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기 무섭다, 혼자 밥 먹기 싫다 말했던 것이 핑계였다는 걸 숨길 생각도 없는지 은아는 한울을 챙기려고만 할뿐 정작 자기는 깨작깨작 밥을 먹는다. 한울은 나름대로 은아를 해석해보려 했으나 실패한다. 왜 저렇게까지 생판 모르는 남을 챙기려고 하는지. 여전히 한울은 알 수 없다.
밥은 맛있고 한울은 묵묵히 식사를 한다. 내려앉은 침묵은 편안하고 빗소리가 그 사이 틈을 부드럽게 매꾼다. 비 오는 날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한울은 이런 것이라면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가 이내 지워버린다.
그러다 은아가 상처에 대해 말을 꺼내자 한울은 그제야 상처에 대해 인지했다. 아니 잊고 있었다는 것에 가까웠을까.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으니까.
“으음.....”
내키지는 않지만 딱히 거절의 말을 하지는 않는다. 그저 조용히 식사를 계속 이어나가다 다 먹은 뒤 수저를 내려놨을 뿐.
밥을 먹으며 자연스럽게 이어진 침묵은 의외로 편안했다. 은아는 새삼스레 한밤중에 한울이 자신의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는 모습이 비현실적이라고 느끼면서도 어쩐지 만족스러운 기분이었다. 특히나 저렇게 식사를 하는 걸 보니 역시 배고팠던 것이 맞는 듯 싶었고. 한국인은 밥심이라잖아. 따뜻한 밥을 먹이니 뿌듯한 마음이 들어, 계속 창문을 두드리는 세찬 빗소리에도 은아는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지는 것만 같았다.
한울이 식사를 마칠 즈음에는 은아의 밥도 텅 비게 되었다. 다 먹은 그릇들을 싱크대로 옮기며 은아는 한울에게 다시금 말을 걸었고.
"저기 소파에서 잠깐 기다려줘. 구급상자 좀 가져올게."
그릇에 물을 받고서 은아는 장난스럽게 씩 웃어보였다.
"상처 치료한 다음에 설거지는 네가 하는 거다?"
계속 호의를 받기만 하면 왠지 한울이 신경쓰여 할 것 같아 일부러 던져주는 일거리였다. 한울이 이해할 수 없는 은아의 배려는 빗방울처럼 자연스럽게 한 방울씩 똑똑 떨어졌다.
식사가 끝난 지금에도 한울은 조금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어디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혹여나 꿈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 비를 맞고 있는 자신을 은아가 찾아온 것부터 이상하지 않던가. 허리를 끌어안고 가지 말라고 했던 것도, 자신이 이 집에 들어와서 씻고 밥을 먹고 있는 것도.
은아가 식탁을 치우는 것을 쳐다보다가 이내 소파에서 기다리라는 말에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향하려고 했다. 그리고 설거지를 부탁하는 말에
“뭐어... 그래.”
라며 대답했을 것이었고. 부엌에서 거실로 향하면서 집을 둘러보다가 이내 소파에 앉은 한울은 편하게 기대며 눈을 감았다. 밥을 먹으면서 조금 마르긴 했지만 아직 머리카락은 덜 마른 듯 살짝 촉촉했다.
잠시 후 은아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지면 한쪽 눈만 나른하게 뜨고는 나직하게 물었을 것이었다.
아니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랜만에 보니 뭔가 뭔가 넘 부끄럽다...........ㅋㅋㅋ큐ㅠㅠ 벌써 2년 전이라니........... ㅋㅋㅋㅋㅋ저 때 문구들 찾아볼 때 둘의 미래를 생각하고 고른 거라서 그럴지도ㅋㅋㅋㅋ 노래 가사는 과거~현재 같은 느낌이니까 3판, 4판 꾸준히 가다보면 저 문구들도 쓰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난 노래 가사도 예뻐서 좋은 걸~~!!!~!!! ><
정반대 영역에 있던 고양이 둘이 만나 기싸움 하는 느낌이었지.....(대체) 에이 한울이가 은아 고집을 잘 받아줘서 그런 거지~~ >< 은아가 아직 더 보듬보듬할 거지만!! 한울이가 비 오는 날이면 은아를 떠올리게 만들어주겠어~~!!!!(?)
한울은 전혀 졸린 상태는 아니었다. 뭐랄까. 낯선 곳 낯선 상황에서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말수를 줄인 것 뿐이었다. 아니면 평상시에 쌓아두던 벽이나 긴장이 조금 풀어졌기 때문에 평소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일수도 있고. 본래 한울은 그렇게 말이 많다거나 하지 않으니까. 물론 장난스러움은 본성에 속했다.
“나 살면서 설거지 한 번도 안 해봤어.”
지금처럼 말이다. 장난처럼 말하지만 사실이긴 했다.
하긴 그 누가 한울에게 설거지를 시키겠는가. 이내 두 눈을 뜬 한울은 소파에 기대던 허리를 세우고 은아 쪽으로 몸을 돌려 구급상자에서 열심히 무언가를 뒤적이며 찾는 걸 내려다본다.
도대체 어떤 점이 부끄럽다는 거지...?? ㅋㅋㅋㅋㅋ 2년 전에 은아주가 일댈을 구했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이어져올 수 있었던 것이구만. 근데 시간 참 빠르다... 벌써 2년이 지났다고....? 대체...... 진짜 문구들 보니까 3판 4판 열심히 만들어 가야만 해.....!! 아까워서 견딜 수 없다...!!! ㅋㅋㅋㅋㅋㅋㅋ 완전 반대 성향의 고양이들이구만 ㅋㅋㅋㅋ 기싸움 한다는 말 넘 귀여워..... 지금은 서로 간보면서 옆에서 털 붙이면서 식빵 굽고 있는 걸려나. 한울이가 비오는 날마다 은아를 떠올릴 수 있게 다음 일상에서도 비를 내리게 해야겠어(네?)
한울의 말이 들려올 무렵, 순간 은아의 손이 삐끗한 것도 같았다. 이윽고 은아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경악에 가까운 표정으로 한울을 바라보았고.
"농담이지?"
하고 물어보지만, 은아는 한울이 사실을 말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긴, 생각해보면 뻔했다. 한울이 재벌 3세라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한울이 가정에서 설거지 같은 것을 했을리가. 특히 집안 사정이 좀 복잡한 듯 싶었는데, 그런 상황 속에서 설거지를 한다는 건 더욱 말이 되지 않았고. 결국 은아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럼 내가 가르쳐줄게. 같이 천천히 해보자."
어차피 비가 그치기엔 아직 멀은 듯 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설거지를 하며 비가 그칠 때까지 시간을 좀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리고 얘 안 해서 그렇지, 한 번 가르치면 잘할 것 같으니까.
"그럼 이제 약 좀 바르자."
은아는 연고를 손가락에 짜내며 한울에게 말했다. 그리고 한울에게 바짝 몸을 기울였고.
"따가워도 좀 참아줘. 알겠지?"
눈을 감고 싶다면 감아도 된다고 속삭이며 은아는 조심스럽게 한울의 뺨에 연고를 발라주려고 했다.
과거의 내 모습이 부끄러워......ㅋㅋㅋㅋㅋㅋ큐ㅠㅠ 마자마자 갑자기 해보고 싶다고 생각해서 일댈을 구해봤는데 한울주가 딱 받아줬어! 시간 진짜 빠르지.... 한 것도 없는데 2년이 지났어....ㅋㅋㅋ
한울주가 문구들 이렇게 좋아해줄 줄은 몰랐는데..!!ㅋㅋㅋㅋㅋㅋ 열심히 찾은 보람이 느껴져!! >< 나야 3판 4판 열심히 만들어 가면 너무 좋지~ 한울주 표현이 더 귀여워......같이 식빵 구우면서 은아가 그루밍도 해주는 중일 거야(대체) ㅋㅋㅋㅋㅋㅋ그거 좋은데? 한울이 비 오는 날마다 은아가 끌어안았던 거 떠오르게 또 끌어안아야지!! ><(???)
자신의 장난이 통했는지 은아가 놀란 얼굴로 한울을 쳐다봤다. 한울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한다.
“너는 매번 내 말을 안 믿더라.”
지난번에 말한 또 그 레파토리다.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한 적이 있냐, 못 믿을 행동이라도 했냐 등등. 물론 은아를 놀려먹기 위해 하는 말이지만. 나 같은 놈의 말을 믿지 않는 게 당연하지 않나.
“설거지를 배워서 해야할만한 거야? 나도 대충 봐서 어떻게 하는지 정도는 알거든?”
한울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 답한다. 이내 은아가 약을 찾은 듯 연고를 꺼내 손가락에 짜냈다. 연고를 바르기 위해서라지만 생각보다 바짝 붙어오는 은아의 모습에 한울은 조금 긴장해 몸을 굳혔다. 어린애를 달래듯 속삭이는 목소리도 간지럽다. 뺨에 조심스럽게 손가락이 닿고 한울은 느껴지는 따가움에 왼쪽 눈을 살짝 찡그린다.
가까운 거리만큼 한울에게서 나는 샴푸향이 은아에게 닿았을지도 모른다. 은아가 매일 쓰는 것이니만큼 익숙한 향이었겠지만.
이윽고 은아는 한울이 조금 머쓱한 표정을 지어도 그냥 웃을 뿐이었다. 은아의 말은 딱히 다른 마음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단순히 같은 샴푸를 써서 같은 향기가 난다는 것이었으니까. 자신이 퍼스널 스페이스를 침범하고 있다는 자각도 없어, 한울의 복잡한 심정까지도 미처 알지 못했고. 은아는 이어진 한울의 대답에 놀라 손을 멈추었다.
"뭐?"
천하의 그 이한울이 맞았다고? 은아의 상상은 한울이 정말로 다른 누군가와 격하게 싸우는 것으로 이어졌고.
"네가 이렇게 다칠 정도면 그 사람은 완전 묵사발이 났겠네."
은아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상처가 길게 날 정도면 얼마나 세게 맞은 걸까. 은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아프지는 않았어?"
반창고를 꼼꼼하게 붙여준 후, 은아는 여전히 한울과 가까운 상태에서 한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빗소리 사이로 은아의 목소리가 조용히 물었다.
어제 내가 먼저 자버렸다....한울주 잘 잤어? 난 덕분에 잘 잤다!! 왕크면 왕귀여우니까 왕고양이 한울이 왕귀여워..........(??) 은아는 아마 자각하고 나서 뚝딱거리지 않을까?ㅋㅋㅋㅋ 어제 피곤해서 그랬나 보다. 괜찮아!! 나도 단어 잘못 쓸 때 많은 걸~ >< 고마워!!! 한울주도 오늘 하루도 힘내자~~!!!! 점심도 맛있게 먹구~!!~!
은아는 입을 삐죽 내밀며 대꾸했다. 의뭉스럽게 나오는 한울을 보며 은아 역시 지지 않고 "그럼 내 맘대로 한다?" 하고 나오기도 했고.
"때려서도 피해서도 안 되는 사람?"
은아는 눈을 깜빡거렸다. 짐작가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애초에 은아는 한울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렇지만 어쩐지 은아의 감이 한울이 말하고 있는 사람이 한울의 가족 중 한 사람일 것 같다고 말하고 있었다. 외동이라고 했으니까 아마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중 한 사람일까.
무력하게 맞아야만 하는 기분이 얼마나 비참한지는 은아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은아는 자신이 함부로 한울의 상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자격이 없음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은아는 그렇기 때문에 한울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은아는 대답을 피하고 거리를 두는 한울의 모습에서, 다시금 한울이 혼자 천사상을 등지고 분수대에 앉아있던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에.
"......많이 아팠겠다."
그래서 은아는 자신도 모르게 조용히 중얼거리며 천천히 한 손을 뻗었다. 마치 한울 대신 대답을 해주기라도 하듯.
"아프지 마."
만약 한울이 피하지 않았다면 은아의 손이 한울의 머리 위에 닿았을 것이었고. 은아의 손바닥이 한울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었을 것이었다. 차마 맞서 때리라고도, 피하라고도, 맞지 말라고도 할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은아는 제일 작지만 제일 큰 것을 대신 바래주었다. 몸도 마음도 아프지 마. 은아는 어쩐지 앞으로 천사상에 빌 소원이 하나 더 늘어나게 될 것만 같다고 생각해버렸다.
그 때 되면 한울이가 은아 이상하게 볼 지도.... 잘 끌어안던 애가 갑자기 긴장하고 그러니까ㅋㅋㅋㅋ 열심히 일 했으니까 더 피곤했겠지....(보듬) 그래도 잘 잤다니 다행이라구~~ >< 잘했어~!! 나도 맛점했다!! 대충 안 챙겨먹었어!!!ㅋㅋㅋㅋ 한울주도 저녁도 맛저하길 바라~~!!~!!
한울이 뻔뻔하게 답한다. 확실히 은아의 말은 틀린 게 없었지만 무논리에는 대응할 방법이 없는 법이다.
“.......”
한울은 은아가 되물었음에도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은아라면 어느정도 눈치 채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뭐, 알아채든 알아채지 않든 자신과는 상관 없는 일이다. 은아와도 상관 없는 일이고. 그렇기에 은아가 자신의 사정에 깊이 공감하고 마음 아파한들 그건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일 뿐이다. 누구나 상처입고 비맞은 고양이를 보면 안타까움을 느낄 테니까. 그 잠깐의 순간에는 그럴 수 있다. 그리고 제 갈 길을 가야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한울은 은아가 뻗은 손이 머리에 닿기 전에 그 손을 잡아 내렸다. 저를 위로하려는 손은 달갑기도 하면서 달갑지 않았다. 순간의 감정에 자신을 맡길 정도로 자신은 아둔하지 않았다.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냐.”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은아의 손이 작은 것인지 한울의 손이 큰 것인지 한울의 손 안에 은아의 손이 포개지듯 덮여졌다. 한울은 그 손을 놓으며 일어나려 했다. “이제 설거지만 하면 끝이지?” 하면서. 부엌으로 향하려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