진 이 정원엔, 어둠과 적막만이 가득하다.
"어둠이 달을 삼켰으니 슬슬 들어갈 시간입니다 황녀님. 애석하게도 바래다 드리지 못하겠군요."
동과 서로 나뉘어져 있을 뿐더러 추문또한 걱정해야 한다. 머리가 아프다. 신경쓸일이 너무 많다.
그래,아주 성숙해서 절대 나보다 어려보이지 않고 아무리 어려도 20대 중반으로 보이는구만. 적어도 나이 많은 것보단 어린게 훨씬 낫잖아! 좀 조용히 조용히 넘어 갈 수 있는데 꼭 하나하나 꼭꼭 찝어서 공격을 해요. 이 애가 누군지 이름은 모르겠지만,정말 이름을 안다면 꼭 기억해두고 싶다. 정말이지 스트레스 받는 녀석이라니까. 그리고 바꿔마시자는 대답은,당연히 예상했던대로 No였다. 네,그럼 그렇죠. 이 기세라면 같은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도 불쾌하다고 할 기세인거 같다구.
"...지금은 돈이 없지만,다음엔 내 돈으로 꼭 사마시겠다. 억울해서 진짜."
으으,완벽하게 이 여자애 페이스에 말려들어가버렸어. 뭔 말을 할거리도 없구요,조용조용히 케이크랑 주스를 마시면서 결국 시간을 보냈다. 거 참,이렇게 어색한 분위기에선 케이크가 한입도 넘어가지 않을것 같았는데 어떻게 넘어가긴 넘어가는구나. 분위기가 이렇게 안좋아도,초콜릿 무스 케이크는 너무 맛있어.
"잘먹었습니다."
그 말과 함께 케이크 접시를 다 비우고. 말끔한 접시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은다음 내 앞에 앉아,디바이스로 책만 들여다보는 여자애한테 삿대질 하면서 말했다.
"내 이름은 테오도르 비르겐슈타인! 잘 기억해두라구! 오늘 커피랑 주스를 바꿔서 마시자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걸 꼭 후회할테니까. 알겠어?"
그럼,난 가본다! 에휴,오늘 성질만 버렸네. 이렇게 차가운 녀석인줄 알았으면 말도 걸지 않는건데!
어두운 밤, 어딘가 긴장하는 것에 가까운 음색이 오늘도 천상 노래를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닐까 할만큼 매끄럽고 매혹적이게 튀어나온다.
"...의 신 ...으로."
아. 긴장되게 들리는 것은 노래가 원래 그래서였을까? 아니면 정말로 그런것일까. 입 밖으로 나오는 노래는 온 몸을 진동시키는듯 나온다. 아마 로머를 서포트하기 위하여 오지 않았더라면 극단에서도, 악단에서도, 아니면 춤을 추는 곳이나 다른 어디에든지 노래가 필요한 곳에서 목을 맬 수준으로 원했을 목소리는 아무도 없을 시간에, 정말이지 이 노래를 듣는 당신이 아니였다면 아무도 없을 장소에 애처로우면서도 굳세게 나온다.
"오-오. 주인이-시-여. 들어주소서-! 어어... 아니. 잠깐만. 여기는 어..."
곧, 분명히 훌륭한 노래였음에도 갑자기 노래를 멈추고 악보를 바라보며 고민하다가 그녀는 당신쪽에서 무언가 부스럭거리자 흠칫하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상인의 단점중의 하나는 시간을 아쉬워한다는 점이다. 그 단점이 부각되는게 바로 이런 때인데, 일이 끝났으면 쉬어야 했지만 뭔가 아깝다고 해서 산책을 하고있었다. 산책을 하면 오히려 피곤해지는건 자명한 일. 그렇다고 해서 교역소에 가서 시세라도 알아보는것도 의미가 없건만.
"음, 이건?"
제법 그럴듯한 여성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고작 행상인이었지만 나도 여러곳을 여행하면서 여러 극단을 만나왔다. 듣기에, 이 노래는 여느 극단에서 보다 돋보이는 목소리였고, 일부 호사가들은 금화를 던질것이 분명하였다.
"이건 의외로 득이 있을지도 모르겠는걸."
쓸데없는 혼잣말을 하며 그 소리를 따라 걸어나아갔고, 그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기서 인기척을 내 노래를 방해하는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고 그냥 가기에는 그 금화값이 아까웠기에 계속 들을 요량이었다.
"아아, 있습니다."
하지만 들켜버리고 말았다. 이것 참, 조금 부끄러운걸. 그 사람의 모습을 보아하니 이곳의 학생임에 틀림은 없었다. 자, 어떻게 할까. 여기서 거짓말을ㅡ 아니, 거짓말을 하기에는 받은 가치가 크다.
그 간격을 묘하게 캐치하였지만 애써 티내려고 하진 않는다. 아마 자신보다 훨씬 더 오래된 관계속에서 그들만의 무언가는 신뢰처럼 굳을테니 그건 분명 이아나가 참견해야 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4학년이 되면 무뎌지는건가요..."
새삼스러운 연륜(...)과 경험의 차이를 느끼며 그녀는 자신의 미래가 될지도 모르는-소위 4학년은 죽을 사를 써서 사망학년이라는 농담-의 주인인 것 같은 프란츠가 조금 애잔해지면서도 자신의 미래라는 생각에 입안에 머금은 마지막 찻물이 좀 더 쓰게 느껴졌다. 아... 굿 로머...
"힘내세요 선배."
손이라도 잡아주고픈 심정이였지만 벌써 잔은 비었고, 창밖은 주홍빛이 되었기에 아쉽다는듯 바라보다가 말한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못 느꼈는데... 이렇게 길게 시간을 내주셔서 고마워요 선배님! 혹시 도움은 못 되겟지만 언제든지 너무 피곤하거나 힘드시면 연락주세요! 뭐라도 도움이 될만한건 반드시 도와드릴게요."
그렇게 말하며 일어났을때 힘내라는듯 기운차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던 이아나는 곧 고개를 꾸벅였다.
그리고는, 노련하고 잔뼈굵은 당신과 너무나 대비되게도 마치 처음 땅에 쌓인 눈덩이들중 가장 위에 있는 깨끗한 눈송이처럼 순수한 그녀는 순식간에 악보로 얼굴부터 가리다가 실눈을 뜬것에 다행이라고 여긴다. 아무래도 자신의 능력은 늘 발동상태이기에 말을 할때도 자신의 감정을 약간씩 암시처럼 전하게 되고 노래는 특히 그게 과해지기에 실눈을 뜨고 살며시 겐에게 쭈뼛쭈뼛 다가간다.
"저... 어. 이 시간에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헉시 큰 폐가 된건 아니신가요?"
현재 이아나가 부르던 노래는 예전에 다른 사이비 종교 마을게 갇혔을때 독실한 신도가 부르짖었다는 기도문을 토대로 만든 노래였기에 부를때는 늘 묘하게 감정이 고조되었다. 그렇기에 혹여나 겐에게도 그런 일이 생겼을까봐 조심히 겐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건 아직 다 익히지 못했는걸요! 아니. 그것보다 이런 시간에 여기서 부르던 제 잘못이기도 하고."
실눈만 뜨지 않았다면 토끼처럼 눈을 떳을 이아나는 부드럽게 말하는 겐에게, 속으로 겐이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안도하며 악보를 보여주었다.
-인간? 그 배신자들. 타락한 것들.. 증오스러운 것들... 존재 자체가 재앙인 것들. 우리를 올라가지 못하게 막은 것들.. -아바돈은 생각보가신과 비슷한 개념이다. 단. 상급 이상일 경우. -루트 중에는 칼라미티의 안식이 깨져서 다같이 배드엔딩도 있다. 근데 웬만해선 그렇지 않을 거야. -법률 상 아바돈의 피를 가공하지 않고 먹는 것은 불법입니다.
이미 누가 말렸다는 말에 정말로 그럴싸해서 납득해버린다. 하기야, 이아나는 매일 노래를 하면서도 노래를 하기 전에는 주변에 허락을 받거나 지금처럼 문제가 안될 공간을 미리 찾아두지 않고는 멋대로 노래하는 일이 없었다. 그야, 멋대로 버프랑 디버프를 해버리고 감정을 의도하는 능력이니-강하지 않아서 다행이지-그러지 않고서는 문제가 많았다.
"그게, 또 전 조금 제약이 있거든요. 능력이 좀..."
친절하게 말하니 무슨 의심도 없이 그대로 불어버리는 이아나... 아마 지금 짓는 해맑은 표정은 도시에 간다면 사기당했는지도 모르고 웃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다가 당신의 비유에 깜작 놀란듯이 말한다.
"안돼요! 안돼! 무심결에라도 자기에게 그런 심한 말을 하면 주늑들어버려요."
라고 말한뒤에, 당신의 말에 고민하면서도 왠지 자신의 손수건을 앉아있기 좋은곳에 깔아준다.
그런 말과 함께 한 손 가득 담아들고 간 것은 작은 메탈류의 금속먈뚝 수 십개. 지금 머릿속에서 구상중인 실험을 하기 위해 금속점에 들렀었는데 이정도로 많이 구할 수 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충분히 실험을 거행하고도 남을 정도의 많은 양의 실험 소체를 손에 들고 학원으로 향하는 길에...
"어?"
굉장히 익숙한 실루엣이 저 멀리 보인다. 큼직한 신체, 검은 머리에 검은 눈, 구릿빛 피부... 혹시 진 후배님? 아니라면 그것대로 민망하겠지만, 내가 아는 선에서 저런 비주얼을 지닌 사람은 진 후배님 한 사람 뿐이다. 알바하고 나오는 길인 것 같은데...일단 가 보자, 그리 생각하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얍, 잘 지냈어?"
처음에 만났을 때랑 완전 다르네! 이렇게 돈벌이 수단도 구했고! 그런데... 혹시 시급으로 사기 당하는건 아닐까, 그런 걱정이 들었다.
그것은 장점이자 단점이였다. 정말로 사랑스럽고 상냥한 이아나, 누구 하나 미워하지 않고 미워할수도 없이 품어주는 이아나... 그건 다른 사람이였으면 진즉 꺾이거나 더러워졌을 아이의 심성이나 다름없었지만 적당히 가난하고, 적당히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서 사랑받고 사랑하며 살았던 소녀의 이런 면모는 행상인을 하며 여러가지를 보고 익힌 당신에게 있어서 상극이나 마찬가지였다.
"잘 하셨어요! 좋은생각이에요."
고치겟다는 말에 마치 자기일처럼 기뻐하며 햇빛처럼 환하게 미소를 짓는것이 확실한 증거였다. 어쩌다가 이런 사람이 이런곳에... 하는 수준으로 말이다.
"훌륭하다니, 좀 쑥스러운걸요... 어디보자. 그러면...어. 시간이 이러니까 자장가?"
라고 하며 스스로 가볍게 손벽을 쳐 박수로 박자를 맞추며 노래를 시작한다.
"小さな人の子よ 森へ迷い込んだ 치이사나 히토노 코요 모리에 마요이콘다 숲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의 작은 아이야
이 노래를 어디서 들었는지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들을때마다 가슴 언저리가 몽글거리고 편안해졌기에 이아나는 이 노래를 정말로 좋아했다. 처음 노래를 듣자마자 1주일은 거의 이것만 불렀고, 그 뒤로도 몇 달 동안을 다른 노래들과 함께 불렀고, 아이들을 재울 일이 생길때에도 자주 불렀던 노래였다. 즉, 그녀의 무수하게 많은 18번중에 하나라는 뜻이다.
"어... 다행이네요."
아무 표정도 없기에-편해보이기는 하였다.-설마하니 노래가 맘에 안드는걸까 불안했던 찰나에 그렇게 말하니 다행이라는듯 안도하였다. 싸늘한 가을밤에 추운 바람이 불자 살짝 팔장을 끼었다.
"으, 조금 추워졌네요. 괜찮으시다면 좀 더 따뜻한 곳에 가면 어떨까요? 여긴 바람을 막을 곳이 없어서 좀 쌀쌀하게 느껴지는데..."
“노력도 시작할수 있어야 하는법이죠. 리야누나가 제게 처음에 도와준 덕분이예요.” 난 내가 아까 받은 돈주머니를 찰랑찰랑 흔들며 말했다. 강한 나무도 기름진 땅이 있어야 새싹이 돋고 하늘 높이 자라는거다. 세상에는 시작조차 할수 없는 사람이 많다. 아마 그랬으면 나는 지금 벌써 내 임무를 실패한 셈이 되는거다.
“무거운것을 옮기는 일이라 힘좀 써야 하지만 그래서 제가 제일 잘... 뭐라 하더라 이 표현이. 잘 출타 한다? 잘 퇴장한다?” 무언가 비슷한 의미였는데. “아 그렇죠 제일 잘 나간다. 돈도 같은 경력자에 비하면 돈도 많이 받아요.”
걱정스레 질문해오는 라야누나의 말에 다 그렇다 라고 대답할수느 없었다. 왜냐면 사기도 당하고 소매치기도 당했으니까. 은행은 맨 처음 라야 누나가 말해줘서 잘 맡기고는 있는데.
간단하고 명료하게 납득이 가능한 대답에 깨달았다는듯이 끄덕인다. 어째서 이렇게 쉽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싶어도, 그녀의 창백한 잿빛머리만큼이나 확실했던 당신의 말이 그럴싸해서 믿는 것도 있다.
"그것도 그럴만하네요. 너무 사양만 하면 역시 상대방이 무안해지기도 하고..."
뭔가를 주기도 편하다는 말에 무엇을 보답해야할지 생각하다가도 또 맑은 가을하늘의 별이 예뻐서 거기에 눈이 쏠려 감탄하기도 한다. 당신의 마음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이렇게 태평하다니... 하지만 완전히 당신을 잊지는 않은듯,학교가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하는 곳 까지 오자 조금 활기찬 목소리로 명랑히 말한다.
"학교에 가기 전에 몸 좀 데피고 가지 않을래요? 저기 생선살을 으깨서 튀긴걸 파는 집이 있는데 조금만 먹오도 육수를 같이 주거든요. 값도 괜찮으니까 제가 쏠게요!"
가볍게 정정하며 뜨끈한 국물과 특제 소스를 생각한다.-모니터 너머의 사람은 오뎅이라고 부르는-그것은 이렇게 추울수록 강하게 위장을 공략하였다. 짭짤하면서도 시원한 국물, 씹는 것도 재미있고 제법 요깃거리는 되는 생선살, 짜고 묘한 향기를 갖고있는 간장이라는 이름의 소스는 이 추위를 즐기게 만든다.
"아. 저기네요! 저기서 달걀이라던가 맛있는거 많은데..."
벌써부터 코를 유혹하는 냄새에 행복하게 웃으며 앞장서서 당신과 함께 가게에 가서 단골인양 주인에게 소개를 하려다가 슬쩍 당신을 본다.
"그... 이쪽은 방금 만났는데 오뎅은 아직 모른대요! 단골로 만들어드릴테니까 서비스 팍팍주세요!"
아침 운동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배를 채울만한 걸 사러 매점 쪽으로 가고 있었다. 오늘도 식당 앞까지 갔다가 바글대는 사람들을 보고 질려서 돌아나온 것이었다.
"식사대용 뭐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칼로리와 배만 채워주는 그런게 있으면 이렇게 매번 귀찮게 매점이나 시가지로 나가지 않아도 될 텐데. 돈 문제보다는 편의성의 문제라고 생각하며 샌드위치와 우유를 사들고 나오던 길이었다. 다 먹고나면 오늘은 훈련장에나 가볼까. 실습을 앞두고 능력을 좀 풀어둬야겠어. 그리고 다음엔- 따위의 여러가지 예정들을 머릿속으로 굴리며 걸어가다가 길 한복판에 서 있던 사람과 툭 부딪혔다. 그 바람에 들고 있던 샌드위치 팩이 떨어졌다.
"야, 위험하잖아. 서 있으려면 저만치 피해 있던가."
순간 확 치솟는 짜증에 날카롭게 쏘아붙이고 떨어진 팩을 주워들었다. 다행히 포장을 안 깐 거라 흐트러지거나 터지지 않았더라. 다시 잘 챙겨들고서 똑바로 보고 다니라고 말하고 그대로 지나쳐 가려고 했다. 뭔가 곤란해 보였지만, 내가 나서서 도와줄 리가 없잖아.
황가. 또 황가인가. 그 말을 들으니 개학식 날이 생각났다. 그러고보니 저쪽도 은발은안..인가. 동급생은 아닌 듯 하니 아마 하급생이지 싶다. 그 날 들었던 것과 비슷한 물음에 나는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대꾸했다.
"나는 이 아카데미에 이득을 주기 위해 여기 있는게 아냐. 내 목적, 내 연구를 위해 있지. 누구처럼 골치 아픈 일들을 아카데미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고, 나는."
정말 웃기지도 않는군. 한순간에 올렸던 입꼬리를 내려 싸늘하게 표정을 굳혔다.
"그쪽이 황가의 일원이든 뭐든 여기선 한명의 학생일 뿐. 여긴 고향이 아냐. 오냐오냐 떠받들어주는 곳이 아니라고 여긴. 뻑하면 황가의 권력이니 지원이니 하는데, 애초에 그건 그쪽들의 힘이 아니지 않나? 그런 걸로 뻐기려 들다니 정말이지 높은 인간들 머릿속이란 꽃밭 천지라니까."
황가의 암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머니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는 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섰다. 나는 가문을 지키기위해 매일 가면을 쓰고 연기로 나를 속인다. 이 짊어진 어깨는 너무 무거워 비틀거린다. 그렇다. 내 마음속에 어머니가 한 축을 이룬 제국을 품지 않는다면 무너질테지.
그런 무게를 폄하하는 것은, 지독히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꽃밭이면 좋겠군. 내 머리속과 황녀님의 머리속이."
잿빛 하늘 아래 썩어들어가는 늪지대가 어울리는 내 머릿속은 꽃밭이 될 수 없을테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내 정신은 갉아먹어져 부정으로 가득차고 있으니.
오전에 있었던 불쾌한 일의 불쾌한 기분을 털어버리기도 할 겸, 오후엔 훈련장에서 시간을 보내었다. 실내보다는 실외가 바람도 쏘일 겸 나을 거 같아서 투박한 야외 훈련장에서 있었다. 훈련이랄까 단련이라고 해봤자 그림자의 반응 속도를 높이는데 주력하거나 좀 더 다양한 형태 변화를 꾀하는게 전부였다. 발밑에 웅크린 그림자, 소매 속, 옷깃 속에 드리운 그림자 등등에서 빠르고 정확하게 원하는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이 지금 내가 하는 것이었다.
공중에 한줌의 종이조각을 뿌리고, 그곳을 향해 팔을 한번 휘두르면 소매 속에서 새카만 그림자의 칼날이 뻗어져나와 공중에 흩어진 종이조각들을 베어버린다. 그대로 찢어진 종이조각들을 향해 다시 한번 팔을 크게 휘두르자 칼의 형태를 하고 있던 그림자가 순식간에 거대한 낫이 되어 남은 조각들마저 갈가리 찢어버린다. 그 일련의 행동들을 앞으로 나아가며 하고나니, 내가 지나온 자리엔 너덜너덜한 종이 조각들만이 흩뿌려져 있을 뿐.
"으음. 조금 더 빠르고 치명적으로 구현시키는 방법은 없을까."
그림자 낫을 든 채로 지나온 자리를 보며 좀더 효율적인 방법은 없을까, 그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누가 훈련장에 오는 줄도 모르고.
그렇지만 내 능력은 철저히 생물에 대한 건데. 어쩌나. ...일단 이런 걸 이용해볼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며, 토마토나 사과, 감자 등의 것과 여러 작물들이 있는 화분를 바구니에 한가득 담아가지고 훈련장으로 갑니다. 저주를 실험하고 또한 연습, 훈련하기 위해서이지요. 오늘 연습할 건 마름병과 부패입니다. 그을음병은 몇번 해봤다가 영 아니라서 저주를 거두기 일쑤였지요. 혹시 훈련하다 배고프면 먹을 수 있도록... 아니, 이러면 너무 먹보같잖아? 아무튼. 음. 그러니까 식용으로도 쓸 수 있는 작물을 가져왔습니다. 감자는 삶은 것도 있고요. 과도도 두 개 가져왔답니다. 하나는 인형을 찌르기 위해서. 하나는... 예 뭐 그렇습니다. 네.
우선 훈련장에 도착해서 훈련을 시작... 하려는데 누가 있었네요. 저는 잠시 고민하다가 구석에다가 가져온 바구니를 내려놓고는, 화분 몇 개를 꺼내 차례대로 둡니다.
"......역시 신경쓰이는데."
그런데 연습을 하려 했지만 역시 저 사람은 뭘 하는지가 신경쓰이네요. 누구일까요? 또, 무슨 훈련을 하려는 걸까요?
현 시점에서 가장 빠르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칼날, 길게 뻗어나가는 가시와 같은 형상이다. 모양을 단순화하면 할수록 스피드는 빨라지지만 그만큼 위력이 떨어지는 걸 무시할 수는 없다. 역시 스스로의 이미지화가 가장 큰 요인이 되려나. 그런 것 따위를 생각하며 낫을 만지작거리다가, 갑작스럽게 느껴진 인기척에 나도 모르게 그림자 가시를 꺼냈다.
"?!"
당황하며 돌아보자 키가 한뼘 정도 작은 여학생이 보였다. 그 학생을 향해 가시를 뻗은 채 잠깐 응시하고 있다가 무해하다는 걸 깨닫곤 가시를 거두었다. 형태를 잃은 그림자는 소매 속으로 되돌아갔다. 가시를 거두고보니 학생의 손에 감자가 얹어져 있었다. 뭐야, 먹으라는 건가? 날 거 아냐? 긴 앞머리 뒤에 숨은 금빛 눈으로 감자를 쥔 손과 학생을 번갈아 보다가 휙 돌아섰다.
"필요 없어."
배가 고파지면 훈련을 멈출 생각이었으니 저런 호의는 필요 없었다. 늘 그렇듯 쌀쌀맞게 대꾸하고 돌아서 그림자 낫을 일단 그림자로 되돌렸다. 그러곤 다음은 어떻게 해볼까, 그것을 생각하려 했다.
저는 그렇게 말하곤 구석으로 돌아갑니다. 그 전에 갖다놨던 화분들에 저주를 걸어 연습하기 위해서였죠. 우선 부메랑을 대신 받아줄 인형들을 만듭니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넷, 다섯. 어쩌면 더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선, 첫번째는."
그렇게 중얼거린 뒤에 방금 전, 푸른 머리의 그녀에게 내밀옸다 거절당한 감자를 한 입 먹습니다. 맛있습니다. ......젠장. 이런 간단하고 가벼운 걸로 기뻐하다니. 아무튼... 음. 저주를 연습해야지요. 저는 화분의 식물들에 마름병 저주를 거는 것을 연습하기 시작했습니다. 식물들은 말라가기 시작했으며, 그 모습은 처참합니다. 이윽고 인형 둘이 저주에 뒤덮혀 사라집니다. 제 저주를 대신 받아줄 인형은 더 남아있습니다. 그 다음은 부패 저주입니다. 이번엔 범위를 넓혀서, 식물들과 그 전에 가져온 토마토들에 겁니다. 썩은내가 나기 시작합니다. 인형 셋이 한번에 날아가고 저에게도 부메랑이 돌아옵니다.
"케헥."
아프네요. 쿨럭쿨럭 계속 기침을 합니다. 잘 멈추지 않습니다. 저기 저 사람에게 들켰을까요?
힘들어보인다고? 그 말에 나 자신을 한번 돌아보았다. 능력을 계속 전개해서 탈력감은 있지만 겉보기에 티는 안 났다. 상처나 그런 것도 없고. 뭐가 힘들어보이는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훈련장의 한켠으로 갔다. 생각할 겸 좀 쉴 참이었다. 발밑의 그림자로부터 의자의 형상을 만들어내 거기에 걸터앉았다.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 반쯤 멍하니 허공을 보며 머릿속으로 이것저것을 생각 하고 있는데...
"...뭔데?"
저만치 떨어진 곳으로 간 학생이 대뜸 기침을 하는게 들렸다. 뭔가 싶어 돌아보니 썩은 식물과 마른 식물들이 보이고 이상한 잔해도 보였다. 뭐 하는건가 싶어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저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도 있는 훈련장에서 저주라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 학생 쪽으로 다가가서 말했다.
"저주계 능력이냐? 밖에서 하기에 너무 무방비해 보이는데. 아무리 리스크를 받을 대상이 있어도 공동 공간에서 쓰는 건 자제 하지 그래?"
굳이 여기가 아니어도 다른 빈 훈련장이 있지 않느냐며 여전히 쌀쌀맞게 말하고 쯧, 혀를 찼다. 애먼 곳에서 불똥 맞는 건 사양이라고.
저주를 걸어낸 뒤, 가만히 쉬려는 참에. 방금 전의 그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뭔가를 크게 잘못한 모양이다.
"일단 저주계 능력은 맞아요. 그렇지만...... 그. 잠깐만요."
저는 그렇게 말하곤 조금 고민하다가 당신을 빤히 바라봅니다.
"일단 말하자면요. 이건 범위 안의 대상에게 거는 게 아닌 타겟을 지정해서 거는 것이니까, 절대로 저주가 다른 데로 튈 일이 없는걸요. ......그래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리스크는 저에게만 돌아오니까 그게 흘러넘쳐서 다른 곳으로까지 날아가는 일은 없어요. 제가 죽더라도 제 시체에만 그 리스크가 쌓일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요."
아무튼 그렇게 적당히 말하고는 가만히 당신을 보며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엽니다.
"그리고...... 제가 민폐를 끼쳤다면 죄송합니다. 사과드릴게요."
그렇게 말한 뒤 저는 허리를 숙여 인사하곤,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한 뒤 당신을 그저 바라볼 뿐입니다. 물론 잘못한 건 저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다 잘못했어요. 죄송합니다." 따위의 말을 덧붙일까 했지만 더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소심해보여서 금방 주눅들까 싶었는데 따박따박 할 말은 다 해오는게 맹랑하게 보였다. 건방지다거나 짜증난다기보다 차라리 이 쪽이 낫다. 자기 의견 확실한 쪽이.
"흐음. 그런 구조인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런 식이라면 확실히 주변에 피해가 없겠군. 이해한 뒤 사과하는 학생을 향해 한결 누그러진 태도로 말했다.
"아니, 사과할 거 없어. 이쪽이야말로 방해해서 미안."
깔끔하게 내 잘못을 사과하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기 보다 다시 서서 그림자로 검을 만들어 뽑아들었다. 능력 훈련도 좋지만 체력 단련도 빼먹으면 안 되니까. 양 손에 제법 긴 장검을 들고 깔끔한 검술 자세를 하나하나 이어가며 나름의 단련을 계속했다. 저쪽엔 피해가 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가려 합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그렇게 말하고 끝내려 합니다. 이제 저는 자기 할 일을 하면 되겠죠. 저주 연습 말입니다. 그래도 혹시 남에게 방해가 되거나 그럴 지 모르니 조심조심 하면서요. 그보다 이렇게 하다 보니 식물들이 다 죽어나가는 것 같은데... 음. 식물들에게 미안하네요. 훈련이 끝난 뒤에는 태워버려야겠죠. ......미안해 식물들아.
"...저 쪽은...... 검인가."
부럽네. 능력으로 뭔가의 형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거. 나는 인형밖에 안돼니까. 던질 수도 없고...... 저런 사람이랑 싸우면 난 역시 져버리겠지. 지는 거겠지. 저 사람은 공격도 방어도 가능할텐데 난 남을 상처입히고 다치게 하는 것 밖에 안돼니까...... 슬프네.
"이쯤에서 갈까."
식물들이 다 죽어나갔다. 미안한 마음을 안고 다시 바구니에 식물들과 썩어버린 것들을 담는다. 그리곤 그것들을 태워버리러, 어딘가로 떠난다.
곧 그가 신기해하면서 먹으려는 모습을 보고 나쁜 선택이 아니였다고 느낀 이아나는 안심하고 자신도 마저 먹으려다가 후후 불며 먹는 모습을 보고 입이 데이지 않을까 바로 물을 떠서 갖다주었다.
"괜찮으신가요? 많이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드셔야 해요."
저도모르게 입가에 손으로 손바람을 해주던 이아나는 처음 보는 사람이 이러면 겐 입장에서는 부담이 크겟다는 생각에 살며시 그것을 그만두고 자신도 먹기 시작했다.
호로록. 호로록. 냠냠.
"으음...!"
오뎅이라는 것에 떡이 들어간다는 발상은 누구의 것일까? 이아나는 누군지는 몰라도 크게 상을 내려야 한다고 느꼈다. 이 따끈따끈하고 국물이 잘 베인 말랑하고 찐득한 음식을 씹는것은 이가 좀 뜨거워져도 포기할 수 없었다. 뜨거운 국물, 쫀득한 떡과 말랑한 달걀, 무엇보다 맛난 오뎅!!!
"아흐... 여전히 맛있네요."
어느세 맛난 음식을 먹는 꼬맹이처럼 표정이 풀어서 헤실거리며 당신과 같이 먹는다. 이 처자... 왠지 납치하기 용이해 보인다.
스레주가 허락했던 선조님이 반지를 통해 위치랑 대화들을 듣는다는게 가능해서 생기는 선조님이 느꼈을지도 모르는 이아나 및 이아나의 부모님이랑 할머니 할아버지!
증조할머니에 대하여: ...미안. 나도 아직 당신을 사랑하지. 하지만 난 당신을 더이상 신뢰할 수 없어. 할아버지에 대하여: 미안하지만 없는 사람 취급해주길. (+자기 욕하는게 다 사실이라 반박불가능.) 증조할머니에 대하여: 이렇게 예민하고 성격 고약한 놈을 데려가주는 착한 사람도 있긴 있구나... 아버지에 대하여: 건실하네. 어머니에 대하여: 훌륭한 며느리야. 이아나에 대하여: 아가 의심좀 하고 살렴. 이안에 대하여: 그래! 바로 이렇게! ...근데 얘도 참 지 할아버지 닮아서 입 한 번 험하네...
결국 무엇이든지 아쉽거나 만족스럽게 끝이라는 것은 다가온다. 추위 덕분에 식었던 몸도 허름하지만 제법 따뜻한 가게 안에서 데펴진 덕분에 이대로 학교로 가는동안 뼈가 시린-물론 겨울도 아니라서 가정도로 추워질 일은 없지만-일은 생길 것 같지 않았다.
"제국 안에서는 이런 류의 요리들이 많은 편이니까요. ...저도 제국에서 태어났지만 제국은 다 보지 못해서 이정도만 알기야 하지만..."
그리고는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쓰게 웃는 당신에게 괜히 미안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음번에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드는지 금방 고개를 끄덕이며 기쁘게 생각하였다. 아마 이것이 그렇게 세상을 좋게 생각하는 비결중에 하나일지도 모른다. 사소한 것에도 집중하고 예민하게 캐치하며 기뻐하는 것. 아이들이나 가능한 그런 예민함이 그녀에겐 아직도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