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진 헤이즐 (카틀레야 진) 나이: 20대 중후반 성별: 남 외모: 키 183에 평균 살짝 웃도는 체중으로 너무 마르지도 찌지도 않았지만 적당히 근육 잡힌 체형. 전체적으로 딱 보기 좋은 비율. 어깨 아래로 드리우는 검푸른 머리칼은 항상 늘어진 꽁지머리를 하고 있고, 타고난 반곱슬로 항상 구불거린다. 앞머리를 살짝 내려 눈가를 가리고 있다. 남자치고는 갸름한 얼굴에 선이 매끄럽다. 피부도 좋은 편. 살짝 째진 두 눈은 세로동공에 빛나는 황금빛. 쌍커풀은 없지만 나른한 듯 귀찮은 듯 반쯤 감긴 눈커풀 아래로 항상 상대를 흥미롭게 응시한다. 입술은 아랫입술이 살짝 도톰하고 언제나 가는 미소를 그리고 있다.
인간일 때에는 위와 같은 모습에 캐주얼한 차림을 선호. 악마의 본모습일 때에는 머리가 땅에 끌릴 정도로 길어지고 얼굴에 발톱자국 같은 문신이 생겨난다. 귀 역시 뾰족해지고 귀 뒤에서 앞으로 둥글게 굽은 산양의 뿔 한쌍이 자라난다. 등에는 새까만 피막 날개 두 쌍을 달고있는데 악마들 중에선 이 날개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고 한다.
악마로서의 힘과 모습을 봉인하기 위해 오른쪽 귀와 팔에 각각 은으로 된 봉인구를 차고 있다. 겉에 주문이 새겨져 있고 검은 오닉스 조각이 장식된, 얼핏 보기엔 그냥 장신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들을 기척을 죽이는데도 상당한 도움이 되고 있다.
성격: 매우 느긋하고 굉장히 능글맞다. 목에 칼이 들이밀어져도 태연할 정도로 능청맞기도 하다. 그야말로 능구렁이 그 자체. 하지만 제 심기를 건드리는 것이 있다면 세상 끝까지 쫓아갈 정도로 집요한 면과 악마답게 유혈에 환장하는 면이 없지않아 있다.
특이사항(기타,특징,과거사??): 나태와 교만을 아우르는 악마로 나름 높이 있는 자리에 있었다. 나태라고는 하나 태생이 악마인지라 전쟁이 일어나면 항상 선봉에 서곤 했다. 물론 실력도 힘도 남달랐었고. 그러다보니 천사들 사이에선 악명이 제법 돌고 있다나 뭐라나. 허나 반복되는 싸움과 끝이 없는 일상에 회의감을 느껴 인간계로 탈주했다. 사실 그 이유만은 아닌 것 같지만서도.
인간계에서는 진 헤이즐이란 이름의 27살 쳥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정체는 수천년을 산 카틀레야 진이라는 이름의 악마지만. 인간계로 내려온 뒤에는 악마적인 힘을 써서 카페를 하나 차리고 평범한 인간인 척 살아가는 중이다. 카페를 차린 이유는 커피를 좋아해서(...)란다.
커피 이외에는 특별한 취향이 없다. 그때 그때 좋아하는 것이 달라지는 꽤 변덕진 성향이라. 보통은 상대에게 맞춘다.
기본적으로 적대심은 없으나 장난기가 좀 있어 안 맞을 매도 벌어 맞는 타입이다. 하지만 그 장난기도 아무에게나 그러지는 않는다. 본인은 반응 좋은 상대에게만 한다지만, 사실은 어떨지.
"그러니까 얌전히 따라오라고." "그렇게 나오면 죽이지 않으려 했다가도 죽이고 싶어지는데요."
이름: 아르체스 베르야코프 (아드리엘) 나이: 20대 초중반? 성별: 남 외모: 청년은 꼭 얼음으로 만든 인형 같았더란다. 가만히 있는 모습이 다소곳하고 얌전해 보였더라지. 어딘가 차가웠고, 그만큼 햇빛에 녹아들기 쉬워보였단다.
모래색의 머리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길이로 두어 목 뒤와 어깨의 경계선을 지키고 있었더란다. 소위 말하는 칼단발—예하 단발 히메컷—으로 잘려진 머리의 끝은 옅은 금발이었지만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모래색과 섞여 티가 나지 않았더라지. 머리카락이 조심히 가린 얼굴의 선은 얇았고, 새하얀 피부는 꼭 도자기처럼 결이 매끄럽고 투명하였다. 얼굴 안에 조목조목 들어있는 이목구비는 얼굴을 꽉 채운지라 시선을 집중하기 좋았다. 눈꼬리는 꼭 고양이처럼 앙칼지게 올라가 있었지만 눈매가 그리 사나워 보이지는 않았다. 풍성한 속눈썹 밑으로는 하얀색에 가까운 하늘색 눈동자가 자리잡고 있었더란다. 꼭 거울의 파편이나 소복하게 쌓인 눈을 빼다박은 것이었다. 옅은 쌍꺼풀이 꽤 조용한 분위기를 더하는 것 같기도 하였고, 높고 매끄러운 콧대 밑으로 도톰하게 자리잡은 입술이 꽤나 볼만 하였다지.
173정도의 청년은 전체적으로 낭창낭창하였다. 선이 얇았다고 해야할까, 여자들만치 곱고 얇은 것은 아니었다만 일반 성인 남성과는 좀 다르게 가늘었던게다. 그런 몸의 선은 캐주얼하거나 얌전해보이는 옷차림으론 쉬이 가려지지는 않았다.
천사의 모습일땐 뒤에 비춰지는 후광—흔히 말하는 광배 말이다—이 은은하였더란다. 머리의 색이나 길이는 그대로 였으나 눈은 깊은 바다의 물을 보는 것 마냥 색이 짙어졌다. 등에 펼쳐진 날개 한 쌍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사 자체의 모습이었다. 커다랗고, 부드러운.
목에는 은으로 만들어진 십자가 목걸이가 착용되어 있었다. 천사의 모습이나 권능을 숨기는 것도 있지만 개인적인 신앙의 의미도 담겨있다고.
성격: 천성적으로 나긋나긋하니 조용하였다. 엄격한 면이 없지않아 있었으나 그것도 부드러운 말로 풀곤 하였다. 겉보기엔 단호하고 원칙을 따르는 면이 부각되었지만 어째서인지 속으론 자주 흔들리거나 휘둘리곤 한다.
특이사항(기타,특징,과거사??): 겉보기엔 유약하였지만 대천사의 후보로 오를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던 능천사였다. 능품천사의 직함을 가졌던지라 전쟁이 일어나면 항상 전장의 선두에 섰고, 청년을 보고 악마들은 애송이를 전쟁에 내보냈다 깔보곤 하였으나 외모와는 다른 자비없는 성격과 실력만큼은 무시할 수 없어 악명이 자자한 천사로 불렸다.
예정대로라면 대천사의 자리에 올랐어야 하지만 모종의 이유—아마 인간계로 도망친 악마의 소문을 듣고 잡기 위해서일터다—로 즉위를 미뤄두고 인간계로 내려왔다. 아마 인간들에게 영향을 끼칠 것이라 생각했겠지.
인간계에서는 25세의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본 모습은 역시나 천사. 평범한 인간들에 섞여있으며 자신이 겪었던 일을 집필해(..) 판타지 소설로 써내려가고 있는, 젊은 작가.
인간들에게 최근 큰 괴리감을 느꼈다 하였다. 아마 너무나도 달라진 그들을 자신이 보살필 수 있는지가 의문이겠지.
악마에 대한 적대심이 있는 편. 그렇게 교육받았기 때문, 도 있지만 전쟁에서 겪은 일들에 환멸을 느낀 것이 아닐까. 장난이나 부탁에 자주 휘둘리며 거절하지 못하는 편.
반말과 존댓말이 묘하게 섞인 어투를 쓰곤 하였다. 반말을 쓰다가도 끝이 요로 끝난다던지. 물론 아무에게나 그러는 건 아니었지만.
드문 꿈을 꾸었다. 한창 천계와 마계가 전쟁을 치르던 시절의 꿈을. 하얀 것과 검은 것이 뒤엉키던 전장은 그리우면서 진절머리가 나는 그런 것이어서.
무언가가 일어날 징조처럼 꿈은 찾아왔으나 그는 그 징조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것의 의미를 알았다 한들, 피할 수는 없었을 테지만.
매서운 한파가 물러나고 서서히 봄이 찾아옴이 물씬 느껴지는 어느 아침에, 진은 일찌감치 제 가게에 나와 그날의 영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알바생은 오후부터 나오니 그 전 준비는 온전히 그의 몫이어서 제법 바빴다. 새로 들인 원두를 살피고, 기계를 닦고 작동시키고, 디저트의 밑준비를 하고... 번화가의 뒷골목에 자리한 숨겨진 가게지만 은근히 단골들이 찾아주는 좋은 카페였다. 카페 'Myosotis(물망초)'는.
잔잔한 배경음악을 틀어놓고 손수 준비를 하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인간의 모습이지만 사실 정체는 수천년을 살아온 악마였다. 그런 그가 왜 인간의 행세를 하며 이런 작은 카페를 운영하는지는 신도 모를 일이지만.
"이크, 읏차."
원두 포대를 들다가 휘청하는 모습까지도 영락없는 인간이다. 어딜 봐도 한치의 의심도 사지 않을 법한 평범한 20대의 청년 그 자체. 실제로 그는 주변 이웃들과 상인들에게 평이 좋았다. 성실하게 일하는 '진 헤이즐'로써.
"어, 벌써 시간이."
한창 준비에 몰두하고 있었더니 어느새 오픈 시간이 되어있었다. 그는 투명유리문에 달린 Close 팻말을 Open으로 바꾸어놓고 오늘의 추천메뉴가 적힌 작은 입간판을 입구 앞에 내놓았다. 그렇게 하루의 준비가 끝나자 그는 안으로 돌아가 곧 올지도 모르는 손님을 기다리며 테이블 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 첫 손님이 제 일상에 어떤 풍파를 불어오게 될 지는 꿈에도 모른 채로.
인간계에 내려온지 한참이 지났다. 본디 일정대로라면 대천사중 하나가 되어 인간을 보좌하고 천계를 수호하는 일을 맡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의 자신에게 있어선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악마를 쫓는 사명이 새로 주어졌다. 언제까지 숨고 찾아내려는 숨바꼭질이 계속될지는 신도 모를 일이었지만.
새벽 내 잠을 설쳤다. 오랜만에 꾸던 악몽이었고, 생생하기 그지 없어 드물게 공포에 젖어 잠에서 깨어났다. 전장 한복판에 서서 검을 든 자신은 여전히 피에 젖어있었다. 주변에 널린것은...
악마였나.
자신이 없는 동안 천계에서 전쟁이 벌어진건가 싶었지만 그럴 일은 없을 터였다. 진즉 자신에게 통보가 왔을 터겠지. 다만 알 수 없는 불길함이 엄습했고 그것은 청년을 제대로 된 잠을 잘 수 없게 만들었다. 뜬 눈으로 지새운 새벽이 지나고, 아침의 해가 어느새 밝아왔다. 창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보단 선선한 바람이 살랑거리며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다만 밤을 샌 여파 때문인지 비몽사몽한 정신은 쉽사리 깰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인간의 탈을 뒤집어쓰고 무엇을 해야 했더라.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쐬며 한참동안 새파란 하늘을 쳐다보자 그제서야 할 일이 떠올랐다. 오늘까지 원고를 작성해야 했다. 인간들에 섞이기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만 했고, 정한 것은 글을 쓰는 일이었다. 자신의 일을 써 가공의 일처럼 꾸미는 일. 처음 쓴 책이 인기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인간들에게 섞이기도 어려웠을 터였다.
"...으으."
기지개를 쭉 켜며 청년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잠이 도통 달아나지를 않았다. 밖에 나가서 따뜻해지는 날씨를 알리는 봄바람을 쐬다 커피라도 마시면 잠이 달아날 것이다. 이참에 바깥에서 일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터였다. 창문을 닫고 청년은 발걸음을 옮겼다.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산발이 된 머리를 정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밖으로 나오니 햇살이 그나마 따스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자신이 날개를 펼치고 몸을 감싸도 벌벌 떨릴 추위였음에도 변덕스럽기 그지 없는 날씨다. 괜히 볼을 퉁명스럽게 부풀렸다가도 청년은 골목을 걸었다. 잠이 어느정도 달아나긴 했지만 여전히 비몽사몽한건 마찬가지였다. 한 팔에 들린 노트북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고, 주변을 둘러보던 청년은 한 골목을 스쳐지나가다 발걸음을 멈추곤 뒤로 몇 걸음 걸었다.
Myosotis
물망초? 아, 그래. 여기에 카페가 있었지. 이 쪽 부근으론 잘 걷지를 않아 카페가 있는지도 몰랐다. 이제 막 연 것 같은데. 커피내음이 언뜻 나는 것 같아 청년은 카페를 향해 몸을 움직이곤 투명한 유리 문을 열었다. 문득 등골이 서늘한 느낌이 들었지만, 바람 때문이겠지. 라고 생각한 것은 너무 안일했던걸까.
마지막 테이블의 정리를 마치고 돌아서 카페 내부를 한번 둘러본다. 더 할 것이 있던가. 원두는 다 볶았고, 쇼케이스도 다 채워놨고. 청소도 비품 정리도 모두 오케이. 더는 할 것이 없다고 느껴지자 가게 안을 은은하게 감도는 노래를 허밍으로 따라하며 입구 근처의 카운터로 다가갔다. 가볍게 카운터를 정리하는데 문에 달아두었던 벨이 경쾌하게 울렸다. 새의 지저귐 같은 벨소리는 오늘 첫 방문객의 존재를 확실하게 알려주었다.
"어서오세요-!"
부담스럽지 않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갓 들어온 손님을 맞이한다. 눈부신 햇살과 함께 들어온 손님을 향해 특유의 느긋한 미소를 지어보인 그는 아직 한적한 안쪽을 가리키며 원하는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매우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문이 열리던 순간의 위화감은 느끼지 못 한 것처럼.
"이 시간에는 저쪽 테이블 자리가 볕도 잘 들고 포근하답니다. 아, 자리에 앉으시기 전에 주문 먼저 해주시겠어요?"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 주문을 받기 위해 카운터에 서서 손님의 오더를 기다렸다. 어딜 보나 평범하고 좀 젊은 카페 사장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모습이었다.
"오늘의 추천은 산미를 부드럽게 잡은 예가체프 블랜드와 가토 쇼콜라에요. 식사 전이시라면 연어 크림 샌드위치를 추천드릴게요."
익숙하게 오늘의 추천 메뉴들을 얘기하곤 자신 있는 것들이라며 한마디 덧붙인다. 말이 많은 것은 타고난 듯 했다. 지워지지 않는 만면의 미소도.
경쾌하게 울리는 벨소리에 잠시 눈을 들어 문에 달아둔 그것이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던 청년은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가 있었나, 라는 생각을 잠시 하곤 카페의 안으로 들어섰다. 원두를 방금 볶은걸까, 은은하게 맴도는 향에 벌써부터 잠이 깨고 머리가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어서오세요, 부담스럽지 않은 중저음의 목소리를 듣고 그 주인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올렸다. 검푸른 머리칼, 느긋한 미소 사이로 보이는 금색 눈동자.
...왜지?
다시금 바람이 훅 끼쳐들어오는, 찰나의 위화감이 들었지만 역시 기분탓이리라. 잠을 설쳐서 그런 것이겠지. 예의상—인간들 앞에서 흔히 지어보이던—미소를 지어보이듯 눈을 휘고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어보였다. 느긋한 미소와는 달리 차분한 미소가 꼭 얼음조각을 다시금 고쳐내 웃는 표정을 만든 것 같았더라지. 청년은 그의 인사에 "좋은 아침이에요."라고 짧게 답하곤 눈을 굴려 주변을 흘끔 둘러보았다. 아직 손님은 자신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첫 손님인걸까. 그렇다면 방해받지 않고 잠시 느긋하게 있을 수 있을텐데.
"...으음.."
안쪽을 가리키며 원하는 자리에 앉기를 권하던 점장을 잠시 바라보던 청년은 주문이 먼저라고 생각한듯—주문 먼저 하라는 말도 있었지만— 검지 손가락을 들어보이곤 제 턱가와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무엇을 마셔야 할지 고민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었지만 눈빛은, 글쎄. 아직도 위화감을 떨쳐내려 노력하는 모습이 참 가상하기도 했다. 물론 눈 앞의 상대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평범하고, 좀 젊을 뿐이잖아. 다른 건 그저 잠이 덜 깨서 그런 것 뿐이었다..고, 청년은 생각했다.
예가체프 블렌드와 가토 쇼콜라.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그러고보니 아침을 먹었나? 글쎄, 그건 아니었지. 잠을 깨기 위해 부랴부랴 준비하기에 바빴으니. 연어 크림 샌드위치와 예가체프 블렌드가 낫지 않을까. 고민을 끝마친 듯 손을 내리고 그와 눈을 마주친 청년은 예의 나긋한 목소리를 내었다.
"추천 메뉴라면 마셔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요. 예가체프 블렌드로..응, 핸드드립이 좋겠네요. 연어 크림 샌드위치도 부탁드릴게요."
미리 계산해두는 것이 낫겠지. 한 팔로는 노트북을 소중히 안고 다른 손으론 주머니를 뒤적여 지갑을 꺼낸 청년은 지갑을 열었다. 붙임성이 좋네. 인간들은 원래 다 이렇던가. 같은 생각을 짧게 해본 청년은 무언가를 떠올리고 그럴리가 없다는 듯 부드러이 올린 입꼬리를 잠시 내렸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거람.
추천메뉴를 들은 손님이 고민하는 사이 진은 약간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달리 특별한 시간은 아니었다. 눈 앞의 손님을 한번 훑어볼 수 정도였다. 불쾌하지 않도록 빠르게 한번 본 손님의 모습은 딱 봐도 미인이란 느낌이었다. 도드라진 골격이 남자인 것을 알 수 있었지만 낭창해보이는 몸과 하얀 피부, 독특한 머리색 따위가 묘하게 색기 있어 보였...아니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건가. 잠깐 혼란스러웠지만 손님의 주문에 정신을 차린 진은 웃으며 주문을 받았다.
"네. 블랜드 한잔에 샌드위치 1인분이요."
익숙하게 포스기를 두드려 계산을 한다. 타닥타닥. 합계 금액을 말하고 돈을 받고, 잔돈을 거슬러 주다가 흘끗 손님의 팔 사이에 끼인 것이 보였다. 노트북인가. 어차피 지금은 사람도 없으니 느긋하게 있어도 상관 없었다. 계산을 마친 후엔 웃으며 다시 말하는 진.
"바쁜 시간이 아니니 자리로 가져다드릴게요. 부디 편하게 기다려주시길."
이렇게 한가한데 그 정도 서비스는 못 해줄 것도 없다. 손님이 자리로 가는 것을 확인한 후에 카운터를 벗어나 안으로 들어갔다.
냉장고 모터 소리만 울리는 부엌은 그의 등장으로 잠시 분주해졌다. 미리 준비해둔 연어살과 특제 소스를 꺼내고 빵과 야채도 필요한만큼 꺼낸다. 느긋한 듯 꼼꼼한 손길로 움직이니 금방 샌드위치가 만들어졌다. 먹음직하게 만들어진 샌드위치를 접시에 담고, 나가서 미리 세팅해둔 기계로부터 커피 한잔을 뽑았다. 혼자 하는데도 막힘없는 동작들이 매끄럽다. 그렇게 오래지 않아 주문한 것들이 완성되자 작은 쟁반에 접시와 잔을 담아 손님에게로 가져간다.
"주문하신 것 나왔습니다. 손님."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하고 테이블에 잔과 접시를 내려놓는다. 깔끔하게 세팅을 마치고 물러나며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부르시라 덧붙였다.
계산을 하기 위해 다시금 카페 사장—점장이겠지?—을 바라보고 나서야 제대로 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보다 키가 크고, 보기 좋은 비율을 지닌. 아, 가까이서 보니 그나마 알겠다. 눈이나, 머리카락이나. 꼭 밤하늘을 사람으로 만들면 저렇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곤 입꼬리를 가벼이 올려 예의 친절한 미소를 지어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거람. 참.
지갑을 뒤적여 지폐를 꺼내 계산을 하고, 잔돈을 거슬러 받았다. 평범한 일상이지. 아무렴. 짤그랑, 흰 손 위로 올라가는 동전은 지갑의 속으로 들어가고 지갑을 단단히 닫은 뒤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혹여 빠질세라 주머니 깊숙한 곳에 넣은 뒤, 웃는 얼굴을 마주한 그는 도톰한 입술을 휘어 올렸다.
"고마워요."
작은 친절에 감사인사를 전한 뒤, 볕이 잘 드는 자리로 종종 걸어가 노트북을 열었다. 이렇게 하면 불편해하겠지. 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잠만 깨면 떠나야겠다 다짐하곤 검지 손가락을 능숙하게 마우스 터치패드 위에 올렸다. 다행히도 마감할 것은 아주 조금만 남아있었다.
과거의 일을 조금이라도 기억할수록 자신이 이렇게 느긋하게 있어서는 아니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점은 피할 수 없지만. 손가락을 키보드 위에 올려 그때의 일을 적절하게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붉게 젖은 날개, 호각이었던 상대, 그리고..
"아."
당신. 웃는 얼굴로 다가오는 당신을 위해 노트북을 구석진 자리로 치웠다. 문득 얼굴의 근육이 팽팽히 굳어진걸 보니 또 과거의 자신에게 과도하게 이입했나보다. 그때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그리 확실치는 않았지만.
"감사합니다. ...와."
샌드위치와 커피가 먹음직스러웠다. 괜히 당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커피내음이 벌써부터 코를 찔렀다. 커피는 2번까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그는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샌드위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무리 먹음직스러워도 일단은 커피부터겠지. 커피 잔을 조심스레 들어올린 그는 향을 맡아보고 눈을 초승달처럼 접어보이곤 조심히 입김을 불어 한 모금, 커피를 입에 머금었다. 향긋한 커피를 뒤로하고 벌써부터 잠이 깨는 느낌이 들었던지라 저도 모르게 만족스러운 미소가 얼굴에 만연했다. 일단 좀 먹고 마저 써야겠지. 잔을 내려놓은 손이 샌드위치를 조심스레 집어 끄트머리를 베어물었다. 다만 시선은 노트북쪽으로 자연스레 옮겨지는 터였다.
첫 손님의 주문을 마치고 제 자리인 쇼케이스 뒤로 돌아온 진. 방금 전의 흔적들을 정리하다 흘끔 홀을 내다보니 마침 커피를 마시는 손님의 얼굴이 보였다. 한모금 마신 손님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표정이 떠오르자 저도 기분이 좋아진다. 은근히 보람도 있는 것이 더 맛있는 커피를 만들고 싶어진달까.
"흠흠~"
작게 기분 좋은 허밍을 흘리며 새롭게 커피 한잔을 뽑는다. 향을 맡으니 저도 한잔 마시고 싶어졌더란다. 어차피 지금은 손님도 없고. 진은 새롭게 뽑은 커피와 가토 쇼콜라 한조각을 담은 접시를 들고 홀로 나왔다. 카페용 앞치마를 두른 채로 적당한 자리, 손님과는 떨어진 곳에 앉아 짧은 휴식을 즐기기 시작했다.
적당한 소음이 감도는 실내와 맛있는 커피 한잔, 그리고 달콤한 디저트의 조합은 그가 좋아하다 못 해 사랑하는 한 때였다.
서로 커피잔이 반쯤 비울 때까지 카페엔 다른 손님이 없었다. 이런 날은 꼭 저녁이 붐비더라. 알바생이 나오면 이것저것 좀 시켜야겠다고 생각하며 커피를 마시다가, 문득 제 잔이 비었음을 깨달았다. 벌써인가. 한 잔 더 뽑을까 하다가 무의식적으로 시선이 창가에 향했다. 거기 앉아있는 손님에게로. 비슷하게 뽑아서 마셨으니 저쪽도 비었겠지 싶다. 노트북에 몰두하는 것을 보니 뭔가 중요한 작업이라도 하는 것 같던데. 진은 조용히 일어나 드립기 쪽으로 갔다. 거기서 적당히 식어있을 커피팟과 작은 접시에 초콜릿 몇 알을 담아 손님의 자리로 갔다.
"하시는 일은 잘 되시나요, 손님? 이건 서비스입니다."
그는 능청스레 웃으며 초콜릿이 든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잔을 한번 흘끔 보곤, 리필은 어떠신지 물으며 들고 온 커피팟을 살짝 들어보였다.
역시 아침에 커피를 마시기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맑게 깨는 느낌도 잠시, 연어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물곤 입술에 옅게 묻은 소스를 자연스레 혀로 훑었다. 응, 좋네. 오길 잘 한 것 같다. 앞으로 자주 올까. 자주 가던 카페보다 훨씬 가깝기도 하고. 노트북의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던 청년의 눈이 느릿하게 감겼다 뜨였다.
다음 글이 묘하게 써지지를 않았다. 문득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눈을 슬쩍 굴렸다. 자신과는 떨어진 곳에 앉아 짧은 휴식을 즐기는 모습에 평화로움을 느끼곤 다시금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물곤 커피 잔을 들어올렸다. 평화롭기 그지 없구나. 이것도 쓸까. 사라지기 전에 빨리 써두는 것이 좋겠지. 노트북의 자판 위로 손가락을 가져다대고 머지 않아 작은 소음이 실내를 채웠다.
드문드문 커피잔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들렸던 듯 싶었다. 커피잔이 반 정도 비워질 때 즈음, 샌드위치도 반절정도 없었더라지. 글도 어느정도 쓰여진 상태였다. 다행인지, 아니면 불행인지. 고민하던 부분의 다음 부분이 쓰여져 내려갔기에 막힘없이 쓸 수 있었다지.
그때의 기억이 잊혀질리가 없지. 평생에 걸쳐 악마에 대한 적대감과 전투를 배워왔으니. 내용을 써내려가며 커피 잔을 들어올리자 잔이 비어있음을 그제서야 깨닫고 말았다. 문득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린 청년은 능청스레 웃으며 초콜릿이 든 접시를 내려놓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감사합니다."
잔잔히 올라가는 입꼬리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커피 리필이 필요해보이지. 어느새 노트북에서 손가락을 떼고 있었던 터였다. 평화롭구나. 평화로워.
음. 타이밍이 좋았던 것 같다. 감사의 말에 진은 상쾌한 미소를 보이곤 손님의 잔에 커피를 따랐다. 딱 마시기 좋은 온도의 새카만 커피가 새하얀 잔으로 흐른다, 흘러들어간다. 적당히 채우고 커피팟을 거둔 진. 그대로 다시 물러나 자리로 돌아가는가 싶더니 곧 제 것이었던 잔을 들고 손님의 자리로 다가왔다.
"바쁘신게 아니라면 잠시 얘기 나누시지 않겠어요? 손님이 없다보니, 좀 심심해서."
방해가 되지 않게만 있을테니 양해 부탁한다며 옆 테이블에 앉는다. 마주보는 위치가 아닌 거의 옆자리다. 조금만 고개를 기울이면 노트북의 화면이 보일 듯한. 능글능글 웃으며 자리에 앉아 잠시 커피를 마시더니, 금방 손님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말을 걸었다.
"이 시간에 계시는 걸 보니 직장인은 아닌 것 같고, 학생이신가요? 대학생?"
손님의 여리여리해보이는 외모 탓인지 진은 손님을 저보다 한참 어리게 보고 있었다. 물론 그러겠거니 하면서. 인간이라면 절대로 자신보다 어리니까.
잔에 채워지는 새카만 커피는 다시금 향을 채워나갔다. 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거우며, 천사처럼 순수하고, 사랑처럼 달콤하다고 인간들이 평하였던가? 맞는 말이지. 괜히 그런 생각을 하며 채워진 잔에 비춰지는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검은 색에 언뜻 섞인 제 자신의 색이 그리도 신기하였더라지. 그대로 물러나 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던 카페의 주인은 제 잔을 들고 자신의 자리를 향해 다가왔더라지.
"좋아요."
조곤조곤 읊조리듯 주인의 제안에 대답하였다. 마주보는 위치가 아닌, 거의 옆자리에 가까운 자리였다 하여도 괜찮은 듯 싶었다. 어차피 중요한 것도 아니고, 저장도 되어있었으니 별 다른 일은 없을것이라 생각하며 노트북을 그대로 내버려둔 청년은 컵을 두 손으로 고이 감싸고 엄지손가락으로 손잡이를 매만졌다. 따뜻하게 데워진 잔의 온기가 손으로 옮겨가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
청년은 고개를 옅게 저었다. 학생이라기엔 학교를 다니지 않았고, 직장인이라기엔 회사보단 글을 쓰는 일이 잦았으니. 농담으로 군인이에요. 라고 답해볼까 고민하던 청년은 이내 입술을 휘었다.
"학교를 다니기엔 여의치 않았지만 지금은 글을 쓰고 있어요."
인간계에선 제 경험담이 인기가 많았었더라지, 그래. 생각해보면 인간들은 이런 일을 겪었겠지만 저희들관 달랐을터다. 그들은 육체와 기술을 믿지만 이쪽은 기술과 여러가지 힘이 난무했으니. 제 노트북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긴 청년은 두 손에 얌전히 잡힌 커피 잔을 들어올려 입가로 가져다댔다.
"...책도 몇 권 집필했는데, 반응이 좋아서 다행이고요."
지금은 신간을 작업중이에요. 커피를 마시고 잔을 내려놓는 모습에서 쑥쓰러움이 잔뜩 묻어났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한 인간처럼.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옆자리의 남성을 마주본 청년은 옅게 입꼬리를 올렸다. 의외의 적성이라, 그런 셈이지. 이어지는 말엔 푸스스,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겠지. 누구나 그럴 것이다. 있는 돈 없는 돈 전부 끌어다 적당히 놀고 먹는다니.
"그래도 적성에 맞는 것 같으신데요?"
흐흐 웃는 남성을 가만히 바라보던 청년은 커피잔을 다시금 입가에 가져다댔다. 적당히 식은 커피가 입술에 닿았다. 오길 잘 했단 생각도 덤이었고. 문득 제 손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엔 그런가보다, 넘기며 이어지는 말에 잔을 내려두었다. 달각, 소리와 함께 조심스레 내려놓은 잔에서 손을 떼고 노트북을 향해 손을 뻗은 청년은 모니터를 남성이 있는 쪽으로 가볍게 돌렸다.
"....판타지..에요. 지금 쓰고 있는건 시리즈고."
온몸으로 몰두해가며 쓰는게. 그 말에 볼을 붉힌 청년은 시선을 어디에 둬야할지 모르겠다는 듯 우물쭈물대다 고개를 픽 숙였다. 버릇이라니까. 그때의 생각을 떠올리면 저도 모르게 그때의 감정까지 같이 느껴지는 터였다. 작은 목소리로 책 제목을 웅얼거리던 청년은 조심스레 모니터의 내용을 쳐다보다 눈을 굴렸다. 이때가 언제였더라.
"천사와 악마들이 전쟁을 하는 내용이에요. 천사인 주인공이 그 전쟁을 겪은 시점으로 쓰고 있고요."
[붉게 물든 날개 사이로 보였던 악마가 그리도 증오스러울 수 없었다. 자신의 주변에서 흉흉한 소문과 함께 악명을 널리 떨치던 자였으니. 검을 쥔 손이 떨리는 것을 숨기는 것에 애를 먹었더라지.]
그대로 돌려받은 말에 과장스레 눈을 크게 떴다가 큭큭 웃는다. 이야. 이렇게 돌려받을 줄은. 웃음이 헤프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쉽게 웃어가며 손님이 하는 말을 들었다. 장르는 판타지고 제목은 뭐고 내용은...
"천사와 악마요?"
생각보다 익숙한 내용에 조금 놀랐을지도 모르겠다. 저도 모르게 놀란 소리가 나온 듯 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다시 웃으며 태연스레 구는 진. 그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는 딱히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재밌겠네요. 꼭 찾아볼게요. 아, 말 나온 김에 주문할까."
말이 곧 행동이라는 듯 폰을 꺼내어 온라인으로 검색해본다. 일단 찾아만 두고, 다시 폰을 내려놓은 그는 예고없이 손님의 쪽으로 몸을 기울여 노트북의 화면을 들여다보았더랜다. 조금 무례할지도 모를 행동이었으니 그는 아무렇지 않게 화면 속 내용을 슥 보고 몸을 뒤로 물렀다. 그 잠깐 사이 그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지만 아마 보이지는 않았으리라.
"표현이 참신해서 좋네요. 어서 책으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는 얼굴이 얄밉기도 하고 쉬이 화내기 어려워보인다. 앉은 자리로 돌아가 다시 턱을 괸 진은 손님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르체스 베르야코프. 오, 굉장히 독특해서 왠만하면 안 잊히겠어요. 제 이름은 너무 흔해서."
키득임이 섞인 어조로 웃은 진이 농담조로 개명할까 하고 중얼거렸다. 굳이 개명할 것도 없이 진명이 따로 있지만. 그의 물음에 돌아온 이름은 아는 것과 너무 달라서 그는 어떠한 예상도 할 수 없었다. 하기사, 전날밤 꿈의 징조조차 무시한 그였는데 이런 사소한 위화감을 신경쓸 리가. 그는 그저 지금 이 대화가 즐거울 뿐이었다. 잠깐 놀라기는 했지만서도.
"그래도 책을 낼 정도면 대단하잖아요. 선생님이시네. 작가 선생."
웃으며 능청스럽게 말하는 진. 제 앞의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까맣게 모른 채 초콜릿을 집어가는 손을 흘깃 보았다. 하얀 손. 비스크 돌 같은 하얀 손. 그는 저런 하얀 손이 수없이 피에 물드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피는 때때로 자신의 것이기도 했고, 제 동족의 것이기도 했다...
"아르체스라고 부를게요. 그래도 되죠?"
속생각은 고요히 수면 아래로 감춘 채 초면인 아르체스에게 친근하게도 이름으로 불러도 되느냐 묻는다. 저 뻔뻔함은 얼굴 가죽 아래 철판이라도 깐 듯 했다.
"자주 와요. 집에서 혼자 쓰면 심심하잖아요. 여기 은근 조용해서 집중도 잘 될걸요?"
이런 시간엔 저도 심심하니까 와서 말상대도 좀 해달라며, 왜인지 치근치근하게 구는 진이었다.
굉장히 독특한 이름이긴 하지. 러시아 계열의 이름을 이 장소에서 보기엔 어려웠을테니. 진, 이란 이름이 흔하였던가. 문득 뇌리를 스쳐 지나간 진은..차분한 눈동자가 잠시 호수에 돌을 던지듯 일렁였다. 농담조로 중얼거리는 말에 차분한 웃음소리로 화답해보인 청년은 초콜릿을 입술께에 가져다댔다.
"...쑥쓰럽네요. 역시 아직 작가란 말을 듣는게 익숙하지 않나봐요."
픽, 웃으며 눈을 낮게 내리깐 청년은 눈 앞의 남성이 지닌 위화감이 기분탓일 것이라 치부했다. 지금 이 대화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의 일환일 뿐이라 생각하며 초콜릿을 베어문 청년은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지 않았더란다.
이런 평화가 언제까지 지속될까. 입 속에서 녹아내리는 초콜릿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이런 초콜릿을 먹는 것도,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이런 것을 먹는 것 조차 익숙치는 아니하였더란다. 늘상 비릿한 피비린내가 주변을 맴돌고 속을 채웠더라지. 자신의 피, 튀어버린 누군가의 피.. 아니, 아니다. 생각하지 말자. 어느새 끈끈히 녹아버린 초콜릿을 삼키곤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헤이즐 씨, 라고 불러야 할까요. 조심스레 덧붙인 청년은 친근하게 다가오는 남성을 향해 입꼬리를 빙긋 올려보였다. 자주 와요, 혼자 쓰면 심심하잖아요. 조용해서..
처음 간 카페에서 인연을 맺은 뒤 며칠이 지났다. 키보드 자판에서 손을 떼고 기지개를 쭉 편 청년은 하, 나른한 한숨과 함께 눈 앞의 결과물을 바라보았다. 결국 원고는 그 날 성공적으로 마감 한 것이지. 피드백까지 받았으니 당분간은 한가하려나. 열려있는 창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아직은 해가 떠 있었다. 아주 조금만 잘까.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난 청년은 침대에 엎어져 잠시 눈을 감았다. 5분만. 딱 5분만 자자.
피가 튄다. 누구의 것이지? 대체 누구의 것이었지? 내가 누굴 위해 싸우더라? 신이시여, 어찌하여 저희는 무고한 어린 악마까지, 싹을 쳐야한단 말입니까.
몸을 벌떡 일으키며 청년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또 악몽을 꾸었다. 문득 방 안이 시리도록 서늘하자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아까까지만 해도 해가 쨍쨍했거늘, 어느새 어둠이 짙게 내리깔린 시간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청년은 벌벌 떨리는 몸을 채 진정하지 못하고 창가로 다가가 창 밖을 바라보았다. 잠시 뛰는 심장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런.."
한참동안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던 도중 선선한 봄 날씨라도 밤에 불어오는 바람은 차기 그지 없어 몸을 옅게 떨어보이곤 제 팔뚝을 양 손으로 연신 쓸어댔다. 춥다. 아직 변덕스러운 추위는 떠나가지 않고 밤에만 슬금슬금 기어나오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생각을 정리한 청년은 창문을 닫고 주섬주섬 옷장을 향해 걸어갔다. 산책을 하면 그나마 나아질 것이라 생각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역시 밤 공기는 차기 그지 없었다. 처음 밖으로 나오자 새하얀 입김이 잠시 허공을 맴돌다 사라졌다지. 청년의 눈이 나지막히 감겼다 뜨였다. 따뜻한 빛이 내리쬐던 천계가 문득 그리운 걸지도 모르겠다. 날개를 활짝 펴고 나른하게 엎어져 누워있으면 그리도 행복한 일이 없었더라지. 하지만 자신은 능천사였던지라 그리 오래 쉬지는 못하였지. 그 점은 꽤나 쓰게 다가왔던 터였다.
인적이 드물다 못해 제 혼자서만 걷는 것 같은 공원에서, 청년은 가로등 밑에 서서 고개를 들어올렸다.
별이 보이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터였다. 아니, 위로 올려다보면 고향이 보일까 하는 생각일지도 몰랐다.
그 날은 카페가 정기적으로 쉬는 휴일이어서, 아침부터 책을 붙들고 있었다. 때마침 전날 주문했던 아르체스의 책이 와서 그것을 꺼내든 것이었다.
한번 펼친 책장은 끝을 보고 다음 권을 집어드는 것이 순식간일 정도로 휘리릭 넘어갔다. 내용이 묘하게 쏙쏙 들어오는 것이 마치 그가 그 작가의 머릿속에 들어가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날 카페에서 얼핏 본 몇 줄도 표현이라던가 감각이 예사롭지 않더라니. 모든 권을 다 보고 정신을 차렸을 때엔 이미 창 밖이 새까맣게 어두워진 후였다.
"...헤에?"
인간계로 내려와 이런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일개 책 몇 권에 정신이 홀리다니. 아르체스, 그 남자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긴 소파에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잠깐 산책이나 다녀올까."
종일 누워만 있었더니 전신이 뻑적지근했다. 간만에 밤공기도 쐴 겸 코트와 머플러를 입고 두른 다음 집을 나섰다. 제가 운영하는 카페 2층이 그의 거주지였다. 밖으로 나오니 제법 쌀쌀한 공기가 그를 덮쳐온다. 머플러도 두르길 잘 했다고 생각하며 인적 없는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정처없이 걷는 것도 좋지만 이왕 나온거 근처 공원까지는 다녀올까 싶다.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니 산책 삼기엔 딱이겠다. 생각을 정하자 걸음이 저절로 공원을 향한다. 그렇게 진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아닌듯 공원으로 갔다.
거리만큼이나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공원에 도착할 즈음엔 정신도 완전히 깨고 몸도 알맞게 풀어져 있었다. 늘 북적이던 공원이 조용한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해서 느긋하게 원내를 돌던 진. 어느 가로등 아래에서 고개를 하늘로 쳐든 누군가를 보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더란다. 다른 누군가와 착각하기 어려운 금사빛 머리칼, 가는 몸, 매끈한 목선. 그의 기억이 맞다면 그 사람은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확인도 않고 소리기척 없이 뒤로 다가가 그 사람의 눈을 슬며시 가렸더랜다.
"누구-게요?"
아프지 않게, 딱 시야만 가려지게 눈을 가리며 그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물었다. 내가 누굴까요?
검은색, 혹은 짙은 남색에 가까운 하늘은 그리 흐리지는 않았더라지. 옅게 반짝이는 저것은 별일까. 한참을 바라보았더란다. 반짝이며 움직이는 걸 보니 비행기인 듯 싶다. 시선을 옮기니 가로등의 주변이 보였다. 가로등 주변에선 죽을 것을 모르는지, 혹은 알면서도 빛을 향해 달려드는 날벌레가 언뜻 보였다. 불빛에 뛰쳐드는 모습이 익숙하기 그지 없었다. 저들끼리 부딪혀 픽 나가 떨어지는 것들도 몇 보였고.
눈 앞에서 포르르 내려가는 그것에게서 무언가 겹쳐보였다. 지상에서 싸우기 여의치 않아 공중으로 날개를 펼쳐 올라가니 기다리고 있던 악마의 날갯죽지를 베어버리자 무력히 떨어지던게다.
그 장면을 겹쳐보면서 꿈속의 내용을 기억해내자 절로 몸이 떨렸다. 추위에 몸을 떠는 것 같기도 해 보였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더라지. 여기에선 그런 일이 없다. 그냥 내려놓고 여기에서 살까. 그러면 편해질텐데. 악마에게 현혹된 자도 아직은 없으니까.
아.
신념이 흔들리는 듯 싶어 고개를 약하게 숙이고 목걸이에 매달린 은제 십자가를 쥐기 위해 고이 모은 손을 제 가슴팍 근처로 가져다댔을 무렵이었다. 순간 시야가 가려지자 소스라치게 놀라선 저도 모르게 외마디—라기엔 조금 긴— 비명을 질렀더란다.
"으, 으와아..!"
그러면서도 눈을 가린 무언가를 최대한 부드러이 잡으려 하였지. 허둥대던 도중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익숙하였다. 눈을 가린 그것은..손 인가? 토끼마냥 오들오들 떨다가도 떨림이 점차 멎어들었다.
"ㄴ..놀랐잖아요. 헤이즐 씨, 맞죠?"
소리도, 기척도 없었는데. 눈을 가린 손을 아래로 슬몃 치우려 하며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추려 했다.
제 눈을 가린 상대의 손이 움찔 떨린것은 느끼지 못하였다. 제 자신의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것이 급급하였는지 오들오들 떨던 청년은 어렴풋이 눈을 접어 휘었다. 놀랐잖아요. 기습인줄 알고 잔뜩 긴장했건만 인간이었더라지. 정말이지, 꿈자리가 사나우면 꼭 그런 착각을 한다니까. 자기도 참 바보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더란다.
"며칠만에 뵙네요. 그간 잘 지내셨어요?"
손을 내리자 보이는 사람이 참 좋은 미소를 지었더란다. 좋은 밤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청년은 제 손에 느껴지는 온기에 청년은 황금빛의 눈을 마주치며 입꼬리를 올렸다. 웃는 것도 잔잔하기 그지 없는터였지.
"네....아."
산책 나왔어요? 라는 말에 대답을 하려던 찰나 남성은 스스럼없이 제 자신을 팔 안으로 끌어들였다. 잠시 놀란 눈이었지만 그런가보다, 생각하며 청년은 도톰한 입술을 휘어 웃었다. "이렇게 추울줄은 몰랐지 뭐예요." 라고 나지막히 입을 연 청년은 제 볼을 감싸는 큼직한 손에 눈을 깜빡이곤 자신과 마주보고 있는 남성을 올려다보았다.
"...그게, 응...깜빡 잠들었다가 안 좋은 꿈을 꿔서 허둥지둥 나와버렸거든요. 언제부터인진 기억이 잘 안 나지만...추운줄도 몰랐네요."
멋쩍게 푸스스, 웃음소리를 흘린 청년은 제 얼굴을 쓸어내리는 온기에 자연스레 볼을 부볐다. 따스한 것을 찾고 있었다는 것 마냥.
잘 지냈냐는 물음에 보시다시피, 라고 대답한 진. 제 행동에 거부 없이 끌려오는 몸에 기시감이 들 정도로 익숙함을 느낀다. 그 자신이야 그렇다쳐도 아르체스 이 남자 원래 이런 사람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행동에 인위적인 색기 같은 건 없어보였다. 아. 그도 자각이 없거나 놀람에 이끌린 것일 뿐이겠구나. 짧은 생각 끝에 그렇게 스스로의 안에서 결론을 내려버렸다. 깊게 고민하는 건 진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저 거부하지 않으면 조금 더...장난을 칠 뿐.
"안 좋은 꿈? 악몽이라도 꿨나 봐요. 어쩐지, 얼굴이 창백하더라니."
손에 부벼오는 얼굴을 더 감싸며 상냥하게 부드럽게 손가락을 움직여서 쓰다듬는다. 조금 붉은 것도 같은 눈밑을 손끝으로 스치고 뺨을 전체적으로 감싸쥐었다가 놓으며 엄지로 도톰한 입술을 한번 문지른다. 장난스러운 미소를 띈 채로 그렇게 아르체스의 얼굴을 보듬었다.
"네, 저도 산책 나왔어요. 오늘은 카페가 쉬는 날이라 종일 집에서 책만 봤더니 뻐근해져서. 저번에 알려준 책 말이에요. 아르체스 선생님."
선생님이란 단어를 은근히 힘주어 말하며 제 검지 끝으로 코끝을 살짝 건드린다. 그 뒤로 작은 키득거림이 지나가고, 얼굴에서 손을 거둔 진은 자신이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풀러 제 앞의 새하얀 그에게 둘러주었다. 때마침 크림색 머플러여서 아르체스의 금빛 모래색 머리칼과 잘 어울렸다.
"하고 있던 거라 따뜻할 거에요. 그쵸?"
계속 손으로 감싸고 있을 수도 없으니 두르고 있으라며 자상한 손길로 꼼꼼하게 매어준다. 마치 연인에게나 할 법한 행동들이 진을 뭇 선수들처럼 보이게도 만든다. 그러거나 말거나 귀까지 확실하게 덮이도록 해두고 뿌듯하게 웃는 진이었지만.
보시다시피. 응, 잘 지낸 것 같네요. 저도 모르게 남성의 팔 안으로 끌려온 청년은 얌전히 눈을 깜빡이곤 고개를 기웃 모로 기울였다. 어쩌다보니 들어와버렸네. 뭐, 그래도 자신에게 위해가 가지 않았으니 그런가보다 싶어 넘긴터였다. 따뜻하기도 했고. 청년은 악몽이란 말에 꿈 내용을 기억하지 않으려 제 기억을 꾹꾹 누르곤 멋쩍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괜찮지만요."
두 번 꾸고싶진 않네요. 라며 눈을 휘어 웃어보인 청년은 제 얼굴을 쓸어주는 손에 얌전히 남성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엄지로 제 입술을 한 번 문지르자 그것에 잠시 멀뚱멀뚱, 커다란 눈망울을 두어번 깜빡였지만. 아, 오늘은 카페가 쉬는 날이었구나. 눈을 깜빡이던 청년은 제 책에 대한 이야기와 선생님이란 단어에 움찔, 놀라더니 시선을 옮기곤 볼을 붉혔다. 진짜 읽으셨구나.
"ㅈ, 진짜 읽으셨구나.."
부끄럽네요. 코 끝을 살짝 건드리는 손가락에 움찔, 몸을 떨어보인 청년은 얼굴을 덮던 온기있던 손이 거둬짐과 동시에 저에게 머플러를 둘러주는 남성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라는 생각도 잠시. 머플러에 남아있던 온기 덕분에 마냥 따뜻한 듯 놀란 표정도 금세 풀어졌다. 따뜻할 거예요. 그쵸? 라는 말에 고개를 수줍게 끄덕여보인 청년은 자상한 손길에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하며 우물쭈물, 입술을 오물거렸다.
"..감사합니다."
능글맞았지. 연애를 수백번 해봤을까, 능숙한 모습이 익숙치 않은 듯 우물쭈물거리다 뿌듯하게 웃는 표정을 보곤 머플러를 향해 손을 가져다대고 그것을 두 손으로 꼭, 쥐곤 배시시 웃어보였다.
하얀 머플러 속에 감싸인 하얀 사람. 이렇게 순백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진은 흰색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전쟁에서 붉은 흰색을 질리게 봐온 탓에 흰색을 좋아하질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보고 있어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괜찮다는 생각이 은근슬쩍 들고 있었다. 왜인지는, 그다지 알고 싶지 않지만서도.
"천만에요."
고마움의 인사를 유들유들하게 받아치는 진. 배시시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가슴 한켠이 간질간질하다. 뭘까. 왠지 멋쩍어져 썰렁한 목을 문지르다가, 괜찮다는 말에 다시 싱긋 웃었다.
"저는 코트 깃도 있어서 괜찮아요. 원래 머플러 잘 안하는데 오늘은 왠지 하고 싶더라니. 이런 일이 있으려고 그랬나보네요."
능숙하게 어색함과 묘한 기분을 숨기고 이제는 갈 곳을 잃어버린 두 손을 주머니에 꽂는다. 잠시 아르체스를 바라보며 무언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곧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곤 몸을 살짝 숙여 아르체스와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걸을까요?"
혼자보단 둘이 덜 심심하지 않겠냐며 전에 카페에서 했던 말과 비슷하게 권유를 한다. 물론 싫으면 거절해도 된다는 말도 잊지 않고.
크림색 머플러가 따뜻했다. 꼭 따뜻하게 우유를 데운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고 저도 모르게 머플러에 볼을 바르작댔다. 따뜻하고 복슬복슬한 것이, 꼭 햄스터 한 마리를 볼가에 두고 바르작대는 기분이었다.
"으음.."
괜찮냐는 질문에 남성이 싱긋 웃으며 코트 깃도 있으니 괜찮다 하자 그를 빤히 바라보다 머플러를 내려다보았다.
"....그..그런가요."
이런 일이 있으려고. 응, 그랬나보다. 며칠전의 위화감도 전부 기분탓인 터였다. 저렇게 친절한 사람을 의심하다니. 나도 참 바보지. 여기는 인간계라 그런 위험한 일은 적을텐데도. 자신과 눈높이를 맞추는 남성은 꼭 밤하늘 같았다. 노란 황금빛 눈동자, 검은색, 혹은 푸른색을 띄는 머리카락. 익숙하면서도 익숙치 않은 모습이 참 오묘하였다지. 한참동안 눈을 마주치니 뭔가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어 시선을 또르르 옮겼다만.
어느새 추위에 발그레하게 물든 볼로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었던 터였다. 만난 것도 인연이니.
"좋아요. 안 그래도 사람이 없어서 좀 무서웠거든요."
만나서 다행이지 뭐예요. 라고 덧붙이곤 청년은 서스럼없이 한 손을 뻗었다. 같이 걷는 건 어때요? 라는 의미를 담아서. 청년은 따뜻한 온기를 좋아했다. 그때는 온기를 느낄 수 없었기에.
머플러에 볼을 부비는 거나, 눈이 이리저리 굴러가는 것이 귀엽다. 이 사람 남자 맞나 싶을 정도로 하는 행동들이 아기자기하게 귀엽다. 뭐지. 눈에 뭐 씌이기라도 했나. 진은 제 눈을 깜빡거려 보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조금 더 필터가 두꺼워진 느낌이었다. 그래서 뭐, 어쩔건데.
"어둠이 무서운가 봐요."
진은 여전한 미소로 아르체스를 보며 그의 손을 잡았다. 먼저 내밀어오는 손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얼굴을 감쌀 때처럼 부드럽게 쥐고 코트 주머니로 넣는다. 미리 손을 넣어둔 덕에 주머니 안은 따뜻했다. 그 온기로 같이 들어온 손을 데워주며 같이 걷기 편하게 나란히 섰다. 옆에 서니 키 차이가 도드라지는 것 같았지만 같이 걷는데 문제는 없으리라. 보폭이야 맞추면 되니까.
"이제 가볼까요? 자, 어디로 가볼까. 이 시간은 저희뿐이니 어딜 가도 눈치 볼 필요 없겠어요."
한층 즐거워진 목소리가 말하고 맞잡은 손과 내딛는 발이 아르체스를 이끈다. 불편하지 않도록 보폭을 맞춰 걸으며 일단은 그에게 맞춰볼까 싶었다.
"자주 가는 곳이라던가 있어요? 아니면 제가 가는 곳으로 갈래요?"
어디로 갈까요, 우리? 친근하게 상냥하게 묻는 진의 웃는 얼굴 뒤로 무슨 생각이 숨어있을지는 그 자신만이 알 일이었다.
보들보들한 감촉이라던지, 이런 건 꽤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터라 절로 기분이 좋아졌더라지. 처음 겪는 것 이었으니. 천계에선 쉴 틈도 없어서 추운지 따뜻한지도 모르고 살았는데, 일상이란 것이 참 좋은 것이었다. 마냥 기쁘다는 듯 웃으며 청년은 제 손을 잡아주는 남성을 올려다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삼킬까봐요. 어릴때부터 어둠속에서 괴물이 나타나서 끌고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 했던지라 지금도 약간 무서워요."
좀 웃기는 이야기죠? 라며 멋쩍은 듯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고 볼을 긁적인 청년은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악마가 나타나서 끌고갈지도 모른다 생각했던게지, 사실은? 부드럽게 제 손이 감싸쥐어지고 이내 코트 주머니 속으로 손이 들어갔다. 청년은 따뜻한 온기가 찬 손을 녹이는 것이 느껴지자 손가락을 미약하게 꼼질댔다. 어느새 곁에 나란히 서니 키차이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터였다. 고개를 올려 그를 쳐다보니 밤하늘과 겹쳐보여 마냥 신기하였더라지.
"으으으음.."
어디로 가야할까요. 이 시간엔 단 둘 뿐이라지요? 어디에 가도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하여도 청년은 지금 정처없이 떠돌던 참이었다. 자유로운 한 손을 들어 습관적으로 검지를 들고 자신의 아랫입술을 꾹꾹 누르던 청년은 남성의 곁에서 열심히 발을 움직이며 생각에 빠져있었다. 어디로 가야할까.
"헤이즐 씨가 가는 곳으로 가보고 싶어요."
친근하고 상냥한 목소리에 그제서야 손가락을 거두고 고개를 돌려 웃는 얼굴을 마주하였다. 고민에 빠졌던 표정도 어느새 밝게 웃고있었다.
어둠이 무서운가 봐요. 그 말에 아르체스는 갑자기 삼켜질까봐, 어둠 속에서 괴물이 나타나 끌려갈까봐 무섭다고 대답했다. 유약한 생김처럼 정신도 무른 걸까. 진의 머릿속에 문득 밤에 불 끄기 무서워하는 아르체스의 모습이 그러져 그는 고개를 돌리고 피식,웃었다. 들키지 않게 작고도 작게.
진은 코트 주머니 속의 꼼질대는 손가락을 좋을대로 두고 조금더 힘주어 잡았다. 놓치지 않게 잡고 옆을 보니 입술을 꾹꾹 누르며 무언가 고민하는 모습이 보인다. 손끝으로 눌리는 입술이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워서 한번 입맞춰보고 싶-
뭐?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잠시지만 스스로에게 기묘한 느낌이 든 진. 허나 그 느낌은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그래서 진은 미소 그대로 아르체스를 볼 수 있었다.
"그래요. 좀 걸어야겠지만, 좋은 운동이 될 테니까 조금만 힘내요."
기대에 확실히 부응할만한 곳이에요. 자신만만하게 말한 진은 느긋한 걸음을 이어가며 제가 자주 가는 그곳으로 향했다. 가면서 몇마디 더 주고받기도 했다.
"가끔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싶을 때도 있는거죠. 저도 때때로 그런 날이 있어서 그럴 때면 그곳을 간답니다. 지금 가는 곳이요."
우연히 찾은 곳인데 정말 운이 좋았다며, 그곳에 대한 궁금증을 은근히 키운다. 아르체스의 손을 꼬옥 쥐고 보폭을 맞춰 걸어가면서.
가로등이 드문드문 있던 공원은 꽤나 무서운것이 사실이긴 했다. 어둠이 짙게 내리깔려 언제 어디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청년의 뇌리를 스치곤 하였다. 남성이 고개를 돌리고 작게 웃는 것은 듣지 못하였는지 어둑한 앞길을 보고 예의 그 얼음장같은 새하얀 눈망울을 깜빡였다.
코트 속에서 꼼질대던 손이 단단히 잡히자 입술을 누르던 손이 짐짓 멈추는 듯 싶었다가도 다시금 입술을 꾹, 누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한담. 답은 어느새 정해졌지만. 얼굴에 미소가 만연한 남성을 바라보던 청년은 조뮤걸어야겠지만, 이란 말에도 별 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당분간 쉬니까 조금 늦게 자도 괜찮을거고. 어느정도 지나면 악몽의 내용도 잊을것이라 생각하였다.
"응, 알았어요."
기대에 확실히 부응할만한 곳이라. 그런 장소가 공원 근처에 있을줄은 몰랐다는 듯 느긋한 걸음의 보폭을 맞추며 걷곤 남성을 올려다보며 몇마디를 더 주고받긴 했다. 밤하늘에 녹아드는 모습인지라, 청년의 눈이 묘하게 반짝이곤 했다.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다. 그 감각이 문득 목 뒤를 간지럽혔다.
"그렇구나, 정말 기대되는데요."
궁금하다는 듯 호기심에 잔뜩 젖은 눈망울로 남성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정말 어디일까, 궁금증이 어느새 치고올라와 야금야금, 나쁜 생각을 잡아먹고 있었더라지.
가는 동안 특별한 얘기를 나눈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두마디씩 대화를 나눌수록 타인이었던 거리가 조금씩 좁혀지는 느낌이다. 지난날 카페에서 처음 보았을 때보다 아르체스가 가깝게 느껴진다면 그건 그저 진의 기분 탓일까. 아니면 상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확인해 보고 싶으면서도 안 될 것 같은 묘한 감각이 자꾸만 내면의 수면을 흔든다. 흔들고 흔든다. 파문을 일으켜 마음을 술렁이게 만든다.
진이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마주친 건 호기심으로 가득 찬 두 눈이었다. 어느새 악몽으로 인한 창백함은 사라지고 보들보들 귀여운 사람이 옆에 있었다. 아. 이 사람에게 저 하얀 머플러는 정말 잘 어울린다. 제가 했을 때는 끔찍하게 안 어울렸는데.
"자신은 있지만 그렇게 보니까 조금 긴장되는 걸요? 아, 만족스러우려나."
아니면 어쩌지- 능청스레 중얼거리며 다시 정면을 본다. 계속 마주하고 있으면 뭔가 제 마음 가는대로 해버릴 것만 같았다.
"그나저나 역시 시간이 시간인지라 사람이 정말 없네요. 전 활기찬 낮도 좋지만 이런 밤도 나쁘지 않더군요."
괜히 볼 것도 없는 거리를 보며 딴소리를 내뱉는 진. 그러고보니 둘은 공원을 나와서 가로등만이 드문드문 켜진 거리를 걷고 있었다. 진이 말한 곳으로 가기 위해. 다시 주변을 둘러보니 조금 더 가야할 듯 했다. 혼자라면 벌써 도착했을 텐데 다른 누군가와 보폭을 맞춰 걷다보니 자연스레 느긋해져 있었다.
"오늘은 둘이기에 더 좋은 밤이란 생각도 드네요."
그렇게 한마디 툭 던져놓곤, 조금만 더 가면 된다며 은근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제가 말하고도 왠지 민망한 탓이었다.
대화를 한마디, 두마디씩 나눌수록 친근감이 점점 들기 시작했다. 단 두 번의 만남으로 벌써부터 이렇게 서스럼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던가? 글쎄, 그건 또 아니었지만 새로운 경험이다. 라고 생각하며 청년은 살갑게 대화에 임했다. 걱정과 근심도 대화를 하다보면 눈 녹듯이 사라지는지라 청년은 어느새 해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보들보들한 감촉이 걸음마다 느껴지는지라 더욱이.
"으응, 그렇게 갑자기 긴장하시면 더 기대되는데."
능청스레 중얼이던 남성이 정면을 보자 청년도 열심히 고개를 돌려 정면을 응시했다. 역시 앞은 깜깜했다. 깜깜하고, 드문드문 옅은 빛이 주변을 비추고 있었다. 그럴때마다 오묘한 기분을 느끼는 것은..아마 기분탓이 아니겠지. 어둠속의 빛을 자주 보았지만 인위적인 것이 아니었으니.
"생각이 많을 땐 밤, 다른때엔 낮."
저는 그렇게 걸어요. 하지만 아무도 없는 공원은 또 처음이네요. 청년은 가로등의 불빛이 깜빡이는 것을 보곤 또 새롭다는 감각을 느꼈겠지.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기던 청년은 문득 들리는 목소리에 남성을 빤히 올려다보았더랜다.
기껏 말머리를 돌렸는데 그 부분을 다시 짚고 들어올 줄이야. 진은 옆에서 시선을 느꼈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지금 봤다간 분명 함락당할 거라는 감이 있었다. 무자각의 힘은 이 능청스런 악마를 압도할 정도로 무서운 것이어서, 견뎌내려면 보지 말아야 했다. 실은 마음속에 파도가 칠 정도로 보고 싶더라도.
"저-는, 대부분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니까요. 오늘처럼 쉬는 날이 아니면."
직장이 있는 일은 행동반경이 좁아진다는게 단점이라는 둥, 자리를 거기 말고 다른데로 할 걸 그랬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는 둥 가는 내내 진은 딴소리를 해댔다. 그 사이사이 시선이 느껴져도 돌아보지는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다. 어쩌면 조금 쌀쌀하게 보일지도 모르는 모습이었다.
얼마나 걸어왔을까. 어느새 둘의 앞에 야트막한 오르막길이 나타났다. 나무계단으로 이루어진 그 길은 위에 뭐가 있는지 보이지는 않지만 못 갈만한 곳은 아니어보였다. 난간도 있고, 사람들도 제법 다녀보였고.
"여기만 올라가면 되요. 혹시 힘들진 않나요? 잠시 쉬었다 갈까요?"
진 그는 괜찮았지만 이 톡 치면 부러질 것 같은 유리 같은 남자는 아닐지도 몰랐으니까. 어떠냐 물은 진은 근처에 쉴 만한 곳이 잇었던가 둘러 찾아보았다. 벤치가 저기 어디쯤 있었는데.
"전 괜찮으니까 힘들면 얘기해요. 서두를 것 없으니까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벤치 하나를 찾은 진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무심코 아르체스를 돌아보고 말았다. 오는 내내 겨우 참았는데. 그 한순간의 방심이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는 아무도 몰랐다. 진 자신조차도.
밤하늘 같은 남성을 빤히 올려다보던 청년은 눈을 깜빡이다 그가 더 이상 자신에게 시선을 주지 않자 앞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자주 눈을 마주칠 수 있어서 좋았지만 그리하였다간 시간이 지체될 터였지. 그렇게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은 청년은 열심히 앞을 바라보고 걸었다.
"저랑 비슷하네요. 저도 집 안에서 자주 시간을 보내거든요."
교회에 가거나 마감이 끝나는 순간까지는 나오는게 꽤 드물어요. 멋쩍은 듯 괜히 머플러를 만지작대던 청년은 남성의 말을 듣고 때로는 옅은 웃음소리를 내거나, 남성을 향해 시선을 돌리기도 하였다. 딴소리라도 드문드문 맞장구를 쳐주는 모습은 글쎄, 온순한 성격일지도 모르고 과거 하지 못했던 대화를 지금에서야 열심히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앞만 보고 걷는것도 묵묵히 인내하며.
어느새 야트막한 오르막길이 보였다. 나무로 만들어진 계단, 그것을 빤히 바라보고 끝이 어디일지 고개를 쭉 올려본 청년은 난간과 사람들을 흘끔 쳐다보곤 그제서야 다시금 남성을 돌아보았다. 그닥 힘든 길은 아닐터다. 이렇게 여려보여도 막상 생긴것과는 달랐으니.
"으응?"
힘들진 않나요? 라며 쉴 만한 곳이 있는지 둘러보는 남성을 빤히 올려다보던 청년은 그제서야 자신을 돌아보았다. 여기선 어떻게 해야할까. 괜찮다고 해야할까? 아니면 쉬었다 가야 할까? 밤은 깊었고 자신은 시간이 많았다. 눈 앞의 남성은...글쎄. 눈을 얌전히 깜빡이며 또 습관적으로 제 입술을 꾹꾹 누르던 청년은 눈이 마주치자 눈을 접고 입꼬리를 휘어보였다.
"아주 조금만 쉬었다 가요."
올라갈 수는 있지만 중간에 지칠지도 모르겠네요. 오, 이건 겉으로는 사실이었지만 속으로는 내숭이었다. 3일 밤낮을 쉬지도 않고 검을 휘둘러온 천사가 말이지.
그냥 가자고 하면 제가 붙잡을까 하고 생각하던 차에 들려온 대답은 제법 반가운 것이었다. 무심코 돌아본데다 좋은 대답까지 들리자 진은 그만 숨김없이 활짝 웃고 말았더랜다. 곧 제가 어떤 얼굴을 하는지 깨닫고 표정관리 했지만은.
"그러면 잠깐 앉았다가요. 어차피 그 때가 되려면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자자, 저쪽이에요. 행여나 쉬자는 말을 무를까보아 진은 조금 서두르듯 아르체스를 데리고 빈 벤치로 다가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 둘을 쳐다보면 진의 금빛 눈이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러면 그들은 놀라며 둘을 피했다. 그 모든 건 제 옆의 새하얀 그에게 들키지 않는 수준으로만, 이었다.
"음, 좀 차겠지만...잠깐은 괜찮겠죠. 앉아요."
벤치에 앉으려면 손을 잡은 채는 안되어서 진은 아쉽게 아르체스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 때까지 주머니 속에 꽁꽁 숨어있던 손을 꺼내어 놓고 먼저 앉혔다. 그러고나서야 저도 옆에 긴 숨을 내뱉었다.
"여긴 신기하게 이 시간에도 사람이 좀 있어요. 그래서 여기만 오면 시간을 잘 모르겠어요."
밤 같기도 하고 저녁 같기도 해서. 그렇지 않냐며 말하는 진의 얼굴엔 묘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활짝 웃는 남성의 미소를 바라본 청년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 미소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단다. 순간 치고 올라오는 간질간질함에 자신이 방금 느낀 감정이 무엇인지 한참을 고민하곤 시선을 또르르 옮겼고. 방금 뭐였지? 굉장히 이질적인 기분이었는데.
"..그..때요?"
청년은 고개를 기웃, 모로 기울이면서도 서두르듯 자신을 데리고 빈 벤치로 다가가는 남성에게 이끌리듯 발걸음을 종종 옮겼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볼 시간도 없는 것 같았다. 한참을 자신이 방금 느낀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는터였다. 정말 뭐였지?
전장에서도, 천계에서도 느껴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다. 희열도 아니었고, 쾌감도 아니다. 그것괴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는데.
"..응. 고마워요."
남성이 뭇내 아쉽게 손을 놓아주자 청년은 눈을 나긋하게 깜빡이곤 조심스럽게 손을 주머니에서 빼었다. 그것이 꼭 아쉬워보이는 듯 싶었더라지. 자리에 조심스레 앉자 천을 타고 살갗으로, 냉기가 치고 올라왔다. 역시 날이 추웠다. 옆에 앉은 남성을 얌전히 올려다보던 청년은 시간을 모르겠다는 말에 잠시 눈을 굴렸다. 하기사, 그렇다. 이 시간에도 사람이 있다면 몇시인지 분간이 가기는 쉽지 않을터다.
옆에 앉아 긴 숨을 내뱉자 하얀 입김이 진의 입으로부터 허공으로 뿜어져 사라진다. 아주 잠깐 흐릿했던 시야가 맑아지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보인다. 가지각색의 표정들을 하고 오가는 사람들, 아니 인간들을 보니 새삼스러운 생각이 든다.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무심코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만져보았다가 조금 의외인 것을 찾았다. 그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어떤 것을.
"......"
이런게 무슨 소용이겠냐. 의미없다. 다시 손을 내려 주머니에 꽂으려다가 문득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방금 제가 놓은 하얀 손이 시야에 들어오니 그냥 두기도 좀 그렇더라. 그렇다고 다시 잡기도 그렇고. 음. 지금은 주머니 속이나 데워놓자고 생각하며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꽂은 진. 그러다 다시 옆에서 시선이 느껴져 슬쩍 돌아보았더란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까부터 자꾸 보네요. 간질간질하게."
아르체스가 보면 시선이 간질간질하게 느껴진다며 프흐흐 웃는다. 김이라도 묻었나. 잘생김. 진담마냥 농담처럼 중얼거리곤 슬쩍 옆으로 움직였다. 아르체스와 몸이 닿도록. 그러곤 아무렇지 않게 얘기한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는 곳에서 살다가 여기로 오니까 매일매일이 신기할 정도로 생생하게 느껴져요. 그렇지만 오늘 같은 날은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네요."
말끝이 조금 흐렸던 것도 같다. 말하기 멋쩍었던 걸까. 잠깐 고개를 돌리고 아르체스로부터 표정을 숨기는 진. 곧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와 마주보며 묻는다,
추운 날씨에 봄은 어디로 숨었을까, 얌전히 생각하던 청년은 무심결에 가슴팍을 쭉 폈더란다. 스트레칭을 하듯 날개를 쭉 펼때마다 자주 보였던 행동이었다. 지금은 날개도, 광배도 존재하지 않았거늘 버릇은 참 무서운 것이었더라지. 인간의 모습을 가졌음에도 이게 뭐 하는 짓이람.
두 손을 곱게 모아둔 청년은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인간들이 지나가는 모습이 공원에서 보던 인적없는 어둠속과는 너무나도 달랐더라지. 한 장소의 차이였을 뿐인데. 자신을 슬쩍 돌아보는 남성을 보곤 입술을 휘어 웃던 청년은 그가 넌지시 던진 말에 눈을 크게 깜빡였다가도 푸스스, 웃음을 마주 흘렸다. 잘생김이라니.
...부정할 수는 없는지 말이 나오지는 않았더라지. 은근슬쩍 자신과 몸이 닿는 듯 하여 눈을 얌전히 깜빡이던 청년은 아무렇지도 않게, 평온하게 이야기하는 남성을 올려다보았더란다.
"...."
말의 뜻을 이해하려 하다가도. 어느새 볼 주위가 발그레하게 물들어버린 청년은 말 없이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는 듯 허둥대다 고개를 픽 숙였다. 자신은 천사였다. 인간과는, 적어도 인간과는. 흘끔 그를 올려다보다 청년은 웃는 얼굴에 제 입술을 오물거렸더란다.
어때요, 라고 묻고 대답을 듣기까지가 엄청 길게 느껴졌다. 길었다. 느릿하게 나온 대답이라 더 그렇게 느껴졌다. 얼굴을 붉히며 저도 그럴 것 같다고 대답하는 아르체스를 보고 진도 제 얼굴이 홧홧해지는 것 같았다. 하얀 머플러에 감싸인 붉은 뺨이 대조적으로 보인다. 아. 계속 보다간 참을 수 없을 것 같아 진은 고개를 돌려 정면을 보았다. 밤공기가 이렇게 시원한 거였나.
"...크흠. 흠."
괜히 헛기침 몇번하고 시선을 피했다. 이대로 계속 같이 있어도 괜찮을까. 과연 자신이 끝까지 참을 수 있을까. 주머니 속에 숨은 손이 초조하게 꼼지락거린다. 그 와중에 그게 아르체스에게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진은 자신을 다스렸다. 어느정도 차분해지자 돌아보았다.
"같은 기분이라 좋네요. 이거 저만 그런가요?"
옅은 홍조가 진의 뺨에 번져 있었지만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밤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진은 고개를 슬핏 기울였다.
"이제 그만 일어날까요. 슬슬 올라가면 시간 맞을 것 같네요."
더 앉아있으면 이대로 얼어버릴지도 모르겠다고 우스개소리처럼 말하고 먼저 일어난다. 일어나서 아까 잡았던 손을 내밀었다. 잡아요. 아르체스를 부드럽게 바라보는 진의 금빛 시선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밤에 선선히 불어오던 바람이 그리도 차던가? 아까보다 훨씬 찬 기분에 괜히 머플러에 깊게 얼굴을 파묻었다. 꼼질꼼질, 만지작대던 십자가를 손가락으로 쓸기도 하고, 괜히 애꿎은 십자가를 건드리며 남성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였더란다.
"아, 그게..."
자신이 머플러에서 고개를 빼던 시점에 다시금 질문이 들어왔다지. 청년은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혼자 그런 건 아니라는 듯.
"...아, 네.."
일어나야지. 발그레한 볼가가 어둠에 묻혀 그리 보이진 않았더란다. 우스갯소리엔 푸스스, 웃음을 흘리곤 그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황금빛, 선명한 색채를 지닌 그 눈을 마주친 청년은 잠시 몸을 움찔 떨었다. 남성에게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더라지만, 자신은 그 움찔거림을 느끼곤 속으로 꽤나 당황했더라지.
방금 그건 뭐였지? 아까와 같았다. 손을 잡지 않은 다른 손은 은 십자가를 꾹 쥐고 있었다. 다른 천사들은 답을 알까, 설마.
일이 오늘 너무 바빴어요...힝..(꼬옥)(파묻힘)(부비적부비적) 우리 악마주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구...조기 출근이라니..8ㅁ8 진짜 푹푹 쉬시구......저도 오전 즈음 다시 이을 것 같아요..(,_, 우리 악마주 좋은 꿈 꾸고 부디 피로하지 않고 퇴근도 일찍 하시길 바라요..(볼쪽입쪽)
남성의 손을 잡자 자연스레 그 손을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다시금 코트 주머니에 들어간 손은 체온과 데워진 주머니 덕분에 차갑진 않았다. 갈까요? 친절한 질문이 돌아오자 청년은 눈을 휘어 웃었다.
"응, 가요."
깊은 생각에 빠졌기 때문인지 짧게 나와버린 답변에도 일말의 흔들림은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말을 듣기에도 고민하거나 생각에 잠긴 모습은 드러나지 않았다.
가요. 저 위로. 계단을 흘끔 바라보다가도 하늘을 향해 눈을 굴린 청년은 남성이 내뱉은 저 말이 얼마나 익숙한지 알고 있었을 터다. 돌아가야 합니다. 돌아가지요, 저 곳으로. 나란히 서서 보폭을 맞추었더란다. 주변을 둘러보니 많던 사람들도 흩어져선 또 한적하기 그지 없었고. 청년은 조심스레 계단에 발 하나를 올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기던 청년은 문득 남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세상의 것이 아닌듯한 느낌이 나는 음색이 낯설었던게지. 어렴풋이 저 다음 음이 무엇일지 생각해보던 청년은 입술의 속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다음 음이 떠오를 듯, 익숙하지 아니하지만 꼭 예상은 될 것 같은 음이었더라지. 계단을 오르던 청년은 남성에게 질문하였고, 자신을 살짝 돌아보고 미소 짓는 남성의 대답에 눈을 깜빡이다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렸다.
"으음, 고향이 여기랑 말이 다르다면 헤이즐 씨도 여기 사람은 아니시구나. 저도 그런데."
라고 첫 운을 뗀 청년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제 손을 꼬옥 잡는 남성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계단이 열 걸음을 채 남기지도 않았던건지, 제 옆의 남성은 아이처럼 순진하게 발걸음을 떼며 거꾸로 세고 있었던게다. 천천히 보이는 위의 풍경도 잠시였다. 기쁜 듯 끝이라 중얼거리며 길게 숨을 몰아쉬던 남성이 질문하였으니. 고개를 돌려 주변을 돌아보던 청년이 작은 공원을 보곤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곳곳의 벤치엔 흘끔 마주쳤던 것 같은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았더라지. 주변을 둘러보며 작은 공원을 눈에 담던 청년은 눈꼬리를 휘어 웃으며 남성을 따라 빈 벤치를 향해 쫄래쫄래 발걸음을 옮겼다. 저도 모르게 이 경치에 들뜬 듯 싶었다.
그 때가 무엇일까. 눈을 두어번 깜빡이며 제 옆의 남성을 올려다본 청년은 꽃 같은 웃음에 금세 볼을 붉히곤 저도 활짝 웃어보였더란다.
"응."
그 때가 무엇일지 기대가 되는 지, 청년의 얼굴에도 아직 피어나지 않은 꽃이 가득하였더라지.
제 말에 저도 그렇다고 답하는 말이 묘하게도 들린다. 술렁이던 마음에 작은 파문 하나가 더해진 느낌. 파문은 작았지만 확실히 마음 속에 퍼져나갔다. 둥글게 둥글게 번져 마음의 벽을 자꾸만 간질였다.
비밀이라면 비밀스러운 작은 공원이 제 의도대로의 느낌을 잘 전해준 것 같아 진은 내심 뿌듯했다. 인간계에 내려와 아무도 만난 적 없는 건 아니지만, 여길 데려온 건 아르체스가 처음이었다. 여기만큼은 남에게 방해받지 않고 싶어서 그랬는데, 그에게라면 괜찮을 것 같아서.
"정말 아는 사람만 아는 곳이에요. 봤다시피 계단이 높아서 올라오는 사람이 적거든요. 조금만 힘내면 이렇게 좋은 곳이 있는데."
사실은 저도 혼자만 알고 싶었지만요.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르체스를 바라본다. 부드럽게 미소지은 진의 눈이 저와 같은 얼굴을 한 아르체스를 은근하게 바라보다가, 다시 정면을 행해 고개가 돌아갔다. 그런 진의 볼이 조금 붉은 듯도 싶었다.
"...자, 앉아요."
진이 데려간 벤치는 그 공원의 가장자리 부근이었다. 낮은 울타리가 쳐져있는 그곳은 울타리 너머로 도시의 전경이 보이는 제법 전망 좋은 자리였다. 하지만 진이 보여주려는 것은 그게 아닌지 일단 자리에 앉고 보는 것이었다. 이번엔 아까처럼 머뭇거리지 않고 아르체스의 옆에 가까이 붙어앉아 낙낙한 코트 자락으로 그를 감싸기까지 했다. 주변 따위는 신경도 안 쓴다는 듯.
문득 온 곳이 다르다. 라고 떠올리며 현재의 천상계는 어떨지 생각해보았다. 악마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갑자기 자신이 사라지면 옆의 남성은 슬퍼하겠지. 그렇다면 자신도..
...방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청년은 괜히 더 열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떠올리고 나선 괜스레 더 그런 것 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듯 싶었다. 정말 아는 사람만 아는 곳. 계단이 높았었지. 청년은 미소를 숨기지 않고 남성을 올려다보았더란다.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부드럽게 미소짓는 금빛 눈이 조금 더 보고싶은 듯, 청년은 한참동안 눈에서 시선과 미소를 떼지 않았다. 정면을 향해 고개가 돌아가는 남성의 얼굴이, 가로등에 비춰진 그 모습이, 정확히는 볼이 좀 붉은 듯 싶었더란다. 청년은 조용히 눈을 굴리곤 벤치에 앉았다. 공원의 가장자리 부근은 도시의 전경이 보였더라지.
이것보다 더 대단한 것잇까. 청년의 두 눈이 궁금함을 담아 깜빡, 깜빡. 감겼다 뜨였다. 제 옆에 가까이 붙어앉아 코트 자락으로 저를 감싸자 청년은 속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드는 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붉어진 얼굴을 가리려는 듯 고개를 숙였다가도.
얄미워도 미워하지 못하겠다더라지.
"...응, 고마워요..."
괜히 심통이 났는지 볼을 붉히던 청년이 눈을 마주치자 고마워요, 라는 말 뒤로 툭, 내뱉었다지.
"...지니."
헤이즐과는 다른 그 애칭 말이다. 평소라면 헤이즐 씨. 라고 말했겠지만. 청년은 그대로 자신을 감싸안은 남성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잘게 잘게 파문이 번지던 마음에 커다란 것이 떨어졌다. 첨벙- 크고 묵직한 그것은 파문이 아닌 세찬 파도를 일으켜 마음이 아닌 심장을 때렸다. 그 힘찬 타격에 진은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렸다. 한순간 말마저 잃을 정도로.
"......"
한술 더 뜨듯 제게 몸을 기대오는 흰색을 시야 밖으로 보며 진은 제 심장소리가 들리면 어쩌지 라고 생각했다. 얼굴도 화끈거리는게 제법 붉어진 것 같은데. 그렇다고 제가 감싸놓고 밀어낼 수도 없는 노릇인데. 아. 어째서인지 지금 이 상황들에 도저히 대응할 수가 없다. 대응하려 하면 점점 더 크게 흔들어오는 이 하얀 사람 때문에. 당신 대체 뭐야. 왜 이렇게 나를 흔드는 거야.
"...별 말씀을."
아무 말도 안 하긴 뭣해서 겨우 꺼낸 말이 그 정도였다. 그 말을 하곤 아르체스에게 보이지 않게 고개를 살짝 든 채로 한동안 말없이 멀게 보이는 풍경을 보고만 있었다. 저 멀리 어둠에 잠긴 도시를, 캄캄한 밤하늘을.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 흐른 것 같다. 슬쩍 하늘을 보고 이제 때가 되었다고 느낀 진. 이제 좀 진정도 된 듯 하여 제 코트 안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거 아나요, 아르체스? 날이 밝기 전 하늘이 가장 어둡다는 것을. 그래서 그 다음에 떠오르는 해가 세상 무엇보다 눈부시다는 걸."
옅은 미소를 지으며 진의 손이 잠시 아르체스의 얼굴을 스쳐지나간다. 한번 부드럽게 쓰다듬곤, 보여주고 싶은 것이 왔다며 정면을 향했다. 저길 봐요. 진의 말을 따라 고개를 돌리면 도시를 덮은 어둠의 장막 위로 서서히 떠오르는 해가 보여온다. 붉고도 환한 햇빛이 도시의 어둠을 걷고 그들이 있는 그 공원까지 환히 비춰오고 있었다. 이런 도시에서 볼 수 있을거라곤 생각하기 어려운 일출이었다.
"이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당신을 두렵게 하는 어둠을 물리칠 빛을."
떠오르는 햇빛을 가득 받으며 진이 아르체스를 바라보았다. 추위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모를 홍조를 띈 얼굴로 세상 어떤 것보다 순수해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감싸안은 체온은 따스했고, 기대니 편하기 그지 없었다. 검에 지탱하여 벽에 겨우 기댄것만 기억에 남았었거늘, 체온에 기대는 것이 이리도 좋을줄은 몰랐던 것이다. 따뜻함에 눈을 느릿하게, 그리고 나긋하게 깜빡인 청년은 한참의 정적을 즐기듯 잔잔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눈 앞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
별 말씀을. 그 말을 끝으로 남성은 제 얼굴을 보이지 않고 멀게 보이는 도시를 바라보고만 있더랜다. 청년 또한 도시를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어둠을 눈에 담았다. 전혀 무섭지 않은 것을 보니, 많이 안정되었나보다. 아니면 당신이....오, 이런. 이런 생각을 또 해버리다니. 붉은 눈가를 기점으로 다시금 얼굴에 복사꽃이 한 송이, 두 송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남성의 품 속에서 느릿하게 눈을 뜨던 청년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에 고개를 살짝 들어올리곤 남성과 눈을 마주쳤다. 날이 밝기 전 하늘이 가장 어둡고 그 다음에 떠오르는 해가 세상 무엇보다 눈부시다 하였더라지. 제 얼굴을 스쳐지나가는 손에 남성을 멍하니 바라보던 청년이 고개를 살풋 돌렸다.
"...아..."
붉고도 환하다. 어둠을 걷는 모습이 그리도 아름다울 수 없었더란다. 이어지는 남성의 말에 청년은 말 없이 남성을 올려다보다 환한 빛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어둠을 물리칠 빛이라는 단어가 가슴에 와닿았다. 익숙하고 질리도록 들은 말인데도 의미가 달랐고, 말하는 사람이 달랐던지라.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청년은 남성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순수한 미소에 저려오는 가슴팍을 애써 무시했다. 한 순간, 눈을 마주쳤던 당신이 햇살보다 더 빛났더란다. 청년은 몸을 더 기대듯,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곤 한껏 미소지어 보였다. 붉은기가 어린 눈가는 감동해서일까, 그리움 때문일까. 감동이 더욱 컸을지도 모른다. 순수하게 웃는 당신에게 감동했겠지.
갓 떠오르는 햇살로 물든 아르체스의 흰 얼굴은 마치 이 세상에 막 나온 것처럼 깨끗하고 맑게 보였다. 혈관이 비쳐 보일듯 투명한 피부와 오묘한 색의 머리칼, 옅은 눈빛이 어우러진 이 사람의 모습은 당장이라도 제 색으로 물들이고 싶을 정도로 하얗고 하얘서-...
제게 몸을 더 기대오며 미소 짓는 아르체스를 화답하듯 끌어안는 진. 만천하에 보일 정도로 밝은 햇살 아래였지만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이라면 뭐든 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몰래 죽여오던 그 충동을, 그 기분을 지금이라면. 진의 손이 천천히 올라가 머플러에 감싸인 아르체스의 얼굴을 감싸쥐었다. 턱을 가볍게 그러쥐고 올려 저를 바라보게 만들며 말한다.
"다행이네요. 이 얼굴의 어둠도 걷혀서."
낮은 목소리는 조곤조곤하고 바라보는 눈빛은 짙은 황금빛으로 그윽하게 일렁인다. 마치 눈빛으로 허락을 구하듯 한동안 아르체스를 응시하던 진. 그가 천천히 움직여 둘 사이의 거리를 좁혀올 때엔 어쩌면 아르체스의 심장도 뛰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지 아닌지 확인할 길은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진은 가볍게 이마를 맞대었다가 떼었을 뿐이었다. 너무나도 가볍게.
"두려움도 가셨으니 이제 한잠 잘 수 있겠죠. 돌아갈까요?"
이마를 맞대고 다시 되돌아간 진은 웃으며 그렇게 말하곤 아르체스를 놔주었다. 놓기 전에 한번 제 품에 꼬옥 담았다가 아쉬운 듯 천천히 떨어지며 가두었던 코트 속에서 꺼내주곤, 아르체스의 손을 찾아 잡았다. 여기 올 때처럼.
기댄 당신이 햇살만큼 든든하다 생각하였다. 어둠을 물리치는 빛과 같이, 당신은. 당신에게 기대어 햇살을 바라보기도 잠시, 남성의 손이 천천히 올라가 제 얼굴을 감싸쥐자 청년은 고개를 들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
무슨 일일까. 턱을 가볍게 그러쥐고 올리는 터라 남성을 바라보던 청년은 짙은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눈을 마주했다. 그 순간이었다.
"...아.."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가슴이 저렸다. 허락을 구하는 건가요. 그의 눈을 피하지 않는 것은 동의의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천둥이 내린듯 가슴이 떨렸다. 가까워지고 있었다. 청년의 두 속눈썹이 잠시 가늘게 떨려왔다. 가깝다. 어째서 당신은. 가볍게 맞닿는 이마의 온기에 청년의 몸이 잠시 움찔, 떨려왔다. 닿은곳이 얼얼한 감촉이 들었다. 한참동안 대답도 하지 못하고 남성의 품에 안긴 청년은 겨우 목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출 이후 진은 아르체스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데려다주고, 헤어지기 직전에 진이 연락처를 물어봐 둘은 서로의 번호를 교환했다. 그 말을 하기 위해서였는지 오는 내내 한마디도 안 했더란다. 번호를 교환한 후의 진은 세상 무엇보다 기쁜 얼굴로 웃으며 돌아섰었다.
그 후로 며칠이 지났다. 연락처는 주고받았지만 딱히 쓸 일은 없었다. 아르체스가 카페로 오곤 했으니까. 그가 오면 진은 잠시 일을 놓고 그와 얘기를 나누었다. 바쁠 땐 한두마디씩 나누는게 고작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게 남의 눈에도 보인다는게 문제였지만.
아르체스가 오지 않은 어느 날. 진은 알바와 함께 늦은 점심을 먹었다. 피스타치오 크림을 바른 두툼한 토스트에 커피 한잔을 곁들인 간단한 식사를 하며 알바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붉은 머리에 새까만 눈을 한 알바, 라일리가 그 얘기를 꺼낸 건 꽤 갑작스러웠지만서도.
"그래서, 그 하얀 손님이랑은 사귀는 거야?" "ㅁ,뭣?!"
답지 않게 당황하는 진을 보며 라일리가 뭘 새삼스럽게 그러냐는 듯 쳐다봤다. 하마터면 커피를 뿜을 뻔한 진. 태연스레 무슨 소리냐며 넘기려고 했지만 그녀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괜찮다고 뭐 그럴 수도 있다고 하며 이해하는 듯 고개까지 끄덕였다.
"사랑엔 나이도 국경도 없댔는데 하물며 성별 쯤이야. 음, 이해해. 이해해."
그런 모습에 진은 아무 대꾸도 못 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일리는 이게 본론이라며 주머니에서 티켓 두 장을 꺼내었다. 다음주면 열릴 꽃 축제의 입장권이었다. 그것을 진에게 내밀며 그와 다녀오라고 하길래, 너는 안 가냐고 묻자 라일리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나 꽃가루 알러지 있어서. 그러니까 둘이 가서 잘 즐기고 오라고."
진은 사양하려고 했지만 때마침 손님이 오는 바람에 얼결에 티켓을 챙겨버렸다. 그것의 존재를 다시 깨달은 건 퇴근하고 집에 올라온 후였다.
"...아- 이거..."
주머니에서 투욱 떨어지는 티켓을 보고 생각났다는 집어든다. 어떡하나. 이왕 받은 거 그냥 갈까. 그도 불러서-
"으음-"
한 손에 티켓을 들고 한동안 고민하던 진. 십여분간의 고민 끝에 될대로 되라 생각해버리곤 폰을 꺼내들었더란다.
[안녕. 지니에요. 혹시 다음주 주말에 시간 있어요? 근처에서 꽃 축제를 하는데, 같이 가면 어떨까 해서.]
저 메세지 하나 쓰는데도 한 이십여분 걸린 듯 하다. 다 쓴 다음엔 행여나 제 마음이 바뀔까 싶어 재빨리 전송하고, 답을 기다리는 대신 폰으로 그 축제에 관한 걸 찾아보고 있었더란다. 갈지 안 갈지 모르지만, 혹시나일지도 모르니까.
그 날 이후, 연락처를 얻게 되었으나 연락을 하는 것은 꽤 적었다. 자신이 카페에 가기도 하였고, 지니와 이러저러한 대화는 말로도 나눌 수 있었으니. 청년은 집에서 마감을 맞추는 것이 빠를것이라 판단하곤 노트북을 열어 손가락을 이리저리 자판에 옮기고 글을 써내려갔다. 만만치 않았던 한 악마를 떠올리던 청년은 문득 표정을 구기곤 자판에서 손을 떼어냈다.
너무나도 많은 자들이 죽어나갔다. 그때를 떠올리니 글을 차마 쓸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자비없는 천사는 남몰래 고통을 안고 있었고, 명예로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천사들을 보며 갈등하기까지 했으니. 얼굴을 두 손으로 덮어 가리고 깊은 한숨을 내쉰 청년은 웅, 진동하는 핸드폰에 화들짝 놀라선 시선을 돌렸다.
[안녕. 지니에요. 혹시 다음주 주말에 시간 있어요? 근처에서 꽃 축제를 하는데, 같이 가면 어떨까 해서.]
꽃 축제? 문득 같이 산책을 나간 날이 떠올라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도 그 생각을 하면 천둥이 내린듯 가슴이 떨렸고 저릿했다. 이마에 닿았던 촉감에 청년은 한참동안 핸드폰을 붙잡고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갈길 잃은 손가락을 겨우 붙잡고 타닥타닥, 빠르게 터치를 하여 답장을 써내려갔다.
[다음주 주말이요?]
앗. 청년은 흘끔 달력을 흘겨보곤 손가락을 움직였다. 사실, 정신이 없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뭐 어떤가.
[마침 시간이 비어요. 같이 간다면 저야 좋죠.]
:)나 ( ´∀`)같은 이모티콘을 써야할지 말아야할지 짐짓 심각하게 고민하던 청년은 쓰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전송버튼을 눌렀다.
"....아."
보내버렸잖아. 이제서야 상황 파악이 되어가는지 삽시간에 볼가가 붉어진 청년은 책상에 머리를 박고 소리없는 비명을 질렀다. 다음주 주말, 시간은 너무나도 빨리 지나가버렸다. 약속을 한 당일이 되어선 옷을 한참동안 고민했고, 루즈한 상의 위로 가볍게 가디건을 걸친 청년은 입술을 오물거리다 약속 장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 꽃 축제는 알고보니 매년 그곳에서 열리는 것이었다. 관심이 없어서 몰랐는데. 꽃은 좋아하지만 저런데 갈 일은 없었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 보다보니 어느새 답이 와 있었다.
[다음주 주말이요?] [마침 시간이 비어요. 같이 간다면 저야 좋죠.]
간단하지만 확실한 긍정의 대답. 좋았어.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린 진은 빠르게 답문 하나를 보내었다.
[그럼 그 날 축제 입구에서 1시에 봐요.]
곧장 뜨는 전송완료를 보고 어서 다음 주말이 오길 바라는 진이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시간은 느린 듯 빨리 흘러가 약속된 날이 되었다. 그 날 따라 유난히 하늘이 맑고 공기가 따뜻해 외출하기 좋은 날이었다. 커튼을 걷자마자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에 진의 기분도 상쾌해졌다. 시작이 좋아서인지, 아침부터 준비 하나하나가 순조로웠다. 옅은 하늘색 셔츠와 검정 면바지에 청 자켓을 걸치고 낮은 굽의 로퍼까지 신자 그야말로 완벽했다. 가볍에 손을 댄 머리는 정갈했다. 카페 갈 때보다 훤칠하고 미남자의 모습이 현관 전신거울에 비춰지고 있었다. 완벽하군. 스스로의 모습에 만족한 진이 집을 나선 건 아마 아르체스와 비슷한 시간 아니었을까 싶다.
약속 장소로 가는 길은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축제 가는 길 답달까. 입구가 가까워질수록 얼른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동시에 못 찾으면 어쩌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사람이 하도 많아서. 하지만 그런 걱정은 할 필요도 없었다는 듯 먼저 와 있었던 아르체스가 단박에 눈에 띄더라. 인파 사이로 보이는 하얀 사람. 보는 것 만으로 가슴이 뛰게 하는, 새하얀 사람.
"아르체스!"
반가운 마음에 크게 부르며 입구 근처에 있었을 아르체스에게 다가갔다. 키가 큰 것이 이럴 때 좋더라. 성큼성큼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가서 그의 앞에 도착하자마자 두 팔을 벌려 끌어안았다. 주변은 신경 쓰지도 않고.
"먼저 와있으려고 했는데 한발 늦었네요. 많이 기다렸어요?"
아직 약속시간까진 살짝 여유가 있는 타이밍이었다. 둘 다 늦지는 않았지만 누가 먼저 왔느냐의 차이가 있는 셈이었다. 마치 몇 년 못 본 사람 반기듯 아르체스를 품 안 가득 안았다가 아쉽게 놓은 진. 끌어안은 팔을 놓고도 냉큼 그의 손을 잡으며 웃어보였다.
상의가 커서 그런지, 허벅지의 절반을 덮는 긴 상의가 다리를 움직이는 순간마다 천천히 나부꼈다. 청년은 축제 입구에서 제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흘끔 바라보았다. 옹기종기 모여 꽃을 보러가는 어린 아이들도 있었고, 화목해보이는 가정도 있었다. 단연 많이 보이는 것은 연인이었지. 인간들도 자신들과 이런 면에선 별 다를바가 없다 생각하며 청년은 눈을 깜빡였다. 입구 근처에서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잠시 시선을 돌리자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쟁쟁히 울렸다. 제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가 한없이 깊어서.
"지니."
제 자신이 반가운 듯 주변조차 신경쓰지 않고 저를 껴안는 남성에게 익숙해져야 하거늘, 또 가슴이 뛰는 듯 하여 괜히 시선을 흘끔 피해본 청년은 다시금 그를 올려다보았다. 기다렸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지. 청년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곤 입꼬리를 휙 휘어 올렸더란다.
"응, 아니요, 저도 방금 왔는걸요."
서로 늦지도 않았으니 다행이었더라지. 저를 품 안 가득 안고 아쉽게 놓는 터라 청년은 펄떡거리며 뛰는 심장을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냉큼 손을 잡는 행위가 퍽 익숙한 듯 손가락 사이에 깍지를 끼우며 청년은 꽃처럼 웃었다.
"응, 꽃 축제는 처음이라 많이 기대되는걸요."
인간계에 오고나서 이런 것을 즐길것이라 생각도 하지 못하였더지. 청년은 남성과 보폭을 맞추며 살랑살랑, 발걸음을 옮겼다.
지니, 라고 불리울 때마다 심장이 덜컹거리는 걸 그는 알까. 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과 모르길 바라는 마음이 상반된다. 들키면 들키는대로 부끄러우니까. 아무리 좋을대로 사는 진이라고 해도 그 정도 부끄러움은 있었다. 농담이 아니고 말이다.
"서로 기다리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아, 처음이에요? 저도 처음인데."
방금 왔다는 말에 진이 정말 다행이라는 듯 답하고, 아르체스의 손을 꼬옥 잡은 채 입구를 지나쳤다. 입구를 지날 때 티켓을 주니 손목에 거는 형태의 입장권으로 바꿔준다. 입장한 후 사람이 없는 곳으로 피한 진. 잡고 있던 아르체스의 손을 당겨 그 손목에 입장권을 걸어주었다. 너무 조이지 않게. 그런데 이렇게 보니까 새삼-
"손목이 참 가늘군요. 와, 잡을 때 부러지지 않게 조심해야겠어요."
공들여 만든 조각 같아요. 매끄럽게 하는 말이 마치 작업 거는 것 같다. 그러나 진은 진심으로 한 말이었는지 잠시 손목을 만지작대었다. 정말 조금만 힘을 줘도 똑 부러질 것만 같은 손목이라서, 이 손목이 감히 무거운 것을 들 수 있을까 싶었다.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아르체스에게 입장권을 걸어주고 제 손목에도 남은 하나를 둘러버린 진은 행여나 놓칠새라 다시 손을 잡고 그 손의 주인을 보았다.
"미리 찾아보니까 이것저것 테마가 많이 있더라구요. 열대라던가 장미원이라던가, 희귀 식물이라던가. 저쪽 실내 전시관에는 곤충 표본 같은 것도 있대요."
폐장 전에 다 볼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 들뜬 목소리로 이것저것 얘기하다가, 어디부터 가볼까요, 그렇게 묻는 진이었다.
"전 다 보고 싶어서 못 정하겠으니까, 아르체스가 가보고싶은대로 먼저 갈래요. 어디부터 갈래요?"
서로 기다리지 않아 다행이지. 깍지 낀 손으로 입구를 지나치며 남성이 티켓을 주자 손목에 거는 형태의 입장권으로 바꿔주는게다. 사람이 없는 곳으로 피하는 남성을 열심히 쫓아간 청년은 제가 해도 괜찮은데.. 라고 작게 중얼거리며 수줍어하듯 자유로운 손으로 제 입가를 덮어 가렸다.
"...가늘.."
말을 잇지 못하고 부끄러운 듯 청년의 눈이 시선을 피했다. 제 손목을 만지작대는 손길 하나하나가 스쳐 지나가면, 지나간 자리는 타오르는 듯 뜨겁다. 심장이 또 빠르게 뛰는 듯 하여 제발 바깥으로 어떠한 반응도 보이질 않길 바라며 청년은 갈 곳 잃은 시선을 애꿎은 제 손목에 향했더란다. 이런 가는 팔로 검을 든다고? 라는 말은 자주 들었지만 막상 그가 내뱉으니 반응부터가 달랐던게다.
남성의 손을 꼬옥 붙들고 청년은 고개를 들어올렸다. 열대, 장미원, 희귀 식물, 실내 전시관에는 곤충 표본..정말로 폐장 전 까지 볼 수는 있을까.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남성의 목소리가 마냥 듣기 좋은 듯 입가에 조용한 미소를 띄우고있던 청년은 어디부터 가볼까요, 라는 말에 눈을 깜빡였다.
"으음..."
자신도 마음 같아선 이것저것 보고 싶었지만. 손가락으로 제 입술을 꾹꾹 누르며 고민에 빠져있던 청년은 눈을 휘어 웃었다.
고민하거나 생각할 때의 버릇인 걸까. 언젠가 봤던 손짓을 보며 귀엽다고 생각해버린다. 얄팍한 눈커풀 뒤로 깜빡 숨었다 드러나는 눈동자도 보석처럼 예쁘고. 아주 고운 크리스탈을 깎아 만든 것 같은 이 사람은 뭘 해도 제 눈에 들지 않는 것이 없었다. 깍지가 씌여도 단단히 씌여버린게지.
"응. 그럼 장미원부터 가요."
고운 미소로 말하는 아르체스를 보며 진 역시 한결같은 미소를 띄었다. 장미를 좋아하나 보구나. 잘 어울린다 생각한다. 하얀 장미 같은 사람이었으니. 진이 붙잡고 있는 이 사람은.
갈 곳이 정해졌으니 이제 움직여야 할 때. 인파에 휩쓸리지 않게 조심하라며 진이 한발 먼저 내딛었다. 이쪽저쪽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잘 피하며 아르체스 역시 부딪히지 않게 제게 가까이 당겼다. 손을 잡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생각해서 그의 어깨에 가볍게 팔을 두르곤 제가 지켜줄 수 있는 범위 안에 두었더란다.
"오늘이 첫 날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네요. 한번 엇갈리면 다시 만나기 어렵겠어요. 그러니까 옆에서 떨어지면 안 돼요? 음. 안 찾을거니까."
웃으며 하는 말은 능청스럽고도 천연덕스러웠다. 물론 농담이기도 했다. 제가 어떻게 안 찾을 수가 있겠는가. 그런 생각과 진심은 살짝 숨긴 채 장미원을 향해 걸어갔다.
꾹꾹 누르던 입술에서 손가락을 떼며 청년은 장미원에 무엇이 있을까. 이것저것을 상상했다. 청년은 장미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아니, 유독 좋아하였다. 저와 다르게 고혹적이어선 붉거나 흰, 혹은 진홍빛을 띄는 꽃잎이 그리 마음에 들었더란다. 가시에 찔릴 때도 있었지만 그것조차 감수할 정도로. 장미는 붉어서, 어울리지 않아도 저 자신이 그리 좋아하는 식물이었던게다. 갈 곳은 정해졌고, 장미원으로 향하기 위해 한 발 먼저 내딛는 남성을 따라 조심스레 발을 내딛었다. 사람들이 많아 정신이 없었더란다.
"응, 사람이 많네요..."
어깨에 가볍게 둘러지는 팔에 청년은 남성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하긴, 사람들이 많으니 당연히 이렇게 갈 수도 있는 법이지. 주변을 둘러보니 아까 입구에서 언뜻 보았던 사람들도 보이는 듯 싶었다. 제 어깨에 올려진 손은 둘째치고, 안 찾는다니. 미심쩍은 눈으로 잠시 그를 바라보던 청년은 "그럼 제가 찾아야죠."라고 짧게 덧붙이곤 두 손을 들어 어깨 위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아무래도 떨어지긴 싫다는 듯.
"저기가 장미원인가봐요."
어느정도 걷다보니 무언가가 보였더란다. 저기가 장미원일 것 같다는 느낌이 물씬 들었고, 청년은 남성의 손을 꼭 붙들곤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 눈을 마주보려 한게다. 기대에 가득 찬 눈빛이 반짝였다.
삐죽, 입술을 내밀고 볼을 옅게 부풀려보이는 장난을 해 보이면서도 청년은 그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어깨를 단단히 잡아주는 손길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던게지. 청년의 두 눈에 어느덧 장미원이 담기고, 가까워지고 있었다.
"..."
확실히, 이 거리에서 봐도 붉었더란다. 실로 장미원 다운 자태에 청년은 잠시 장미원을 바라보았더란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남성을 흘끔 보고 고개를 기웃, 기울이다가도 입꼬리를 살풋 올려보인 청년은 장미원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제가 살던 자리에선 장미를 손수 가꾸곤 하였지. 장미 꽃잎이 바람에 휘날려 떨어지면 그것을 모아 이러저러 장식을 하기도 했더란다.
입구에 다다르자 보인 것에 청년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진정 장미라는 것들은 어찌 이리 황홀함을 안겨주는지. 장미 덩쿨로 꾸며진 동굴길, 그리고 장미로 꾸며진 정원. 형형색색의 장미와 함께 아찔하게 제 코를 자극하는 진한 장미향까지. 청년은 어떠한 감탄사도 내뱉지 못하고 멍하니 장미가 가득한 이 장소를 눈에 담았다. 붉은 장미, 흰 장미, 검은 장미와 노란 장미까지. 오, 꽃말을 전부 알고 있을 정도로 청년은 장미에 빠져버렸지.
"....아..그게."
아르체스는 어때요? 라는 질문에 그제서야 꿈결같은 기분에서 벗어난 청년은 고개를 가까스로 들어올리고 남성을 올려다보았다. 진한 장미향에 취하기라도 한 듯 멍한 표정에서 배시시, 웃음이 피어올랐다.
사방에 가득한 장미와 장미향이 마치 이곳을 세상 전부라고 느껴지게 만든다. 자그마한 테라리움 같은 장미원 안에 오직 둘만 있는 것처럼 느껴져, 몽롱한 기분이 마음을 한껏 들뜨게 만들었다. 그 속에서 보인 아르체스의 미소는 여태까지 중에 가장... 유혹적이었다. 화려한 색 가운데 하얀 그의 모습이 너무나 순결해보여서, 망가뜨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진은 금방이라도 그의 허리를 감싸 입을 맞추고 싶은 것을 참으며 미소를 유지했다.
"...말을 잃을 정도인가요? 확실히 제가 보기에도 정말 무어라 말하기 어렵긴 하네요."
그다지 꽃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여긴 그냥 단순히 싫다고 치부하기 어렵게 느껴진다며 하하, 작게 웃음을 흘렸다. 당장 아르체스를 끌어안아버리려는 손을 한껏 제지하면서. 아. 약간 당기기는 했다. 가만히 서 있다간 들락이는 사람들에 의해 이리저리 치일 것이 뻔했으니까.
"이제 우리도 둘러보죠. 당신이 만족할 때까지 있을테니, 느긋하게 가요."
그렇게 말하며 진은 붉은 장미원의 하얀 벽돌길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장미원의 울타리나 길, 구조물 같은 것들은 죄다 새하얘서 장미들이 더욱 돋보였다. 하얀 바탕에 피어있는 꽃들을 보던 진. 문득 제 옆의 그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소리 없이 입꼬리를 올렸더란다.
"아르체스는 어떤 색 장미가 가장 좋나요?"
그 말을 꺼낸 것은 넓은 화단에 핀 여러 종의 장미들을 보며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같은 장미라도 종에 따라 색이 다르고 모양이 다르니 그 중에서도 유독 좋아하는 것이 있지 않느냐고, 그렇게 덧붙여 말한 진이 마침 지나치던 장미 한 송이를 손 끝으로 톡 건드렸다. 아주 가벼운 손짓에 꽃이 부끄럼을 타듯 가늘게 떨었고 그것을 보며 진이 쿡쿡 웃었다. 즐거운 듯이.
말을 잃을 정도인가요? 청년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흡사 아이돌을 눈 앞에서 직접 만나는 팬과 같이, 두 볼이 발그레 물들어선 멍한 표정으로 웃는게 황홀하기 그지 없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지. 그가 자신을 약간 당기자 그제서야 정신을....차렸나.
"고마워요, 지니..!"
볼을 붉히며 청년은 붉은 장미원을 걷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장미들이 온통 새하얀 장소에 피어나 있는 모습에 고향이 생각나 향수에 젖은듯 눈빛이 잔잔히 가라앉았다. 여전히 볼도 발그레했고, 멍한 표정도 그대로였거늘.
온통 새하얗고 성스러운 분위기가 넘실대던 그 장소에서 유일하게 다른 색을 지닌 것은 장미였더란다. 자신의 신념과 신앙이 흔들리는 순간마다 그는 흰 색이 아닌 붉고도 강렬한 자태를 지닌 장미를 눈에 담았고, 평소 입고다니던 예복에도 장미가 새겨져있었다. 그가 전투에 나설 때 꺼낸 검의 손잡이에도, 지금 십자가의 중앙에도.
장미가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었던건 이루 말 할 수 없었고.
"으음...."
어떤 색의 장미가 가장 좋냐고 묻는다면야. "하얀 장미와 분홍색 장미요." 라고 대답할 수 있겠다. 사실 장미라면 그 어떤 색이라도 좋았지만 유독 좋이하는 것은, 분홍색과 하얀색이었지. 꽃말도 그가 맘에 들어 하는 것이었던게고. 청년은 장미를 눈에 이리저리 담으며 눈을 휘어 웃곤 남성을 올려다보았다.
장미향이 코를 스쳐지나가자 청년은 손을 들어 마침 눈에 보이는 흰 장미 하나를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꽃잎을 살짝 눌렀다 뗀지라 꽃이 잠시 흔들리는 것이 꼭 바람결에 휘날리는 것 같았더라지. 어느새 제 곁에 있던 남성이 제 볼을 한 손으로 쓰다듬는 터라 그를 향해 온전히 시선을 옮기곤 이어지는 말에 눈을 휘었다.
"지니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붉은 장미는 사랑, 그리고 용기 또한 가지고 있었더라지? 아무래도 용기라는 쪽을 더 마음에 들어하는 천사였지만. 자신의 얼굴을 감싸안는 손길에 청년은 입술을 휘어 웃어보였다. 남성이 살짝 고개를 숙이자 익숙한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이마에 닿았던 촉감마저도 다시금 느껴지는 듯 싶었다. 제 귓가로 입술을 가까이 하곤 나지막히 속삭이는 목소리에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
얄미워서. 제 자신만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놀리는 듯 싶은 능글맞음에 볼을 붉히곤 시선을 휙, 피했다. 태연스레 앞을 향하는 것도, 어깨를 감싸는 것도 마냥 익숙치 않고 그렇다고 불편하지는 않았더란다. 그냥 가슴이 뛰어 장미향이 나는지 안 나는지도 모를 정도일 뿐이지.
"...응, 잘 따라가고 있는걸요."
제 자신을 이리도 감싸주는데 어찌 잘 따라가지 못 한다고 할 수 있겠던가. 사람들에게 치이지 않는 쪽에 제 자신을 걷게 해주는 배려에 눈을 나긋히 깜빡이던 청년은 장미원을 둘러보며 어느덧 보이는 출구를 보고선 그제서야 입술을 떼었다.
"제가 살던 고향에선 장미꽃을 보기가 어려웠어요."
여기서 못 보던 장미를 실컷 보니 좋네요. 나긋하게 말하는 높낮이는 확실히 만족했다는 듯 가볍게 띄워져있었다. 고된 훈련과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천사만이, 쉬는 동안은 꽃잎이 아닌 온전한 장미꽃을 볼 수 있었던 터였다. 제 붉은 죄를 덮어주는 더 붉은 장미꽃을.
제 의도를 느꼈는지 고개를 휙 돌리는 모습에 진이 작게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붉어진 뺨을 숨길 수는 없다는 걸 그는 알까. 그 밤처럼 머플러라도 둘렀다면 숨듯이 가릴 수 있었을 텐데. 오늘은 무방비하게도 숨겨지질 않아서 실컷 볼 수 있었다. 붉어지는 뺨도 곱게 짓는 웃음도. 진도 남말할 것 없이 그러했지만 그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그런가요? 이거 우연이네요. 제 고향도 그랬는데. 장미만이 아니라 꽃 자체를 보기가 어려웠죠."
의외의 교집합에 진은 반가운 듯 말했다. 마력과 독이 가득한 마계에 이런 팔랑팔랑한 꽃이 피는게 말이 되겠는가. 그나마 가끔 볼 수 있었던 때는 천계에 쳐들어갔을 때 정도였다. 그 때는 관심도 없었는데. 참. 이렇게 보니 또 다른 느낌이더란다. 새삼 좋아질 것 같은? 음, 아마도? 둘은 어느새 장미원을 다 돌고 출구에 다다라 있었다. 이제 다른 곳으로 가야 할 차례인가. 나가는 곳까지 장미로 둘러진 장미원을 나가려다 문득 진이 아르체스를 멈춰세웠다.
"잠깐만, 여기 서서 장미 좀 보고 있어봐요."
웃으며 말한 진이 덩쿨장미가 소복히 깔린 울타리 한켠에 아르체스를 세웠다. 사람들이 오기 전에 얼른 해버려야지. 그대로 뒤로 몇 걸음 물러나더니 제 폰을 꺼내어 장미를 배경으로 한 아르체스를 몇 장 찍었다. 어떻게 해보라는 말도 없이 정말 눈 깜짝할 새였다. 연분홍의 자그마한 장미들이 한가득 핀 하얀 울타리 앞에 하얀 사람. 햇빛 속에 녹아들 것 같은 조합이라고 생각하며 진은 셔터를 몇번 눌렀다.
"기억만으로는 조금 아쉬우니까요."
만족스럽게 찍었는지 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은 진. 정작 당사자에게 보여준다거나 하진 않고 그대로 태연히 그를 데리고 장미원을 나왔더란다.
정말이지, 휘둘리는 느낌이 나는터였다. 볼을 붉히며 시선을 돌리는 찰나에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싶으니 청년은 더 시선을 피한터였다. 그런가요? 이거 우연이네요. 제 고향도 그랬는데. 아, 꽃 자체를 보기가 어려웠다니. 청년은 문득 천계를 떠올렸다. 따스한 햇살속에서 피어난 꽃은 전부 밝은 색을 띄고 있었다. 짙은 색은 장미를 제외하면 꿈도 꾸지 못했지만.
출구에 다다른 것이 조금은 아쉬웠지만 만족할 만큼 바라봤으니 괜찮을 것이다. 문득 자신을 멈춰세우는 남성의 말에 눈을 깜빡이더니 그의 말대로 장미를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다시금 장미향이 짙게 퍼져서. 나른하고도 부드러운 미소가 얼굴에 가득 퍼졌다.
"...응?"
찰칵거리는 소리에 그제서야 놀란 듯 얼굴을 붉히곤 남성을 바라보았다. 설마 지금 사진 찍은거예요? 라는 느낌이 가득한 눈으로 그 큰 키의 남성을 살풋 올려다본 청년이 뾰루퉁, 볼을 부풀렸다.
"정말이지, 이럴줄은 몰랐는데요."
아쉽긴 하지만, 앗, 저 안 보여주시는 거예요? 치사해라. 그의 곁에서 걸음을 옮기자 어느새 따스한 볕이 제 살갗에 닿았더란다. 익숙한 따스함도 잠시, 실내 전시관에 가보자는 제안에 그는 먼저 손을 뻗었다.
"응. 가요."
저긴 또 무슨 꽃이 있을까. 청년은 남성에게 빨리 가자는 듯 그의 옷자락을 살풋 잡아당겼다.
뾰로통하게 부푼 볼을 톡 건드리며 진이 말했다. 약간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아르체스에게 향하고 한없이 사랑스럽다는 듯 휘어진 금빛 눈이 아르체스를 바라보았다.
귀엽고도 예쁜 사람. 카페에서 자주 보니까 얼굴 잊을 일은 없지만 가끔 안 올 때나 집에 갔을 때 볼 사진이 있으면 나쁠거 없지. 어렴풋이 생각만 하던 걸 이렇게 이루니 기분이 참 좋다.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갈 거에요~"
제 옷깃을 잡아당기는 손을 부드럽게 감싸쥔다. 장미원을 나오니 사람이 덜해서 손 잡고 다녀도 괜찮을 듯 했다. 어깨를 감싸는 것도 좋지만, 이 말랑하고 부드러운 손을 잡는 것 또한 좋아서. 응.
놓치지 않게 아르체스의 손을 단단히, 굳게 붙들고 전시장 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표지판 같은 걸 보니 실내 전시장은 꽃꽂이 같은 작품이나 스폰서들 부스 같은게 있는 듯 했다.
"안에서 기념품 같은 것도 파나 보네요. 음. 하나 사다줄까."
덕분에 같이 왔으니. 혼자 중얼거리던 진이 슬쩍 아르체스를 내려다본다. 시선이 마주치자 씨익 웃으며 다시 앞을 보는 그 얼굴은 뭔가 생각하는 듯 했다. 무얼 생각하는지는 말해주지 않은 채 둘은 전시장 앞에 도착했다. 입장은 자유인듯 제지 없이 들어가니 밖과는 다른 느낌의 전시장과 크고 작은 부스들이 보였다.
이상하게 찍혔을까 걱정이 되는 것이었지. 청년은 제 부푼 볼을 톡, 건드리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저만 볼 것이라는 남성을 흘끔 올려다보았다. 심장이 다시금 미친듯이 뛰는 듯 싶었다. 제 자신을 한없이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그 휘어진 눈길이 청년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밤하늘과 같은 사람. 알아채기 어렵고도 제 자신을 마음대로 휘두드는 듯한 얄미운 사람. 그럼에도 제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이 어찌나 볼을 붉히게 하는지. 눈을 나지막히 감았다 뜨며 청년은 제 손을 부드럽게 감싸쥐는 그 손을 다른 손으로 덮었다. 그리고 예의 그 새하얀 눈동자로 남성을 빤히 쳐다보다가도 앞을 바라봐 가까워지는 실내 전시장의 입구를 응시했더라지.
표지판이 있기에 빠르게 훑어보니 꽃꽂이, 스폰서의 부스가 눈에 유독 띄었다. 으음, 그렇지요. 기념품도 팔겠지? 알바에게 사준다는 뜻일까. 청년은 눈을 깜빡이고 고개를 기웃 기울였다. 천계의 사람들에게 인간계의 선물을 사주기엔.. 오, 우스운 생각이다. 청년은 고개를 돌렸고, 시선이 마주치자 씨익 웃는 남성을 보고 마주 웃어보였다.
전시장 앞에 도착하고 그 안에 들어가자 보이는 부스는 다양했다. 꽃내음이 나는 듯 하여 그쪽을 돌아보니 꽃으로 만든 향수도 있었고, 어린 아이들을 위해 비누를 만드는 것도 있었지. 꽃을 본딴 여러 악세사리 부스도 보이는 듯 싶었다. 청년의 두 눈이 반짝였다.
실내의 풍경은 진 역시 처음 보는 곳이었다. 인간계에 살면서 이런 행사에 도통 온 적이 없으니 신기하기도 하더라. 그 와중에 그는 어떨까 싶어 시선을 내리자 저보다 더한 반짝이는 눈이 보였다. 마치 열살배기 아이마냥 눈이 반짝이는 아르체스가 진의 시야에 한가득 들어왔다. 음. 하긴 그도 이런 곳은 처음이랬으니 저런 반응도 당연하려나. 그 모습이 귀여워서 손을 들어 볼을 툭 건드리곤 말했다.
"신기해보이는게 많네요. 여기서 이러고 있지만 말고 직접 봐요, 우리."
그렇게 눈을 빛내고 있으면 그냥 지나칠래도 그럴 수 없겠다며 또 한번 얄미운 소릴 하는 진. 제 말에 제가 쿡쿡 웃으며 일단 꽃꽂이 같은 작품들이 있는 쪽으로 먼저 향했더란다. 길을 따라 걸으며 본 것들은 하나하나 독특하고 특이했다. 인위적으로 색을 만든 꽃도 있었고 실내에서만 볼 수 있는 화초도 있었다. 인간이란 족속은 정말 별 걸 다 만드네. 무심코 그렇게 중얼거릴 뻔 한 것을 참아 넘기곤, 느긋한 걸음을 옮기며 감상을 이어갔다.
"아, 여기엔 못 본 장미도 있네요. 보라색이랑 파란색... 만들어낸 것이겠지만 색은 참 예쁘군요."
인위적으로 만든 자줏빛과 푸른빛 장미를 지나칠 때에 진이 그렇게 말했다. 저건 저거대로 예쁘지만 역시 자연스러운게 좋다고 덧붙이며 그 앞을 지나쳤다.
전시 쪽을 한바퀴 돌고 나자 길이 자연스럽게 판촉 부스들 쪽으로 이어졌다. 어차피 이쪽도 한번 볼 거였기에 길을 따라가며 아르체스를 보았다.
실내의 풍경을 바라보며 청년은 천계를 떠올렸다. 그리곤 이내 천계와 비교해보곤 의미없는 생각이라며 천계를 떠올리기를 그만두었다. 이런 풍경과 천계는 너무나도 달랐으니. 특히, 이런 것들은. 청년은 인간들을 사랑했으며 자신과 다르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 또한 사랑했다. 그래서인지 더욱 관심이 가는지도 모를 터였다. 순간 제 볼을 툭 건드리는지라 청년은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남성을 올려다보았다.
"앗, 맞다. 직접 봐야죠. 응."
얄미운 소리에 뾰루퉁 입술을 내밀다가도 청년은 남성이 향하는 장소를 얌전히 따라갔다. 독특하고, 특이한 터였다. 처음 보는 색의 꽃도, 실내에서만 볼 수 있는 화초도 있었다. 형형색색의 꽃에 정신이 팔릴 뻔 하였더라지. 온통 밝은 색만 가득하여 성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던 천계와 달리 온통 화려한 색으로 가득 차있는 것이 그리도 신기했더라지. 장미를 지나칠 즈음, 청년은 멍하니 그 장미에 정신이 팔렸다.
"보라색이랑 파란 색..그렇죠, 자연적으로는 불가능하니까.."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색깔은 부자연스러우면서도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여서. 그래, 저 색깔의 장미는 다른 장미 사이에 끼어 이리저리 자라나겠지. 자연스럽지만 무언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청년의 눈은 지나가는 부스의 꽃을 담았고, 조화를 보았을 땐 시들지 않는 꽃임을 알곤 신기한 눈빛을 보내다가도 이내 그 시선을 거두었더란다. 지금은 인간의 탈을 썼으니.
한바퀴를 돌고나니 어느새 판촉 부스다. 청년은 향수와 비누, 각종 악세사리와 열쇠고리 같은 것들을 눈에 담다가도 제 자신의 눈이 엄청 반짝거렸다는—놀리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말을 듣곤 흠칫 놀라더니 눈을 도르륵 굴렸다.
".......아..아니에요. 그냥..."
하기사, 장신구는 목걸이 하나로 족했지. 반지는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고, 향수 또한 그에게 어울리는 물건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청년은 볼을 붉혔다.
눈에 띄게 흠칫거리는 거나 보석 같은 눈동자가 굴러가는거나, 그대로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진다. 솔직하고 쳔연스러운 반응들이 저로 인해 나오는 것이라 생각하면 그건 그거대로 즐거운 기분이 들어서. 진은 딱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웃음을 흘렸다. 프흐흐.
"아니라기엔 너무 반짝거려서 눈이 부실 정도 였는 걸요. 이미 충분히 빛나는데도."
장난을 좋아하는 손이 슬쩍 올라가더니 손가락으로 그의 뺨을 간질인다. 오구오구. 이쁘기도 하지. 약간은 아이를 다루듯 그렇게 쓰다듬곤 금빛 눈이 그를 위아래로 한번 보았다. 머리, 목, 팔, 손... 기분 나쁘지 않게 휘릭 보곤 그리 중얼거렸더란다.
"목은 이미 주인이 있고, 팔 정도일까."
무슨 의미일까. 어쨌든 중얼거린 진이 무심코 아르체스의 목에 걸린 십자가 목걸이로 향했다. 허나 그 손끝이 목걸이에 닿자 움찔거리며 재빠르게 손을 거둔다. 자신도 놀랐다는 표정으로. 진에게만 느껴졌을지 모르겠으나, 목걸이에 손이 닿는 순간 따끔한 감각이 올라왔다. 무언가 반발하는 듯한.
"흠..? 정전기가 나서 놀랐네요."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 진. 그가 깊게 파고들기 전에 신경을 돌리려는 듯 그를 데리고 가까운 부스로 향했다. 간단한 수공예 악세사리 같은 것들을 파는 부스였다. 진열된 장신구들을 보며 무언가 눈에 들어오는 거 없냐고, 그리 말하며 진 자신도 이것저것 들어보고 있었더란다.
프흐흐, 작은 웃음소리가 들리자 청년은 고개를 돌려 남성을 빤히 쳐다보았다. 얄미워. 얄밉단 생각을 몇 번이나 하는건지! 뾰루퉁 나온 볼은 쉽게 사그라들줄 몰랐던게다. 아니라기엔 너무 반짝거려서 눈이 부실 정도 였는 걸요. 청년은 제 자신이 정말로 그리 눈을 반짝였는지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이어지는 뒷 말에 볼을 붉혔다.
"앗."
제 뺨을 손가락으로 간질이자 부풀린 바람이 쏙 빠져버렸다. 제 자신을 아이 다루듯 쓰다듬는 통에 눈을 깜빡였다. 볼이 붉어지진 않았겠지. 심장이 뛰는 소리는 들리지 않겠지. 입술의 안쪽 살을 잠시 자근자근 깨물던 청년은 제 자신을 부드러이 훑어보고 중얼거린 남성의 말에 시선을 내려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제 자신을 지키는 목걸이였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힘을 숨겨주는 것. 제 자신의 신앙을 지키게 해주기도 했지만. 목걸이를 향하던 남성의 손 끝이 목걸이에 닿자 그는 재빨리 손을 거두었다. 올려다보니 놀란 표정이었더라지.
정전기라니.
"으음..따가웠을텐데. 괜찮아요?"
청년은 그의 손을 감싸쥐곤 제 볼에 몇 번 부비더니 그대로 쫄래쫄래 가까운 부스를 향해 걸어갔다. 간단한 수공예 악세사리들이 참 예뻤더라지. 팔찌, 목걸이, 머리핀...아, 반지와 피어싱도 있네. 눈에 들어오는 게 없냐니. 세심히 둘러보던 청년은 문득 신기한 악세사리를 발견하였더란다.
"이건 뭐예요?"
제 자신이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팔찌와 반지를 섞은 그것을 들어올린 여성은 친절하게 설명을 시작한 터였다. 반지를 끼우고, 팔찌를 두르면 되는 것. 반지는 장미의 형태를 띄고있고, 팔찌는 꼭 줄기 같았더라지. 얇은 사슬이 그 둘을 잇고 있던 터였다.
"으음..."
수수하긴 해도 특이한 모양새라 눈에 띄긴 좋았더라지. 응. 청년은 입술 위에 검지 손가락을 올리곤 톡톡, 입술을 두들기며 고민하였다.
정전기가 올랐다는 말에 괜찮냐며 제 손을 가져가 뺨에 부비는 모습에 진은 온 머리칼이 쭈뼛 서는 것만 같았다. 이 순진무구한 행동이 어떤 충동을 불러일으키는지 그는 알고나 있을까. 짐작이나 할까. 아마 모르겠지. 그러니 저렇게 홀랑 가버리겠지. 진은 쫄래쫄래 가버린 뒷모습에 아주 잠깐 쓴 웃음을 띄웠었다. 곧 지웠지만.
부스 앞에 선 둘이 각자 이것저것 보고 있을 무렵, 옆에서 아르체스가 무언가 고른 듯 했다. 팔찌와 반지 사이를 보고 있던 진이 뭘 골랐냐며 들여다보자 팔찌와 반지가 한 세트인 특이한 장신구가 눈에 들어왔다. 장미를 모티브로 한 듯한 모양새에 어련하시겠어, 라고 생각한 진.
"아르체스는 정말 장미가 좋은가보네요. 음. 한번 걸쳐봐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고민하는 아르체스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오고, 부스의 점원으로부터 그 장신구를 받아든다. 많이 해본 듯 익숙한 손길로 그의 약지에 반지를 끼우고 사슬이 엉키지 않게 내려 팔찌를 채워준다. 하얀 피부 위에서 반짝이는 장신구는 참 잘 어울렸다. 제가 해주고도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인 진이 점원 여성을 향해 사겠다며 냉큼 돈을 내버렸다. 제멋대로인 행동이었지만 기쁘게 웃는 얼굴이 쉬이 화내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생각보다 더 잘 어울려요. 당신이 장미를 좋아하는 만큼."
그러니 화내지 말라며 그의 손을 들어올리더니 희고 가는 손가락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일부러 약지에 반지를 끼운 의미를 그는 알까. 가늘고 흰 손가락들 중에서 일부러 약지를 골랐다는 걸. 제멋대로의 행동에 볼을 붉히는 그를 보고 감히 저와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봤다는 걸. 그는 알까. 같은 마음이었으면 했다는 걸.
진은 손에 입 맞추고도 잠시 그대로 입술을 댄 채 가만히 있었다. 그리 오래는 아니었다. 한 십여초 정도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이 둘에게 얼마나 길게 느껴졌을지는, 당사자들만 아는 일이겠지. 길고도 짧은 순간이 지나고 손을 내린 진이 아래를 향한 그의 얼굴을 감싸 올렸다. 저와 마주보게끔.
"잘못한 것도 없는데 피하긴 왜 피해요. 그렇게 고개를 숙여버리면 얼굴이 안 보이는 걸."
마주보는게 제일 좋은데. 그리 말하며 웃는 진의 얼굴도 살짝은 불그스름했을지도 모르겠다. 음. 아마도.
"자, 아직 못 본 곳은 많아요. 얼른 봐야죠. 시간이 다 지나기 전에."
톡톡. 두어번 볼을 두드리고 손을 떼어 은근슬쩍 그의 허리에 감았다. 가는 허리가 팔 안에 쏙 들어올 것만 같아, 그대로 휘어감아버리고 싶었다. 아. 충동을 참아내는 건 정말이지 괴로운 일이야. 진은 그저 동행을 위한 정도로만 아르체스를 가까이 하고 남은 전시장 내부를 돌았다.
나머지 부스들에는 처음 봤던 악세사리 부스 말고도 뭔가 이것저것 많았다. 온갖 향의 향수나 향초를 내놓은 곳, 드라이 플라워로 만든 조형 같은 걸 파는 곳, 또다른 악세사리를 파는 곳. 그 중에서 진은 장미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 하나를 샀다. 마침 남성용 체인으로 나온 것이 있어서. 엄지손톱보다 크고 작은 장미 세 송이가 가시 덩쿨로 얽힌 독특한 모양새가 마음에 들었더란다. 사서 목에 걸곤 한번 내려다본 진이 아르체스를 보며 말했다.
"어쩌다보니 세트 같은 느낌이 되었네요. 당신의 팔찌랑, 이 목걸이랑."
남들이 보면 연인으로 보일까요? 웃으며 하는 말은 농담 같기도 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전시장 밖으로 나오니 정수리를 비추던 해가 은근히 기울어가고 있었다.
"벌써 해가 지나... 아, 힘들지는 않아요? 최대한 치이지 않게 하긴 했는데."
아직 못 본 곳이 있긴 했지만 피곤하다면 쉬어도 괜찮다고 말하며 아르체스의 안색을 한번 살펴보았다. 고개를 내려 시선을 맞추고,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제서야 제 약지에 반지가 끼워진 것을 눈치 챈 것이었지.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유달리 묵직하게 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볼은 복사꽃이 핀 것 마냥 발그레하게 물들어있었다. 손에 닿은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 시간은 짧았지만, 길기도 하였다.
결국 고개를 숙여버린 청년은 그가 자신의 얼굴을 감싸 올리자 옅게 물기가 어린 눈동자로 그 금빛의 눈을 응시했더란다. 슬프거나 감동한 눈은 아니었다. 그저 붉어진 볼과 함께 자연스레 나타난 그것이.
"..으응."
웃는 남성을 마주보고 그제서야 눈을 접어 웃어보인 청년은 살짝 불그르슴한 그 얼굴을 마주했다. 맞아, 아직 못 본 곳은 많았지. 고개를 수줍게 끄덕일 무렵 그가 제 볼을 두어번 두드리곤 손을 은근슬쩍 허리에 감았다.
허리에 닿은 손의 존재감은 하도 컸더라지. 악마들이 내지른 검이나 창이 허리 부근에 닿았을 순간에도 이런 기분은 나지 않았는데. 남은 전시장을 도는 것도, 자신이 걷고 있는지 기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혼미했더란다. 향수, 향초, 조형, 악세사리.. 전부 눈에 띄었지만 금세 지워지고 말았지. 남성이 산 것은 장미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였다. 꽤나 독특한 모양새였지. 그와 눈을 마주치고, 이어지는 말에 생각했다.
당신의 정체가 대체 뭐길래 나를 이렇게도 흔들어놓는가.
"...지니랑 비슷해보이니 마음에 들어요."
입술을 휘어 웃곤 그에게 은근슬쩍 달라붙었더란다. 아까의 소소한 복수와도 같았고, 얌전한 그가 내보이는 대단한 반격이기도 하였지. 전시장 밖으로 나오니 해가 뉘엿뉘엿, 저물 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힘들진 않아요."
전장에 있던 시간보다 힘든 시간은 없었으니. 청년은 그 말을 애써 삼키곤 남성을 바라보고 제 반지를 내려다보다 십자가 목걸이를 흘끔 쳐다보았다.
참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제 행동에 온전히 부끄러워 하는 듯 하면서도 이렇게 때때로 치고 들어오는게, 마냥 예쁘게 보기만도 어려워서. 그래서 더 흔들리게 되는 듯 했다. 아니, 더 흔들렸다. 아. 그만 좀 흔들어요. 이러다 일 치겠어.
"그래요? 음. 그러니 더 마음에 드네요."
저랑 비슷해보여서 마음에 든다는 말에 진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전시장을 나와 힘들진 않냐는 물음에 그가 아니라며 저는 어떻냐고 되물어오길래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카페에 종일 있는 거에 비하면 편하고 즐거워요. 무엇보다 아르체스와 함께니까."
혼자였거나 다른 사람과 함께였으면 이렇게까지 즐겁진 않았을 것이다. 애당초 오지도 않았겠지.
해가 더 저물기 전에 볼 수 있는 걸 보자며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게 달라붙는 그를 놓칠새라 단단히 붙들고, 이제는 조금 한산해진 곳들을 차례차례로 돌아다녔다. 여러 꽃들로 만든 야외 조형물이나 곳곳에 핀 꽃들을 지나치며, 때로는 멈춰서 보기도 하며 그렇게 남은 곳들을 만끽했다. 둘이서.
다니는 동안 진이 아무것도 안 하진 않았다. 때때로 손을 잡아다 제 입술에 대거나, 무언가 멍하니 보고 있을 때 뺨을 톡 건드리거나. 사람이 갑자기 몰리는 곳에선 은근슬쩍 제 품안에 폭 감싸기도 하면서 아슬아슬하게 장난과 진심 사이를 오갔다. 그러다 반격해오기도 하면 얼굴이 붉어지는 둥 하기도 하고.
한정된 곳이라고는 하나 제법 넓은 곳을 돌아다니다보니 두어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저물어가던 해는 어느새 꼴딱 넘어가고 하늘은 은은히 어두워지던 무렵, 축제장 내를 울리는 방송이 있었다.
[잠시 후 축제 개막 기념 불꽃놀이가 있을 예정이오니, 관람하실 분들은 호수가에 설치된 무대로 오시면 됩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잠시 후 축제 개막...]
"불꽃놀이를 하려나보네요. 쉴 겸 보러 갈까요?"
방송을 들은 진이 아르체스를 보며 물었다. 물으나마나 보고싶어하겠지. 속으로만 생각하며 싱긋 웃었더란다.
"별로면 그냥 나가구요. 어떡할까요?"
괜히 안 해도 될 말 한마디를 덧붙이곤 또다시 손끝으로 그의 코끝을 톡 건드렸다. 어떡할래요. 응? 그리 말하는 듯한 금빛 눈이 장난스럽게 반짝이고 있었다.
대담한 행동이다. 적어도 제 자신이 생각하기엔 나름 큰 용기를 낸 반격이었지. 청년은 남성에게 꼬옥 달라붙어선 더 마음에 든다는 말에 수줍게 눈을 휘었다. 전시장을 나오고나서 이어지는 말엔. 오, 청년은 또다시 생각했다. 얄밉고도 얄미운 사람. 언제까지 제 자신을 이리 흔들어댈 생각인건지! 말 없이 제 허리를 잡은 손에 조용히 제 손을 포개어 올렸다.
"...기쁘네요."
겨우 내뱉는 말 한마디가 이리도 무거웠던지. 기쁘다는 것이 사실임에도 막상 내뱉기엔 큰 용기가 필요했다. 전장에서도 이정도는 아니었는데. 아, 당신. 대체 나에게 왜 이러나요. 왜 나를 이리 부끄럼 많은 아이처럼 만드나요. 해가 지기 전,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 청년은 사람들이 조금 빠졌음을 알면서도 그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러 꽃들로 만든 야외 조형물, 곳곳에 핀 꽃. 멈춰서 볼 때 즈음 청년은 핸드폰을 꺼내 멈춰선 남성을 살풋 찍기도 하였다. 그리곤 "꽃이랑 지니랑 정말 잘 어울려요." 라고 말하기도 하였지.
다니는 동안 그가 제 손을 잡아 입술을 대거나, 꽃에 정신이 팔릴 무렵 제 뺨을 톡 건드리거나,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에선 은근슬쩍 품 안에 자신을 감싸는 터라 정신이 아득하였다. 정신을 겨우 차리고 용기를 내어 그가 제 자신을 품 안에 감쌀 무렵 품 속으로 파고들어보기도 하고, 그의 팔을 꾹 끌어안고 제가 먼저 이끌어보기도 했다.
두어시간이 지나고 해는 어느새 저물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선명하지만 어딘가 지직거리듯 먹먹하게 들리는 안내 방송에 귀를 기울인 청년은 남성을 올려다보며 그의 질문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불꽃놀이. 인간계에 있으면서도 보기 어려웠던 것.
"보러가요..!"
손가락으로 제 코 끝을 톡 건드리자 그는 눈을 깜빡였다. 장난스레 반짝이는 눈동자를 마주하니 뭔가 또, 간질간질하게 올라오는 기분과 얄미움을 어찌 설명해야할지.
끄덕끄덕. 위아래로 끄덕이는 고개가 아이 같다. 기대감에 찬 투명한 두 눈도. 행여나 진이 정말로 그냥 가자고 할까봐 물끄러미 마주봐오는 모습을 보니 이거 참, 웃음이 안 나오고 베길 수가 있나.
"알았어요. 그렇게 보고 싶어하니 봐야겠네요."
한번 그냥 가자고 하면 어떤 반응일까 궁금하긴 했지만 괜한 짓은 안 하기로 한다. 말장난 한번이면 충분하지. 다시 한번 코끝을 톡톡 건드리는 걸로 대신하고 그에게 제 팔을 둘렀다. 몇 번 했더니 이젠 그냥 자연스럽게 손잡기가 아닌 팔두르기가 되어버려서.
방송을 들은 인파가 한 곳으로 몰리는 걸 보니 그들이 가는 쪽에 방송에서 나온 무대가 있다 싶었다. 저도 그 쪽으로 가려고 발길을 돌린 진. 잠시 우뚝 멈춰 서서 무언가 생각하더니 아르체스를 데리고 인파와 반대인 쪽으로 가기 시작했더란다.
"저기보다 괜찮을만한 곳이 생각나서요. 자, 저 놓치면 안 돼요?"
진이 가려는 방향은 사람들과 반대였기에 그 사이를 거슬러 가야만 했다. 행여나 그를 놓칠까보아 제 팔 안에 가두듯 감싸고서 그에게 무리가 가지 않도록 천천히 그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간다. 그를 챙기느라 정작 진 자신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부딪히고 막히거나 했지만, 그럴 때마다 괜찮다는 듯 웃어보일 뿐이었다.
얼마나 갔을까. 몰리던 사람들에게서 겨우 벗어나 조금 더 가니 벤치 몇 개와 가로등만이 덩그러니 있는 쉼터가 나왔다. 축제장 자체가 호수를 중심으로 한 곳이라 그런지 쉼터 역시 호숫가였다. 저 멀리 설치된 무대가 보이는, 인적 따위 느껴지지 않는.
"무대 쪽으로 갔다간 사람들에 치여 잘 보지도 못 할 것 같아서요. 무대가 보이는 곳이면 불꽃 놀이도 잘 보일 것 같아서."
생각만큼 잘 보였으면 좋겠다고 말한 진. 인파를 헤쳐온 탓인지 조금 지쳐보였지만 내색하지 않고 웃는 얼굴로 아르체스를 보았다.
알았어요, 그렇게 보고 싶어하니 봐야겠네요. 남성의 목소리에 청년은 내색하지 않으려 하며 애써 기쁜 마음을 감추려 했다. 눈빛은 쉬이 가릴 수 없는지 눈동자가 빛났더라지. 사진으로만 본 불꽃놀이. 과연 어떨지 궁금해 하는 것이겠지. 천계에선 화려함은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었다. 예복과 장미를 제외하면... 음, 더 있었나. 화려한 것. 자신은 천계에 있었음에도 천계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 더욱 많았다. 전장에 있던 시간이 더 많았고, 갇힌 공간에서 생활하며 그곳에서 오로지 악마와 맞서 싸우기 위해서만 자랄 운명이었으니.
유감스럽지만 네 부모는 악마에 의해 죽었단다, 아드리엘. 그 장면을 너도 보았겠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하지만 너는 안전한 곳에서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릴 성격은 아니구나. 나를 따라오지 않으련. 내가 너에게 내 모든것을 가르쳐주고 전수해주마. 어찌 네 이름을 알고 너를 거두냐고? 소개가 늦었구나. 나는 신의 뜻을 따르는-
"..아."
저에게 팔을 두르는 남성에게 슬쩍 기대곤 청년은 눈을 깜빡였다. 좋지 않은 기억을 왜 하필 지금 떠올렸는지. 불꽃놀이를 생각하며 기운을 차린 청년은 괜히 남성에게 볼을 부볐다. 따스한 체온이 좋았더란다. 인파가 한 곳으로 몰리는 것을 흘끔 보며 무대가 있을 쪽으로 가야하는건가, 생각하던 도중 그가 자신을 데리고 인파와 반대인 쪽으로 가기 시작하자 의아한 표정으로 남성을 흘끔 올려다보았다.
"...응, 절대 안 놓쳐요."
사람들이 몰리는 방향과는 정 반대였기에 그 사이를 거슬러 가는 것이 힘들었더라지. 제 자신을 팔 안에 가두듯 감싼 남성은 사람들의 사이를 빠져나갔다. 흘끔흘끔 올려다보는 남성이 부딪히고 막히는 것에 잠시 왜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친절을 베푸는가, 라고 생각하다가도 이내 눈을 나지막히 내리깔고 말 없이 그의 팔을 두 손으로 끌어안았다. 사람들을 빠져나가고 보니 벤치 몇 개와 가로등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쉼터가 보였다. 흘끔 눈을 굴리니 저 멀리 무대가 보였고, 인적은 없었다.
"으응, 여기라면 잘 보일거예요. 지니는 이런 지리도 밝아서 부럽네요."
조금 지쳐보이는 모습에 청년은 걱정어린 시선으로 남성을 바라보다가도, 그가 호숫가의 아담한 벤치로 자신을 이끌자 그를 따라가며 예의 그 도톰한 입술을 오물거리는 터였다.
"....괜찮아요?"
저 때문에 무리하시는 것 같은데. 청년은 작게 덧붙이며 벤치에 조심스레 앉곤 남성의 옆에 기대었다. 그 짧은 시간동안, 어느새 그는 이렇게 달라붙는 것에 길들여지고 말았다. 눈을 나지막히 깜빡이던 청년은 흘끔 불꽃놀이의 무대가 있는 부분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날은 어느새 어두워진 참이었다.
타고난 힘을 쓰지 않고, 몸 만으로 인파를 빠져나오는 건 생각보다 귀찮은 일이었다. 아. 귀찮달까 쓸데없는 심력 소모가 있었다. 원래 같았으면 다 썰어버리고 지나갔을텐데. 지금은 혼자도 아니고 여긴 마계도 아니었으니. 인간인 척 하는 것도 참 귀찮구나.
벤치에 앉아 한 숨 돌리고 있으니 옆에서 괜찮느냐고 물어오는 목소리가 있다. 제가 끌어당기지 않아도 자연스레 제게 기대는 그 모습에 쿡, 짧은 웃음을 흘린 진. 그가 편히 기댈 수 있게 몸을 움직여주며 슬쩍 팔을 둘러 안았다.
"괜찮아요."
당신만 괜찮다면 다 괜찮아. 작게 중얼거리며 제게 기댄 그의 머리에 잠시 뺨을 대었다. 진도 그에게 기대어 그렇게 제 피곤함을 잊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지. 이제 시작하려나보다는 말에 눈을 뜨고 고개를 드니 캄캄해진 하늘이 보인다. 무대 쪽에서 무언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난다 싶다가 핑- 하고 쏘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높게 하늘로 올라가더니 이내 펑 하며 커다랗고 반짝이는 불꽃이 되어 터졌다. 그게 시작이었다.
"..와...."
진도 불꽃을 직접 보기는 처음이었다. 크고 환했던 그 하나를 시작으로 연달아 터져가며 검푸른 하늘을 수놓는 불꽃들을 보며 잠시 넋을 잃었다. 넋 놓고 보는 동안에는 제가 본디 누구인지도, 여기가 어디인지도 잊은 채 그저 불꽃에만 온 정신이 쏠려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옆의 기척을 느끼고 정신을 찾았지만.
"정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멋지네요..."
어떠냐고 물을 것도 없어서, 그저 그렇게만 말하고 아르체스를 좀 더 끌어안았다. 그때만큼은 진의 얼굴도 기쁨, 혹은 아련함이 뒤섞인 얼굴로 그저 불꽃들이 터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짧은 웃음소리가 지나가고 남성은 자신이 편히 기댈 수 있도록 몸을 움직이곤 팔을 둘러 저를 안았다. 청년은 이제 익숙하다는 듯 입술을 휘어 웃어보였다. 그가 저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이젠 퍽이나 익숙한 터였지. 어째서인지 편하였더란다. 그러면서도 가끔가다간 의문이 들기도 하였지. 자신이 괜찮다면 다 괜찮다는 작은 중얼거림이 들리고, 그는 제 머리에 뺨을 대었다. 청년은 말 없이 눈을 느긋하게 깜빡였다.
"...다행이에요."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쏘아올려지는 불꽃을 바라보면서도, 청년은 말 없이 그것을 바라보며 감탄사도,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커다랗고 환했던 하나는 널리 퍼져나가고, 연달아 터지기 시작하는 그것은 하늘을 수놓아 별을 가렸다. 별 보다 더욱 환한 것이었다. 아름답고, 그것이 끔찍하리만큼 빛이 나서.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인공적인 별들은 사그라들었다.
문득 옆의 남성을 쳐다보니, 그는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더라지. 기쁨, 아련함이 뒤섞인 얼굴로 제 자신을 좀 더 끌어안는 남성을 바라보던 청년은 제 혀를 자근 씹었다. 불빛에 언뜻언뜻, 온전한 모습이 비춰지는 당신이 더 멋지다는 말을 꺼내면 웃기겠지. "그렇네요. 정말 멋져요." 라고 덧붙이며 청년은 남성에게 온전히 기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수놓는 불꽃들이 아름답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지만, 제 옆에 존재하는 사람에 비하면 별 거 아니다. 라고 생각하던 청년은 제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깨닫곤 한 손을 들어 제 목걸이를 꾹 쥐었다. 불꽃이 아름다웠다. 수없이 터져가던 불꽃을 바라보기만 하던 청년이, 불꽃들의 소리가 잠잠해지고 점점 희미해지는 마지막 순간을 바라보곤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기뻐요."
당신과 이런 순간을 함께해서. 청년은 그리 말하곤 눈을 낮게 내리깔았다. 호수의 잔잔한 물결에, 마지막으로 화려하게 터지며 사그라드는 불꽃이 보였다.
이 순간 만큼은 제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불꽃을 수놓는 남성을 멍하니 바라보던 청년은 고개를 떨궜다. 호수에 비치는 잔잔한 물결 사이로 보이던 그것은 사그라드는 불꽃이었고, 청년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와 함께 하는 이 순간이 기뻤다. 아무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그 자신만큼은 이해할 수 있을 감정이었다. 혼자 떠안고 가야 할 것 같은 감정. 감히 천사가 자신의 임무를 내려놓는. 청년은 제 입술 속 살을 자근자근 깨물었다.
이 남자와 함께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청년은 남성의 목소리에도 호수를 바라보다가, 남성이 제 턱을 잡아 들어올리고 그 눈을 똑바로 마주보자 그제서야 채도가 낮은 눈으로 황금같은 두 눈을 마주했다. 황금같은, 그 눈동자는 탐욕과도 같은 무언가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적어도, 청년이 보기엔 그런 것이었다. 쉬이 사라지지 않을 그것은. 처음 마주하는 그것에 어찌 반응해야할지 몰라하던 청년은 제 이름을 낮게 부르는 소리에 눈을 깜빡이려다, 자신의 입술을 거칠게 덮는 그의 입술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읏.."
거칠게 덮은 다음, 부드럽게 파고드는 터라.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한 감정들이 요동치며 제 마음속을 헤집어갔다. 머릿속에서 불꽃놀이가 터지는 기분이었다. 가까이서 불꽃놀이를 보듯 귀가 먹먹해지는 느낌이었다. 자신을 완전히 품 속에 가두는 남성이 상냥하기 그지 없었다. 황홀한 감정이 떨어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두 눈을 감은 청년은 남성이 아까 전 하였던 질문에 대답하듯 두 팔을 올려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지금은 모든것을 내려두고 싶었다. 오로지 그와 단 둘이서 있다는 행복을 느끼고 싶었다.
보드라운 입술 사이로 파고들며 제가 미쳤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저는 본디 미친 존재가 아니던가. 유해하고 해악적인 존재이지 않은가.
당신도 그런가요. 그 질문에 답하듯 목에 둘러지고 어깨에 얹어지는 팔에 진은 좀더 가깝게 그를 끌어안았다. 더는 가까울래야 가까울 수 없을 정도로 저와 그의 거리를 좁히고 겹쳐진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제가 파고드는 만큼 뒤로 젖혀지는 여린 목을 큼직한 손으로 받치고, 깊숙히도 혀를 밀어넣었다.
"......"
그대로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축제의 폐장을 알리는 음악에 겨우 둘의 입술이 떨어졌다. 아쉽게 입술을 떼며 가볍게 감겨있던 눈커풀이 들어올려지자 그 뒤에 숨어있던 금빛이 다시 일렁거리며 드러났다. 그 두 눈은 완연히 애정의 빛을 담고 품안의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돌아갈 시간이네요. 이제."
몇 초간 바라만 보다가 한 말은 그것 뿐이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입맞춤을 나눴다기엔 너무 담백한 말이어서, 어쩌면 진이 야속해보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게 의도된 것일지도 모르지만.
"입구 닫히기 전에 나가야죠. 자, 어서."
진은 선뜻 먼저 일어나 아르체스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열기가 한김 식은 얼굴로 산뜻하게 웃으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제 입술 사이로 파고들고, 입 속을 휘젓는 감각에 청년은 제 자신이 이대로라면 녹아내리지 않을까, 생각하며 남성을 더욱 강하게 끌어 안았다. 더는 가까울래야 가까울 수 없는 거리까지 달라붙고 말았다.
온 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깊숙하게 들어오는 혀를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에 어찌 대응해야 하는지는 모르는 것 같았지만. 제 목을 받치는 큼직한 손이 그리도 따스할 수 없었다. 그가 닿는 모든 곳이 화끈거렸거늘. 이젠 온 몸이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천사의 성스러움? 그런 건 이미 내쳐버린지 오래였다. 그래, 내쳐버린지 오래였다.
당신이 곁에 있다면, 제 자신은 무엇이라도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았더라지. 설령 대천사장의 후보에서 제외된다고 하여도. 당신이 자신의 곁에만 있더라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청년은 겨우 떨어지는 입술 사이로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며 눈을 천천히 떴다. 볼가도, 눈가도 붉어져선 열기로 인해 물기어린 두 눈동자로 금빛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청년은 붉어진 입술을 휘어 웃었다. 애정의 빛이 보였다. 그 또한 애정의 빛이 완연한 터였다.
".....으응."
돌아갈 시간이지. 야속하게 내뱉는 말에 청년은 아쉽게 눈을 깜빡였다. 선뜻 먼저 일어나 자신의 손을 잡고 일으키는 터라, 청년은 그를 바라보고 두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버리면 이 모든 일이 꿈일까, 두려웠지만 그런 일은 없었던 터였다.
"..있잖아요, 지니."
청년은 자신이 손을 잡은, 저에게 새로운 감정을 알려준 남성의 팔에 머리를 기대며 나지막히 속삭이곤 잡은 손에 옅게 힘을 주었다.
진한 스킨쉽을 나눈 후였으니 뭔가 간질간질한 말이 오갈법도 하건만, 진의 태도는 담담하고 이전과 같았다. 야속할 정도의 모습. 그러나 진의 태도와 반대로 아르체스가 손을 잡아오며 그 말을 꺼냈을 때는 누가 그의 얼굴에 붉은 물감을 칠한 것 마냥 화악 붉어졌다. 귀끝까지 붉어져서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하. 정말이지..."
가려던 걸음조차 우뚝 멈춰서서 얼굴을 한번 쓸어내린다. 아르체스에게는 등을 보인 채로 뭔가 고민하듯 한동안 서 있다가 일단 나가자며 다시 걸음을 떼는 진이었다.
"일단, 일단은 나가죠. 시간 없으니까."
그렇게 걸어 나오니 나가는 인파가 또 몰리더라. 어쩔까 하다가 잡은 손을 당겨 제 팔 안에 그를 품었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조금 어색한 건 기분 탓이 아니리라. 분명 단단히 감싸안고 챙기는데, 얼굴을 보려하지 않는다던가 그가 품 안에서 움직일 때마다 움찔거린다던가.
"그...조심해요. 다치지 않게."
그 말을 끝으로 사람들 사이에 섞여들었다. 그 때만큼은 다른 생각 없이 그와 무사히 나가는 것만 생각했다. 괜히 딴 생각 하다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길까봐.
느릿한 인파를 따라 나오니 시간이 또 제법 흘러있었다. 어둡던 하늘엔 달이 휘영청 떠 있었고, 밤공기는 살짝 쌀쌀했다. 한적한 곳으로 나와 슬쩍 그를 내려다본 진. 제 자켓을 벗어 어깨에 걸쳐주며 말했다.
담담하고 이전과 같은 태도가 야속해보였다. 자신을 녹여버릴 작정을 했던 남자가 어찌 저렇게 태연할 수 있는지. 제 자신이 손을 잡고 제 마음을 속삭이자 그의 뒷 모습이 우뚝 멈춰서버렸다.
"....."
머리카락 틈으로 슬쩍 보이는 귀가 붉은 듯 싶어보였다.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리는 모습을 바라보던 청년은 조용히 남성을 기다렸다. 한참동안 무언가를 고민하듯 멈추던 남성은 이내 일단 나가자는 말을 건네곤 걸음을 떼었다.
시간이 없었지. 대답 없이 남성을 따라 걸어 나오니 인파가 또 몰리는 참이었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정신이 없는 통에, 방금 전 조용했던 순간은 어디로 갔나 싶을 정도였다. 잡힌 손에서 누군가 당기는 힘이 느껴지고, 청년은 그대로 남성의 품에 갇히고 말았다.
가는 길이 어색하다. 왜이리 어색하지. 자신을 단단히 감싸안고 챙기면서도 제 얼굴을 보려 하지 않고 품 안에서 움직이자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지는 터였다. 청년은 조심스레 제 입술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톡톡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지그시 누르는 터였다. 순간적인 충동이 아니었기를 바랄 뿐이었다. 야속하게도.
"..무리하지 말아요."
인파에 섞여들어가며 청년은 중얼거렸다. 문득 인파에 섞여 긴 목걸이가 저 멀리로 딸려나갈 뻔 하자, 청년은 눈에 띌 정도로 크게 동요하며 그것을 겨우 사수하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당황스럽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말아먹을 뻔 하다니.
인파를 헤치고 나오니 시간이 제법 흘러있었다. 어느새 하늘엔 달이 뜨고, 밤을 알리듯 공기가 조금은 쌀쌀했다. 한적한 곳으로 나오자 남성은 제 자신에게 자켓을 걸쳐주고 그제서야 자신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
데려다주겠다 말한 남성의 얼굴은 붉은 기가 남아있었다. 청년은 말 없이 제 집이 있을 곳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그곳을 가리켰고, 조용히 조곤거렸다.
"그리 멀지는 않아요."
다행히도. 혹은 불행히도. 청년은 입술을 휘어 웃었다. 청년의 집은, 1층엔 사람이나 방이 존재하지 않고 계단으로 올라가면 마을의 전경이 보이는 작은 집이었다.
사람들 사이를 헤쳐왔더니 조금 피곤하네요. 청년은 그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다정하고 부드러운 손길에 얌전히 기대어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시끌벅적하고 사람들이 많던 축제장과 지금의 장소는 너무나도 다르다. 익숙해져버린 탓인가, 밤거리가 낯설기까지 한 기분에 흘끔 위를 올려다보니 만월이었다. 청년은 만월을 눈에 담곤 남성을 흘끔 바라보았다. 밤하늘과 같은 머리가 월광에 비추어졌고, 드는 느낌은 어째서 기시감이었나.
"....."
아드리엘, 지금 퇴각하지 않으면 전멸할게 분명합니다!! 절대, 절대 용서 못해!! 아아악!
청년의 두 눈동자가 바르르 떨렸다. 왜 이런 기억이 스치고 그대에게 오싹한 기시감이 들었는가. 아니야. 아니다. 지쳐서 그런 것이겠지. 천천히 한 걸음, 두 걸음을 걷다가도 남성의 목소리에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 응. 즐거웠지요. 당신도 처음이었고, 피곤했고... 응.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어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이 느껴졌다.
"...."
말이 수그러들자 청년은 눈을 깜빡였다. 달아오른 얼굴과 미묘한 표정. 말 없이 걸음을 옮기는 남성에게서 시선을 뗀 청년은 입꼬리를 잔잔하게 올려내었다.
"저도 즐거웠어요. 혼자 왔더라면 절대 이렇게 즐기진 못했겠지요."
제 팔찌를 바라보며 일부러 남성을 피했다. 얄밉다기보단 수줍어보여서. 청년은 눈을 깜빡이곤 가까워지는 듯한 집을 바라보다, 남성을 바라보았다.
인간계에 내려와 연애를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마계에 있을 때에도 연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가슴이 뛰고 왜인지 조심스러워지는 연애는 처음이었다. 이렇게나 벅찬 감정에 섣불리 말하기조차 어려운 연애는 정말, 처음이었다.
진의 말이 사그라들자 그 뒤를 잇듯 아르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즐거움에 대한 공감, 혼자였다면 절대 이러지 않았을거란 그 말. 말도 목소리도 무엇 하나 자극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당장 손을 얹은 것부터가 온통 신경쓰이는데 거기에 그런 말까지 해버리면, 정말이지.
"....흐-"
마지막 불꽃보다 당신이 더 화려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걸음마저 무의식 중에 멈출 정도로. 아까 그러했듯 우뚝 멈춰선 진은 한 손으로 제 얼굴 한쪽을 감쌌다. 잔뜩 붉어져 뜨거워진 얼굴이 손바닥에 닿는다. 여태 이런 적이 한번이라도 있던가. 아니, 단언컨데 없었다. 악마일 적에도, 인간일 적에도.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이지... 손으로 입가를 누른 채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들렸을지 안 들렸을지는 상관없었다. 진은 그에게 둘렀던 팔을 거두며 그를 저와 마주보게 돌려세웠다. 당장이라도 숨기고 싶은 새빨간 얼굴로 그를 마주보며 조금 떨리는 목소리가 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 그러니까, 아, 머릿속에 말은 정말 많은데 뭐라고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아까의 대답만 할게요. 아르체스. 저도 당신이 좋아요. 처음 카페에서 봤을 때부터, 반했던 거 같아요. 아니 반했어요. 정말 좋아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진은 그 다음을 쉬이 잇지 못 했다. 말은 이미 목 끝까지 걸려 있었는데 나오질 않았다. 애타는 듯한 눈으로 아르체스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다가 결국은-
한발 뒤로 물러섰다. 그에게서 물러서서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말을 내뱉었다.
"..카페에서, 기다릴게요. ...그럼 다음에."
어물어물 말을 하곤 진 답지 않게 그 자리에서 도망쳐 버렸다. 그에게 둘러준 자켓을 그대로 둔 채 황급히 몸을 돌려 그를 두고 혼자 가버렸다. 미처 잡을 새도 주지 않고.
새카만 밤거리를 달리는 진의 얼굴은 붉었으니 괴로워보였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워보였다.
남성이 자신에게 고백을 한 이후로 며칠이 지났을까. 청년은 카페에서 기다리겠다는 남성의 말에도 카페로 쉬이 가지 못하였다.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일 때문에 바쁜 것도 있지만 역시 그 또한 확신이 서지 못한 것이지. 자신이 정말 가도 괜찮은 것인지 머뭇거리는 것에 더욱 가까웠다. 청년은 키보드에서 손을 떼곤 두 눈을 깜빡였다. 이틀 연속으로 밤을 새자니 뭐라고 쓰여있는지 눈 앞이 흐릴 지경이다. 청년은 책상에 고개를 박고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지금 청년이 서 있는 장소는 전장 한복판이었다. 천계로 쳐들어오는 일이 질리지도 않는지. 소수의 인원으로 편성되어 배치받은 장소에선 아니나 다를까, 다른 길을 생각하고 자신들이 있는 장소로 악마들이 오고 있었다. 청년은 공중에서 악마들을 바라보다가도, 검을 들어 외쳤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우리는 죽는 것이 아니라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 뿐이다!!"
청년은 전장으로 뛰쳐들었다. 그의 뒤를 따라 여러명의 천사들이 청년을 따라 악마에게 제각기 칼을 내질렀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튀고 깃털이 붉게 물들었다. 제 자신이 네다섯의 악마를 베어 넘길 때 즈음. 청년의 두 눈동자가 수축했다. 붉은 날개 사이로 한 악마가 보였다. 악명이 자자한 자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악마를 가볍게 칼로 찌르며 발로 걷어찬 청년은 악마가 있는 곳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제 자신과 함께 싸우던 자들이 무참히 쓰러져갔다. 그 중엔 어린 소년을 거두었던..
"...형님?"
형님마저. 쓰러지는 익숙한 인영 사이로 푸른 머리카락이 넘실 거렸다. 그리도 증오스러울 수 없었다. 자신의 주변에서 흉흉한 소문과 함께 악명을 널리 떨치던 자가 제 눈앞에서. 검을 쥔 손이 떨리는 것을 숨겼다. 침착하게 있지를 못한 터였다. 청년은 당장에라도 칼을 내지르기 위해 악마를 향해 뛰쳐들었으나 누군가 청년을 붙잡았다.
"아드리엘, 지금 퇴각하지 않으면 전멸할게 분명합니다!!"
익숙한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들리지 않았다. 시선은 쓰러진 천사를 향하고 있었고, 청년은 이성을 잃고 악을 쓰며 끌려갔다. 버둥거리는 터라 한 명의 천사가 그에게 더 달라붙었다. 내 기필코 저것을 죽일것이다. 저 자를 죽여 복수하리라. 신이 허락하셨다. 신께서, 신께서- 청년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절대, 절대 용서 못해!! 아아악!"
청년은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때의 일을 꿈으로 꾸고 말았다.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기억을 되내이고 말았다. 짙게 깔린 어둠이 방 안에 만연했다. 만월조차 지고 난 터라 달빛이 사그라든지 오래였다. 청년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책상에서 뛰쳐나가 집 밖을 나섰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노트북의 화면이 깜빡이곤 내용이 어둠속에서 보였다.
[...신께서 검을 내지르는 것을 허용한 것이 아니었다. 그건 내 복수심이고, 신은 그를 죽이는 것을 허하지 아니하셨다. 내 신념은 크게 흔들리고 말았다. 나는 그 악마가 아닌 천계의 전장에 어린 나이에 뛰쳐든 소년병을 무참히 베었다. 그것으로 그 자가 분노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내 기분을 느끼길 바라고 검을 내질렀으나 돌아오는 것은 끝없는 죄책감이었다.]
이 장소로 뛰어가면, 이 장소로 뛰어가면 해를 볼 수 있다. 어둠을 물리칠 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청년은 잔뜩 패닉에 질린 모습으로 뛰다가도, 어느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길을 잃고 말았다. 가로등도, 사람도 없는 어둠에 갇히고 말았다.
축제를 다녀온 날 이후로 며칠이 흘렀다. 그 며칠간 진은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카페를 운영했으나 아주 조금 다른 것이 있었다. 매일 카페 문을 열 땐 기대에 차 있다가도 카페를 닫을 즈음엔 시무룩해지는 것이었다. 왜인지는 분명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오질 않으니까.
"그 분 오늘도 안 오시네요-"
그런 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바가 태평히 중얼거린 말에 진이 움찔했다. 그 날 그렇게 피해서는 안 되었던 건데. 그러면 안 되었는데.
"......"
후회를 휘감은 하루가 또 지나가고 밤이 찾아왔다. 알바도 퇴근하고 카페도 마감한 진은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밖으로 향했다. 달조차 모습을 감춘 그믐의 밤은 그야말로 어둠 그 자체였다.
정처없이 거리를 걷던 진. 생각 없이 걸어가다가 불쾌한 기운을 느끼고 말았다. 모를래야 모를 수 없는 악마 특유의 기운. 힐끗 시선을 드니 어두운 밤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인영 둘이 보인다. 함께 전장에 섰던 것도 같은 악마들이었다. 그들은 정확히 진의 앞에 내려섰다. 기운이나 날개를 감출 생각도 없이 당당한 둘은 진에게 이만 돌아올 것을 권했다. 다시 한번 그 악명을 전장에서 떨쳐달라고. 이런 미적지근한 인간계 따위에 머무르지 말고 돌아오라고.
"...글쎄. 지금의 내겐 이곳이 더 좋아서 말야. 그러니 곱게 가주지 않겠어?"
진의 정중한 거절에도 그들은 아랑곳않고 억지로라도 데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의 시도는 무참히 실패했다. 오히려 진을 잡으려던 두 팔을 잘리고 날개까지 꺾일 뻔 했다. 두려움이 물러난 그들이 진을 보았을 때 마주한 것은 흉흉한 역광의 금빛 두 눈과 두 쌍의 거대한 날개였다.
"꺼져."
단 한마디에 악마들은 정신이 빠져라 도망쳤다. 진은 어둠 속으로 달아나는 그들을 구태여 잡지 않았다. 쫓지 않으며, 그들의 피를 뒤집어 쓴 채 거기에 있었다. 얼마나 있었을까. 어느 순간 어느 때에 그가 나타났다. 인간의 모습을 벗은 진의 앞에 새하얀 머리칼의 그가 나타났다. 잔뜩 질린 모습으로. 당장이라도 안아 달래주고픈 모습으로.
"...어째서 당신이, 여기에."
크게 뜨인 두 눈이 사정없이 떨렸다. 반사적으로 그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붉게 물든 제 손을 보고 뒤로 물렀다. 아직 진은 그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가 저를 알아보기 전에 모습을 감추려고 했다. 어서 사라지면 되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서늘한 공기가 여느때와는 달랐다. 피비린내. 어째서? 청년은 맥없이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보인것이 한없이 익숙한 모습인지라. 청년의 두 눈동자가 떨리다 못해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흐윽. 흐느끼는듯한 그 소리가 두려움에 젖은 것과 마냥 비슷했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오르고 말았다. 그래, 자신은 악마를 잡기 위해 이곳으로 내려왔지. 눈 앞의 악마는 피를 뒤집어 쓴 채 서 있었다. 누구의 피인가? 주변엔 죽은 시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문득 청년의 귓가에, 한 목소리가 파고 들었다.
..어째서 당신이, 여기에?
자신을 아는 것인가. 각종 공포에 젖었던 청년의 정신이 한 순간에 돌아왔다. 아드리엘임을 아는 악마인가? 아니면..
아르체스임을 아는 악마인가.
공포에 질린듯한 모습을 지녔던 청년의 두 눈이 악마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겁에 질린 토끼와 같던 모습과는 달리 이질적이었다. 겨우 용기를 낸 것과도 같았다. 청년의 두 눈동자가 눈에 띄게 동요했다.
익숙한 푸른 머리. 하지만, 어디에서 보았지?
악마가 제 자신을 향해 손을 뼏자 반사적으로 제 목걸이에 달린 십자가를 쥐었다. 손을 뒤로 무르자 의아한 눈으로 악마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어째서 나에게. ...나를 인간으로 아는 건가요. 당신은 인간은 죽이지 않고 천사는 찢어버리던건가요.
네놈은 그런 존재인건가?
모습을 감추려는 듯 하는 낌새가 보이자 청년은 소리없이 제 입술 속의 살을 깨물었다. 놓치면 안 돼. 놓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 하지만 악마잖아. 어떻게..어떻게...
"가지 말아요."
청년은 물기어린 목소리로 악마를 불렀다. 제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목소리에 그 자신도 놀라고 말았지만. 그는 악마보다 더 잔인한 천사였다. 인간의 흉내를 내는. 그런 존재였다.
모습을 감추려 한두발짝 물러섰을 무렵 그의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가지 말아요. 물기 어린 목소리는 쉬이 떨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부름 따위, 아니, 모습을 보고 동요하는 일 따위 없었을 텐데. 그래서 이렇게 멍청히 서서 말문이 막히는 일도 없었을 텐데.
"......"
그는 물었다. 왜 당신이 익숙하느냐고. 어째서냐고. 그 말에 진은 더더욱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애꿎은 입술만 짓씹으며 시선을 돌리다가, 그의 손이 가슴께의 목걸이를 쥐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손에 차고 있는 팔찌와 반지도. 그것을 보며 진도 무의식중에 제 가슴팍에 늘어져있던 목걸이를 손으로 짚었다. 그 날 같이 샀던 세트와 같은 장미 목걸이. 움켜쥐자 장식으로 달린 가시가 손바닥을 찔러왔다. 그게 아파서 진은 표정을 일그러뜨렸고, 그 상태로 말했다. 겨우, 겨우 꺼낸 말은-
"어째서냐니. 그건 당신이 더 잘 알지 않겠어? 이 내가 그런 하찮은 질문에 일일히 답해줄 줄 알았나?"
평소의 다정함은 1도 찾아볼 수 없는 무례함과 거친 말투. 그것은 조금 전 저를 찾아온 악마들을 대할 때와 비슷했으나 같지는 않았다. 진으로서는 억지로 만들어내는 중이었다. 그가 저를 무서워 하도록. 더 잡지 않도록. 거칠게 말하고 등에 돋아난 날개를 일부러 활짝 펼쳤다. 천마계를 통틀어 가장 크고 위압적이라고 말이 자자했던 날개를 지금 고작 인간 하나를 위협하기 위해 펼치고 있었다. 사실은 그러고 싶지 않으면서, 당장 날개 따위 접어버리고 그를 끌어안고 싶으면서.
"어이, 인간. 나는 지금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아. 한번만 더 헛소리를 지껄였다간 그 가는 목을 부러뜨려버리겠어. 그러니 썩 꺼져."
손이 새하얘지도록 목걸이를 쥐고 그만큼 인상을 구긴 채 하는 말은 정말 짜증이 나서 하는 말 같았다. 본심은 괴롭고 괴로워 제가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으면서도. 그래. 악마는 너무도 유약했다. 저 앙큼한 천사와 달리. 악마라는 존재에 어울리지 않게.
익숙했다. 그래, 지독하리만큼 괴로운 악몽의 주인공을 눈 앞에서 만났으니 당연하지. 하지만, 왜 그런 익숙함이 아닌거지? 청년은 입술을 짓씹는 악마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의 손이 가슴팍으로 향한다. 아닐것이라 생각하며, 청년은 모든것을 부정했다. 보고 말았다. 못 본척을 하며, 겁에 질린 모습으로. 청년은 말 없이 악마를 쳐다보았다. 일그러뜨리는 표정을 보고 볼 살을 자근자근 깨물었다.
"......"
악마는, 무례하고 거칠었다. 크고 위압적인 날개에 제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린 그는 바들바들 떨면서도, 한 걸음, 두 걸음. 악마와 조금 가까워지곤 공포에 질린듯한 숨을 들이마셨다. 기분이 몹시 좋지 않다며, 자신의 목을 부러뜨리겠다 협박하는 악마를 쳐다보다가도 고개를 푹 숙인 그는 겨우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나는 당신이 익숙합니다."
부러뜨려도 상관이 없어요. 청년은 덜덜 떨리는 몸을 겨우 진정시켰다. 심호흡을 하는 숨소리가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았다.
"꺼지라고 해도 꺼질 수 없어. 헛소리가 아니니까."
고개를 슬몃 들고 치켜뜬 두 눈이 푸른빛으로 일렁였다. 청년의 눈에는 평소와 다른 감정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증오였나? 아니다. 증오라기엔 그것은 애증에 가까웠다. 지금까지 공포에 떨었던 그것은, 바르르 내쉬던 숨은 얼음장차럼 차가운 분노와 증오였다. 목을 부러뜨려도 상관이 없었다. 오해는 또 다른 오해를 낳았다. 청년은 그저 눈 앞의 대상을 악마로 인식하였고, 십자가를 꽉 쥐곤 그대로 앞으로 손을 뻗었다.
"당신이 전부 죽였잖아."
십자가는 익숙한 장미 장식이 달린 검이 되어 바로 코 앞을 겨누고 있었고, 천사는 제 날개를 펼치며 두 눈에 고인 눈물을 감추려 애썼다. 왜지? 왜 이렇게 가슴이 미어지는거지. 악마면서, 당신은 악마에 불과하면서. 형님을 죽인 원수가 눈 앞에 있으면서도. 그 파란 머리카락이. 그 파란 머리카락과 금빛 눈이.
"..전부.."
아니야. 부정하던 청년의 두 눈이 결국 감겼다. 어딘가 익숙한 악마는.. 익숙한 당신을 빼닮았더라지.
부정하고 싶었다. 형용하기 힘든 감정들이 덜컥 현실과 함께 다가와버리는 것은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다. 천사의 두 눈동자가 결국 질끈 감겼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 지금 이 상황도 악몽의 일환이었으면 좋겠다. 아침에 일어나 카페로 찾아가서, 그의 품 안에 안겨 이 사실을 잊고 싶었다.
당신을 증오하면서도 사랑하기에. 그 날, 신이 악마를 죽이지 말라 명한것은 이 재미난 상황을 보기 위해서였나. 그동안 지켜온 신념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모든것이 부숴지는 느낌이었다. 복수도, 고통도, 내 자신조차.
"..아니야."
작게 부정했다. 당신은. 당신은...아니야. 순간 자신에게 가까이 걸어오듯 한 걸음을 내딛는 악마를 보며 천사는 몸을 움찔 떨었다. 왜, 왜 다가오는거지? 목에 닿는 검을 보며 천사의 손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뭘 하려는거야. 살을 파고들어 가늘게 피 한줄기가 흐르는 것을 보며 천사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치라고? 목을? 제 증오를 풀어버리라고? 돌아가라고? 안돼, 아니야. 왜 아니지? 혼란스러웠다. 성스러운 천계는 전쟁만이 가득했다. 환멸이 났다. 환멸이 난다. 자신은 지금 어린 악마까지 죽인 자다. 돌아가서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을까. 당신을 죽이고 돌아가면 나는 과연 제정신으로 남을 수 있을까.
이미 자신은 정상이 아니었다. 당신을 죽이는 것에 머뭇거리고 있었으니. 당신은 이 영악한 천사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깊게 뿌리를 내린 존재였다. 원수를, 종족이 다르고, 평생을 싸워야 할 자를.. 천사는 제 입술을 깨물었다. 하도 세게 깨물어서일까. 피가 맺혔다. 눈을 감고 입을 다문 악마는 여전히 얄밉기 그지 없어서 더욱 화가 치밀었다. 천사는 악마의 목가에 닿은 검을 슬몃 뒤로 물리곤, 그대로 칼을 치켜올렸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천사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전부 거짓이었나?" 라고 묻는 목소리에 고통이 가득 차 있었다. 천사는 칼을 내지르려 하다가도, 칼을 저 멀리 던져버리곤 악마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연약한 모습과는 달랐다. 그간 보인 인간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난, 난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는데!!! 전부 다 장난이었냐고!! 거짓말이냐고 묻잖아!!!"
빌어먹을, 작게 욕을 뇌까리는 소리가 들렸다. 천사는 떨고있었다. 거짓일리가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당신이 다시금 자신을 품에 안고, 거짓이 아니었다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끔찍하기 그지 없었다. 천사의 명예를 깎다 못해 퇴출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 목을 들이민 검이 저를 쥔 주인의 떨림은 고스란히 전해주었다. 눈을 감았기에 그 떨림이 무엇 때문인지 알 길은 없었으나, 어렴풋이 증오 때문이겠지 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래. 당신은 그저 그렇게 제게 모든 것을 풀고 떠나면 되는 거다. 저 하늘 위로. 당신이 태어나 자란 곳으로.
어느 때보다도 긴 시간이 지난 것 같다. 얕게 베인 상처가 아릿해져 올 즈음 검이 움직였다. 아. 이제야 치려는 건가.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려는 진에게 돌아온 것은 증오의 칼날이 아니라 악에 받친 목소리였다. 전부 거짓이었냐고, 장난이었냐고. 검을 쥐고 있었을 손이 제 멱살을 움켜쥐자 힘없이 흔들리며 고스란히 잡혀주었다. 맥 없이 잡힌 채 전부 거짓이었다고 대답하려 했으나 말은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대신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뜨며 저를 죽일 듯 노려보는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렇다, 고 답할 수 있으면 좋았을 것을."
밤하늘의 달 같은 역안의 금빛 눈이 가늘게 떨린다. 더는 자신을 숨기지 않는 그 눈이 그를 바라보며 말한다.
"장난이 아니었어요. 거짓도, 거짓말도 없었어. 저는 그저 당신이 좋았을 뿐이에요. 그 날도, 지금도... ...그 지긋지긋한 전장에서 당신을 본 그 순간부터."
아주 오랫동안 숨겨왔던 마음을 꺼내보이며 악마는 웃었다. 너무나 아픈 미소를 지으며 눈을 깜빡이자 눈꼬리를 따라 맑고 투명한 물방울이 또르륵 굴러떨어졌다. 멱살을 잡힌 채로 천천히 제 한 손을 들어올린다. 가늘게 떨고 있는 손은 조심히, 더 조심히 저와 마주한 천사의 얼굴에 닿았다. 그 손에 닿는 살결이 처음 닿았을 때와 다를 것이 너무 없어서, 악마는 더 환하게 웃었던 것 같다. 이제는 멈추지 않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멱살을 움켜쥐자 악마는 힘없이 흔들렸다. 거짓이었나? 나는 내 감정을 이대로 지니고 가야하는 것인가? 이 모든것이 장난이었나? 악마의 농간에 넘어간 것인가? 나는, 나는. 새하얗던 눈은 깊은 바다와도 같이 파랗게 변해서 눈 앞의 악마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눈가에 어린 물기는 적어도 거짓이 아니었다. 시선을 마주친 역안이 가늘게 떨렸다.
그렇다. 고 답할 수 있으면 좋았을 것을. 천사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장난이 아니었다고 하였다. 자신이 좋았다고. 그 날도. 그 날도..?
"...너.."
지긋지긋한 전장에서 자신을 마주한 순간부터. 그리 말하며 웃는 미소가 천사의 가슴을 찢어버렸다. 우는거냐고, 울어야 할 사람은 나인데, 왜 당신이 우냐고. 제 얼굴에 닿은 손길에 결국 뜨거운 눈시울이 눈물을 떨군다. 망할 자식. 악마가, 증오하는 당신이. 빌어먹을. 천사가 다시금 욕을 내뱉었다. 신념은 박살난지 오래였다. 자신의 가슴에 비수와 못을 박곤 눈물이 뚝, 떨어지자 눈물을 바라보듯 천사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나는 악마가 싫어."
증오스러워. 멱살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증오스럽다 못해 치가 떨려. 그리 덧붙이는 천사의 날개도, 불안정하게 떨려왔다. 고개를 떨구고 눈물자국을 바라보던 천사는 문득 바닥의 눈물자국이 늘었음을 깨달았다. 볼가에 뜨거운 것이 흘렀다는 것도, 그제서야 깨달았다.
"정말로 싫어."
난 당신이 싫어. 멱살을 틀어쥔 손이 풀렸다. 한 손으로 주먹을 쥐고 그의 가슴팍을 퍽, 치며 바르르 떨었다. 물기가 어려선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 애를 쓰듯.
"싫어. 싫어. 싫다고."
결국 울어버렸다. 소리없이 몸을 떨며 흑, 흐느끼는 소리가 숙인 고개 사이로 들렸다. 싫어. 그 다음의 목소리를 내뱉는다면, 자신은 모든것을 내려두어야 한다. 명예로운 천사가 한 순간에 추방되어 타천사가 될 수도 있다. 천사는 입술을 꽉 깨물며 떨더니, 악마와 눈을 마주쳤다.
오랜 시간 품어왔던 마음을 겨우 내보일 수 있었던 것 만으로 진은 만족하려 했다. 이런 형태나마 제 마음을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이제는 그가 제게 마무리를 지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하지만.
그의 얼굴에도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걸 보았다. 제 손으로 그걸 닦아주고 싶었으나 거두어진 손은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닿았다간 다시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 애써 다잡은 마음이 흔들려 미련이 생길 것만 같아서. 울지 말라는 말도 못 했다. 할 수 없었다. 감정이 너무나 북받혀서.
새하얀 천사는 부들부들 떨다가 결국 제 멱살을 놓았다. 떨리는 것은 비단 몸만이 아니었다. 물기 어린 목소리에도 그 떨림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떨리는 손을 주먹 쥐어 제 가슴을 쳤을 땐 지금껏 맞았던 어떤 것보다도 아프게 느껴졌다. 가벼웠을 주먹이었건만, 어찌도 아프던지.
몇 번이고 싫다는 말을 반복하던 그가 고개를 들고 저를 보았을 때 불현듯 그 입을 막아야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안 돼요. 그 말을 하면, 다신 돌아갈 수 없어. 당신의 날개가, 빛이. 허나 막아야겠단 생각과 달리 진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꼼짝하지 않은 채 그의 말을 들었고 흐려지는 그의 빛을 보았다...
"...어째서 당신은."
진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친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흐느낌을 참는 먹먹한 목소리로 말을 내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미안해요. 저 때문에. 고작 나 같은 것 때문에. 당신의 빛이, 당신이, 당신이 아니게 되어버리게 해서.
절규와도 같이 말을 내뱉으며 제 팔을 뻗는다. 그를 기다린 며칠부터 마주친 그 순간까지 참았던 만큼 강하게 그를 끌어와 품 안 가득 안으며 고백했다.
"저도, 저도 당신 없이는 안 돼요. 이제 놔달라고 해도 놓지 않아. 제 것이 되어주세요. 아르체스, 아드리엘. 사랑해요. 나를 전부 바쳐도 모자랄만큼, 사랑해요."
결국 그 찬란하던 광배가 흐려지고 말았다. 모든 천사들이 알게 될 것이다. 전장의 천사가, 대천사장이 될 자가 타락하기 시작했음을 알 것이다. 괜찮았다. 전부 다 괜찮아. 날개가 검게 물들어도, 천사들이 배반자라 칭할지라도. 일그러지는 얼굴을 마주보며 천사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당신을 사랑하니까."
이정도 쯤이야 괜찮았다. 겨우 이것을 바치는 것이냐 물어도 좋을 만큼. 오히려 자비로운 결과였다. 그 누가 이해하지 못해도, 지금의 자신은 그러하였다.
먹먹한 목소리로 제 자신에게 미안하다 절규하는 당신을 바라보며 천사는 입술을 자근 깨물었다. 전혀 미안해 할 필요가 없는데. 이젠 당신과 함께하는 조건으로 겨우 이정도인 것이 감사할 뿐인데. 당신 덕분에 자신을 되찾았는데.
당신의 품에 강하게 안겨있던 천사는 그제서야 안도감을 되찾았다. 이런 품을 원했다. 당신이 자신을 끌어안길 바랐다.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자신이 원하던 것이 이루어져서. 겨우 눈물을 삼키곤 천사는 당신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난 이미 당신의 것이었어.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당신의 것이겠지요."
맹세해요. 천사는 그리 덧붙이곤 그대로 당신을 끌어당겨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이번엔 그가 한 발 앞서있었다. 그 어느것과도 바꿀 수 없었다. 설령 지금 배반죄로 자신을 찾아온다 할지라도, 당신의 곁이라면 그들을 망설임없이 벨 수 있었다. 오직, 이 천사에겐 당신밖에 없기 때문에.
그를 끌어안고 아이처럼 울던 진에게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도, 앞으로도, 진의 것일거란 말. 맹세하겠다는 말. 그 말들은 진의 눈물을 멎게 만들었고 대담한 그의 행동은 진을 살짝 당황케 만들었다.
"...!!"
저를 끌어당긴다 싶더니 입을 맞춰오는 행동 때문에 일순간 움찔 떨었다. 하지만 곧 잡아먹을 듯 파고들며 제 날개로 그를 감쌌다. 위협을 위해 펼쳤던 날개가 이제는 그를 가두듯 감싸며 오롯히 둘만의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잠시나마 세상으로부터 몸을 숨긴 채 하는 그것은, 사그라들던 불꽃 아래에서 했던 첫 키스보다 농밀하고, 좀더 서로를 얽매는 그런 입맞춤이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고치처럼 감싸고 있던 날개가 어느 순간 풀리자 그 안에 숨었던 둘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의 모습은 어땠을지 모르겠으나 진의 얼굴은 좀 엉망이었다. 울어서인지 어째서인지 모를 열기로 얼굴은 빨갛게 물들었고 금빛 눈은 살짝 풀린 채로 제 품 안의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따스한 애정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며 상냥한 목소리가 말을 자아내었다.
"...보고 싶었어요. 아드리엘. 지난 며칠간도, 인간계에 내려와 있는 동안에도. 하루도 당신을 잊은 적 없어요. 잊으려고 갖은 노력을 해봤지만 그럴 때마다 점점 더 깊게 새겨지기만 해서 힘들었어요. 하지만 이제 더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겠죠. 당신이, 여기 있으니까."
당신이 울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고작 이런 일로 울지 않았으면, 아이처럼 우는 당신에게 입을 맞추자 당신은 자신에게 파고들며 날개로 자신을 감쌌다. 아까와는 달리, 위협을 하지 않는 그 날개는 자신을 감싸고. 천사는 당신에게 밀착하며 입을 맞췄다. 날개가, 당신의 품이, 세상에서 단 둘만 있게 해주는 그런 안온한 장소 같았다. 사랑하는 그대를 위하여 내가 무엇이라도 하리라는 다짐과도 같이, 농밀하게 서로를 얽매었다.
그때와는 또 다른 시간이 지났다. 날개가 풀리자 열기가 달아오른 얼굴이 눈 앞의 당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붉게 달아오르고, 풀린 눈가 함께. 애정을 아득히 뛰어넘은 감정이 완연한 눈망울이 당신을 가만히 마주쳤다. 당신을 이리도 사랑하는 내가 어떻게 당신을 죽이겠는가. 상냥한 목소리에 미소지었다.
"..미안해요, 보고 싶었죠."
이제 걱정 말아요. 당신의 곁에 언제까지고 남을테니. 나를 잊지 않아줘서 고마워요. 깊게 새겨진 나를 사랑해줘서 고마워요. 그리 속삭이며 당신의 말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인 그는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자 당신의 볼에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 떼곤 당신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만나서 기뻐요, 이젠 곁에 있을게요. 내 사랑."
순수히 당신의 곁에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이젠 그 어떠한 전쟁도, 지긋지긋한 피비린내도 맡을 일이 없겠지. 인간계에서 평화로이 지내는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들을 신경쓰지 않고. 그러기를 바랐다. 그러기만을.
당신에게 달라붙어버린 천사는 집이 다가오자 아쉬운 표정으로 당신을 올려다보았다. 이 모든것이 꿈은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던 천사가 두 볼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꼭 갈게요." 라고 덧붙이며 천사는 아쉽게 집으로 들어갔다. 켜진 노트북이 눈에 들어왔다. 화면이 꺼지지도 않았나.
천사는 글을 읽어보곤 한숨을 픽 쉬곤 빠르게 타이핑을 시작했다. 차마 그때의 자신이 당신을 생각한 이야기를 그 카페에서 보일 수 없으니. 겨우 이야기를 끝마치고 저장을 누른 뒤 잠에 든 시간은, 평소보다 몇 시간은 더 늦은 터였다.
맑은 하늘에 내리쬐는 따스한 햇살이 자신을 깨우자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느긋하게 준비를 하는 도중, 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았지. 그야, 카페에 가는 것 뿐인데 무슨 옷을 입냐로 수십분동안 고민중이니. 날씨도 따스하겠다, 결국 입은 옷은 얇고 긴 니트와 검은 바지였다. 허벅지까지 닿고 쇄골이 언뜻 보이는.
바깥 날씨가 따스하다. 참 얄궂기도 하지. 며칠 전엔 그리도 쌀쌀하더니만 그런 건 어디로 가고 봄 날씨가 어느새 덜컥 다가와버리는지! 아직 저녁은 쌀쌀하지만 그렇게 추운 정도는 아니었더란다. 꼭 걷는 그 길이, 그때와 똑같았지. 날씨도 엇비슷했고. 다른 것이라면 옷차림과 노트북이 없다는 정도일까.
어느덧, 카페가 보인다. 자신이 그리도 사랑하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두 볼가가 어느새 발그레 물드는 느낌이다. 풋풋한 첫사랑을 하는 소녀처럼 부끄러워 하기도 잠시, 정신을 차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카페의 문을 열면서 제 자신도 모르게 함뿍 기쁨을 담아보인 미소를 지었던게다.
차 한잔과 스콘, 그리고 당신. 살풋 웃으며 하는 그 말이 어찌나 귀엽고도 앙큼하던지. 순박한 백익의 그라곤 상상치 못할 모습에 진도 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주문 받은 것을 만들러 가기 전에 그의 턱을 쥐어 들어올리고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짧은 시간에 깊이 파고들었다 나오며 떨어지곤 제 입술을 혀로 훑으며 말했다.
"주문 확실히 받았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돌아서며 씨익 웃는 얼굴이 마치 당신은 아직 멀었어, 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주문 받은 것을 위해 쇼케이스 뒤로 넘어온 진. 주전자에 물을 담아 올리고 웨지우드의 얼그레이 캔을 꺼내어 티포트에 두 스푼 톡톡 담는다. 새 것이라 그런지 상큼한 향이 찻잎에서부터 느껴졌다. 그와 잘 어울리는 느낌이라 혼자 쿡, 웃었다. 잠시 그러곤 쇼케이스에서 스콘 셋을 꺼내어 미니 오븐에 넣는다. 스콘이 데워지는 사이 클로티드 크림과 딸기잼을 각각 작은 플레이트에 담고 곧 데워진 스콘과 함께 한 접시에 올린다. 스콘의 준비가 끝났으면 붉은 홍차가 담긴 잔 두 개와 함께 쟁반에 올린다. 만족스러운 결과물에 뿌듯해 하곤 쟁반을 들고 그에게로 갔다.
"주문하신 차와 스콘 나왔습니다. 손님."
일부러 영업용 멘트를 치며 그의 테이블에 쟁반 위 접시들을 내려 놓는다. 이내 두 사람 분의 티 테이블이 준비되자 진도 맞은편 자리에 앉아 그를 보았다. 언제나처럼 웃으면서.
"스콘은 식기 전에, 차는 뜨거우니 조심해요."
크림과 잼은 직접 만든 걸로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다며 조금 어색해 하고 있었다. 마치 보통 인간처럼.
한 순간 제 턱을 쥐어들곤 입을 맞춰 파고들고 떨어지는 터라, 놀란 눈으로 당신을 쳐다보다가도 그가 입술을 혀로 훑으며 조금만 기다려달란 말에 볼을 붉히고 괜히 제 붉은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었다. 아직 멀었어. 라고 말하는 것 같은 그 표정이 얼마나 얄미운지.
턱을 괴고 당신을 기다리며 가만히 창 밖을 바라보았다. 평화로운 일상이 언뜻언뜻 보였지만 그것이 또, 저번과는 색다른 느낌이 드는 터였다. 그땐 의무적으로 봐야했던 것들이 이젠 자연스러워졌다. 무거운 책임도 질 필요가 없다. 지긋지긋한 피비린내를 다시 맡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며 표정을 굳힐 일도 없었다. 목에 걸린 십자가 목걸이는 여전했지만 빛을 잃은지 오래였다.
저 멀리, 당신이 보였다. 쟁반에 차와 스콘을 담아오는. 그런 당신을 바라보며 환히 웃었다. 주문하신 차와 스콘..손가락을 들어 제 입술을 톡톡 치던 그는 고개를 옅게 기울였다.
"으음, 이상하네. 지니도 주문했는데-"
그런 농담을 던져보며 당신을 얌전히 기다렸다. 이내 모든 것이 준비가 되고 나서야 그가 마주앉은 당신과 눈을 마주치곤 살풋 웃었다. 간질간질한 기분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어색해하며 크림과 잼이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다는 당신을 바라보다가도, 검지 손가락의 끝으로 찻잔의 궤적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던 손이 멈췄다.
"고마워요, 지니."
먼저 차 부터였다. 붉은빛을 띄는 홍차가 담긴 찻잔을 조심히 들어올린 청년이 조심스레 차를 불었다. 그리곤 한 모금을 목 뒤로 넘기는 터였다. 마음에 드는 듯, 활짝 웃으며 당신을 바라보다가도 스콘을 보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 싶었다. 크림을 바르고 잼을 얹을까, 잼을 바르고 크림을 얹을까.
하얀 손가락이 찻잔의 가장자리를 둥글게 따라 움직이는 걸 보며 비죽 입꼬리를 올린다. 뭐 하나 안 이쁜 구석이 없네. 또 예고 없이 저 손을 가져다 살짝 깨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문득 궁금해졌지만 찻잔을 드는 걸 보고 생각을 접는다. 장난치다 차를 쏟으면 데일 테니까.
조심조심 차를 마시고 스콘을 보는 옅은 눈이 제법 진지하다. 음. 뭘 생각하는지 알 것 같다. 크림이 먼저냐 잼이 먼저냐. 진도 같은 걸로 고민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의 모습이 이해되면서도 새삼 귀엽더라.
"그렇게 고민할 것 없이 한번식 먹어보면 되겠죠. 응?"
제 손을 뻗어 그의 미간을 톡, 건드리고 키득거렸다. 이쁜 얼굴에 못난 주름 생길라. 고민하는 그를 대신하듯 진이 스콘을 들었다. 하나는 크림 위에 잼을, 다른 하나는 잼 위에 크림을 얹어 만들어놓고 접시를 그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것 하나가 남아있었지만 진은 그저 빙긋 웃었다.
"남은 하나는 더 맛있게 느낀 쪽으로 발라줄게요. 한번 먹어봐요."
일반 손님들에게는 평이 좋은 편이어서 자신은 있었지만 새삼 이렇게 주려니 왠지 떨렸다. 그의 입에 맞았으면 좋겠는데. 먹고 기쁘게 웃어줬으면 좋겠다는 작은 욕심이 내면에 살짝 피어오르고 있었다.
둘이 카페 한켠에서 알콩달콩 노는 동안 카페 안의 공기는 포근했고, 밖에서 비쳐 들어오는 햇살은 눈부시기 그지 없었다. 그렇게 특별할 것도 유별날 것도 없는 일상적인 만남이었지만 둘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시간이 되고 있었으리라. 더는 싸우지 않아도 되는, 더는 적대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잼을 먼저 바른다면 달콤한 맛이 먼저 혀를 감쌀 것이고, 크림을 먼저 바르면 상큼한 맛이 먼저 혀를 감쌀것이다. 사소한 차이라도 어찌나 골머리를 앓게 하는지! 그 채도 없는 두 눈이 열심히 스콘을 바라보다가도, 미간을 톡 건드리는 당신의 손에 눈을 깜빡였다. 고민할 것 없이 한번씩 먹어보면 되겠죠, 라는 말에 어떻게 자신의 생각을 아냐는듯, 혹시 생각을 읽은 건 아닌지 싶은 눈으로 당신을 바라보았다. 두 눈이 놀란 토끼처럼 깜빡였다.
자신의 고민을 대신 해결해주듯 당신은 스콘을 들어 하나는 크림 위에 잼을, 다른 하나는 반대로 두는 것이었다. 더 맛있게 느낀 쪽으로 발라줄게요. 눈을 깜빡이며 자신에게 밀어놓은 접시 위의 스콘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겨우 고민 끝에 집어든 것은 크림이 먼저 발라진 것이었다. 그것을 조심스럽게, 작게 한 입 베어물고 홍차를 빤히 바라보던 그는 이내 야금야금 갉아먹은듯한 스콘을 내려두고 잼이 먼저 발린 것 또한 베어물어보았다. 그리고 그것에서 눈을 반짝였지.
사실 스콘을 베어무는 그 순간부터 두 눈이 반짝이곤 하였다. 기쁜 듯 두 눈을 휘어 웃는것이 순수하기 그지 없었다. 평온한 일상을 겪는것이, 그렇게 순수하게 다가오곤 하였다. 소중한 시간이다. 싸우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었으니. 홍차를 다시금 한 모금 마시곤, 당신을 바라보았다.
"전부 맛있어요, 지니."
하지만 역시 잼이 먼저 발리고 크림이 얹힌게 좋은걸. 그렇게 말하는 것이 겨우겨우 고민하고 자신의 생일선물을 고른 어린 아이같았다.
자신을 더없이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는지라, 그 시선이 만야 좋다는 듯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하곤 기쁘다는 듯 휙 웃어보였지. 남은 하나의 스콘을 들어 자신이 원하는 잼 위에 크림을 바르곤 접시에 내려두는 터였다. 세 개 전부 자신에게 주는것임에도 즐거워보이는지라, 두 눈이 잠시 깜빡이곤 스콘을 부드럽게 두 손가락으로 찢어내곤 그 위에 잼을 바른 뒤 크림을 얹었다.
"지니의 사랑을 먹고 자랐나봐요."
자, 아. 떼어낸 스콘을 당신에게 먹여주려는 듯, 두 눈이 곱게 휘어졌다. 이내 눈을 못 떼겠다는 말에 볼가에 옅은 홍조가 어렸다. 손을 뻗어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것이 좋은 듯 그 커다란 손에 제 뺨을 부비기를 몇 번. 어느새 그가 자신의 옆으로 오곤 냉큼 자신을 품에 안아버리자 앙탈을 부리듯 그의 품에서 바르작대었다.
"정말? 제일 사랑하는거면 얼마만큼 사랑해요?"
애정 어린 말이 퍽이나 기쁜 듯 꺄르륵 웃으면서도, 스콘 위의 잼보다 달콤한 당신을 놀려보고 싶다는 듯 야살스럽게 웃는것이 꼭 여우같기도 하였더라지.
손에 얼굴을 부비기도 하고, 품 안에서 바르작거리기도 하는 그. 이런 모습을 보면 언제 천사였나 싶다. 사실 천사의 탈을 쓴 악마여서, 진을 호시탐탐 노려온 거 아닐까 싶다. 이제야 제 모습을 되찾아서 이렇게 예쁜 짓만 골라 하는가, 그런 생각들이 소록소록 올라와 마음을 간지럽혔다.
제일 사랑하느거면 얼마나 사랑하느냐고 물어오길래 잠시 진지하게 고민했다. 진 역시 말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지만 그보다 더 느껴질 수 있는 말을 해주고 싶은 걸. 한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각하다가, 좋은 말이 떠오르자 빙긋 웃었다. 그러곤 슬쩍 몸을 기울여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하고 속삭였다.
"당신 이외의 누군가를 안을 수도 없을 정도로 사랑해요."
사실이었다. 그에게 반한 그 순간부터 진의 시야엔 누구도 차지 않았으니까. 밤일마저 할 수 없을 만큼.
"당장이라도 잡아먹고싶은 걸 참고 있다구요. 참는 건 제 특기가 아닌데."
도대체 이 이상 얼마나 참게 만들거냐며, 그의 허리에 팔을 단단히 감아 못 빠져나가게 만들었다. 그대로 뚫어지게 응시하는 금빛 눈에는 마주치기만 해도 오싹할 정도의 욕망이, 짙은 정욕의 빛이 어려 있었다.
장난을 치듯 치고들어가는 질문에 어떤 답을 해줄까. 대답을 기대하듯 제 머리를 쓰다듬는 당신의 손에서 전해오는 온기를 느꼈다. 얼만큼 자신을 사랑할까? 물론 그의 마음을 잘 알고 있지만. 자신과 같다면 더없이 행복할 정도겠지. 몸을 기울여 자신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하고 속삭이자 눈을 크게 떴다.
"아, 아..?"
방금 뭐라고, 아니, 내가, 무슨 말을 들었지. 뒤이어 쐐기처럼 박혀오는 목소리에 움찔, 몸을 떨어보인 그는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고 괜히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니트의 끝자락을 꾹 잡았다. 자신의 허리에 팔을 단단히 감는터라 당신을 흘끔 올려다보다가도, 금빛 눈이 마주치자 작게 몸을 떨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타인에게 욕망이란 감정을 느끼게 한 적도 없을 뿐더러, 하물며 정욕이라면. 아니, 일단 천사가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할리가 없잖아. 지금은 그렇게 깨끗하게 흰 날개를 펄럭이는게 아니라 검은 날개를 팔락이긴 한다만 이건, 그의 양 뺨이 붉게 물들었다. 역시 악마는 다르구나.
"..나도 사랑해요, 지니."
당신의 품에 기대 그대로 뺨을 부볐다. 당신을 놀리기엔 아직 한참 멀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괜히 볼을 부풀렸다.
간질간질해서 뭔가 참을 수 없는걸. 볼을 붉히며 당신의 쓰다듬는 손길에 얌전히 두 눈을 휘어 인형처럼 기대었다. 당신과 함께 있는 이 평화로움이 얼마나 좋은지. 포근하기 그지 없는 당신의 품 속이 꼭 구름에 몸을 맡긴 것 같았다.
어째 오늘은 손님이 오지를 않는 터였다. 뭐, 그것 덕분에 당신의 품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도 되니 좋을 뿐이다. 언제까지고 이 품에서 시간을 보내면 참 좋을텐데. 노닥거리느라 먹는 것도 잊었다며 스콘을 잘라 자신의 입가로 가져다주자 그는 자신이 꼭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을 하였더란다. 뭐, 나쁘진 않았지만.
스콘을 받아먹곤 그 또한 잘려진 스콘을 집어들어 당신의 입가에 가져다댔다. 찻잔을 들어주자 볼을 부풀리기도 했다. 이정도는 혼자 할 수 있는걸요. 자신의 입술에 잼니 묻자 닦아준다는 핑계로 혀로 입술을 핥자, 그는 짐짓 요염하게 속눈썹을 늘어뜨리곤 입술을 휘었다.
"당신 앞에선 한없이 어린 아이로 남고싶은걸."
자신의 입술을 덮어 입을 맞추자 그의 목가에 팔을 둘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사람이 없는 터라 한참을 주고 받았던 것이다. 자신의 뒷목을 받치고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그리도 뜨거울 수 없었다. 가쁜 숨과 함께 여운을 남기며 천천히 떨어졌다. 숨을 길게 들이마신 그는 눈 앞의 당신이 자신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리자 몸을 앞으로 기울여 팔을 뻗고는 당신을 끌어안았다.
"아쉬우면 찾아와요."
저 저녁에 시간 비어요. 제 입술을 슬몃 핥아보이고 입술을 휘어 올린 그 모습이 얄궂기도 했고, 대담하기도 하였다.
아쉬워하는 진에게 그가 속삭였다. 아쉬우면 찾아와요, 저녁에 시간 비어요. 그 말에 보태듯 곱게 휘는 입술이 다시 한번 덮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요염하다. 그런 식으로 한번씩 보여주는 앙큼하고도 대담한 모습들이 진의 가슴에 방망이질을 했다. 충분히 쿵쾅대는 심장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저녁까지 기다려야 해요? 맙소사. 아직 이렇게 해가 쨍쨍한데."
저 해를 당장이라도 떨어뜨려 강제로 저녁을 불러올 수만 있다면. 달콤한 속삭임이 다시금 그의 귓가로 내려앉는다. 저를 끌어안은 그의 허리에 단단히 팔을 둘러 마주 안다가, 그걸론 성에 안 차는지 그를 휙 들어올려 제 무릎 위로 앉혔다. 누가 볼까 걱정할 일이 없으니 자꾸만 대담해지는 진이었다.
"이거이거, 너무 가벼워서 앉힌 것 같지도 않네요. 많이 먹여서 살 좀 찌워야겠어요."
잘 보니까 너무 말랐다며 그의 이곳저곳을 만져댄다. 잘록한 허리, 매끈한 허벅지, 가는 종아리와 가는 발목. 다시 올라와 손목과 팔뚝을 슬금슬금 만져 올라가더니 니트 사이로 슬며시 보이는 쇄골에도 손을 대었다. 하얀 피부 때문에 더 도드라져 보이는 그곳을 손끝으로 문지르다가, 그를 끌어당겨 그 위에 입을 맞추었다. 진득한 소리가 날 정도 진하게.
달콤하게 속삭이는 당신이 제 자신의 허리에 단단히 팔을 둘러 마주앉자 야살스럽게 입술을 휘어 웃었다. 정말이지, 인내심도 꼭 필요한 법이라잖아요. 계속 이럴거예요? 그렇게 덧붙이며 작게 웃음소리를 내보인 그는 당신이 자신을 들어올리자 눈을 커다랗게 깜빡였다.
"정말이지."
당신의 무릎 위에 앉히자마자 내뱉은 말은 그것이었다. 누가 오지도 않으니 이렇게 대담하게 나오고. 이러다 누가 와버리면 어쩐담. 가볍다는 둥, 많이 먹여서 살 좀 찌워야겠다는 둥. 그런 말을 하면서도 제 자신의 이곳저곳을 만져대는 손길에 그는 팔을 뻗어 당신의 목가에 팔을 둘렀다.
지극히 태연해보이는 행동이었지만 정작 얼굴은 그렇지 않았다. 입술을 꾹 다물고 볼을 붉힌 그는 허리와 허벅지에 손이 닿자 몸을 움찔 떨었다.
"저기, ㅈ,지니."
하도 대담해서 그도 모르게 시선이 바깥을 향했다. 혹여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는지, 아니면 들어오려는 손님이 있는지 살피려는 듯. 몸을 움찔거리다 쇄골에 닿는 손길이 뜨거워서 입술을 꾹 다물다가, 그가 자신을 끌어안고 쇄골 위에 입을 맞추자 힉, 한 손으로 제 자신의 입을 틀어막곤 다른 팔로는 그의 목가를 끌어안았다.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을락말락 하는 진의 손길에 그가 당황해한다. 쇄골에 선사한 입맞춤에 새어나온 그 소리는 어찌나 간지럽던지. 새삼 이쁘고 귀여워 다시 한번 입 맞추려다가 참았다. 다음은 입 맞추기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
"아직 아무도 안 왔잖아요. 그렇게 걱정되면 못 오게 해버리죠. 그 정도도 못 할까봐서."
진의 눈이 순식간에 검게 물들며 등 뒤로 검은 빛이 일렁였다. 정말 그렇게 해버릴 듯 하다가, 농담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당황해 하는게 너무 귀여워서 그만 더 해버리게 되네요. 그러길래 누가 이렇게 귀여우래요, 응?"
소리가 나오려는 입을 막거나 밖을 살피는 그 모습에 제 안의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는 인내심을 길러보는게 어떻겠냐고 했지만, 진으로서는 이미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참지 않았다면 이미-
농담을 하고 작게 웃던 진. 알겠다며 그를 제게서 떼어 원래 자리로 돌려놓았다. 조심히 내려 앉히고 흐트러진 머리와 옷을 정리해주었다. 담백한 손길로 애정을 담아 토닥토닥 쓰다듬어주곤 마주 보며 웃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까, 조금만 더 인내심을 길러보도록 할까요. 여태까지 참은 것도 있으니, 뭐."
반나절 쯤이야. 그렇게 말한 진이 금빛 눈을 휘며 미소지었다.
그런 둘의 타이밍에 맞추어 알바생이 카페로 출근했다. 알바는 들어오며 둘을 보곤 고개를 갸웃 하다가 이내 싱긋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다 알지만 모른 척 해주겠다, 뭐 그런 느낌이었다. 알바생이 온 것을 시작으로 손님들도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해 진은 아쉽게도 그의 곁에서 일어나야 했다.
"돌아갈 때 얘기 해요. 배웅해줄게."
계속 있고 싶으면 있어도 되지만. 그랬으면 좋겠다는 듯 말한 진은 바빠지는 카페 업무로 몸을 돌렸다.
저를 바라보며 웃는 얼굴이 좋다. 제 얼굴을 쓸어주는 손에 어리광 부리듯 볼을 부비곤 히죽 웃었다. 그는 기다릴 수 있지만 진은 기다릴 수 있겠냐며 도발해오듯 하는 말에 이거이거 방심 못 하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잘 참고 있는데 그러면, 확 저질러 버리는 수가 있어요?"
아까 그런 건 애교 정도라는 걸 새삼 깨닫게 해주겠다며 키득키득 웃음을 흘렸다. 그는 이제 갓 타락한 타천사지만 저는 세상에 존재하는 그 순간부터 해악인 악마다. 그런 쪽으로는 이 풋풋한 타천사와는 비교가 안 된다 이거지. 지금도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그가 알면... 아마 볼 빨개지는 정도론 안 끝날 거다. 음.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치밀어올라 그걸 억누르는 것도 일이다, 일.
"저는 오래오래 아껴주고 싶단 말이에요. 천천히 시간을 들여가며 저를 새겨놓고 싶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한 곳도 빠짐 없이."
새하얀 그를 제 앞에 앉혀 놓고 발끝에서부터 입맞춰 올라가고 싶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생각하다가 다시 피식, 실소했다. 그러곤 몸을 일으켰다. 손님들은 거의 빠졌고 더 올 것 같지도 않으니 슬슬 마감 쳐볼까.
어리광을 부리는 듯한 행동에 금방이라도 입을 맞춰버릴까, 그런 생각을 해보이곤 그는 웃어보였다. 히죽 웃는 모습도 더없이 좋아서. 눈을 가늘게 좁히며 확 저질러 버리는 수가 있어요. 와 함께 말을 잇자 그의 볼을 꾹꾹 눌렀다.
정말이지, 못말려. 볼을 꾹꾹 누르는 것이 꼭 고양이의 발바닥을 누르듯 조심스러웠던 터였다.
"으응, 그러지 말고."
짐짓 애교스럽게 목소리를 내보곤 입술을 뾰루퉁 내밀었다. 여기서는 안 돼. 그렇게 제 자신이 말해놓곤 볼가를 발그레 물들였던 것이다. 그동안 이런 말은 마음 속에만 아주 잠깐 넣어두고 그랬는데, 이렇게 입 밖으로 내밀어보니 참 닟간지러운 말이었다지. 이제 긍지니 뭐니 단단히 규율을 지키고 하는 것도 없으니 방해없이 이런 말을 내뱉을 수 있어 괜찮다지만 역시 제 자신이 익숙해지기엔 꽤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이미 당신의 것인데도, 아직도 부족한거예요?"
지니도 참. 당신의 머리를 품안에 가볍게 안았다가도 몸을 일으키자 얌전히 당신을 올려다보았다. 마무리를 하고 오겠다며 제 턱을 한번 쥐었다 놓자 그는 팔로 턱을 괴며 두 눈을 느긋히 깜빡였다. 지금까지 기다린건 얌전히가 아니었으려나.
"다녀오세요-"
그리고 뒷 말은 꾹꾹 눌러 담았다. 아직은 눌러둘까. 하는 생각과 함께 그의 두 눈이 창 밖을 응시했다. 벌써 해가 져버린 참이었다. 시간이 원래 이렇게 빨리 가던가? 시간도 조금 지나 마감이 끝나가는 것 같고. 그는 금방이라도 저 순진한 악마가 끝났다고 말하면 끌어안아야지. 하는 생각을 머릿속에 채웠다.
그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인 그 말은 감미롭고 또 유혹적이었다. 턱을 쓸고 가는 손길도 마냥 담백하지만은 않았다. 참는다고는 하지만, 진의 말과 행동 곳곳에서 그를 탐하고픈 욕망의 빛이 조금씩 비쳤다.
갈망만 하던 때가 아닌 지금, 그 동안 눌러왔던 욕망을 해소하려면 얼마만큼의 낮과 밤이 필요한지 그는 모를 것이다. 당장 오늘밤부터라도 제 품에 가두고 놓아주고 싶지 않은데- 그러면 안 되겠지.
안쪽 정리를 하는 사이 그를 제외한 마지막 손님도 나갔다. 알바가 그 자리를 치우고 테이블들을 정돈하면 진은 부엌에서 내일의 디저트 밑준비와 기계의 상태를 손보았다.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 할 일을 하니 청소도 정비도 금방 끝나더라. 입간판을 들여놓고 패널도 클로즈로 바꾸고. 유니폼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알바가 인사를 하고 카페를 나감으로써 다시 카페에는 둘만 남았다.
"저 갑니다-" "어, 수고했어. 들어가라."
문의 차임벨이 울린 뒤 다시 닫히자 진이 부엌에서 쏙 나와 그에게로 향했다.
"오래 기다렸죠? 끝났어요. 우리도 나갈까요?"
카페용 에이프런을 벗으니 단정한 네이비 셔츠와 검은 면바지 차림이 보인다. 살짝 물기가 남은 손으로 제 앞머리를 쓸어올리던 진. 그와 눈이 마주치자 여느 때처럼 싱긋, 웃었더란다.
지금부터는 계속 같이 있을 수 있다지만, 밤은 짧고 아침 또한 짧겠지. 당신이 곁에 있다는 가정 하에, 그 어떤 방법을 써도 밤은 바람이 불듯 지나가버릴테다. 문득 아쉽다는 듯 두 눈에 그림자가 어린다. 자신을 품에 안고 몇 번 토닥여주다가도 허리에 팔을 두르고 밖으로 나가자 그의 팔 안에 안겨 발걸음을 옮겼다.
바깥은 아직 붉은기가 어려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더란다. 인간들은 저녁을 먹을 시간이고, 천사였던 자신은 예복에서 사복으로 갈아입고 자유로울 시간. 간단하게 저녁부터 먹을까 하는데.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환한 시내 거리가 보였다. 번화가구나. 온 적이 거의 없었지? 두 눈이 깜빡이다가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짧게 덧붙이고선.
- 와인 한 잔과 파스타. 인간계로 파견을 나갔을 때 그것만큼 낭만적인 건 없었지. - 와인은 빼도 괜찮지 않나요. 형님. - 오, 아드리엘. 너는 술을 못하지만 언젠가 인간계로 가면 도전 해보는 것도 좋을거야. 와인이 있어야만 하거든. - 낸들 알겠나. 형님이 절 놀리는 것 같지만 시도는 해보죠 뭐.
저녁 시간대라 인파가 몰리다보니 혹여 사람들에 치일까, 자신을 품에 끌어 당기자 그는 말 없이 볼을 부비며 옅은 채도의 눈을 깜빡였다. 원수를 사랑하라더니 진짜로 사랑해버렸구만. 그런 생각이 문득 스쳐지나가지만 지난 일이다. 애정이 담뿍 담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곤 미묘한 톤으로 웃는 당신을 쳐다보다가도, 자신을 쓰다듬자 그를 놀리고싶단 생각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겨우 억누른 터였다.
"으음...파스타요."
와인은 고민해볼까. 눈을 느긋하게 깜빡이고 괜찮을까요? 라는 듯한 눈으로 당신을 올려다보았다.
안을 때마다 볼을 부비는 건 이제 아예 학습화 되어버린 걸까. 제 품에서 눈을 깜빡이며 고민하는 그를 보며 진이 소리 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아. 그를 만나고 웃음이 너무 헤퍼져서 문제다. 그 전에는 영엽용 외에는 잘 웃지 않았는데, 지금은 혼자 있어도 그의 생각만 나면 절로 미소가 지어지니. 뭐 좋은게 좋은 거지. 안 그래?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그가 고민을 마쳤는지 저를 올려다보며 파스타를 말했다. 괜찮은 메뉴였다. 그가 골랐으니 사양할 이유도 없고.
"그럼 제가 아는 가게로 안내할게요. 가요."
괜찮으냐 물어오는 눈에 함박 웃는 얼굴로 답한 진이 그를 데리고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거리를 마치 물살 가르듯 가볍게 헤치며 가고픈 곳으로 간다. 이렇게 가고 있으니 축제날이 떠오른다며 짧게 얘기하는 진.
"그 날, 나갈 때 사람들이 엄청 붐볐잖아요. 안 다치게 하려고 품에 안긴 했는데 자꾸 신경쓰여서. 그 날 제 심장이 얼마나 빨리 뛰었는지 알아요?"
들었으면 정말 부끄러울 거에요. 하하. 진의 낮은 웃음소리가 둘 사이에 울렸다.
그대로 조금 더 걸어가자 거리와는 조금 동떨어진 건물이 하나 나타났다. 마치 시골에서나 볼 법한 벽돌집은 번화가에 있기에는 조금 분위기가 안 맞아보였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기자기하고 아늑한 분위기의 내부 인테리어가 둘을 반겼고, 안에는 제법 손님이 있었다.
"여기 주인장, 조금 특이한 사람이거든요. 주인이 그래서인지 그런 손님만 오는 곳이에요. 아는 사람만 아는 맛집이랄까?"
작게 얘기하고 그를 이끌어 빈 테이블에 앉는다. 푹신한 의자에 그를 앉히고 저도 앉아 기다리니 앞치마 차림의 늘씬한 미인이 다가와 메뉴판을 주더라. 잘 보니 그 미인은 귀가 뾰족했고, 귀 뒤로 뿔이 돋아 있었다. 그것만 빼면 보통 인간처럼 보였다.
"한번 골라봐요. 여긴 해산물이 들어간 토마토 파스타가 맛있어요. 버섯이랑 베이컨이 들어간 크림 파스타도 괜찮고. 뭘로 먹을래요?"
진은 아무렇지 않게 메뉴판을 펼쳐 그에게 보여주었다. 직접 만든 듯 아기자기한 메뉴판에 여러가지 파스타며 샐러드 따위가 적혀 있었다.
아는 가게로 안내하겠다며 웃는 얼굴로 답하자 그는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고 당신을 따라갔던 터다. 자신이 잘 아는 집도 없을 뿐더러, 번화가로 오는 일은 거의 없었으니까.
늦은 밤 번화가의 향락과 죄악을 보며 인간들에 대해 크게 흔들리고 말았던 것이 엊그제 같았지.
익숙하게 인파를 헤쳐나가며 축제날이 떠오른다 이야기하자 그는 입술을 휘어 웃고는 양 팔로 당신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지금도 빨리 뛰고 있는 건 아니고요?"
낮은 웃음소리에 휙 접히고 휘어지는 눈이 그리도 얄미울수가 없었다. 그를 따라 걸어가자 번화가의 거리와는 조금 동떨어진 건물이 보였다. 도심에서 보기 흔치 않은 벽돌집은 글쎄, 분위기가 그리 맞아보이지는 않았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기자기하고 아늑한 분위기의 내부가 바깥과는 달랐더라지. 제법 있는 손님에 이런 곳에 숨겨졌다 입소문이라도 탔을까, 같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특이한 사람이요?"
그런 손님만 오는 곳. 아는 사람만 아는 맛집. 고개를 기울이며 푹신한 의자에 앉아 기다리니 다가온 미인은.. 그의 두 눈이 잠시 가늘게 떨렸다. 악마예요? 라고 묻는듯 그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 여간 당황한 게 아니었더라지. 아무리 그래도 악마가 인간계에...아니, 엄청 숨어든건가. 아니, 편견을 가지지 말자. 자신도 이젠 천사가 아니지 않던가.
"으음.."
아기자기한 메뉴판에 적힌 파스타나 샐러드, 진의 추천에 고민하다가도 결국 고른것은 크림 파스타였다. 저만큼이나 새하얀.
큭큭 웃는 것을 뒤로하고, 제 자신이 눈이 어두운건지 천사가 멍청한건지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악마들이 인간계에 있음은 알았지만 이정도일줄은. 묻지도 않고 와인을 주문 한 뒤, 괜찮죠? 라고 묻는 것에 그는 입술을 픽 휘어 웃었다. 그것이 내가 어떻게 말리겠어. 라는 감정이 더 많이 내포되어선 그리 순수해보이진 않았지만.
"으응. 그렇구나."
역시 악마였구나. 진 보다 나이가 훨씬 많고, 인간계에서 지낸 시간도 많다. 전쟁에서 날개와 가족을 잃었다는 말에 천사의 휘어진 입술이 일자를 유지했다. 그리고 제 자신의 기억을 잊으려 했다. 자신도 일조하였으니. 전장에서 쓸모가 없다. 그것은 천사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천사는.. 그래. 날개가 없던 천사를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다.
적어도 다른 천사들은 그랬다. 아드리엘의 눈이 기억을 스쳤다. 전쟁에서 날개를 잃은 천사는 불명예스러운 자다. 처형은 소리소문 없이 소수의 능천사가 집행자가 되어 이루어진다. 지금도 그러고 있겠지. 그런 천사와 달리 인간계로 도망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주인은 이곳에 가게를 만들고, 자신과 비슷한 자를 도운다고 하였다.
"지니도 도움을 받았군요. 뭔가 천사와는 다르게 돕고 돕는 것 같네요."
목소리를 낮추고 조곤거렸다. 저처럼 선봉장의 직함을 달게 된 천사들은 전부 혼자서 해야하거든요. 그래서 자비가 없었을지도 모르죠. 휘하의 천사들을 돌보는 것 외엔 정도 없거든요. 눈을 나지막히 감았다 뜨며 손에 닿는 온기를 느꼈다.
"...지니."
쓸쓸해보이는 얼굴을 보곤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볼에 닿아있는 큰 손을 부드러이 잡고는 볼을 가볍게 부비다 고개를 살풋 돌려 손바닥에 가볍게 입술을 부비곤 조곤거렸다.
"괜찮을거에요."
그렇게 잔잔한 애교를 부리다가도, 여인이 와인잔을 들고 다가오자 입술을 휘며 손바닥에서 입술을 떼어내곤 진의 손을 양 손으로 조물거렸다.
그럴 일은 없었으면 좋겠지만, 살다보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거니까. 그 모든 순간에 제가 그의 곁에 있어줄 수 있다는 보장도 없으니까. 진은 제가 그렇게까지 유능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도망칠 곳이 있노라고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 여길 온 것이기도 했다. 만약의 순간에 제가 그의 곁에 없다면 아마...어쩌면 그럴지도 모르니까.
"자신에게 부족한 건 타인에게서 채우는 수 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되면, 더는 혼자일 수 없거든요."
날개랑 뿔 빼면 인간과 다름 없죠.
제 손을 잡는 그의 손길이 부드럽고 따뜻했다. 손바닥에 닿는 입술은 말랑해서 끌어당겨 입 맞추고 싶었다. 그렇지만 여긴 밖이고, 그녀의 가게에서 그런 행동을 했다간 등짝이 남아나지 않겠지. 때마침 와인을 들고 온 여인이 두 사람의 앞에 깊고 둥근 잔을 하나씩 놓아주었다. 속이 아른하게 비치는 레드와인이 담긴 잔이었다. 와인과 함께 나온 것은 견과류 한줌이 담긴 손바닥만한 플레이트였다. 여인은 꽁냥꽁냥한 둘을 보며 한번 미소 짓더니 그를 보고 자주 와요, 라고 말하곤 자리로 돌아갔다.
"마음에 들었나보네요. 정말, 어딜가도 이쁨 받으니 데리고 다닐 수가 있어야지."
진이 괜히 투덜거리듯 말하며 그의 손을 제 손으로 꼬옥 감싸쥐었다. 가능한 그가 살아있는 동안은 자신이 곁에 있어줄 수 있길. 속으로만 다짐하곤 잡았던 손을 천천히 놓았다. 손을 계속 붙잡고 있으면 먹지를 못 하잖아.
"가볍게 건배 한번 할까요?"
웃으며 말하고 제 앞의 와인잔을 들었다. 잘게 출렁이는 와인을 한번 바라보곤 그를 향해 살짝 내밀었다. 우리를 위해. 낮은 중얼거림과 함께.
날개와 뿔을 빼면 인간과 다름이 없다. 철저하게 구분이 되는 지나치게 완벽한 천사와는 다르다. 어쩌고보면 천사보다 악마가 더 좋구나. 응.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며 조용히 손을 만지작거렸다. 깊고 둥근 잔에는 붉은색으로 세계를 투영하는 와인이 담겨있었지. 와인과 더불어 나오는 견과류를 뒤로하고, 한 번 미소를 짓더니 자주 와요. 라고 말하자 눈을 깜빡였다. 아마 동의 그 내지 무언가였을테다.
"혹시 질투하는 건 아니죠? 지니가 예뻐해주는게 제일 좋은데."
투덜거리듯 말하다가도 어느덧 잡았던 손을 놓으며 건배를 권유하자 그는 눈을 옅게 휘며 와인잔을 들었다. 어째서인지 당신이 이런 모습을 보일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기뻐서. 당신의 속을, 아무것도 모르는 천사는 그저 웃으며 잔을 살짝 앞으로 내밀었다. 잔이 서로 마주안듯 닿았다 떨어지자 듣기 좋은 소리가 챙, 울려퍼렸다.
우리를 위해. 낮은 중얼거림에 답하듯 그 또한 같은 말을 내뱉었고, 그는 잠시 잔을 바라보며 쉽사리 잔을 입에 대지 못했다. 그게 말이지, 응. 그래. 그는 술을 전혀 하지 못하는 부류였던게지. 형님이 첫 포도주를 알려주었을 무렵, 저건 우리가 아는 그 아드리엘이 아니라며 자신이 있던 구역이 한바탕 뒤집어질뻔 했으니.
"...."
겨우 한 모금을 입에 머금고 목 뒤로 넘기자 그제서야 여인이 저와 진의 파스타가 담긴 그릇을 가지고 와선 테이블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감사합니다. 짧은 목소리와 함께 그는 묵묵히 잔을 내려놓는다. 그나마, 처음 포도주를 마셨을 때 보단 나은 것 같다. 단 한 모금으로 그걸 판단한건 안일했을지도 모르지만.
질투인걸까. 진은 그저 웃어넘겼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여인을 상대로 질투는 바보 같은 짓이다. 그녀는 갈 곳을 잃은 존재 모두에게 손을 내밀어주니까. 어머니의 그것과 같은 애정을 질투하는 멍청이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그래서 진은 그저 잔잔하게 웃어넘겼다.
"예나 지금이나, 당신을 가장 예뻐하는 건 저일 거에요."
웃으며 말하고 가볍게 잔을 맞댄 후 한모금 마셨다. 오롯히 잔 안에 담겨있던 붉은 액체를 입 안에 살짝 머금었다가 천천히 목으로 넘기니 세상 그것보다 맛난게 또 어디 있을까. 한모금 진하게 음미하고나자 파스타가 나왔다. 그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파스타 그릇을 보니 따끈따끈하고 맛있어보이는 파스타가 소담하게 담겨 있었다. 잘 먹을거에요. 여인을 향해 미소로 말하고 포크를 들었다.
"옷에 튀지 않게 조심하고, 맛있게 먹어요."
그를 향해서도 싱긋 웃으며 말한 진. 답지 않게 조심스런 손놀림으로 파스타 면을 돌돌 말더니 한입 먹는다. 그 한입을 넘기고 나자 한순이었지만 아이 같은 함박웃음이 얼굴에 화악 퍼졌다.
"맛있어..."
정말 보통 인간처럼 그렇게 반응한다. 며칠 전 날개를 펼치고 위협하던 악마라곤, 전장에서 날뛰던 난봉꾼이라곤 생각하지 못 할 정도로. 파스타 한입에 와인 한 모금을 마시고 다시 포크를 들다가, 적당한 크기로 면을 말아 그를 향해 내밀었다. 자, 아앙. 이라면서.
의외로 나, 충분한 사랑이 없으면 금방 외로워하는 존재거든요. 장난스레 그리 덧붙이곤 파스타를 바라보았다. 새하얀 크림 위에 뿌려진 녹색 파슬리, 그리고 연분홍의 베이컨과 오묘한 색의 버섯. 꼭 어린 아이처럼 볼을 붉히곤 포크를 들었다.
"안 튀니까 걱정 말아요. 지니야말로 조심해요."
조심스런 손놀림이 꼭 어린 아이같다. 파스타 면을 포크로 돌돌 말면서도 시선은 그 아이같은 모습에 닿아 있었다. 단 한 순간, 아이 같은 함박웃음이 보여 입술을 휘어 웃었다. 정말 내가 알던 그 악마가 맞나. 천마계를 통틀어 가장 크고 위압적이던 날개를 가지고, 전장에서 날뛰던 악마 말이야.
그는 제 포크에 말려있는 파스타를 한 입 먹어보곤 눈을 크게 깜빡였다. 왜 당신이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알 것 같다는 듯. 조심스럽게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아직 그 맛에 익숙치는 못해서 한참동안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못했지만.
"정말이지."
적당한 크기로 말린 면을 바라보던 그는 조심스레 한 손으로 제 머리를 쓸어내곤 저를 향해 내밀어진 포크의 면을 입에 담곤 뒤로 물러났다. 토마토도 맛있구나.아니, 그냥 여기 파스타가 맛있는 것으로 치자. 입술에 묻은 소스를 혀로 가볍게 훑으며 그 또한 포크로 제 면을 적당한 크기로 돌돌 말았다.
주는대로 얌전히 받아먹는 모습도 참 예쁘다. 그런 당신을 어찌 예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다시 내미는 포크를 보고 눈을 한번 깜빡인 진. 아앙이라며 제가 한 것을 고대로 하는 것에 곱게 눈을 휘어 웃곤 날름 그것을 받아먹었다. 받아먹을 때, 일부러 포크를 살짝 물고 안 놔줄 듯 하는 장난도 쳤지만.
"원래도 맛있지만 오늘 건 좀 더 각별하네요. 당신과 함께여서 그런가봐요."
진의 특기인 낯간지러운 소릴 아무렇지 않게 하곤 와인잔을 든다. 입 안에 남은 끈적하고 진한 맛의 크림을 산뜻한 와인으로 밀어 넘기고, 다시 포크를 들어 제 파스타를 먹었다. 간간히 들어있는 모시조개며 새우 따위의 해물도 면과 같이 먹으면서 그와 대화를 나누고, 또 웃었다.
"처음 내려왔을 땐 여기 음식이 입에 안 맞아서 고생 깨나 했었어요. 위에 있을 때도 잘 먹는 편은 아니어서. 천천히 익숙해지게 하는데 한 일주일 정도 걸렸는데 그 기간이 어찌나 괴롭던지-"
묽은 죽이나 스프에도 구역질이 나 게워내기 일쑤였다며, 그 때 저를 챙겨주던 여기 주인이 이래저래 고생이 많았더라고 덧붙인다.
"봉인구에 익숙해지지도 않아서 몸도 꽤 아팠죠. 그래도 돌아갈 순 없으니까, 어떻게든 버텨냈던 거 같아요. 어떻게든."
거기까지 말하고 와인을 마시는 진. 아무래도 알콜이 들어가니 옛 생각이 슬슬 나는 모양이었다.
오, 이런 장난엔 익숙하다고요. 아무렇지도 않게, 눈을 초승달처럼 휙 접어보이다가도 포크로 면을 말아 제 몫의 파스타를 먹었다. 끈적하고 진한 크림이 그리도 좋았더라지. 낯간지러운 소리에 볼을 붉히며 와인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당신이 있어서 기뻐요."
뜬금없이 그런 말을 내뱉곤 와인을 다시금 한 모금 마셨다. 문득 포크에 버섯이 집히자 그것을 빤히 바라보다가도, 접시 깊숙한 곳으로 버섯을 저 멀리 밀어내는 건 기분탓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괜찮나요?"
음식이 입에 안 맞는 건 자신 또한 그랬으나, 눈 앞의 당신은 저보다 더 심했던 것이다. 위에 있을 때도 잘 먹는 편이 아니었더라. 간단한 음식에도 구역질이 날 정도였더라면.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마주했다.
"...고생 많았어요."
돌아갈 수 없었으니. 자신 때문이기도 했겠지. 와인을 마시는 모습을 바라보다가도 그는 천천히 포크로 파스타의 면을 말았다. 알콜이 들어가면 옛 생각을 말하는 편일까요, 그대는. 포크를 입가에 가져가고 면을 입에 담은 그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여기서 당신을 만나서 다행이에요."
만약 당신을 만나지 못하였더라면, 나는 지금쯤 사연이 있는 악마들조차 무참히 베어넘겼겠지. 와인과 함께 그 말을 삼켰다. 여러 대화를 나누며 두 사람의 그릇이 비어갈 무렵, 그의 두 눈동자가 잔잔하다 못해 가라앉아 있었다. 건드린다면 금방이라도 키스를 하고 입술을 떼었을 때 마주했던 것 처럼 눈동자가 풀릴 것 같았다.
"....미안해요.."
저 술 못해요. 어렵사리 그 말을 꺼내며 그는 양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덮어 가렸다. 그는 와인 한 잔에 그리 굴복해버린 것이었다.
괜찮다니 다행이지만요. 처음으로 만취했던 날은 기쁜데 좀 서글펐더란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알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것은, 그를 위한 배려이거나 추측이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아르체스란 이름을 가진 자신이 아드리엘이라 다행이었더란다. 그러고보니, 자신은 무턱대고 내려와 인간의 육신을 얻을 기회도 없었지. 자신을 대신할까 고민했단 말에 볼을 부풀렸다. 너무해. 만약 그랬더라면 흐음, 기분이 굉장히 묘했겠지. 아니, 묘한 수준을 뛰어넘었겠지.
"..."
그릇이 비고 잔도 비었다. 잔이 비어있는 만큼 그는 무거운 기분을 겨우 들어올렸다. 술을 못한다는 말에 어린건 죄책감 혹은 앙탈 그 언저리다. 설마 벌써 취했나, 라고 묻는다면야 대답은 물론이지. 체질이 그런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정신줄을 제대로 붙잡고 있는 수준이라 다행인 것이지. 지금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필름을 겨우 붙드는 꼴이 참 용하다. 한 잔이면 충분하다, 슬슬 나갈까요? 라는 말에 두 손을 얼굴에서 떼어내고 그를 응시했다. 멍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꼭 잠에 취한 어린 아이 같았다.
"응. 나가요."
주위를 보니 사람이 많았다. 인간이 아닌 모습도 보이고. 만약 여기 인간이 온다면 어떻게 되는걸까. 따위의 생각을 한 그는 뜬금없이 눈을 휘어 웃었다. 그냥 보기만 해도 행복해서 그런 것일테다. 아니면 절대 이런 웃음을 내보일리가 없잖아.
나가자는 말에 그가 얼굴에서 손을 떼고 저를 본다. 힘 풀린 눈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심장이 덜컹 흔들렸다. 아, 정말이지. 고새 무슨 생각을 했는지 환히 웃는 얼굴에 살짝 움찔한 진. 손수 그가 앉은 자리로 가서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남들에게 이 이상 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무방비하게 되는 건 저와 있을 때만이면 충분하잖아.
"..자꾸 제 인내심 시험할래요? 그렇게 예쁘게 웃으면 당장이라도 잡아먹고 싶어진다구요."
그를 품으로 당기며 귀에 슬쩍 속삭인다. 도대체 이런 앙큼한 건 어디서 배운건지. 악마를 이렇게 애닳게 만드는 천사라니. 거 참.
"가만히 두질 못 하겠잖아요. 정말."
결국은 피식 웃으며 그의 뺨에 입맞췄더랬지. 아직 가게 안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그를 데리고 가게를 나오자 서늘한 밤공기가 둘을 맞이한다. 와인으로 인해 살짝 달아오른 뺨을 살랑이는 바람이 기분 좋게 감싸준다. 나른해지는 기분에 길게 한번 숨을 내뱉곤 그를 바라보았다.
"어때요, 걸을 수 있겠어요? 못 걷겠으면 업고 갈까요?"
아니면 공주님 안기? 제가 말하고도 좀 그랬는지 키득 웃어버린다. 아. 그렇지만 한번 해보고 싶기는 해. 공주님 안기 그거. 번쩍 안아들고 그대로 침대로 데려가면- 크흠흠. 혼자 엄한 상상에 슬쩍 볼을 붉히곤 괜히 품 안의 그를 쓰다듬었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그런 생각을 하니 좀 미안하긴 했다.
자신을 부축해 일으키자 팔을 벌렸다. 그리고 한 팔을 껴안고 눈을 깜빡이는 것이 꼭 주인에게 달라붙은 고양이 같았다. 인내심을 시험한다니, 그런 건 아닌데. 자신을 품으로 당기며 속삭이자 말 없이 볼을 부비곤 뺨에 입을 맞추자 작게 웃음을 흘렸다. 간질간질하니 기분이 좋은게다.
가게를 나오자 서늘한 밤공기가 몸을 감쌌다. 안과 밖은 온도차가 있어서 괜히 그에게 달라붙었다. 평소에도 달라붙었지만, 그가 먼저 다가서는건 또 낯선 광경이었다.
"업는 건 좀 그렇지 않아요..?"
걸을 수 있겠냐는 질문에 나른하게 눈을 깜빡였다. 업는다면 지니도 힘들텐데. 공주님 안기라는 말에 잠시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홀로 키득대는 걸 한 번 바라보고, 슬쩍 볼을 붉히자 미심쩍은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았다.
"지니가 해준다면 다 괜찮지만."
여기서 문제. 현재 아드리엘의 상태는? 답을 구한다면 취했음. 이겠지.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맥없이 웃으며 품속에서 바르작대었더란다. "걸을 수 있지만 못 걷는 척 할건데에." 따위의 말을 내뱉는 꼴이 아무리 봐도 취했다. 그래, 취해있었다.
안아올리니 부끄러운지 얼굴을 가리는게 앙증맞더라. 못 걷는 척 할거라고 종알거릴 땐 언제고 이제는 부끄러워하는지. 계속 보다보니 그러는 것도 일부러 그러는 듯 해 피식 웃음이 났다.
"글쎄요. 어디로 갈까요?"
요 앙큼한 여우를 어디로 데려가야 하나. 손가락 사이로 저를 보는 눈을 마주하며 진도 미소지었다. 둘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겠지. 어디든 갈 수 있다. 그에게도 제게도 지상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날개가 있으니까. 언제든 그에게 갈 수 있고, 그가 제게 올 수 있는. 본연의 삶을 뒤로 한 우리에게 남은 건 넘치는 자유 뿐이니까.
그대로 서 있기도 뭣해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팔을 뻗어 제게 두른 그를 보고 다시금 함박웃음을 지은 진. 오구오구. 아이 달래듯 그를 얼러주곤 느릿한 걸음을 옮겼다.
"생각해보니까, 길에서 냥줍을 한 사람의 기분이 이런 걸지도 모르겠네요. 너무너무 이쁘고 사랑스러운 고양이를 주웠는데 데리고 갈 곳이 한 곳 밖에 없다는 기분이거든요."
거기가 어딜까요? 맞추면 소원 하나 들어주지. 그렇게 말을 하는 걸 보니 지금 진의 걸음이 향하는 곳이 그 곳인가보다. 알 듯 말 듯 아리송한 질문을 그에게 하고, 자연스레 그의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그러나 감촉은 확실하게. 그 사이 진의 다리는 꾸준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주변 풍경도 그에 맞춰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마저도 착각할 정도로 느긋하고 느릿하게.
어디로 갈까요? 자신에게 되묻는 목소리에 말 없이 품 속에 고개를 파묻었다. 둘은 어디라도 갈 수 있다. 물론 가고 싶은 장소가 있지만 제 입으로 말하면 부끄러운것이지. 대신 자신을 어르는 손길에 어린아이처럼 해사하게 웃어보이는 것으로 대신하였더란다.
"야옹. 잘 어울려요?"
야옹, 작게 종알거리는 모습이 그리 익숙치는 않았다. 이렇게 야옹 소리를 내보는 건 길고양이들이 자신과 눈이 마주치면 장난식으로 야옹, 하고 대화를 시도해보려 했을 때 빼곤 없었지. 문득 자신에게 하는 질문에 느릿하게 두 눈을 깜빡이곤 순간 볼을 붉혔다. 질문의 답을 알았다는 것 같은 반응이었다.
"으응, 그게."
몰라요. 몰라. 앙탈을 부려보곤 이마에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자 그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곤 귓가에 조곤조곤 속삭였더란다. "소원이 없으니까 알고있어도 대답하지 않을래요." 라고 말하는 것이 짐짓 능글맞았지. 역시 사람이나 천사나 악마나, 술이 들어가면 달라지는 건 맞는가보다.
술에 취했어도, 제 질문의 답을 생각 못 할 정도가 아닐텐데. 그걸 앙탈로 바꿔버리는 모습에 진은 내심 놀라면서도 즐거웠다. 제게만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정말 셀 수 없는 시간 동안 꿈꿨던 상황이니까. 그러니 이 정도 장난은 넘어가주기로 하자. 제 볼에 입 맞추곤 속삭이는 말에 진은 짖궂은 미소를 지어보였더란다.
"그래요? 그럼 이제부터 제 마음대로 할 거에요. 거절은 거절입니다."
본래 악마인 진이 살짝 그림자를 드리우며 씨익 웃자 이건 좀 위험하다 싶다. 하지만 제 말을 무를 생각은 없는지 진의 걸음은 어딘가를 향해 계속 걸어갔다. 둘이 지나가며 마주친 사람들은 둘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본래라면 엄청난 눈길을 끌 만한 모습이지만. 아무래도 진이 무언가 수를 쓴 건 아닐까. 그건 본인만 알겠지만.
산책 같은 걸음의 끝에 다다른 곳은 그들이 만났고 나왔던 카페 앞이었다. 놀랐어요? 태연스레 그를 보며 한마디 한 진이 그를 안은 채로 카페의 뒤쪽으로 걸어갔다.
"그 긴 시간 동안 당신이 저를 못 찾은 건 단순히 힘을 봉인했기만은 아니었어요. 저도 저 나름대로 꽁꽁 숨었거든요."
카페 뒤쪽으로 돌아가자 평범해보이는 집 문이 벽에 붙어있었다. 그 문을 진이 당기자 열렸고 안에는 계단이 있었다. 위치상 카페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여길 만들고 누굴 데려오는 건 처음이네요. 그 처음이 당신이어서 기뻐요."
쪽. 또 한번 입맞춤을 하곤 그를 안은 채 계단을 올라간다. 처음 열었던 문은 스르륵 닫히더니 이내 벽과 같은 무늬가 되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스무개 남짓 되는 계단을 올라가니 다시 한번 문이 나왔다. 그 앞에 다다라서야 그를 내려놓은 진이 한발 앞서 문을 열고 그를 맞이했다.
"어서와요. 아드리엘."
그가 들어오기 편하게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내부는 생각보다 평범한 집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거실과 부엌이 있고, 방이 있고. 겉으로 보기보다 넓어보이는게 특징이라면 특징인 보통의 생활집이었다.
제 마음대로 할 거라며 그림자를 드리우며 씨익 웃는 모습에 술에 취했어도 위험한 감이 살짝 서렸더란다.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는건지, 아니면 술 기운에 맥도 못 추리는지 그에게 팔을 두르고 가만히 있었을 뿐이다. 어디로 향하는 건지 알지 못하고 느긋하게 눈을 깜빡였다. 다른 건 모르겠고, 안기니까 기분이 붕 뜨는 기분인지라.
지나가며 마주친 사람들은 시선도 주지 않는다. 으음, 지니가 무슨 수를 쓴걸까. 지나가는 풍경을 눈에 담다가도 고개를 푹 숙였다. 걸음의 끝에 도달한 곳은 익숙하기 그지 없는 카페인지라. 놀란 토끼 눈으로 카패를 바가보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굉장히 의외네요. 어쩐지 찾아도 없는 것 같더라."
볼을 뾰루퉁 부풀리곤 괜히 그리 중얼거렸다. 이젠 찾을 일 조타 없음에도. 카페의 뒷편으로 걸어가니 평범해보이는 집 문이 붙어있더라. 열면, 카페 2층으로 통할법한 계단이 보였지. 누굴 데려오는 건 처음이라니.
"제가 처음이라서 기뻐요."
스무개 남짓 되는 계단을 올라가니 문이 다시 한 번 보였다. 자신을 내려놓고 문을 열자 두 눈에 담긴 방의 풍경을 보고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지. 그야 그럴것이, 그는 방 문을 열면 침대, 책상, 창문과 그 옆의 작은 부엌 등, 사람 두어명이 옹기종기 모여 살 정도로 소박했으니. 그는 히죽 웃으며 그의 팔에 꼬옥 달라붙더니 새침하게 눈을 깜빡였다.
고양이를 대하듯 턱을 간질이며 자신을 어르자 그 큼직한 손에 이리저리 고개를 까딱이며 뺨을 부볐다. 주인에게 사랑받는 고양이들은 이런 기분일까. 쉬이 가실 생각을 하지를 않는 술기운과 더불어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기분을 띄웠다. 몽롱하니 붕 뜨는 기분이 점점 자신을 대담하게 만드는 것도 모르고 있겠지.
"폭신폭신한 곳이라도 지니가 없으면 놀 수가 없어요."
자신을 안고 몇번 둥기둥기 하는 도중에, 그는 아까도 하였듯이 팔을 뻗어 그의 목 주변을 끌어안았다. 그리곤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곤 그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뭐하고 놀까요?" 라고 되물어보며 작게 웃는 모습이 꼭 여우 같았다. 방 쪽으로 걸어가는 걸 익히 알고 있는지 두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지니."
사랑해요. 그렇게 귓가에 속삭이곤 애교스럽게 볼을 부비다가도 따스한 체온이 마냥 좋은 듯, 어린 아이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그리곤 두 눈을 반쯤 감곤 입술을 휘어올렸다. 적어도 이런 모습으로 자주 웃어본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뺨에 입 맞춰오는 그가 어찌나 앙증맞던지. 애교 많은 고양이인가 싶다가도 저러는 걸 보면 꼬리 아홉 달린 여우 같기도 하다. 한결 같은 것도 좋지만 이리저리 바뀌는 모습 또한 보기 좋아서, 콩깍지 한번 단단히 씌였구나 싶더라. 이거 벗겨지기는 하려나? 안 벗겨지면 좋겠는데.
스스로 팔을 감고 사랑한다 속삭이는 말에 한번 멈칫 했다가 그 다음 말에 또 멈칫. 이거 참. 어디서 이렇게 이쁜 말만 배워와선 제 심장을 덜컹거리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자꾸 그러면 못 참는다니까.
"나도 사랑해. 내 모든 걸 주고 줘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사랑해. 응."
진도 그의 볼에 가볍게 입술을 부비곤 얼굴을 맞대었다. 내 이쁜 사랑, 사랑스럽고 사랑하는 사람. 그 이상을 표현할 말이 없다는게 정말 안타까울 정도로 사랑해. 그를 안은 진이 방문 앞에 다다르자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방은 예상대로 침실이었다. 큰 침대가 있고 그 옆에 작은 협탁이 있는. 그 안으로 들어가 푹신한 침대에 걸터앉아 제 무릎 위에 그를 앉혔다. 마주 보고 있을 수 있도록. 넘치는 애정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며 진의 손이 그를 쓰다듬었다.
"아침부터 같이 있었다는게 믿기지가 않네요. 볼 때마다 새롭고, 잠깐 눈을 뗀 사이에도 보고 싶어져서 큰 일이야."
이러다 걷잡을 수 없는 집착이 되면 안 될텐데. 그렇게 말 하면서도 진의 손은 그를 쓰다듬고 보듬는 걸 멈추지 않았다.
멈칫거리는 그의 귓가에 다시금 속삭이곤 입술을 휘어 웃었다. 그가 하는 사랑 고백이 달기 그지 없다는 듯. 사랑하는 나의 악마. 당신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어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소리없이 문이 열리고, 침실이 보였다. 큰 침대와 작은 협탁. 푹신한 침대에 걸터앉아 그의 무릎 위에 앉았다. 마주보고 앉아 두 눈을 마주치니 그것만큼 기쁜 일도 없다.
"그럼 계속 눈에 저를 담아주세요, 지니. 저는 언제나 지니의 곁에 있을테니까요."
자신을 쓰다듬고 보듬는 걸 멈추지 않는 손길에 고양이처럼 조용히 품속에 안겨 몸을 바르작대다가도 팔을 둘러 가볍게 볼에 입을 맞추고 시선을 마주했다. "이젠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잖아요." 라고 말하곤 다시금 볼에 입을 맞췄다. 그 누구도 갈라놓을 수 없을것이라 생각했다. 걱정 말아요. 라고 작게 덧붙이고는 어린 아이처럼 볼을 부비고 해사히 웃었다.
언제나 곁에 있을거라는 말에 괜히 울컥할 뻔 했다. 새삼스럽게 인간계로 내려오던 날이 생각난 탓이었다. 그 때는 정말, 죽어도 못 볼거라고 생각하면서 내려왔는데. 그 생각을 하니 지금 품 속의 온기나 감촉이 허상인 것처럼 느껴져 그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꿈이 아니라고. 환상이 아니라고. 제게 몇 번이나 다시 되내이며 그를 끌어안았다.
절대 놓치지 않을 거란 다짐도 함께.
"그래요. 응. 저도 언제나 함께 있을테니."
그가 가볍게 입 맞춰오자 거기에 응하며 입술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시 겹쳤다. 그가 했던 것처럼 가벼운게 아닌, 열기가 온전히 느껴지는 깊고 진한 입맞춤이었다. 더이상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하는 입맞춤은 이전보다 비교할 수 없이 깊고 또 끈적했다. 진은 지금까지의 키스는 장난이었다는 듯 축제날보다, 카페에서보다 짙은 욕망을 담아 그를 탐했다. 한 손으로 그의 뒷목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는 상의를 들추고 그 안의 살결을-
뜨거운 손이 제 연인을 한껏 보듬었다. 부서질까 조심하면서도 애정 어린 손길로 그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품 안에서 바르작거리는 그를 푹신하고 부드러운 침대 위에 가지런히 눕혀놓곤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바라보며 속삭였다.
"사랑해. 아드리엘."
사랑해.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몇 번이고 속삭이며 제 손으로 그의 볼을 쓸어내렸다. 맹새하듯 그의 이마에 입 맞추었다.
언제까지고 곁에 있으리라. 입을 맞추기가 무섭게 또 다시금 자신을 향해 입술을 포개자 목에 팔을 두르곤 끌어당겼다. 놓지 않겠다는 듯 밀착하며 두 눈을 감았다. 갖고싶었던 것을 가지게 된 어린아이의 욕망이 이런 것일까. 놓치고 싶지 않고, 놓을 생각조차 없었다.
지금껏 해왔던 키스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농염했다. 자신에게 그간 억눌렀던 욕망을 표출하는지라, 자신의 살결에 닿는 손길에 몸이 절로 떨려왔다. 뜨거운 손길이 자신을 훑고 지나가면 꼭 화상자국이 남을 것 같아서인지, 두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온전히 그의 것이다, 온전히 그의 소유다. 그리 생각하며 입술이 떨어지자 그제서야 두 눈을 느릿하게 떴다. 풀려있어도, 제 눈 앞에 보이는 사람을 향한 애정을 숨길 수 없었다.
"사랑해요, 지니."
가쁜 숨을 내쉬곤 침대에 누워 그를 올려다보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에게 몇 번이고 사랑을 고백하자 입술을 휘어 웃었다. "사랑해줘서 고마워요. 정말, 정말로 사랑해." 이마에 입을 맞추자 해사히 웃어내었다. 같이 있을 수 있어서 기쁜지라, 그것을 숨길 필요도 없었고.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는다. 술기운 때문에 머리가 찡하니 아파서 깨는것이, 이번에도 고작 와인 한 잔에 제대로 취한게 분명하다. 고개를 돌렸다간 뇌가 반박자 늦게 딸려오는 기분이 들겠지. 잠든 침대가 훨씬 푹신하고, 덮던 이불보다 훨씬 보드랍다. 그는 두 눈을 깜빡이며 이곳이 어딘지를 생각해내려 했고, 이내 고개를 들어 따뜻한 온기의 근원을 쳐다보았다.
"...어라."
왜 지니가 여기에.. 아. 그의 두 눈동자가 순간 수축하곤 머릿속에선 이미 지난밤의 기억을 드문드문 떠올리고 있었다.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있다가도 제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는지 얼굴을 확 붉히곤 고개를 숙였다. 뒤늦게 쑤셔오는 허리 때문에 아야야, 작게 앓는 소리를 내곤 팔을 뻗어 눈 앞의 남성을 끌어안으려 했다.
"........"
난 몰라, 이제 다 끝났어. 결국엔 갈때까지 갔고 이젠 못 돌이켜. 머릿속에선 파란 아르체스나 붉은 아르체스나 감정들이(...?) 각기 다른 반응과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그걸 신경쓰지는 않는 것 같았다.
잠이 덜 깬 목소리가 또 새롭다. 자신을 품 안으로 끌어들이자 볼을 가볍게 부빈다. 이젠 반사적으로 하게 되는 행동이었다. 허리를 한 팔로 감싸는 손길이 마냥 조심스럽다. 배려라도 해주는 것일까. 눈도 다 뜨지 못한 모습이 언뜻 보여서인지 목덜미에 얼굴을 부비자 머리를 끌어안고 쓸었다.
"목에 자국 많이 남은 것 같은데, 또 만들게요?"
장난스레 웃으며 두 눈을 내리깔아 제 눈에 보이는 밤하늘같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꼬아본다. 매일 봐도 새로울 따름이다. 웃으며 얼굴을 떼자 머리를 끌어안은 팔을 떼곤 그의 눈을 마주했다. 누구의 남자인진 몰라도 참 잘생겼다.
"으음, 잘 잤을까요? 카틀레야 경 덕분에 두근거려서 잠도 못잤지 뭐예요. 정말 너무했죠, 헤이즐?"
장난스레 말을 던져보곤 자신을 쓰다듬는 손길에 눈을 휘어 웃었다. 아침에 눈을 떠서 그대를 가장 먼저 보는건 자신도 마찬가지지. 매일 이러면 얼마나 좋을까, 라. 가볍게 입을 맞추자 앙탈을 부리듯 꺄르륵 웃곤 두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눈을 휘었다. 어휴, 여우 같기도 해라.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손이 닿았다. 붉어지는 뺨과 함께 입술을 우물대다가도 고개를 숙인 뒤 주먹으로 투닥투닥 가슴팍을 두들겼다. "정말이지, 다른 사람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증표를 남길 필요가 있어요?" 라고 말하는 것은 역시나 앙탈이다. 자신에게 다시금 입을 맞추자 눈을 애교스럽게 깜빡이곤 희소성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에 흐응, 짧은 콧소리를 내었다.
"정말요? 저 진짜 여기서 살아버릴지도 몰라요, 매일매일 지니의 사생활을 감시해야지."
장난스레 톡톡 내뱉는 말이 마냥 진심같다. 언제까지고 눈에 담고싶은 사람. 떠나지 않을 내 사랑. 뺨을 부비늠 그의 온기를 듬뿍 느끼고 헤실헤실 웃었다. 이렇게 행복한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사랑. 혹여 멀리 떨어진다 해도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눈에 담을리도 없다. 아니, 멀리 떨어질 일 조차 없을 것이다. 아무도 방해하지 못할 내 사랑.
등을 가볍게 토닥여주며 상체를 일으키는 모습을 흘끔 바라보다 휙 휘어지는 눈과 입을 막지는 않았다. 이불이 흘러내리자 보이는 탄탄한 상체는 그렇게 눈에 담았는데도 질리지를 않지. 늘 새로워, 짜릿해, 잘생기고 멋진 지니가 최고야. 꽤 오랜 시간이 지나보이는 흉터들이 곳곳에 보이자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상체에 기대듯 그를 끌어안았다. 이불속에서 나왔기 때문인지 아직도 몸이 따뜻했다.
"이 흉터들은 전부 전쟁 때문에 생긴거겠죠..?"
배에 입술을 대곤 조건조건, 달싹이며 흉터를 손가락으로 매만져보았다. 검흔이라던지, 찔린 흉터라던지. 살짝 솟은 흉터의 살을 매만지는 손길이 조심스럽다. 얼마나 아팠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조심스레 고개를 부볐다.
귀여운 앙탈을 부리며 사생활을 감시한다는 둥 하는 소리가 어찌나 귀엽던지. 좀더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은 좀 참기로 했다. 밤은 또 오고, 시간은 많으니까.
웃음이 떨어지지 않는 그의 얼굴을 보며 그렇게 좋을까 싶었다. 천계에서는 항상 무언가 참듯 미간을 찡그리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검을 휘두르는 모습만 봐서, 한번만 저를 보며 웃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아. 생각해보니 인간계로 내려와서 소원 다 이뤘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혼자 실소했다. 피식. 그 사이 제 몸에 기대듯 안긴 그를 천천히 토닥토닥 쓰다듬으며 흉터 위를 스치는 하얀 손을 보았다. 이제는 낫지 않을 오래된 자국 위로 가느다란 손가락이 만져 지나갈 때마다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몸보다는 마음이 그랬다.
"전쟁 반, 싸움 반이에요. 전 부모도 없이 길거리에서 자라서 어릴 때부터 치고받으면서 살았거든요."
어릴 적엔 누가 돌봐주기도 했지만 조금 크고 나니까 혼자 살아남아야 했다며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얘기한다.
"먹고 살려면 뭐든 해야 했어요. 더러운 짓도, 나쁜 짓도. 힘을 타고난게 그나마 다행이었죠. 마계의 군대는 힘만 있으면 일단 들어갈 수 있으니까. 때때로 살아있는 것에 회의감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남았어요. 이렇게 상처 입고 괴로워도, 아파도..."
결코 좋은 과거는 아니었다. 악착 같이 살려고 발버둥치는 와중에 적을 많이 만들기도 했으니까.
잠시 말을 멈추고 그를 쓰다듬는 손만 움직였다. 굳은 살이 베긴 제 손으로 보드라운 머리칼을 쓰다듬고 뺨을 쓸어내리며 한동안 말없이 허공을 보고 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넉살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보았더란다.
픽 실소하는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다가도 두 눈을 낮게 내리깔고 흉터를 매만졌다. 자신을 쓸어주는 손길이 따스하다. 흉터를 매만지던 손길이 멈춘 것은 그의 과거를 들었을 즈음이었다. 그저 가만히 흉터를 쳐다보았을 뿐이다. 전쟁 반, 싸움 반. 부모도 없이 길거리에서 자랐다는 말에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떴다.
".......고생 많았어요."
작게 종알거리며 얼굴을 파묻었다.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했겠지. 우리는 닮은 점이 많았지만, 살아온 것은 차이가 컸구나. 당신은 살기 위해 발버둥치며 여기까지 오게 되었구나. 말을 멈추고 자신을 쓰다듬자 팔을 뻗어 그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굳은살이 딱딱하게 스쳐 지나가고 그에게 있어선 부드럽기 그지 없었지. 한동안 말없이 허공을 보고 있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넉살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과거를 묻자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떴다.
"저는 부모님이 전쟁 도중에 저를 지켜주시려다 돌아가셨어요."
이젠 과거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해도 슬프지는 않았다. 너무나도 시간이 오래 지났다고 생각하고, 무뎌져버린 감정이었다.
"악마가 저에게 다가올때 저는 그 악마를 집에 있던 꽂병을 던졌던 것 같아요. 마침 다른 천사가 나타나서 그 악마를 베어버렸고 저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주셨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씀하시더군요."
유감스럽지만 네 부모는 악마에 의해 죽었단다, 아드리엘. 그 장면을 너도 보았겠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하지만 너는 안전한 곳에서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릴 성격은 아니구나. 나를 따라오지 않으련. 내가 너에게 내 모든것을 가르쳐주고 전수해주마. 조용히 조곤거리며 휘어올렸던 입술을 내렸다.
"자기를 대천사장이 될 후보이자 엘리야 베르야코프라고 밝혔던 남자는 저를 거두어가고 저와 의형제를 맺었어요. 그리고 같이 교육을 받았지요. ...으음, 맞아요 제가 인간의 이름을 가지고, 베르야코프란 성씨를 쓴건 그와 의형제였기 때문이었거든요."
일단, 교육이라고 해도 말로만 교육이더군요.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모든 정보와 차단되어선 베고 찌르면서 엄격하게 감정을 배제하는 법을 배웠어요. 그렇게 자라고 악마를 베어왔다고 이야기 하는 부분에서, 그의 표정은 담담했다.
"솔직히, 많이 무서웠어요. 죽기 직전에 살려달라고 하는 자들의 숨통을 끊어버릴때도 담담하게 있어야 하는게 힘들었고요. ..엘리야가 죽고나서 저 혼자 대천사장으로 즉위하기 위해 준비할 때 즈음, 당신이 인간계로 내려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잡으러 왔는데.."
제 물음에 그는 담담한 한마디로 얘기를 시작했다. 부모님은 전쟁 도중에 그를 지켜주다 돌아가셨다고. ...전쟁. 그 놈의 전쟁이 항상 문제지.
감정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얘기하는 그를 멈추지 않고 쓰다듬으며 한마디 한마디를 귀 기울여 들었다. 하마터면 죽을 뻔한 때에 다른 천사가 나타나 그를 구해준 것, 그 천사가 그에게 검 쓰는 법을 가르쳐줬다는 것. 그의 이름은 그 천사와 의형제를 맺었기 때문이란 것...
"......"
얘기를 하는 내내 그는 큰 감정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 담담해서 자신의 얘기를 하는게 맞나 싶었다. 의형제였던 천사가 그를 그렇게 만든 걸까. 아니면 이제는 시간이 너무 지나버린 탓에 무뎌져버린 걸까. 어느 쪽도 진에게는 달갑지 않았다. 그저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그를 거두었던 그 의형제가 살짝 원망스럽기도 했다.
"...잡으러 와서 도리어 잡혀버렸네요. 이런 함정이 있을 줄은 몰랐을테니까."
진은 그저 웃으며 제 위로 올라온 그에게 팔을 둘렀다. 잘록한 허리에 한 팔을 감고, 다른 팔로 등을 받치며 자연스럽게 그의 뒷목을 받쳤다. 옛날이야 어쨌든 지금의 그에게 그 시절의 잔재는 보이지 않으니 다행인거지. 그렇게 생각하곤 그를 끌어안아 입술을 가까이 했다.
"그 키스로 울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했지?"
하여간 좀 참으려고 하면, 응? 낮은 목소리로 간지럽히듯 귓가에 속삭이곤 그와 입술을 겹쳤다. 몇 번이고 탐했던 입술은 닿을 때마다 새로워서, 무심코 깊게 파고들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그래서 진은 참지 않고 마음껏 그와의 입맞춤을 즐겼다. 행여나 꺾일새라 그의 머리를 단단히 받치고, 은근슬쩍 허리라던가 허벅지를 조물조물 만져가면서.
멈추지 않고 쓰다듬는 손길이 마냥 좋다. 이야기를 끝마치고 제가 당당히 키스해달라 이야기하자 자신을 끌어안곤 입술을 가까이 하자 고양이처럼 두 눈을 기묘하게 반짝이곤 입술을 휘어 올렸다.
"어떻게 우는데요?"
야옹야옹 하고 울까? 속삭이듯 작게 덧붙이곤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속눈썹을 늘어뜨려 반쯤 눈을 감았다. 영락없이 유혹하는 꼴이다. 입술을 겹치자 자연스레 그를 끌어안았다. 몇 번을 맞추어도 늘 새로운 감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매번 다른 느낌이 아니라 온전히 그와 입을 맞추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서인지 안심이 되는 터였다. 혹여 꺾일새라 자신의 머리를 받치고 은근슬쩍 닿는 손길에 몸을 움찔 떨었다.
"정말이지."
얼마 뒤 입술이 떨어지자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와 볼이 홧홧하다. 허리 위에 얹어진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 그 위에 제 손을 올려덮곤 두 눈을 휙 휘었다.
"지금, 밤이 아니라 아침 맞는거죠?"
뭔가 밤 같은데. 그냥 밤으로 두는 거 어때요? 그리 덧붙이는 것이, 아까부터 이어지던 작은 도발이었다. 그는 그의 손등을 덮던 제 손을 떼어내곤 그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야옹야옹. 좋지. 이왕이면 앙탈을 더해 앙앙 울면 더 좋겠지만. 자연스럽게 마주안는 그를 온전히 품 안에 가두고 달콤한 키스를 이어간다. 손끝이 살갗을 스칠 때마다 움찔움찔 떠는 것이 또한 자극적이더라. 그가 먼저 입술을 떼지 않았다면 그대로 그를 눕히고 전날밤처럼 그를 탐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분명 그랬겠지.
진하게 겹쳐져있던 입술이 떨어지자 둘 사이에 가느다란 타액의 실이 이어진다. 그 실이 끊어지기 전에 혀로 날름 그의 입술을 핥아버린다. 살짝 부르튼 여린 입술의 감촉이 선명하게 혀끝을 지나쳤다. 약간의 아쉬움을 담은 짧은 한숨을 내쉬곤 그 못지 않게 붉어진 얼굴로 마주보던 진. 제 손과 얼굴을 오가는 하얀 손의 주인을 보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다 하루 온종일이 밤이 되버릴 수도 있어요. 전 괜찮지만, 당신이 못 버틸 걸요?"
어젯밤에도 이 허리 부러지지 않게 힘조절 하느라 얼마나 고생이었는지 아느냐며 태연한 얼굴로 낯뜨거운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제 위에 올라탄 앙큼한 고양이의 턱을 간질이며 웃음 지은 입술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밤은 또 와요. 밤은 매일 오고, 저 역시 항상 당신의 곁에 있으니, 안심하고 즐겨요. 함께하는 모든 시간을."
지금 이 순간도. 언제 농염하게 굴었냐는 듯 달달한 목소리로 속삭인 진이 그를 안은 채 침대에서 일어났다.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던 이불이 흘러내려 더는 가려지는 곳이 없었지만, 아무렴 어떠랴. 사랑하는 연인 앞에 부끄러울 것이 뭐가 있다고.
"우리 고양이, 뭐부터 할까요? 목욕? 식사?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만 해요. 다 해줄게."
밤까지 못 기다리겠단 말에 결국은 소리내어 웃고 말았다. 아. 사랑스러운 사람. 이런 사람이 전 천사였다고 하면 누가 믿을까. 사실 악마인데 천사인 척 하고 있었던 거 아닌가 하는 별난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모습은 천계에서 볼 때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런게 사랑의 힘인가 싶기도 하다.
"또또. 이젠 아주 자동이네요 자동. 이 응큼한 고양이."
뭐 할까요 라는 물음에 자연스럽게 저부터를 말하는 걸 보고 다시 한번 키득였다. 이렇게 좋아하면서 어떻게 참고 살았나 몰라. 아니, 몰라서 참을 수 있었던 건가? 어느쪽이든 그에게 제가 처음이란 사실은 변함 없으니 상관없지만서도.
"그럼 씻고 맛있는 거 해줄게요. 응."
제게 팔을 두른 그에게 가볍게 쪽, 입 맞추고 욕실로 향했다. 화장실과 별도인 널찍한 욕실에서, 그를 욕조 가장자리에 앉혀놓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손수 깨끗하게 씻겨주었다. 몽글몽글한 거품과 매끈한 감촉에 야한 장난을 칠 법도 하건만 의외로 건전하게 목욕을 마쳤다. 여기서 장난을 쳤다간 단순한 장난으로 끝나지 않으리란 걸 진도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 그를 씻겨준 후 저도 씻고, 들어갈 때처럼 그를 안고 나왔다.
"머리 말려줄 동안 뭐 먹을지 생각 좀 해볼래요?"
뺨을 살짝 간질이며 얘기한 진. 곧 그를 자리에 앉히더니 드라이어의 따뜻한 바람으로 그의 머리칼을 살살 말려주었다. 손짓 한번이면 그깟 물기쯤은 순식간에 말릴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고 제 손으로 시간을 들여 그를 보듬었다.
키득거리며 그의 품안에 잔뜩 바르작거린다. 꼭 애교 많은 고양이처럼 바르작거리다가도, 가볍게 입을 맞추자 볼을 부볐다. 씻고 맛있는 거 해줄게요. 라는 말에 두 눈을 애교스럽게 깜빡이기도 하고.
"혼자 할 수 있는데..."
그래도 싫지는 않은 듯 몽글몽글한 거품을 괜히 손으로 듬뿍 떠올려 그의 머리 위에 얹는 등 작은 장난을 쳤다. 건전하게 목욕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지. 장난으로 끝나지 않을 것도 알고 있었고. 깨끗하게 씻고나니 기분이 마냥 좋다. 그가 씻을땐 얌전히 기다리다가도, 자신을 안아올리자 괜히 품 안 가득 그를 안아보려 했다.
"으음...응, 알았어요."
뺨을 간질이는 손길에 해사하게 웃은 그는 머리를 살살 말려주자 볼을 붉혔다. 사랑받는 것이 확실히 느껴진다. 그는 자신을 정말로 사랑하는구나. 괜히 기분이 좋아 맑게 미소를 지어보이곤 입술에 또 손가락을 올렸다. 무엇을 먹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듯 말캉말캉한 입술을 계속 눌러보다 무언가 떠올랐는지 눈을 깜빡이며 손을 내렸다.
"핫케이크..."
개인적인 취향이었지. 버터 한 조각, 시럽 잔뜩. 둥글둥글하고 밝은 것이 햇살 같기도 해서.
안아주면 아이처럼 안겨오는게 좋아 자꾸만 안아들게된다. 무겁지 않느냐고? 그럴리가. 보송보송한 깃털 같은 그인데.
따스한 바람으로 머리를 말려주는 동안 그는 버릇처럼 입술에 손가락을 올리고 고민하고 있었다. 거울에 비춰보이는 모습이 어찌 그리 이뻐보이던지. 이거 깍지가 씌여도 단단히 씌인 모양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그의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응, 핫케이크요?"
핫케이크라. 그의 주문에 잠시 바라보다가 곧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핫케이크 정도야 쉽지. 전원을 끈 드라이기를 옆으로 밀어놓고 손으로 다 마른 머리칼을 빗겨주며 말했다.
"그럼 만들고있을테니까, 부르면 나올래요? 옷 꺼내두고 갈테니 입고."
온종일 타월만 두르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 한마디는 일부러 귓가에 속삭이곤 볼에 쪽, 입맞췄다.
"기다리는 동안 잠들면 안 돼요. 자고 있으면 확 덮쳐버릴거야."
농담이지만. 그렇게 말하고 휙 돌아선다. 침실에 딸린 작은 방으로 들어가 제 옷 한벌을 꺼내와서 그에게 주고, 저도 적당히 입은 후 그의 뺨을 다시 한번 쓰다듬었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요. 귀여운 내 사랑.
그 홀로 방에 두고 부엌으로 나온 진. 잠시 두리번거리며 무언가 생각하더니, 곧 가루며 계란이며 재료들을 꺼내고 섞어서 반죽을 만들기 시작한다. 달각달각, 톡톡, 치익. 불 켠 렌지 위에 팬이 올려지고,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부엌과 거실에 달콤한 핫케이크 냄새가 솔솔 차오른다. 진은 그 달달하고 고소한 냄새가 피어오르는 팬 앞에 서서 흥얼거리며 핫케이크를 굽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