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6410109> [All/육성/슬로우/무협] 무림비사武林秘史 - 76 :: 1001

◆gFlXRVWxzA

2021-12-27 01:03:44 - 2022-01-02 14:55:52

0 ◆gFlXRVWxzA (KhJJnHd8yY)

2021-12-27 (모두 수고..) 01:03:44

주의사항
※최대 12인이 제가 받을 수 있는 한계입니다.
※총 10개의 대사건이 모두 일어나면 완결됩니다.
※이 스레는 슬로우 스레로서, 매우 천천히 진행됩니다. 진행은 일주일에 한 번, 일요일. 보통 오후 2시~4시 사이에 진행되며 길면 2시간 짧으면 1시간 반 진행되니 참고 바랍니다.
※진행 때에는 #을 달고 써주시면 됩니다. 진행레스가 좀 더 눈에 잘 띄기 위해서 색깔을 입히거나, 쉐도우를 넣는다거나 하는 행위도 모두 오케이입니다. 스레주가 지나치지 않을 수 있도록 이쁘게 꾸며주세요!
※유혈 묘사 등이 있사오니 주의 바랍니다.
※이 외에 미처 기억하지 못한 주의사항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스레주도 무협 잘 모릅니다...부담가지지 말고 츄라이츄라이~
※기본적으로 우리는 참치어장 상황극판의 규칙을 적용표준으로 적용하며, 이에 기속규칙대로 해야한다됩니다.

시트스레 : https://bbs.tunaground.net/trace.php/situplay/1591885835/recent
수련스레 : https://bbs.tunaground.net/trace.php/situplay/1596307065/recent
다이스스레 : https://bbs.tunaground.net/trace.php/situplay/1592093605/recent
임시스레 : https://bbs.tunaground.net/trace.php/situplay/1591887528/recent
위키 : http://threadiki.80port.net/wiki/wiki.php/%EB%AC%B4%EB%A6%BC%EB%B9%84%EC%82%AC%E6%AD%A6%E6%9E%97%E7%A7%98%E5%8F%B2
익명 설문지 :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e40d_FakoEwIYj7dHpDGZLWrxfDOqH6WZM-53IcFJCou4k5g/viewform?usp=sf_link

389 재하 (QSNUBvUeR.)

2021-12-27 (모두 수고..) 21:37:14

"왕 씨 어르신이 오셨사와요."
"재희 꾸미도록 해라."

루주가 재하를 가리키며 명하기가 무섭게 기녀들이 앞다투어 몰려들었다. 재하는 익숙한 듯 양 팔을 벌렸다. 기녀 하나가 제일 먼저 재하를 품에 안아 동백기름 바른 빗을 들어 올리자 다른 기녀는 장신구를 찾아오겠다며 패물함을 열었다. 밖은 추수를 끝내 이번 년은 풍년이라 기뻐하는 소리로 가득하고, 뜨겁게 여름을 달구던 해는 불어오는 쌀쌀한 바람에 식어 온기를 주나 작열하지는 않았다. 왕 씨를 뵌 지 곧 1년, 아홉 살의 가을이었다. 재하는 그 1년 동안 왕 씨가 오는 날만을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다. 짧은 기루의 삶이었지만 왕 씨가 오는 날엔 회초리를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것뿐이랴, 다른 손님들처럼 무리하게 세 시진을 넘게 노래하지 않아도 됐고, 원한다면 푹신한 품에 안겨 잠들 수도 있었다. 가끔씩 가져오는 귀한 과자는 혀만 대도 그 맛이 대단했으며, 손바닥만 한 보에 넉넉히 싸주었던 지라 누이와 함께 나눠먹을 수도 있었다. ​재하는 그런 왕 씨의 사소한 친절과 선행이 좋아 자주 끌어안았고, 왕 씨는 그런 재하를 토닥이며 아들처럼 여겼으며, 또 무엇보다 귀히 여겼다. 왕 씨는 재하를 위해 기루에 오는 날마다 온갖 패물과 비단옷을 선물해 주곤 했다. 금화를 쥐여주는 날도 이따금씩 있었다. ​

"손이 굼뜨다!"
"최대한 열심히 꾸미고 있거든요? 나 참!"
"요 년이 어디서 말대꾸야?"
"그야 오늘 재하는 물이 올랐기 때문이지요! 오늘은 유달리 예쁘네, 우리 재하!"
"크흠. 은야랑 백화는 먼저 가서 맞이나 해라."
"매출 오르는 소리는 죽어도 못 넘어가죠."
"요 년이 진짜! 오늘 지명에서 빼랴!"
"아뇨! 갈게요, 가!"

그러나 온갖 패물과 비단옷, 금화는 재하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다. 루주인 주 씨가 날름 가져가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왕 씨도 알고 있었지만, 두툼한 풍채처럼 넉살도 좋은지 왕 씨는 껄껄 웃기만 했다. 정말 괜찮냐고 주눅이 들어도 그럴수록 새 패물을 주면 된다며 과자를 주고 달랬다. 재하는 그럴 때마다 나 노인에게서 배운 노래를 조곤조곤 불러 조금이나 남은 앙금을 달래주곤 했다. 이후 같은 일상의 반복이었다. 재하는 노래를 부르고, 왕 씨는 술을 마시고, 패물을 쥐여주고, 루주가 가져가고, 다시금 재하가 노래를 부르고……. 차라리 왕 씨가 재하를 꺼내가면 되었을 텐데, 막상 그런 얘기가 조금이라도 오가면 바로 선을 그었다. 왕 씨는 재하를 돈을 주고 빼오지 않았다. 기루에 가는 것은 극비인 사항이기 때문이라는 대외적인 명분이 있었지만 기루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왕 씨도 결국 기루의 재하를 귀히 여겼을 뿐이라며 뒷말만 이따금씩 오고 갔다. 그렇지만 재하를 대놓고 비호하지도 않았다. 재하가 떠나버리면 기루의 매출을 책임질 수 없었다. 그렇게 모두 혀 위에 바늘을 올려두듯 침묵했을 뿐이다.

"다 됐다!"

기녀가 머리 장식을 꽂고 뒤로 물러나며 높은 소리로 탄성을 질렀다. 오늘의 역작이라는 둥, 앞으로 이런 날이 또 오면 기절할지도 모르겠다는 둥, 요란한 소리를 뒤로하고 시선이 몰렸다. 재하는 눈을 내리깔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새하얀 비단은 너울거리며 재하의 가녀린 몸을 덮어 휘감았다. 동백기름을 바른 빗으로 빗어내고, 일부만 틀어올리고 나머지는 폭포수처럼 늘어뜨린 머리 위에는 옅은 백금색 장식을 꽂았다. 나비와 나뭇잎 위의 이슬을 얇은 은으로 조각한 장식은 움직일 때마다 나비가 날갯짓하듯 작게 흔들렸고, 나뭇잎 위 이슬이 튕겨 나뭇잎을 칠 때마다 방울처럼 맑으나 흐르는 물처럼 은은한 소리를 냈다. 귀하디 귀한 하얀 공작처럼 꾸며진 재하는 어린 날 앳되고 통실한 뺨은 분칠하지 않아도 발그레하며, 입술은 조막만 해 분홍색 색조 어렸다. 작은 손을 너른 소매에 숨기며 눈을 내리깔자 그 모습은 투명하고, 한순간의 옅은 꿈과 같아 손만 뻗어도 깨 금방 사라질 것 같았다. 왕 씨 어르신이 재하를 부른다며 문을 조심스레 열던 점소이가 눈을 둥글게 떴다.

"오늘은 났네, 났어."
"어서 데려가라. 오늘은 금화라도 하나 받겠구나."
"재하 이리 온."

재하는 능숙하게 점소이에게 팔을 뻗었다. 점소이가 재하를 번쩍 안아들어 품에 안았다. 일전에 사내아이와 계집아이의 구분을 틀려 루주에게 맞았던 회초리 자국이 크게 남았던 날, 왕 씨의 첫 지명과 겹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재하가 걷자 상처가 터져 피가 배어 나왔다. 그 이후 매질과 지명이 반복되자 자칫하다간 상처가 곯을까 싶어 여러 기녀와 점소이가 머리를 맞대 방법을 고안했고, 마침내 택한 방법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상처를 곯지 않게끔 했던 방법에 불과했으나, 이렇게 재하가 잔뜩 꾸미고 안겨 가는 모습이 하계에서 막 내려온 선녀가 불결한 것을 밟지 않게 하게끔 행차하는 것 같다는 손님의 중얼거림에 이젠 다리를 다치지 않아도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기녀가 나오는 방에서부터 시작된 재하의 행차에 남아있던 손님들이 고개를 쭉 내밀었다. 그리고 제일 꼭대기 층으로 가버리자 뭇 아쉬운 듯 입맛만 다셨다.

"재희 왔느냐!"
"네에, 당도하였사와요."
"에잉, 오늘도 선녀야. 내 아들놈이 이 미모 반의반만 닮았어도 여한이 없겠구먼."​

재하는 점소이의 품에서 내려오자 천천히 앞을 향해 걸었다. 춤을 추듯, 나비가 움직이듯 절도 있고 부드러운 몸짓을 뒤로 팔을 쭉 뻗어 세 배쯤 되는 덩치의 왕 씨의 푸근한 배에 안겼다. 먼저 술을 따라주던 백화는 사랑스럽다는 듯 짧은 탄성을 질렀고, 왕 씨는 무엇이 좋은지 껄껄 웃다가 솥뚜껑만 한 손으로 재하의 등을 두어 번 토닥였다. 그리고 품 속에서 과자가 담긴 보따리를 꺼냈다. 왕 씨는 한 손으로도 들고도 남았지만 재하의 작은 손바닥은 두 개를 겨우 모아 내야 꽉 들어찰 정도였다.​

"자아, 선물이다."
"우와아.."
"네 단 음식 좋아한단 말을 들었으니, 말리화와 꿀 굳힌 사탕이다. 누이와 나눠먹거라."
"감사합니다."

보따리를 풀자 은은한 말리화 향이 올라왔다. 꿀 단내를 뒤로 둥근 사탕 입에 넣어 혀로 굴리니 향긋함이 올라오고 비강에 가득 들어찼다. 새로운 맛임에도 낯설지도 않고 오히려 자꾸만 당기는 맛인지라, 재하는 눈을 둥글게 뜨다 부스스 웃었다. 그리고 조막만 한 손으로 보따리의 매듭을 짓고 품에 고개를 기댔다. 은야가 비파를 들었다. 오늘도 먹고 마시고 왕 씨는 취하며 재하는 노래할 시간이었다.

"대왕을 따라 전장을 헤매며 풍상고초를 겪은지 여러 해, 해는 가고 또 가니. 한스러운 건 적의 폭정에 도탄에 빠진 백성들.."

두 시진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다. 술 때문이다. 한때 왕 씨는 재하를 지명하고 술을 일절 마시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천천히 술을 마시더니, 요즘에는 얼큰하게 취하곤 했다. 그럼에도 재하에게 바르지 못한 손길 한 번도 보인 적 없었으니 이런 부분에서는 자못 선인이었다. 술에 취해 엎어져 버린 백화, 그리고 정신을 차리려고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 고개를 기울이는 은야를 뒤로 왕 씨는 잠기운 하나 없이 말끔한 눈으로 이 시간에 사탕을 하나 더 먹어도 되나 고민하던 재하가 자신을 볼 수 있도록 바닥을 퉁퉁 두들겼다.​

"재희야."
"네에, 부르셨사와요."
"참으로, 그래. 참으로 아리땁다. 그래.. 네 참으로 아리따워."
"과찬이어요."
"그리하여 참으로 가여웁다."

왕 씨는 두툼한 몸만치 부어오른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새빨개진 코에 주름이 지고 눈가에도 주름이 자글자글 졌다. 제 손님이 슬퍼하는 표정은 처음이라 재하는 잔뜩 긴장했다. 루주의 귀에 들어가면 회초리를 두 배로 맞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 씨는 울지 않고 큰 손으로 재하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몇 번 토닥였다. 술 때문에 열이 오른 몸 때문인지, 아니면 울음기를 참았기 때문인지 머리 위의 손길이 뜨거웠다. 장신구는 전부 헝클어졌지만 이 정도면 괜찮았다. 왕 씨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재하의 손에 소중하게 쥐여주었다.​

"네 아직 영글지 않은 나이지? 헌데도 이리 꽃 피었으니 만개하는 날 어찌 될지.."
"어르시인..?"
"자아, 아들 같아서 주는 선물이다. 잘 숨겨두거라. 이번엔 절대 뺏기지 말구."
"네에."
"아저씨는 이번에 교국 밖까지 갔다 올 것이야. 그러니 봄에 보자꾸나."
"..교국에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많다 들었사와요. 부디 몸 성히 다녀오셔요."
"오냐, 이 아저씨가 못된 괴물은 다 무찌르고 오마."

재하는 나비 장식이 된, 상아를 깎아 만든 비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풍성한 머릿결 사이로 쑥 집어넣어 숨겼다. 끌끌, 혀를 차며 또 뭐가 재밌는지 웃던 왕 씨는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뉘엿뉘엿 해가 뜨려 했으니, 재하가 아무리 잠에 들지 않으려 해도 잘 시간이며 왕 씨는 가야 할 시간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왕 씨가 가기 직전 루주에게 금화를 하나 쥐여주었기 때문인지 재하에겐 안중도 없었기 때문에 비녀는 뺏기지 않았다. 재하는 처음 생긴 소중한 물건을 소중하게 안았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 겨울날이 다가왔다.

눈은 소복이 쌓여 세상은 희게 물들었고, 쌀쌀한 바람에 식어버린 해는 이따금씩 목소리 내듯 드문 온기만 안겨주다 다시금 바람의 등쌀에 이기지 못해 얼어붙었다. 근래 들어 가장 추운 날씨에 지독한 고뿔에 걸린 나 노인과의 수업은 일주일 뒤로 미루어졌다. 몸이 유달리 약한 재하는 그간 따뜻한 방에서 가만히 누워 이불과 한 몸이 되었다. 은야는 둥글게 몸을 말고 누워 한참 손가락으로 꼬물꼬물 바닥에 작대기를 긋던 재하의 등을 일정한 박자로 토닥였다. 재하가 그렇게 두 시간을 꿈쩍도 않고 형체도 없는 작대기를 긋다 말갛게 웃었다.

"10. 나는, 이제 10살이에요."
"우리 재하가 왜 10살일까?"
"떨어져 나간 돌조각으로 작은 작대기와 중간 크기의 작대기를 번갈아 그었고, 이렇게 큰 고드름이 얼던 날엔 작대기를 크게 그었으니까.. 채연 누이가 오기 전에는 여덟이었어요."
"..돌조각? 우리 재하는 여덟일 때 어디에 있었을까?"
"그으거언.."
"호외요, 호외야!"

큰 목소리에 재하는 이불 속으로 쏙 숨어버렸다. 은야의 동그래진 눈 뒤로 점소이가 들이닥쳤다. 눈총을 받든 말든 점소이 여럿이 좋은 음식이 차려진 상, 좋은 옷을 줄지어 들여왔다. 적당한 상에 올려진 그릇 몇 가지를 살펴보니 귀빈에게나 내놓는 술상의 음식이요, 옷은 지금껏 빼앗았던 비단옷 중 유달리 값지고 예쁜 것만 들고 들어오니, 술병이 들어 엎어져 이젠 몸이 예전 같지 않다며 골골대던 백화도 몸을 벌떡 일으킬 정도였다.

"세상에! 무슨 일이야?"
"이게 다 루주가 준 재하 선물이라지 무어야? 루주가 곧 죽을 때가 되지 않았나 싶어!"
"말도 안 돼!"

재하를 위한 선물이라는 루주의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어 은야는 재하가 했던 말을 잊게 되었다. 덕분에 대답을 들을 수도 없었다. 왜 루주가 이런 선행을 베푸는지 알기 어려웠으나, 짐을 나르던 점소이 하나가 헛기침을 하며 눈을 굴렸다. 재하가 꾸물꾸물 이불 속에서 기어 나오며 눈을 마주치자 황급히 피했다. 어딘가 찜찜한 표정이었다.

"진짜 죽을 때 다 됐을 지도 모르지."
"너어, 뭔가 아는구나, 그치?"
"아니야! 그냥 그 양반 하는 짓이 그렇잖아."
"아무렴 어떠한지. 자, 재하야, 루주가 챙겨주는 날도 있구나."
"아, 석류다! 재하야, 석류 먹으련?"
"..석류?"
"석류는 복을 불러온다지? 자아, 먹어보련."

은야는 어느덧 이불 속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재하를 품에 안았다. 루주의 성격상 독을 탔을 리 없었다. 은야는 나무로 된 수저를 들어 정성스럽게 한 알 한 알 까놓은 석류를 재하에게 떠먹여주었다. 상은 총 네 개로 재하 혼자 먹을 수 있는 양이 아니었기에 점소이도 슬금슬금 기어들어오고, 다른 기녀도 슬그머니 자리를 차지한다. 낮 동안 웃음소리와 함께 호화로운 식사가 이어졌다. 간만의 만찬을 이후로 재하는 곤히 오침에 들었다. 그렇게 재하가 깬 시간은 붉은 등 켜지고 웃음소리와 호객행위가 이어지던 순간이다. 추운 겨울날에도 오히려 온기를 찾기 때문에 사람은 끊이지 않았다. 재하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맨 처음 본 것은 기녀 하나가 동백기름을 바른 빗을 머리를 빗고 있던 것이다. 점소이 하나가 문을 두드리더니 슬쩍 고개를 들이밀었다.

"재하 깼어? 아, 깼구나."
"재하는 왜?"
"지명이래. 화려한 걸 싫어하시는 분이니 최대한 수수하게 꾸미라는데?"
"운도 좋지! 오늘은 내가 독차지하고 꾸밀 수 있겠구나."
"어림도 없는 소리!"

다른 기녀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며 꺄르르 웃었다. 재하는 아직 비몽사몽 한 얼굴로 팔을 벌렸고, 잠이 깰 적엔 쪽빛 바림 된 비단옷과 은은한 옥비녀로 치장한 뒤였다. 잘 다녀오라는 기녀의 말과 함께 재하는 팔을 벌려 한번 안아주고는, 점소이를 향해 팔을 쭉 뻗었다. 점소이는 그런 재하를 보다 한참 말을 고르더니 이내 포기하고 재하를 품에 안아 올렸다.

"재하야."
"으응."
"기루가 좋아?"
"응."
"왜 좋을까?"
"루주가 그랬어요. 아무도 위협하지 않고 사랑 주니 좋은 곳이라고."
"……그렇구나."

재하는 고개를 위로 쭉 뻗었다. 점소이가 데려가는 곳은 분명 가장 위층일 것이다. 귀빈을 위한 방에 들어선 재하는 눈을 둥글게 뜨며 점소이를 마주 봤고, 점소이는 자신의 혀를 자근자근 깨물다 재하를 내려놓더니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자리를 도망치듯 떴다. 재하는 동그랗게 뜬 채로 눈앞의 인물을 마주 봤다. 루주였다. 루주는 곰방대를 물고 연초를 피우다 연기를 뱉더니, 술상을 곰방대 머리로 툭툭 쳐 주의를 돌렸다.

"재희 왔느냐."
"…네에. 당도하였사와요."
"네 오늘 얼마나 배웠는지 알아야겠구나. 와서 술을 따라보아라."

재하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듯 눈을 깜빡이다 곰방대로 다시금 술상을 툭 치자 흠칫 놀라고는 천천히 다가갔다. 체구가 워낙 작아 술병을 끌어안아야 했던 재하는 천천히 술병을 기울였다. 지금껏 아이라는 이유로 배려해 주기 때문에 술을 따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봐온 것은 있었다. 엉거주춤 따라만 해도 주둥이에서 맑은 백주가 흘러나와 적당한 곳에서 멈췄다. 그러나 완벽하지는 못했다. 술이 미세하게 몇 방울 튀었고, 루주는 그걸 가만히 바라보다 소리치지 않고 쭉 마셨다. 그리고 짧게 뱉었다.​

"미흡하다."
"죄송합니다."​
"악은 어떠하느냐."
"그.. 그것이.."
"불러보아라."
"……."
"불러보래도."

재하는 이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오늘 내온 상도 그랬고, 비단옷도 그랬다. 루주께서 드디어 재하를 잘 대해주려 하는 걸까 싶었지만 지금껏 봐온 것이 있기 때문인지 어린 나이에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마냥 적대하기도 어려웠다. 재하는 곰방대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제대로 하지 않으면 저 곰방대가 회초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재하가 조막만 한 입술을 벌렸다.​

"나, 나는 비구니… 꽃다운 시절 사부에게 머리를 깎여 나는 본래.."
"나는 본래?"
"나, 나는 본래 사내.. 아이로.."
"재희."
"자, 잘못했사와요! 잘못했사와요! 다시 할게요, 다시……."
"네 계속 틀리는 연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그, 그것이."
"네가 진정 계집이 아니기 때문이다. 네 계집이기에 해야 할 기녀짓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 쉬운 가사조차 틀려먹는 것 아니더냐."

재하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술 찌든 내에 둔감했던 코가, 지금껏 익숙해서 당연한 줄 알았던 술 내음이 루주에게 가득했다. 루주는 진즉 취해있었다. 그렇지만 저 솥뚜껑 같은 손도, 재하를 훑는 눈도 넉살 좋은 왕 씨와는 궤를 달리했다. 그렇게 좋은 머리는 아니었지만 지금 도망쳐야 함을 잘 알고 있었다. 재하가 뒤로 한 걸음 더 물러났을 때, 루주가 술상을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네 계집이 될 수 있다!! 그래, 계집이 되면 되는 일이야. 이 루주 어르신이 돕는다고 말을 해야겠느냐! 어차피 굴려먹으면 이 년이 저년이고 저놈이 저 새끼가 되는 법!"
"루, 루주.."
"그렇기에 네 행해야 할 마지막 관문이 있는 것이다."​

재하는 눈을 둥글게 뜨고는 이내 뒤로 돌아 문을 향해 달렸다. 모르는 척했지만 기실 전부 듣고 자랐다. 모를 리가 없다. 새벽마다 잠들었으나 들었던 그 숨소리를 잊을 수 없다. 어른의 걸음으로 단 다섯 걸음이면 되며 재하의 걸음이면 여덟 걸음이면 되는 문을 향해 달음박질치면 됐다. 두 걸음, 재하는 그 짧은 순간을 놓쳤다. 루주가 옷깃을 붙잡자 품 넓은 옷은 금세 찢어지고 어깨를 드러냈다. 재하는 기우뚱대다 가까스로 균형을 붙잡았다. 그러자 우악 진 손길이 재하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우두둑 소리가 나며 틀어올린 머리를 지탱하던 비녀가 두 동강이 났다. 재하는 손을 마구 휘두르며 새된 비명을 질렀다. 나고 자라 처음 질러보는 큰 소리였다. 그마저도 옥구슬 굴러가듯 하다 이내 처절하게 찢겼다. 짐승이 덫에 걸려 소리치듯 울부짖었다. 땀에 젖은 손에 석류즙 낸 연지 번지고 머리카락은 난리다. 그 순간 재하가 여린 손톱으로 루주의 뺨을 내쳤다. 잠깐의 정적 이후로 재하가 딸꾹질을 했다.​

"네년이 오늘 경을 치게 만드는구나."
"아, 아……."
"재희 이리 오지 못할까!!"
"살려주시어요!! 살려줘!"

재하가 파랗게 질리더니 주춤거리며 그대로 달렸다. 문을 박차는 순간 루주가 쫓아 나섰다. 지금껏 재하는 기루에서 단 한 번도 소리를 내서 걷거나 달려본 적이 없었다. 복도가 울릴만치 세찬 발걸음을 뒤로 재하가 아래를 향해 계속 내려갔다. 그간 점소이가 안아 올려 걸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여린 몸 때문인지 벌써부터 체력의 한계가 찾아오는 것 같아 아까처럼 악에 받쳐 외칠 힘도 없었다. 이대로 붙잡히면 매를 맞아 죽거나 그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재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복도를 뛰는 재하를 보고 기녀들은 도와주려다 뒤에서 무서운 기세로 쫓아오는 루주를 보고 눈을 둥글게 뜨며 다시 기방 안으로 숨어버렸다. 몇 손님이 도우려 했지만 점소이가 되레 말렸다.

"아니, 아이가.."
"신경 쓰지 마셔요."
"아니! 그래도 아이가 있다니까 그러네!"
"몸종입니다. 몸종!"
"누가 몸종이야, 저 아이 그 아이 아니야? 노래하는 그 흰 애!!"
​​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장소였다. 재하는 황망한 시선으로 난간에 기댔다. 2층 난간에서 겨우내 숨을 할딱였다.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아무도 돕지 않고 신경 쓸 수 없는 장소에서, 가장 귀하지만 가장 쓸모없는 존재. 재하는 어느덧 앞까지 성큼성큼 다가오는 루주를 마주 보고 부들부들 떨었다. 차라리 뛰어내릴까? 그러면 채연 누이처럼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천마님께서 거둘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려웠다. 재하는 우악 진 손길이 뻗치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안간힘을 써 몸을 피했다.​

"재희 네 이ㄴ-"

사람이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뼈 부러지는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름 끼칠 정도로 조용한 정적이 일었다. 점소이와 기녀, 손님이 순간의 정적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둘씩 고개를 내뺐다. 재하는 천천히 난간에 기댔다. 조금만 기울여도 바로 떨어질 것 같은 그 위치에서 시선을 천천히 내렸다. 바닥에 누워있는 루주가 더는 입을 벌리며 호통을 치지 않았다. 목은 부자연스럽게 뒤틀리고, 눈은 부릅 홉뜨고 있다. 채연 누이처럼 루주도 같은 장소에서 그렇게 되어버렸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젠 정면에서 마주하는 것이 아닌 재하가 내려다보는 입장이 된 것뿐이었다. 웅성거림을 뒤로 재하가 덜덜 떨리는 손을 들었다. 숨이 가쁜지 제대로 쉬지도 못하며 입가를 틀어막았다. 눈 부릅 뜬 시체를 2층 난간에서 내려다보던 재하는 사시나무 떨리듯 몸을 달달 떨며 이내 눈을 찡그렸다. 공포에 내질린 것 같은 호선이었다. 주변이 금세 비명소리로 가득 찼다. 루주가 죽었다는 목소리가 파도치듯 커져만 갔다. 그 소란에서 재하가 천천히 뒤로 한 걸음, 두 걸음 물러나며 눈을 굴렸다. 그리고 주변 눈치를 봤다. 영락없이 공포에 질린 아이와도 같았다.​

그리고 재하는 가려진 입가를 천천히 휘어 올렸다. 숨이 부족한지 흑흑대며 몸을 떨어댔다. 한참 동안 시체를 내려다보던 재하가 눈을 다시 굴렸을 때, 한 사람을 마주했다. 재하의 눈이 점점 커졌다. 루주의 시체를 처음 봤듯이 사백안으로 홉뜨인다. 떨어진 직후부터 자신을 쳐다본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면 그 이전부터였을 지도 모른다. 재하는 입가를 가리던 손을 내렸다. 언제 그랬냐는 양 입은 자그맣게 벌려진 모습이었다. 은야가 황급히 다가와 재하를 품에 안았다. 누군가 재하에게 다가왔다.

"재하야, 괜찮아? 응?"
"저 아이는 내가 데려가도록 하겠소."
"기다리시지요, 대체 누구신데-"

남성이 패를 꺼내들었다. 일순 정적이 일었다. 재하와 은야, 그리고 기방에서 고개를 내민 기녀 몇과 손님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재하는 고개를 들어 패를 훑었다.

"금화 세 개면 되겠소?"
"……."

은야가 재하를 내려다봤다. 아직 손이 달달 떨리는 가엾고도 순수한 재하를 보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재하를 데려가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생각했다. 그럼에도 이 끔찍한 장소에 내버려 두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은야는 입술을 악 물었다. 피가 배어 나올 듯 세게 깨물다 이내 재하를 품에 가득 안았다.

"재하야."
"으응."
"엄마가 미안해."
"은야?"
"부디 넓은 세상에서 천마님의 뜻이 함께하기를.."

재하가 품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은야는 무관으로 추정되는 자를 향해 천천히 떠밀리듯 보냈다. 재하는 열린 기방 틈새 큰 거울에 비친 자신의 꼴을 마주 보았다. 찢긴 옷가지, 휘어잡혀 흐트러진 머리채, 부러진 비녀. 재하는 이내 부서질 듯 수심 깊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덜덜 떠는 은야를 향해 깊게 절했다.

"그동안 감사했사와요. 필히 돌아오도록 할 테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그리고 떠났다. 기루의 삶도 그리 끝나게 되었다. 욕심과 방종의 말로는 그렇게 주취로 인한 추태를 부리다 죽었다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묻혔다.
재하는 석류를 깨물었다. 한 알 한 알 떼어먹는 것이 아니라 사과를 깨물듯 석류를 꽉 깨물자 붉은 즙이 터지듯 흘러 턱을 타고 흘렀다. 재하의 앞엔 빈 술병이 여럿 보였다. 눈은 술에 젖어 몽롱했고, 입 떼지 못하고 몇 번 우물거리는 석류는 알맹이가 터지고 씨를 깨물어 뼈 씹듯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윽고 마시지 못한 붉은 즙이 턱을 타고, 이내 목을 타 앞섶을 적셨다. 석류를 붙잡은 손목을 타고 팔꿈치를 타 소맷단이 붉게 물들었다. 재하는 느린 몸짓으로 입에서 석류를 떼어내고 세워둔 무릎 위에 팔을 걸치며 고개를 숙였다. 머리카락은 산발이고, 아무렇게나 나앉아 흐트러진 흰옷자락에 붉은 즙이 꽃 피듯 번졌다. 숙인 고개 때문에 얼굴을 확인하긴 어렵지만 아까 석류를 깨물 때 즙이 눈썹 위까지 튀었다.​

"오셨습니까."

재하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석류즙으로 엉망이었다. 입가를 할 것 없이 석류즙이 발갛게 번진 모습이 사냥한 사슴에 머리를 박다 들어 올린 짐승 같았다. 불편한 침묵 뒤로 재하가 석류를 다시금 깨물었다. 흐린 눈으로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며 다시금 씨 씹는 소리가 울렸다. 이내 반도 다 못 깨문 석류를 툭 아래로 떨구더니 즙에 붉게 물든 손가락을 그만치 발간 혀로 핥아냈다. 그러고는 고개를 까딱였다.

"色字頭上一把刀 石榴裙下命難逃……."색자 위에는 칼 한자루가 있으니 석류 치마 아래에선 목숨 부지 어려워라

술에 취해 낮게 잠긴 목소리를 뒤로하고 핥던 손가락을 멈칫하더니 입술을 짓누르다 살살 아래로 끌어내린다. 석류즙이 번졌다. 눈매가 천천히 호선을 긋는다. 찡그린듯한 호선 뒤로 입매가 부스스 올라갔다. 양 팔을 뻗으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산발이 된 머리가 기울어 흩어졌다. 섬찟하리만치 순수한 미소와 함께 이내 키득거렸다. 맑은 웃음소리를 뒤로 탁하게 읊조렸다.

"나는 밤동안 외롭습니다. 부디 함께 해주시지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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