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지금 동수 씨에게 남은 것은 51장의 덱, 넝마같은 점프수트 한 벌, 그리고 털 뿐이었다. 후드도 있었지만, 굳이 쓰고 싶진 않았다. 그는 짐승을 싫어한다. 특히 원숭이는 더욱. 점프수트에는 검은 털이 있었다. 다리부터, 등까지. 후드에도 있었다. 동수 씨는 그 감각이 싫었다. 지금 느껴지는 이 감각이. 털이 살결을 부드럽게 간질였지만, 그런 식으로는 어루만져지고 싶지 않았다. 동수 씨는 티 파티를 생각했다. 티 파티에서 만난 마샤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지금 여기 없다는 것도. 그 감각은 형언하기 어려웠다. 허전함인지? 혹은 답답함인지? 그것이 너무도 싫어서 그러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손에 쥔 덱이 꾸깃해졌다. 그리고 손에서 벗어난다. 하트의 퀸. 그것은 인파에 밟히고, 오물에 뒤덮힌다.
결국 동수 씨는 무언가 결심한다. 동수 씨는 일어나 거리를 다시 걷는다. 그리고 어느 가게로 들어간다.
조립식의 기둥과 서까래, 기와가 얹어진 주택이다. 왁스 발린 마루를 딛고, 종이가 발린 미서기 창을 열면 다다미가 깔린 너른 방이 나왔다.
"안녕하세요." 동수 씨가 먼저 인사했다. 관장은 그곳에서 검은 벨트를 찬 채 서있었다. 벨트에 양 손을 얹은 채. "반갑습니다." 관장이 화답했다. 동수 씨는 고개를 떨궜다.
"등록을 좀 하려고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관장은 빈 서판 위에 두루마리를 올려놓고 만년필로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동수요." "동수 씨이시고… 등록은 언제부터?" "지금부터요." "지금부터요?" "네. 제가 좀 당한 게 많아서요."
동수 씨는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자 눈 앞에는 가훈처럼 걸린 명판이 뵌다. 명판에는 무언가 쓰여있었다. 한지 위에, 페인트 브러쉬로. ```[ P A Y B A C K D O J O ]```
"좋습니다. 그러면… 마침 잘 됐군요. 마지막 한 자리가 남았는데, 바로 신청 가능하십니다." "잘 됐군요." "그러면 그렇게 하시고… 도복은…" "필요 없습니다." "필요 없으시다고요?" "예." 동수 씨는 단호하게 말했다.
"동수 씨, 잘 아실거라 생각했는데… 의복은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마음가짐의 기본이에요. 적절한 의복을 입음으로써 스스로 결의를 다질 수 있으니까요." "예에…" 관장은 설교하는 목사처럼 얘기했다. 동수 씨는 마지못해 수긍했다. "동수 씨도 환불을 받고 싶어서 오신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렇다면 단호해야지요.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단호해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 그런가요?" "물론이지요." 관장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어… 카드로." "현금으로 하시는 게 나을텐데요?" 관장은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동수 씨는 갑자기 땀을 흘렸다. "네, 에? 웨… 에, 왜요?" "10% 할인이 있거든요. 계좌 이체 하셔도 됩니다." 동수 씨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러나 손에 잡히는 것은 털 뿐이었다. "저어, 지갑을 잃어버려서…" "…" 관장은 다시 은은한 미소를 보이면서, 코팅된 A4 종이를 가져왔다. 거기에는 이렇게 써있었다.
```[ 새마을금고 486-1010235-0242 연인사 ]```
"음… 저, 그런데 스마트폰도 잃어버렸는데요." "이렇게 하시죠. 자, 이게 당신 것 아닙니까?" 관장은 이번에는 해맑게 웃으면서 검은 폴리카보네이트제 네모 상자를 꺼냈다. "에? 그, 그걸 어떻게." "열어보세요." 동수 씨는 손을 떨면서 네모 상자를 엄지로 슥 문질렀다. 떠오르는 화면은 과연 동수 씨가 익히 보던 것이었다. "자, 이제 된 것 아닙니까?" 관장은 이를 보이고 웃었다. 귀에 걸릴 것만 같았다.
"…미안해요. 아니, 감사합니다." "아니, 저, 죄송하지만, 아니, 감사하지만, 다음에 오겠습니다." 동수 씨는 어깨를 움츠리고 뒤로 돌아 종종걸음을 걸었다.
동수 씨가 미서기 창을 반쯤 열었을 때, 뒤에서 일갈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어딜 도망치시는 겁니까!" 관장은 우렁차게 호통쳤다. 불호령이 떨어지자, 그 목소리는 도장 전체를 에워쌌다. 동수 씨는 돌아선 채 움찔거렸다. 얼어붙었다. 굳어있다. 아무 것도 못 했다. 차가운 오이가 엉덩이에 닿은 듯한 느낌이었다. 관장은 어느새 동수 씨의 뒤로 다가왔다. 아무 소리도 없이. "자아, 저와 함께 하시는겁니다. 동수 씨. 세계는 당신 거에요. 당신은 손만 뻗으면 됩니다." 관장은 동수 씨의 어깨를 붙잡고, 동수 씨의 뒷목에 입김을 불듯 속삭였다. 동수 씨는 목 뒤의 털이 간지럽혀지는 감각에 더욱 움찔거렸다. "그, 그만…!" "동수 씨에게는 재능이 있어요. 지금 보여주시는 단호함, 좋아요. 아주 좋아요. 하지만 약간의 터치가 필요합니다." "동수 씨는 또 다 잃고나서야 깨달을 셈입니까?"
동수 씨는 그 말을 듣고 마샤를 떠올렸다. 위스콘신으로 돌아가버린 그녀를. 그리고 대치동에 홀로 남겨진 자신을 생각했다. 다다미 넉 장 반짜리 고시원에서 살고 있는 자신을. "…좋아요. 하겠습니다. 바로 이체해드리겠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끝마친 동수 씨는 곧바로 네모 상자를 꺼내어 양 엄지를 이용해 능숙하게 화면을 두드렸다. 관장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금액은…" "오십 칠만 팔천 이백원 되시겠습니다." "…" 동수 씨는 자신이 입고 있는 점프수트를 내려다보았다. 이 털달린 수트를 사는 데에도 자그마치 백일만 이백 삼십 오원이 들었다. 거기에 더해서 오십 칠만 팔천 이백원을 더하면… 동수 씨는 계산기를 꺼내려다가 뒤늦게 점프수트에 주머니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건 당신 인생입니다, 동수 씨. 그리고 당신 인생은 당신이 주도적으로 사는거에요." 관장은 천연덕스럽게 입바른 소리를 해댔다. 동수 씨는 반박하지 못했다. "흠, 그리고 아울러서… 부가… 음? 어디서… 뭔가 새는… 아무튼, 그건 별론으로 하지요." 관장이 이상한 소리를 했지만, 동수 씨는 공상에 잠겨있었다. 그 날이 떠올랐다. 마샤가 떠날 때도 그랬다. 그녀가 위스콘신으로 돌아가 학교를 다시 다니겠다고 했을 때, 동수 씨는 아무 것도 하지 못 했다. 하다못해 그녀가 마도공학을 공부할 필요가 있기는 하냐고 질문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는 그대로 항구에서 쓸쓸한 작별을 맞이했다. 소쩍새가 울었지만, 파도가 바위에 부서지는 소리에 묻혀 지나갔다. 해안 만의 포말이 서서히 흩어지고 있었다. 바다의 파문에 꺼져가며. "…알겠습니다. 이체해드릴게요."
동수 씨는 확인 단추를 눌렀다. 약간의 결심이 필요했지만, 일단 결심이 들자 행동에 옮기는 것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보냈습니다. 확인해주세요." 동수 씨는 결연하게 말했다. "…어디보자, 음?" 관장은 그것을 보더니 갑자기 의문을 표했다.
"왜요? 뭐 문제 있나요?" "아니, 동수 씨. 부가세를 안 주시면 어떡해요." "네? 그게 무슨…" "제가 부가세 별도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관장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동수 씨는 몸을 비틀거렸다.
--- date: 2023-03-15 tags: 일기, 2023년 --- #1 서론 일기를 씀으로서 그 날을 정리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오랫동안 안 써온 일기를 다시 쓴다. [[메모 상자와 커뮤니케이션 하는 법]] 에서 루만이 말했던 것 처럼, 글 없이 생각하기는 불가능하다. 서로 정교하게 구분되고 연결지어지는 방식으로 명료하게 사고하려면 글이 있어야 하고, 기억력의 문제까지 포함하자면 더 좁게는 기록이 있어야 한다.
#2 암시적이고 예측하기 어려운 작품을 접하는 건 정말 즐겁다. 루만이 말했던 일정 수준의 불확실성이 여기에 있는 듯 하다. '이것은 무엇이다' 라고 정의내리면 그 무엇만을 생각하게 되지만, 명확히 정체화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상상력이 개입된다. 타츠키는 정말 알레고리를 잘 담아내는구나. 그냥 바보인줄 알았는데, 아니 바보가 맞을 지라도 이런 부분에서의 천재성은 또 궤가 다른걸까?
#3 문득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내가 정말 하고싶은 게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고싶은 것 1. 음악 만들기 2. 글쓰기 (소설, 에세이 등) 3. 그림 그리기 4. 운동(생존을 위해서)하기 5. 옵시디언 관리를 통한 인사이트 획득 6. 건축 공부 7. 캐드, 레빗 등 BIM 프로그램 숙달 8. 프로그래밍 (1. 컴퓨팅 사고 2. 실생활 코딩)
등등... 나열해보니 생각보다 그리 많진 않군
#4 나는 어떻게 살고싶은걸까 그게 의문스러웠다. 내가 mk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ㅇㅇ이에게 소리내어 말하고 나니 문득 나는 사랑이란걸 해본 적이 있기는 할까 싶었다. 내가 한 사랑들은 사실 몰이해를 바탕으로 그 사람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투영해서, 사랑이 아닌 다른 오만 감정들을 섞어서 빚어낸 무언가 아니었을까? 애초에 사랑이란게 다 그런 건가? 사랑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느낄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또 어떻게 그렇게 쉽게 잊을 수 있을까? 나는 왜 사랑받고 있을 때는 초연한 척 하면서 막상 그것이 떠나가고 없어지면 그리도 슬퍼할까? mk이가 날 떠나도 슬퍼질까? mk이는 어떻게 잘 알지도 못하는 나를 그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한다는 말도 거짓말일까? 그렇다면 뭘 위한 거짓말일까? 사랑에는 앎이 필수일까? 그렇다면, 얼마나 알아야 할까?
사랑을 떠나서 생각해봐도 그렇다. 나는 뭘 하고 싶은걸까? 최근 일에만 집중하다보니 느낀건데, 나는 생각하는 걸 포함해서 많은 다른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무엇 하나도 나의 주된 관심사로 남기진 못한듯 하다. 그 중에서 그나마 옵꾸랑 글쓰기 정도는 꾸준히 하고 있나? 그치만 생각해보면 생각할 거리가 정말 많다. 그리고 잘 생각해야한다.
#5 공포는 앎으로부터 비롯한다. 사자를 보고 두려워하는 건 유전자 수준의 공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광견병 걸린 너굴맨을 보고서 두려워하는 건 앎이 선행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반대로 공포는 무지로부터 비롯하기도 한다. 어둠이 두려운 건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무지한 채로 사는 건 행복해지는 비결일까? 얼마나 알아야 할까? 얼마나 몰라야 할까?
#6 여유가 생기니까 생각할 거리가 존내 많아졌다. 반대로 말하면 여유가 없으면 생각도 줄어든다.
현장용어 (한국식 일본어 다수 함유)의 문제점은 사전에 등재된 표준말이 아니기 때문에 다들 좀 지멋대로 쓴다는 점이다 (완전 다르게는 아니지만 발음이 많이 달라지거나 하는게 보임) 당장 데모도 (조공)도 메모도/네모도 (거푸집 대기 전에 직각 맞출려고 대는 각목)랑 발음이 유사하다 멀 말하는지 헷갈림
먹이나 레벨 마킹도 시로시, 시루시, 시노시 등 다들 발음이 다름
기리바시 (철근 등 자잘한 똥가리들) 도 기리바리 (버팀대) 랑 발음 비슷하고 사포도 이런건 그나마 나음 들으면 바로 서포트 (동바리 등)라는걸 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