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하의 대답에 지은은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간단하게 생각하자. 간단하게. 한참을 곱씹어보지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머리만으로도 간단하게 생각하자 마음먹으니 조금 편해졌다.
“선배 덕분에 조금 정리됐어요!”
서하의 말을 따라 차근차근 상황을 정리해본다. 그래, 연구원을 찾고 하윤 선배를 비밀요원으로부터 지키면. 비밀요원. 누군가를 의심해야한다. 나와 친한 자를 의심해야한다. 누가 거짓말을 하는 거야? 거짓말쟁이. 지은은 말을 멈추고 표정을 굳혔다. 밝아지려 노력해도 어두운 생각은 어디에나 존재했다. 심란해진 마음을 정리하고자 지은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다시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비밀 요원을 찾아내야죠! 제가 이렇게! 이렇게! 때려잡을 겁니다.”
애써 밝게 말해본다. 지은이는 장난스럽게 허공에 잽을 날렸다. 장난이었지만 주먹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경찰에서 정석으로 배운 호신술이었다. 비밀 요원이 누구인지 알고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진실을 안다면 분명 침대위에서, 아참 지은이는 침대가 없었지. 어찌되었든 이불에 하이킥감이다.
“저는...”
커피를 마시는 경찰에 로망이 있었지만 역시 쓴 것은 싫었다. 지은은 망설이는 기색으로 말을 끊다가 두어초 지나고 나서야 서하의 말에 답해주었다.
"...일단은 요원은 이 세상에 익스퍼나 익스파가 알려지는 것을 막는 일을 한다고요. ...그렇게 꼭 악당처럼 보지 않아도..."
살짝 시선을 회피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정면에서 나를 때려잡겠다는 말을 듣는 이 상황. 되게 묘하지 않나...? 물론 지은 씨의 입장도 이해가 되지만, 그래도 굳이 그런 말을 내 앞에서 할 필요는 없잖아. 애써 표정관리를 하면서 난 손가락을 퉁긴 후에 지은 씨의 손에 오렌지 주스를 하나 전송했다. 지은 씨가 손에 힘을 완전히 풀지 않는 한 오렌지 주스 캔이 밑으로 떨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이어, 나는 손으로 캔의 뚜껑을 딴 후에 안에 들어있는 커피를 마셨다. 씁쓸하면서도 진한 맛. 그 라떼의 맛이 내 입가에 퍼져나갔다. 그 향과 맛을 느끼며 작게 미소를 지으며 지은 씨를 바라보았다.
"...뭐, 일단은 의지는 대단하시네요. ...하지만 요원은 강할지도 몰라요. 정말로. ...뭐, 애시당초 우리 근처에 있는지도 모르는 거니까요. 그 사람도 요원이 누구인진 말 안했고 말이에요."
그 점이 나에게 있어선 정말로 그나마 구원점이었다. 거기서 내 이름이 나왔다면 아마 그 이후는.... 생각만 해도 한숨이 나오겠지. 물론 아실리아는...어느정도 눈치챘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도 알 수 없어 그저 답답했다. 나는 정말로 어째야하는 것일지...
"...여러모로 귀찮게 돌아가네요. 일이."
지은 씨는 알아듣기 힘든 그런 말을 하면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역시 기분이 심란할 때는 커피를 마시는 것이 최고다. 씁쓸한 맛에 머리가 아픈 것을 잠시 잊을 수 있으니까. ...절대로 커피 중독이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절대로...
지은은 머리를 긁적이며 자책했다. 으... 열정이 너무 앞섰다. 헛기침을 하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 그래도 하윤 선배가 위험할 수도 있고...”
변명하려 애써보지만 괜히 더 상황만 안 좋아진 것 같다. 죄송해요. 지은이 조용하게 사과했다. 그래... 협박당해서 어쩔 수 없이 그런 짓을 하는 걸 수도 있고 그 사람이 주변에서 내 이야기를 듣고 있다면 큰일이니까. 지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큰일을 낸 것도 모르고 태평하다. 서하가 준 오렌지 주스 캔을 순발력 있게 받고는 뚜껑을 땄다. 한 모금을 채 마시기 전에 캔을 슬슬 흔들며 주황색 액체를 보다가 서하의 말에 답하였다.
“엄청 강하다면... 모두가 힘을 합쳐서 막아보자고요!”
밝은 것이 좋다. 그 말하는 대상이 서하만 아니었다면 아주 희망차고 바람직한 멘트였을지도 모른다. 귀찮게 돌아간다는 서하의 말에 강하게 긍정하듯이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인다. 그러고 보니 서하 선배, 커피 좋아했던가? 어째선지 아까부터 우중충한 분위기니 분위기라도 띠워 보고자-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서하의 반응이 궁금했다.- 박수를 치며 말했다.
“서하 선배, 커피 좋아하시면 절 때 커피빈은 가지마세요. 왜냐하면 거기는 커피를 시키면 컵만 들고 나오니까요! 커피’빈‘.”
안 좋은 선택이었다. 지금 이 드립을 치고 있는 제 3자도 분노로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서하가 화가 나서 지은이를 서울로 전송시켜도 뭐라 못할 드립이다.
"......아니요. 딱히 그렇게 말할 필요는...사과를 바란 것도 아니고... 뭐, 열심히 해봐요. 한번."
애초에 그녀가 나에게 사과를 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사과를 해야하는 쪽은 나다. 지금도 나는 그녀를, 그리고 동료들을 속이고 있지 않은가. 이곳에 정말로 있어도 될 지 알 수 없는 죄인은 바로 나다. 지은 씨가 경계해야 하고, 다른 이들이 경계해야 하고 막아야만 하는 것은 바로 나. ...지금 이 순간도 죄책감에 마음이 무거웠다. 난 정말 어째야 하는 것일까. 왜 하필..하윤이인걸까. 대체 왜... 그 말이 거짓이라고 믿고 싶었다. 역시, 좀 더 조사를 해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커피를 천천히 마셨다. 지금 이 심란한 마음을 어떻게든 잠재우기 위해서....
그러는 와중에 들려오는 말은, 지은 씨의 개그였다. 설마라고 생각하지만 이거... 웃으라고 나에게 던진 것일까? 뭐라고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는 그 개그에 나는 뭐라고 말을 할 수 없어서, 정말로 뭐라고 말을 할 수 없어서... 그저 멍한 표정으로 지은 씨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잠시동안, 정말로 멍한 표정으로...
일단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지은 씨가 무안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에 약간의 긴 침묵을 지키다가 애써 웃어보였다. 하지만 내 표정은 아마 억지로 웃는 느낌일 것이고, 목소리도 국어책 읽기에 가까웠다. 그렇게 잠시동안 웃는 느낌으로 말을 하다가, 고개와 몸을 옆으로 살짝 돌리면서 이야기했다.
"...죄송합니다. 무안하게 해서."
최서하. ...너는 정말로 엄청나게 구제불능인 녀석이로구나. 그런 혼잣말을 나도 모르게 가슴 속에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